132화. 배신감2021.08.05.
“당신…….”
이우라의 무심한 눈빛에 레나의 눈썹이 곤두섰다. 좋은 관계라고 할 순 없지만 어쨌든 지난 3개월간 같은 전장에서 같은 목적을 가지고 싸운 사이다. 그러니 전우라는 말은 과분해도 협력자라는 말은 부족하지 않을 텐데, 이우라는 그런 이에게도 가차 없이 냉정했다. 레나는 그 태도에 화가 나 나직이 윽박질렀다.
“꼭 이런 식으로 해야겠어?”
“그럼 어떤 식이길 바라지?”
이우라가 차가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레나가 할 말을 잃은 사이, 뒤에 서 있던 루비드가 빽 소리쳤다.
“야!”
하지만 이우라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루비드는 그 익숙한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 마.”
여전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루비드는 다시금 악을 썼다.
“동부공을 놔주기로 했으니까 하지 말라고!”
루비드가 발을 구르며 소리치자 이우라가 비로소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동생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런 동생에게 이우라가 낮게 대답했다.
“왕을 잡지 않으면 접경지의 전투가 계속된다.”
“뭐?”
이우라의 말에 루비드는 오히려 당황했다. 내용 때문이 아니라 이우라의 대답 그 자체에 놀란 투였다. 그래서 잠시 멍하니 있던 그는 곧 정신을 차리고 다시 외쳤다.
“그, 그것도 해결됐어!”
해결이라는 말에 이우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때 지켜보던 레나가 끼어들었다.
“루비드 씨 말대로예요.”
레나는 이우라를 설득하기 위해 간곡히 말했다.
“이번에 놓아주면 접경지로 나온 망자들을 거두기로 했어요. 그러니까 한 번만 협조해줘요.”
하지만 그 간절함에 반응한 건 이우라가 아니라 칼리고였다. 칼리고는 뭔가 잘못된 사람처럼 놀라서 레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이제껏 레나에게서 저런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레나가 그에게 보여준 건 잔인함과 냉랭함, 그리고 혐오와 경멸뿐이었다. 그래서 칼리고는 레나의 새로운 일면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지만, 정작 레나는 그걸 까맣게 모른 채 이우라에게 집중했다.
“어차피 우리가 손해 볼 건 없어요. 순서가 바뀌는 것뿐이에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레나의 간청에 이우라가 낮게 중얼댔다.
“접경지의 망자들이 사라졌는데 심장은 구하지 못했다. 이걸 황제에게 어떻게 설명할 거지?”
이우라의 물음에 레나는 말문이 막혔다. 마음이 급해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 했다. 망자들이 물러났다는 건 왕이 패했다는 의미. 그런데 빈손으로 돌아가면 황제는 뭐라고 할까? 왕은 놓쳤습니다, 심장을 잃어버렸습니다, 저희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이런 식의 변명이 과연 통할까? 레나가 답을 찾기 위해 급히 궁리하는데, 등 뒤에서 칼리고가 외쳤다.
“그대는 속고 있다!”
칼리고의 난입에 이우라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궁지에 몰린 칼리고가 재차 소리쳤다.
“그대의 황제, 니힐 그라샤가 우리의 심장을 원하는 이유를 알고는 있는가? 정녕 그걸 알고 무덤까지 온 것인가!”
이우라의 강경한 의지는 황제에 대한 의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칼리고는 이우라의 의지를 꺾기 위해 폭로했다.
“그는 산 자가 아니다. 살아 있는 척 그대들을 기만하고 있을 뿐!”
칼리고의 말에 사위가 고요해졌다. 그에 칼리고는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고 생각하며 쐐기를 박았다.
“사실을 알려주마. 너희의 황제, 니힐 그라샤는 나와 같은 망자의 왕이다.”
“뭐라고……?”
칼리고의 외침에 루비드가 희미한 목소리로 신음했고, 레나는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그래, 저치의 입장에선 지금 저걸 밝히는 편이 유리하겠지. 그 후폭풍을 감당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니까. 레나는 난감해하며 플레누스 형제의 반응을 확인했다. 루비드는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반면 이우라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차가운 얼굴이었다. 레나가 그의 심정을 알아내기 위해 안색을 살피는데, 침묵하던 이우라가 중얼댔다.
“역시.”
그렇게 운을 뗀 이우라는 레나를 내려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경도 알고 있었군.”
많은 것을 담은 표현에 레나는 눈을 홉떴다. 하지만 그 말에 가장 놀란 사람은 레나가 아니라 루비드였다.
“경도……?”
루비드는 당황 섞인 목소리로 이우라의 말을 되뇌었다. 혼란스러웠다. 칼리고의 허튼소리도, 그게 사실이라는 듯 받아들이는 레나 루벨과 형도. 아니, 레나 루벨은 망자들에게 왕 취급을 받는 녀석이다. 어차피 수상쩍은 녀석이니 뭘 알고 있든 더 놀랄 필요는 없다. 하지만 형은 아니었다. 형은, 북부공인 이우라 플레누스는 이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저딴 식으로 반응하면 안 됐다. 그러나 동생의 경악에도 불구하고 형의 얼굴은 여느 때처럼 차갑기만 했다. 이우라의 무심한 눈빛은 도리어 묻는 것 같았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그 냉랭한 모습에 레나마저 신음했다.
“당신, 알고 있었어……?”
“비켜라.”
“기다려!”
이우라가 레나를 지나치려고 하자 멍하니 서 있던 루비드가 소리치며 끼어들었다. 그렇게 외치는 루비드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황제가 망자라니. 그걸 너는 알고 있었어? 그걸 알고도 지금까지…….”
황제에게 충성한 거야? 그 인간이 망자인 걸 알면서도? 루비드가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으르렁댔지만 이우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숨 막히는 침묵에 루비드는 새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대답해!”
“알고 있었다.”
비로소 돌아온 대답에 루비드는 몸이 식는 기분을 느꼈다. 이질적인 추위가 그를 덜덜 떨게 만들었다.
“언제부터……?”
루비드가 실낱같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언제부터 알았냐고!”
소리쳐본들 마찬가지였다. 이우라는 광물의 조각처럼 무정한 눈으로 루비드를 바라보더니, 도리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지?”
“뭐……?”
“황제가 망자인 게 무슨 상관이냐고 물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달라질 건 없다. 살아 있든 죽어 있든, 그가 우릴 지배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우라의 단언에 루비드는 할 말을 잃었다. 이우라는 그 가련한 동생에게서 시선을 떼며 읊조렸다.
“따르지 않으면 보복당한다는 사실도.”
이우라는 말을 맺으며 다시 검을 들었다. 그의 검에는 유백색 빛이 맺혔다. 참격이었다. 이우라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돌아오자 레나도 기가 막힌 듯 중얼댔다.
“당신 그런 사람이었어요?”
레나는 저도 모르게 실소했다.
“우리 아버지와 왜 죽이 맞았는지 알겠네요.”
레나의 도발에도 이우라는 묵묵히 검을 치켜들었다. 레나 역시 동강 난 검을 집어던지고 채찍을 꺼냈다. 이우라가 먼저 달려들었고, 레나는 맞받아쳤다. 이어 양보 없는 공방이 휘몰아쳤다. 그리고 그들의 연인과 동생은 서로 비슷한 충격에 빠져 그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사실 린은 이우라가 니힐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엔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럴 여유도 겨를도 없었다. 그는 그전부터 엉망이었다. 나자가 망자의 왕으로 선택됐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의 마음은 이미 풍랑을 만난 배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죄 많은 나자 아이테르너. 망자들의 왕으로 선택될 만큼 사악한 내 어머니. 혈육의 실체에 린은 또 한 번 아득히 절망했다. 루비드 역시 거의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칼리고가 폭로한, 그리고 이우라가 실토한 사실에 발밑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망자와의 전쟁은 공작 가의 의무였다. 집안 꼴이 어떻든, 망자와 맞서는 것으로 그는 자신이 나름의 역할을 한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게 기만이었다니. 자신을 둘러싼 것 중 무엇 하나 진실이 없다는 생각에 루비드는 차라리 울고 싶었다. 넘실대는 절망 속에서 레나와 이우라는 살벌한 춤을 이어갔다. 이우라의 검이 레나의 머리카락 몇 올을 잘라냈다. 검격을 가까스로 피한 레나는 이우라의 손목을 채찍으로 당기며 그의 등 뒤로 돌아갔다. 이대로 그를 칭칭 묶어버릴 작정이었다. 낌새를 챈 이우라가 팔을 들어 공간을 만들었다. 이우라는 그 틈으로 검을 세워 채찍을 끊으려 했고, 레나는 채찍을 힘껏 당겨 그의 시도를 저지했다. 그로써 힘겨루기가 시작됐다. 이우라와 대치하게 된 레나는 채찍을 팽팽하게 당기며 속삭였다.
“괜찮겠어요? 동생에게 더 미움받게 생겼는데.”
“관여할 바 아니다.”
“나도 놀랐어요. 당신이 그렇게 비굴한 사람인 줄 몰랐거든요.”
레나는 옅게 웃으며 이우라를 도발했다. 한편으로는 상당히 진심이었다. 신의 운운하기에 나름의 기준이 있는 줄 알았는데, 좋아할 수는 없어도 존중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당신도 강자에겐 약하면서 약자에게만 강한 사람이었군요. 우리 아버지처럼.”
레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우라가 특별히 반응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강자와 맞서다 죽는 것은 고결한가?”
그런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죽음과 패배를 예상하면서도 덤벼드는 건, 현명한가?”
갑작스러운 물음에 레나는 되려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이우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상히 말했다.
“만족스럽긴 하겠지. 하지만 그러고 나면 뭐가 남지? 그 후 남겨질 자들은?”
그렇게 되묻는 이우라의 표정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비판하는 것도 빈정대는 것도 아닌, 늘 그렇듯 냉철한 얼굴로 묻고 있었다. 레나가 답하지 못하자 이우라가 대신 대답했다.
“대책이 없는 것보단 차라리 비굴한 것이 낫다.”
그건 이우라 플레누스가 이미 오래전에 내린 결론. 설령 정답이 아니라 해도 그가 선택하고 걸어온 길이었다. 말을 맺은 이우라가 레나의 채찍을 잡아당겼다. 당황한 레나는 일순간 중심을 잃은 채 끌려갔고, 이우라는 그 빈틈에 대고 검을 내리그었다. 종이 잘리는 소리가 나며 레나의 어깨에서 피가 솟구쳤다.
“윽!”
화끈한 감각에 레나는 급히 물러났다. 그러곤 어깨를 감싸며 이우라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래서, 진실을 알면서도 황제에게 복종하겠다는 건가요?”
“달라질 건 없다고 했을 텐데.”
지금 황제가 가진 막강한 권력은 그가 살아 있기 때문에 부여된 것이 아니다. 그건 단지 그가 강하기에 거머쥔 것. 오직 폭력으로 모든 인간에게서 강탈한 것. 그러니 그가 무엇인지는 상관없다. 중요한 건 오직 살아남는 것뿐. 그 재해나 다름없는 존재로부터 자신에게 맡겨진 것을 지키는 것뿐.
“황제의 뜻을 거스를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럴 셈이라면요?”
“그렇다면 날 먼저 막아봐라.”
이우라가 다시 달려들었다. 그 짧은 순간, 레나는 시간이 멈추는 것을 느꼈다.
‘이 사람…….’
진심이야. 필요하다면 죽일 셈이다. 나도, 린도. 레나는 느려진 시간 속에서 가까스로 이우라의 궤도에서 벗어났다. 그러곤 이우라를 어떻게 제압할까 생각하다가, 멀찍이 서 있는 칼리고를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도망치면 될 텐데, 저 바보는 구경이나 하고 있다. 그래서 레나는 한껏 들어온 이우라의 턱을 걷어차며 소리쳤다.
“도망쳐!”
칼리고에게 한 말이었다. 이우라는 레나의 속셈을 깨닫고 레나를 무시한 채 칼리고에게 달려갔다. 레나는 그의 팔을 채찍으로 휘감아 붙잡았다. 이우라가 그 채찍을 휘어잡자 어깨의 상처에서 다시금 피가 솟구쳤다. 다친 어깨로는 이우라를 붙잡는 게 여의치 않다고 생각한 레나는, 채찍을 이빨로 물며 필사적으로 버텼다. 칼리고를 피신시킬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정작 칼리고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그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칼리고는 홀로 묻고 있었다. 왜지? 왜. 왜 그렇게까지. 너는, 너희 여자들은,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잖아. 레나의 절박한 모습에 칼리고는 어느 때보다 싸늘한 감정을 느꼈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평소엔 남자에게 보호해달라고 애걸하면서, 남자가 약해지면 매몰차게 내치는 것이 여자들일 텐데. 왜 지금의 너는 진심인 것처럼 보이지? 내게는 그런 걸 보여준 적 없으면서. 레나를 바라보던 칼리고의 입술이 길게 찢어졌다. 네가 나한테 그래선 안 되지. 내 심장을 몇 번이나 뽑아놓고. 또 나만 쓰레기처럼 내버리는 건가? 칼리고는 이를 악문 채 웃었다. 린은 부득대며 이 가는 소리에 옆을 돌아보다가 흠칫 놀랐다.
‘울어?’
칼리고가 울고 있었다. 아니, 웃고 있었다. 그는 웃는 얼굴로 울며, 레나 루벨을 향해 싸늘한 분노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 분노의 이름은 배신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