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이번엔 내가 널2021.08.19.
“망할 젠장…….”
막 깨어난 루비드는 영문도 모른 채 욕부터 했다. 어쩐 일인지 온몸이 욱신대며 아팠다. 마치 흠씬 두들겨 맞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신음하며 눈을 떴는데, 생각지도 못한 것이 코앞에 있었다.
“이런 씨……!”
저속한 욕설을 한차례 내뱉고, 루비드는 크게 뜬 눈으로 자신의 형을 바라보았다.
“뭐야, 너…….”
루비드는 멍하니 중얼대며 바쁘게 상황을 살폈다. 그들은 폐허에 둘러싸여 있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깔려 있었다. 무너진 벽이 그들을 뒤덮은 모양새였는데, 이우라가 그것을 등으로 받치고 있었다. 그 아래 바로 누워 있던 루비드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겨우 붕괴를 멈춘 건물의 잔해가 덜컥 흔들렸다.
“움직이지 마라.”
루비드가 동요하자 이우라가 낮게 경고했다. 그 차가운 목소리에 놀란 루비드의 기분도 도로 가라앉았다. 이런 상황인데도 그따위로 잘난 척이냐? 루비드는 이렇게 쏴붙이고 싶은 걸 참고 입술을 잘근 물었다. 그러곤 별수 없이 최초의 자세로 돌아가, 일단은 상황을 살폈다. 무너진 건물 잔해 사이로 듬성듬성 틈이 보였다. 하지만 사람이 빠져나갈 만큼 넉넉한 크기는 아니었다.
‘참격으로 다 날려버리면…….’
루비드는 짜증을 내며 혀를 찼다. 여기선 참격을 쓸 수 없는 게 뒤늦게 떠오른 탓이었다. 그럼 이렇게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하나? 아니, 그런 거면 차라리 다행이다. 이거 무너지진 않겠지? 주위를 살피던 루비드의 시선이 다시 제 위를 받친 형에게로 돌아왔다. 이것도 상당한 고역이었다. 데면데면하다 못해 남보다 못한 형 놈이랑 이렇게 마주 보는 꼴이라니. 루비드는 세포 단위의 거부감에 이를 갈다가, 첨탑이 무너지기 전에 이우라와 칼리고가 나눈 대화를 떠올리고 눈을 부릅떴다.
“야.”
루비드가 눈썹을 곤두세우며 이우라를 불렀다.
“너 뭐냐?”
경황이 없어서 깜빡 잊고 있었다. 아까 이우라가 했던 말.
“황제가 망자의 왕인 거, 정말 알고 있었냐?”
루비드의 추궁에 이우라는 침묵했다. 그래서 루비드는 대답하라고 소리치며 이우라가 등으로 받친 벽을 발로 쾅 걷어찼다. 흙먼지가 부스스 떨어지며 그들을 둘러싼 잔해가 다시금 들썩였다. 루비드의 겁 없는 난동에 이우라는 인상을 쓰더니 마지못해 인정했다.
“……그래.”
“그걸 왜 이제 말해! 너 나한텐 아무 말도……!”
루비드는 바락 소리치며 따졌다. 하지만 그의 입은 몇 마디 뱉어내지 못하고 도로 멈췄다. 이우라의 머리에서 흐른 피가 루비드의 어깨로 떨어진 탓이었다. 루비드는 이우라의 머리가 피범벅인 걸 그제야 눈치챘다. 진작 눈치채지 못한 건 형의 흐트러진 흑발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이우라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무너진 벽을 떠받치고 있었다. 그 꼴이 루비드의 심경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루비드는 말문이 막혀 형을 쏘아보다가, 이우라가 등진 벽을 다시금 걷어찼다. 그러곤 다리를 뻗은 채 버텼다. 그로써 무너지는 벽을 함께 떠받치게 된 형제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한참 후 루비드가 다시 입을 뗐다.
“……너도 목이 잘릴까 봐 겁먹고 그러냐?”
“힘을 아껴라.”
하지만 이우라는 대답을 피했고, 루비드는 도로 울컥했다. 루비드가 막 불평하려고 할 때였다. 발로 받친 단단한 벽이 물렁댄다 싶더니, 그들을 둘러싼 건물의 잔해가 차츰 부스러지기 시작했다.
“이건…….”
벽돌과 기둥들이 모래가 되어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루비드는 예전에 이런 걸 본 적 있다. 히엠스 그라샤의 성에서, 레나가 그의 심장을 뽑아온 직후에. 그때를 떠올린 루비드는 본능적으로 소리쳤다.
“무너질 거야!”
루비드가 빽 소리치자 이우라가 쏟아지는 토사를 막아보려는 듯 팔을 들었다. 그 허접한 대처에 루비드는 발을 구르며 다시 소리쳤다.
“검!”
루비드는 이우라가 뭐라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그의 허리에서 검을 뽑았다. 그러곤 있는 힘껏 참격을 날렸다. 잠시 후, 반으로 갈라진 모래더미 사이에서 두 청년이 튀어나왔다.
“푸하!”
겨우 밖으로 나온 루비드는 숨을 몰아쉬며 씹히는 모래를 뱉어냈고, 이우라도 옷을 털며 상황을 살폈다. 이우라의 시선은 필연적으로 한 곳에 꽂혔다. 조금 떨어진 곳에 거대한 반원이 있었다. 거대한 부피감을 지녔지만 건축물로 볼 수는 없는, 우윳빛 막이 비눗방울처럼 동그랗게 솟구쳐 있었다.
“뭐야, 저건 또.”
루비드는 일어나서 인상을 쓰다가 눈을 홉떴다. 하늘에서 거대한 뱀이 화살처럼 낙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뱀은 저 둥근 것에 정면으로 머리를 처박았다.
*** 나자 아이테르너. 전대 동부공. 린의 어머니.
‘저 사람이 어떻게…….’
레나는 놀란 눈으로 나자를 바라보았다. 칼리고는 심장만 남기고 사라졌다. 그러니 그의 망자들도 함께 사라져야 하는데, 저 사람은 왜 아직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 레나가 의아해하는 사이, 나자가 나직한 목소리로 레나를 불렀다.
“축복을 빼앗긴 왕.”
나자의 중저음이 귓전에 울리는 순간 레나는 저절로 깨달았다.
‘당신도 왕으로 선택됐구나…….’
자신의 아픔만 알고 타인의 아픔은 모르는 이들에게. 많은 심장을 가진, 새로운 왕으로. 왕들은 서로를 알아봤고, 레나는 나자가 칼리고를 따라 사라지지 않은 이유도 이해했다.
“그 애를 살리고 싶나?”
나자가 린을 눈짓하며 말했다.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 타인을 대하는 듯 건조한 투였다. 그래서 레나는 나자가 나타난 이유를 더 알 수 없게 되었다. 이전부터 린은 생모에 대한 이야기를 꺼렸다. 게다가 예전에 나자를 본 린의 반응을 생각하면 이들을 보통의 모자 관계로 여기긴 어려웠다. 레나는 나자를 경계하며 천천히 끄덕였다.
“길을 열어주마.”
“길?”
“저 애를 깨울 수 있는 길.”
나자 아이테르너는 전대 동부공이자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의 후보. 그러니 지배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레나는 그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고 되물었다.
“왜 당신이 직접 하지 않고 내게 길을 열어주겠다는 거죠?”
“날 두려워하니까.”
나자의 대답은 빨랐다. 거기엔 망설임도 주저함도, 일말의 아픔도 없었다. 그 묘한 태도에 레나는 다시 물었다.
“당신은 왜 린 씨를 구하려고 하죠?”
이번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레나는 이번에도 스스로 이해했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를 통해서. 그래서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린을 살리고자 하는 나자의 의지를. . . . 레나는 자신을 둘러싼 공간이 변한 걸 알고 힘들게 눈을 떴다. 어두웠다. 하지만 레나의 주변을 감싼 건 텅 빈 어둠이 아니라 밀도와 질량을 지닌 검정이었다.
‘불쾌해.’
마치 늪에 빠진 기분이었다.
‘타인의 정신에 접근하는 건 원래 이런 건가?’
레나가 이 생소한 감각에 적응하려고 애쓰는데, 주변이 일렁이며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도 저주하지 않았느냐, 널 거부하며 떠난 계집들을.
―또 증오하고 원망하지 않았느냐, 네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간 어미를.
악의가 가득한 음성에 레나는 설핏 인상을 썼다.
‘이 목소린…….’
―너라면 내 심정을 알 것이다.
―그러니 함께 복수하자. 우릴 괴물로 만든 자에게.
칼리고의 목소리였다. 레나는 칼리고를 찾아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어떤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다만 나긋이 꼬시는 목소리만 메아리처럼 들려올 뿐이었다.
‘칼리고가 남긴 사념이구나.’
아마 린의 몸을 차지하려고 남겨둔 목소리일 거다. 그건 본체가 당한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레나는 끈질기다고 생각하며 칼리고의 마지막 얼굴을 떠올렸다. 울면서 웃던, 절박하면서도 광기로 가득하던 얼굴. 문득 레지나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굳이 용서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동정은 해라. 그 또한 빼앗긴 자다.
뻬앗긴 자. 참으로 편리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어 레나는 쓰게 웃었다. 레나는 잡념을 떨치며 공간을 헤쳤다. 그러자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아…….’
레나는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눈앞에 나타난 건 높은 산과 넓은 들이었다. 마치 시를 닮은 풍경이었다. 그래선지 그 쾌청함과 고요함에 가슴이 벅찼다. 그래, 당신은 이런 사람이다.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시를 닮기로 한 내 사람. 내 모든 걸 줘도 아깝지 않을 사람. 만약 내게 삶과 생이 남아 있다면 기꺼이 당신에게 줬을 텐데. 하지만 레나 루벨의 모든 것은 이미 용서받지 못한 자들의 것. 레나는 마음에 구멍이 난 것 같아 담담히 웃었다.
‘린 씨도 이런 곳에서 날 찾았을까?’
그렇다면 참 고생했겠다. 혼자서, 외롭기도 했겠다. 그때 우린 아직 서로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또 한 번 욱신댔다. 사랑스러움과 미안함이었다. 레나는 린이 그랬던 것처럼 저 드넓은 곳을 일일이 걸어 그를 찾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없어, 조용히 자신에게 속한 자들을 불러냈다. 왕의 부름을 받은 그들은 모습을 지운 채 린을 찾아 뻗어나갔다. 레나도 그들을 따라 고요한 들판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금만 기다려, 이번엔 내가 널 찾을게. *** 어? 어린 린은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어리숙한 모습에 옆에 앉은 소년이 낄낄대며 물었다.
“졸았어?”
“아, 아니. 그건 아닌데…….”
린은 머쓱해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다시 슬쩍 등 뒤를 돌아보았다.
‘누가 날 부른 것 같았는데…….’
잘못 들었나. 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책상에 펼쳐놓은 책으로 다시 시선을 내렸다. 동부공 나자 아이테르너가 망자 토벌을 위해 떠난 지도 벌써 1년이 다 되어 간다. 그래서 린은 동부공의 시동으로 지내던 일을 거의 잊고, 동부공의 성에서 단조롭고도 무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소식 들었어?”
“무슨 소식?”
“동부공이 망자 토벌을 끝냈대.”
소년이 속닥인 말에 린은 눈을 크게 떴다.
“정말?”
“어, 내가 관리들한테 직접 들었어.”
그렇게 말하는 소년은 린과 함께 동부에서 끌려온, 린보다 세 살이 더 많은 형이었다. 그는 영리하고 요령이 좋아 제국인들과도 곧잘 어울렸고, 이따금 이렇게 외부 소식을 가져왔다. 린도 함께 지내는 소년 중에서 그를 특히 잘 따랐다.
“그럼 이제 우릴 놔주는 거야?”
어린 린이 순진하게 물었다. 망자 토벌은 제국이 다른 나라를 침략한 명분이었다. 제국은 인류의 적과 맞서기 위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강자만의 명분을 내세웠다. 그뿐만 아니라 망자와의 전쟁이 끝나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갈 거라고 사람들을 회유했다. 그래서 린도 망자 토벌이 곧 해방이라 믿었고, 결국 비웃음을 샀다.
“그럴 리가. 점령한 땅을 순순히 돌려줄 바보가 어디 있어.”
“그럼 약속이…….”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쉬쉬하고 있나 봐. 토벌이 끝났는데 식민이 계속되면 다들 들고 일어날 테니까 말이야.”
린은 입을 조금 벌린 채 형이 하는 말을 듣기만 했다. 혼란스러워하는 린에게 소년이 은밀히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린. 우리 도망치지 않을래?”
도망. 그 한마디가 묘한 기시감이 되어 린을 뒤덮었다. 하지만 이미 기억에 녹아든 린은 눈치챌 수 없었다. 이 순간이 자신의 인생을 뒤엎은 분기점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