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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화. 망자의 저주 (133/208)

133화. 망자의 저주2021.08.09.

칼리고의 섬뜩한 표정에 린이 주춤대자, 칼리고가 웃으며 중얼댔다.

16562827334314.jpg“참으로 기이하다. 죽은 지 천 년이 지났는데도 이 기분만은 생생하다니.”

그렇게 말하는 칼리고의 두 눈은 광기로 가득했다. 맥락 모를 분노에 린은 당황했다. 그가 갑자기 격정을 토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칼리고는 더 말하는 대신 조용히 발밑을 움직였다. 그의 발밑이 붉게 물드는가 싶더니 핏빛 웅덩이가 뱀처럼 퍼져나갔다. 린은 그게 어디로 향하는지 깨닫고 소리쳤다.

16562827334318.jpg“레나!”

칼리고에게서 뻗어 나간 피는 레나를 노렸다. 린의 외침에 레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땅을 기던 핏자국이 레나의 발치에서 뱀처럼 고개를 들며 위협했다. 기습에 놀란 레나는 이우라를 밀치며 채찍을 휘둘렀다. 채찍으로 치자 그것은 진짜 피처럼 사방으로 방울져 흩어지더니, 곧 도로 끈끈하게 엉겨 레나에게 휘몰아쳤다.

16562827334322.jpg“무슨 짓이야!”

레나가 몸을 피하며 칼리고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칼리고는 입술을 찢은 채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 알 수 없는 표정에 레나마저 당황했다. 그리고 레나의 당황은 칼리고를 더 자극했다.

16562827334314.jpg“사랑합니다, 나의 신부여.”

미치광이가 하는 미친 말에 레나는 그만 얼이 빠졌다. 린과 루비드도 마찬가지였고 이우라 마저 잠시 멈췄다. 마치 기묘한 동물을 보는 듯한 시선이 쏟아지자 칼리고는 더 짙게 웃었다. 그러곤 가시 같은 피로 린의 몸을 꿰뚫었다. 그야말로 찰나였다. 그 일은 모두가 방심한 순간 벌어졌다. 아무런 조짐도 이유도 없이, 린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리고 석류알처럼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레나가 그 사실을 깨달은 건, 산개하는 핏방울이 눈동자에 가득 맺힌 후였다.

16562827334322.jpg“린!”

레나가 단말마를 쏟아내며 린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내동댕이쳐진 연인을 보듬을 겨를은 없었다. 그 틈을 타 이우라가 칼리고에게 달려든 탓이었다. 그래서 레나는 린이 아닌 칼리고를 안고 몸을 굴렸다. 직후 칼리고를 향해 날아들던 이우라의 검격이 레나의 등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레나가 끌어안고 보호하자 칼리고는 그의 팔 아래서 큰 소리로 웃었다. 그 소리가 소름 끼치게 싫어 레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우라가 그 꼴을 보며 물었다.

16562827334333.jpg“그게 협상이 가능한 상대로 보이나?”

16562827334322.jpg“그건 내가 판단해요.”

16562827334333.jpg“틀린 판단이다. 물러나라.”

16562827334322.jpg“당신 동생이었어도 그럴 건가요?”

레나가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이우라는 대답하지 않았고, 레나는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16562827334322.jpg“당신 동생이 위험할 때 내가 도왔어요. 그러니까 갚아요. 당신이 정말 신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이우라에게 집중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쓰러져 피 흘리는 린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참고 또 참으며 이우라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우라는 말이 없었고, 대신 엉뚱한 방향에서 목소리가 돌아왔다.

16562827334314.jpg“눈물겹구나.”

레나의 밑에서 칼리고가 키들댔다. 아까까지만 해도 겁먹어 눈치를 보던 칼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마치 취해서 사리 분별을 못 하는 사람처럼 유쾌하게 지껄였다.

16562827334314.jpg“저 애송이가 그리도 사랑스러운가? 응?”

그렇게 말하는 칼리고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입으로는 웃고 눈으로는 우는 기이한 모습에 레나는 나직이 윽박질렀다.

16562827334322.jpg“입 다물고 있어, 당장 죽고 싶은 게 아니면.”

16562827334314.jpg“그렇게는 못 하겠구나. 덕분에 생각났다. 내가 왜 왕이 됐는지. 내가 왕이 되어 처음으로 죽인 여자가 누군지.”

칼리고는 그렇게 말하며 레나의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바닥엔 움푹 팬, 아주 오래된 상처가 남아 있었다. 레나가 그 상처를 보고 인상을 쓰자, 칼리고는 제 손바닥을 핥으며 속삭였다.

16562827334314.jpg“내 손에 못질한 그 여자였다.”

칼리고의 고백에 혼란스러워하던 레나는 차라리 납득했다.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미쳤나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그가 이러는 게 처음도 아니었다. 과거, 유소년기의 레나에게 쫓기던 시절에도 칼리고는 빙글 돌아버린 것처럼 태도를 바꿨다. 자신을 죽자고 쫓아다니며 정말로 죽여댄 레나에게 신부 운운하며 사랑을 고백했었다.

16562827334322.jpg‘또 혼자서 무슨 허튼 생각을…….’

레나가 싸늘히 노려보자 칼리고는 입술을 더 길게 찢었다. 동시에 칼리고의 그림자에서 붉은 뱀들이 일어났다. 레나가 급히 물러났지만, 정작 그것들은 레나를 쫓지 않았다. 그렇다고 린이나 이우라를 덮친 것도 아니었다. 생전 칼리고는 항상 기행을 저질렀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순간 예상 밖의 패악을 부리며 모두를 놀라게 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그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던 왕자. 그러다 얼떨결에 왕홀을 쥐게 된 허수아비 왕. 때문에 그는 언제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었다. 각인시키고 싶었고, 내가 여기 존재하노라 선언하고 싶었다. 그 날것 같은 욕망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는 그 방법을 본능처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칼리고는 이번에도 스스럼없이 저질렀다. 핏빛 뱀을 휘둘러, 자신의 가슴을 찢어발기는 것으로. 칼리고의 가슴에서 심장을 대신하던 황금빛 규가 뽑혀 나왔다. 직후 고통에 찬 비명이 연이어 울려 퍼졌다. 앞선 소리는 린이었고, 뒤따른 소리는 레나였다. 그리고 궁전과 첩탑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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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심장이 불타는 기분이었다. 끔찍한 격통에 시달리던 린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어떻게 된 일인지 그는 깊은 어둠 속에 있었다. 마치 검은 휘장 같은, 기이한 광택을 가진 어둠이었다. 갑자기 바뀐 공간에 린은 자신의 모습부터 살폈다. 몸이 멀쩡했다. 옆구리가 심하게 헤집어졌었는데 상처도 핏자국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옷은 린이 평소에 입는 깨끗한 셔츠 차림이었다.

16562827334318.jpg‘현실이 아니야.’

린이 결론을 내리기 무섭게 어둠 저편에서 칼리고가 나타났다.

16562827334314.jpg“그리 놀라지 않는구나. 그래, 너는 네 힘의 정체를 이미 아는 거로군.”

칼리고가 허공에 느긋이 앉으며 말했다. 그러더니 다시 입매를 길게 찢으며 물었다.

16562827334314.jpg“그 계집이 알려줬느냐?”

칼리고의 조롱 섞인 물음에 린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16562827334318.jpg‘이건 칼리고의 권능인가?’

린은 이 어둠이 낯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익숙했다. 이건 린이 망자들에게 권능을 사용할 때 익히 보아온 공간이었다. 린은 바로 이런 곳으로 망자를 끌어들여 그들을 장악하고 지배했었다. 그래서 린은 자신이 어디 있는지 깨닫고, 경계하며 입을 열었다.

16562827334318.jpg“협상이 끝난 것 아니었나?”

16562827334314.jpg“그 계집이 날 속였다.”

16562827334318.jpg“속여?”

16562827334314.jpg“덤을 받는 척하면서 날 가지고 놀았지.”

칼리고는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치더니 혼자 중얼댔다.

16562827334314.jpg“그게 계집들의 특기라면 특기겠지. 어리석고 경박하기 짝이 없는 것들.”

그렇게 말하는 칼리고의 목소리는 여유로웠다. 하지만 린은 그게 꾸밈인 걸 눈치챘다. 모르려 해도 모를 수가 없었다. 마치 이어진 것처럼 그의 감정이 저절로 전해졌다.

16562827334318.jpg‘대체 왜…….’

그래서 린은 오히려 칼리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찬란한 어둠은 린과 칼리고의 감정을 세세하게 연결했고, 때문에 린은 아까 칼리고가 울면서 웃은 이유도 알게 되었다. 레나가 린을 구하려고 몸부림칠 때, 그들이 서로를 절박하게 원할 때 칼리고가 느낀 감정은 비참함이었다. 그때 그는 마치 진짜 신부에게 배신당한 것처럼 불같이 화를 냈다. 그렇다고 그가 레나를 정말 사랑한 건 아니었다.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믿었던 것도 아니고 어떤 약속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증오하거나 복수의 기회를 노리던 것도 아닌데 레나의 마음이 린에게 고정된 순간 그는 질투에 사로잡혀 자신의 살길까지 막으며 판세를 뒤엎어 버렸다. 너희의 원대로 해줄 바에야 함께 부서져 버리겠다는 심산이었다. 이해도 납득도 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린이 그 기이한 사고에 놀라자, 칼리고도 린의 마음을 느낀 듯 말했다.

16562827334314.jpg“이해 못 하는 척 선을 긋지 말아라. 너라고 뭐가 다를까.”

16562827334318.jpg“무슨 소릴…….”

16562827334314.jpg“알 것이다. 내 힘에 기생하는 너라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린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칼리고는 오만하게 웃었다.

16562827334314.jpg“우리가 심장을 빼앗길 때 그것을 그냥 주었겠느냐? 너도 분명 알 것이다. 이 심정을. 애당초 그러기 위한 저주니까.”

칼리고가 은밀한 속삭이자 어둠이 일렁였다. 어둠은 물결처럼 반짝이며 파문을 만들더니, 린에게 칼리고의 기억을 보여주었다. 무심한 눈을 한 여자가 보였다. 목에 긴 상처가 있는, 그리고 꼭 그 상처와 기장이 맞닿은 단발의 여자였다. 린은 그가 누구인지 곧장 알아봤다.

16562827334318.jpg‘니힐 그라샤.’

황제 니힐이었다. 그는 무명으로 된 잠옷을 입은 채, 코르셋으로 몸을 꽉 조인 채 군데군데 검은 피를 묻히고 린을 도도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린은 니힐과 눈이 마주쳐 흠칫 놀랐지만 곧 깨달았다. 니힐이 바라보는 게 자신이 아님을, 이것이 칼리고의 기억임을.

16562827334314.jpg―목이 잘려 내려온 자여. 고조부의 심장을 뜯는 것으로는 부족합니까?

칼리고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울렸다. 마치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신음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16562827334314.jpg―왜 내게 이런 분풀이를 합니까, 나는 그대와 다른 시대를 지냈고 그대에게 관여한 바가 없는데…….

칼리고는 억울해하고 있었다. 동시에 겁을 먹기도 했다. 망자의 왕이 된 이후 이토록 난자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16562827334314.jpg―그대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나도 그대와 같은 일을 겪었는데 어찌 모르겠습니까? 철저히 이용당하다 버림받는 심정을 압니다.

그래서 칼리고는 자존심도 버리고 갓 태어난 왕에게 간곡히 빌었다. 히엠스 그라샤를 본 순간 미쳐 날뛰는 그를 달래볼 셈이었다. 하지만 레지나, 아니. 니힐의 얼굴은 차갑기만 했다.

16562827334314.jpg―왕이여, 그러니 부디, 우리가 살아생전 바라던 자비를…….

칼리고가 다시금 애원하자 그제야 니힐의 입술이 움직였다.

16562827419608.jpg―닥쳐.

니힐은 거의 들리지도 않게 중얼대며 칼리고의 심장을 기어이 강탈해갔다. 그로써 니힐은 왕들의 심장과 권능을 모조리 손에 넣었고, 나아가 그 힘으로 생과 사의 경계를 찢으며 밖으로 통하는 길을 만들었다. 최초의 균열, 그 앞에 니힐이 서자 가짜 심장으로 겨우 연명하게 된 왕들은 그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16562827334314.jpg―영원히 죽지 못하는 자들 중 가장 미련한 자여.

16562827334314.jpg―우리의 힘과 함께 두려움도 가지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을 불사르던 왕이 말했다.

16562827334314.jpg―업화를 얻은 자, 그 불꽃에 홀려 자신을 태우리라.

어린 자식을 바쳐 생을 부지한 왕이 말했다.

16562827334314.jpg―쇠약을 얻은 자, 무수한 죽음 가운데 홀로 남으리라.

온 땅을 지배하기 위해 평생토록 싸운 왕이 말했다.

16562827334314.jpg―압제를 얻은 자, 단 하루도 편히 잠들지 못하리라.

그리고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사랑받기만을 원하던 왕도 말했다.

16562827334314.jpg―지배를 얻은 자, 사랑할수록 증오하며 한 줌의 온기도 얻지 못하리라.

왕들은 증오에 차 니힐을 저주했다. 하지만 정작 니힐은 그들을 비웃지도 않고 돌아섰다. 그러곤 패배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읊조렸다.

16562827419608.jpg―돌아가 기꺼이 사용하겠다. 내가 단두대에서 얻은 악몽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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