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울고 있었다2021.08.23.
“도망?”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야. 다들 싸울 준비를 하는데 우리만 여기서 제국인인 척할 수는 없잖아. 다른 애들도 가기로 했어.”
“하, 하지만 우리끼리 어떻게…….”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린은 놀라서 눈을 깜빡댔다. 동부공의 성에서 꽤 좋은 대접을 받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국인들이 허락한 범위 내에서였다. 그 증거로 린을 비롯한 소년들은 지난 3년간 성 밖으로 나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도망이라니. 성을 빠져나가는 것도 막막하고 그 후 고향까지 가는 길은 더 까마득했다. 린이 주저하자 소년이 재차 말했다.
“방법은 다 찾아놨어. 새벽에 성 밖으로 나가는 짐 마차에 타면 돼. 아무도 모를걸.”
“잘 모르겠어, 그러다 잡히면…….”
“……뭐, 싫으면 꼭 안 가도 돼. 대신 우리가 가는 건 절대 비밀이야.”
“정말 다 가는 거야?”
린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타지에서 유일하게 의지가 된 형들이다. 린은 그들이 떠난 후 이곳에 혼자 남을 자신이 없었다. 소년은 린의 여린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목소리를 한층 낮추며 말했다.
“사실 또 들은 게 있어. 동부공이 이번에 성으로 돌아오면 우리한테 감찰 임무를 맡길 거래.”
“어……?”
“표적을 바꾸려는 거야. 제국인이 아니라 제국의 개가 된 우리가 미움받도록. 여기 계속 있으면 우린 동포들에게 채찍질하게 될 거야.”
“그런…….”
“너는 그래도 괜찮아?”
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이곳으로 끌려올 때와 마찬가지로, 린은 또 운명에 휘말리듯 탈출을 감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허무맹랑하다고 느낀 소년의 탈출계획은 뜻밖에도 완벽히 진행됐다. 밤중에 복도를 달려 지하의 짐 마차로 숨을 때까지 그들은 누구에게도 발각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성을 빠져나온 짐 마차는 시내 어귀에서 멈춰 섰고, 린과 소년은 거기서 대기하던 다른 마차로 곧장 바꿔탈 수 있었다. 모든 게 준비된 것처럼 잘 맞아떨어져, 린은 무서워하던 것도 잊고 조금 흥분했다.
“이걸 어떻게 다 준비한 거야?”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
“도와주는 사람?”
“너도 곧 만나게 될 거야.”
린이 신기한 듯 묻자 소년은 의젓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밤새 깨어 있던 린은 마차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그가 깨어난 건 점심이 지난 오후였고, 그사이 마차는 동부성에서 제법 멀어져 시가지를 지나고 있었다. 부스스 눈을 뜬 린은 마차의 흔들림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실감했다. 바깥 풍경이 궁금해진 린은 커튼을 살짝 들춰보았다. 그러곤 밖이 보이기 무섭게 다시 커튼을 닫고 몸을 숙였다.
“왜 그래?”
“밖에 기사들이 있어. 되게 많아.”
린이 목 졸린 사람처럼 신음하자 소년도 힐끗 창밖을 보았다. 말마따나 밖에는 검은 제복을 입은 기사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자로 잰 듯 열을 맞춰 동부공의 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그냥 지나가는 거니까.”
소년이 좋은 말로 린을 달랬다. 하지만 말과 달리 소년의 안색도 긴장으로 어두웠다. 반사적인 두려움에 린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정말 제국과 싸워서 나라를 되찾을 수 있을까?”
“불가능하겠지.”
“어?”
“저항은 할 수 있어서 하는 게 아니라 해야 하니까 하는 거야.”
린은 소년의 대답에 짐짓 당황했다. 동부성에서 린을 부추길 때와 달리 소년은 현실적이고 냉정했다. 그래서 린이 멍하니 바라보자, 소년이 시선을 피한 채 말했다.
“있잖아, 이것도 들은 얘긴데 우리 중에 동부공의 자식이 있을 수도 있대.”
그 덤덤한 말에 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아는 거 있어?”
“아, 아니. 전혀.”
소년의 물음에 린은 저도 모르게 부정했다. 처음 듣는 이야기지만 왠지 자신과 무관한 이야기 같지 않았다. 동부공의 시동으로 있을 때 애써 구겨 넣은 불안감이 다시 스멀대며 올라왔다. 그래서 린은 그만 입을 다물었고, 소년도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마차가 멈춘 건 그 후 한나절이 지나서였다.
“여기야.”
어두컴컴한 밤, 소년이 린을 이끈 곳은 산속에 버려진 산장이었다. 그 살풍경한 광경에 린은 또 한 번 주춤했다. 이런 외딴곳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린은 폐허나 다름없는 산장으로 들어가며 소년에게 물었다.
“다른 형들은 언제 와?”
“다른 애들은 안 와.”
“어?”
“미안해, 린.”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린이 당황하는 순간,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산장 안에서 장정들이 나와 린을 붙잡았다. 린은 반사적으로 발버둥쳤다. 하지만 린을 붙잡은 사내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린은 저항하다가 불빛에 비친 그들의 얼굴을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그들은 제국인이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야…….”
린은 울 것 같은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소년은 가라앉은 얼굴로 대답했다.
“아까 말한 그거. 너야.”
“뭐?”
“동부공의 아들, 너라고.”
심장이 멈추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린을 놀라게 한 건 동부공의 아들이라는 말이 아니라 그걸 곧장 납득한 자기 자신이었다. 때문에 린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 이야기가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지 않았던 것임을.
“해치진 않아. 그냥 숨겨두기만 할 거야.”
“왜……?”
“저항이야.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린은 멍하니 소년을 바라보았다. 화는 나지 않았다. 도리어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너한텐 잘못 없는 거 다들 알아. 하지만 잘못이 없는 건 동부공이 죽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어.”
소년이 린의 기분을 헤아린 듯 말했다. 위로도 다그침도 아닌 객관적 사실에 린의 몸은 더 싸늘히 식었다.
“그러니까 너도 절대 그 사람을 용서하지 마.”
소년이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린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을 속인 것에 화를 내는 것도, 억압에 반항하는 것도. 그때 그가 스스로 규정한 자신의 신분은 이미 죄인이었다. 낯선 얼굴의 제국인들은 린을 방에 가뒀고, 린은 저항하지 않았다. 자신과 같은 처지인 소년이 어떻게 제국인들과 손을 잡았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소년이 폭로해버린 이야기가, 그로써 덜컥 현실이 된 악몽이 버거울 뿐이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밤이었다. 린은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한 채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레 듣고 말았다. 어둠을 가르며 다가온, 강력하고 비정한 죽음의 소리를. 시작은 정체 모를 둔탁한 소리였다. 잘못 들었나 싶은 찰나 누군가 소리치고, 또 다급한 발소리가 이어졌다.
‘이 소리는…….’
3년 전에 듣던 소리다. 장 속에 숨어 듣던 소리. 사람이 죽어 나가는 소리. 꿈에서도 잊을 수 없는 소리가 린을 3년 전 그 시절로 데려갔다. 극심한 공포에 공황이 찾아왔다. 린은 여기가 어딘지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헷갈렸다. 여기가 산장인지 어머님의 안채인지,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심지어 내가 누구인지조차도. 그럼에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소리가 그치면 저 문이 열릴 것이다. 그리고 문이 열리면……. 린의 예상대로 소리는 곧 그쳤다. 그리고 그가 있는 방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내리 얼어 있던 린은 저도 모르게 문고리를 붙잡았다. 그렇게라도 닥쳐오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소년의 미약한 힘은, 밖에 선 자의 악력에 너무도 간단히 무산되었다. 문이 벌컥 열리며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맹수의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문고리에 매달려 있던 린은 그와 바로 맞닥뜨렸다. 린은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의 어깨너머로 천천히 눈을 돌렸다. 그곳엔 예상한 그대로의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피가 가득했다. 사람들이 쓰러져 있고, 피 흘리고 있고, 죽어 있었다. 그 가운데엔 소년도 있었다.
―그러니까 너도 절대 그 사람을 용서하지 마.
이제 유언이 된, 소년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어디서 왔는지 모를 목소리도 린의 귓전에 울렸다.
―복수하자. 우릴 괴물로 만든 자에게.
속을 메스껍게 하는 목소리가 린을 휘감았다. 그다음은 암전이었다.
. . . 다시 깨어났을 때, 우습게도 그는 동부공의 성에 돌아와 있었다. 짧은 탈출, 짧은 충격, 모든 것은 결국 제자리로. 린이 눈을 뜨자 데카가 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많이 놀라셨겠습니다. 배후는 잡았습니다. 나자 저하의 사촌인 후작이 벌인 일이었습니다. 친구분은 아무래도 이용당한 모양입니다. 혹시 잡혀 있는 동안…… 나자 저하에 대해 들으셨습니까? 린은 데카가 하는 말을 들으며 멍하니 생각했다. 도망치다가 붙잡혀 온 포로에게 참 친절히도 설명한다고. 어쩌면 처음부터 숨길 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저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지만 힘드시다면 꼭 지금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동부공이 기다리는데 안 가도 된다니. 린은 어이가 없어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러곤 비틀대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가겠다고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려보니 린은 이미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 긴 복도를 지나는 동안 몇 개의 목소리가 린을 휘감고 지나갔다. 아녀자는 살려달라고 빌던 아버님의 목소리. 네가 감히라며 절규하던 어머님의 목소리. 그 사람을 절대 용서하지 말라던 친구의 목소리. 그리고 저주하라고, 증오하고 원망하라고 부추기는 알 수 없는 목소리. 린은 어지러워하며 동부공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동부공 나자 아이테르너는 마치 흑표범처럼 그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지만 이번엔 겁먹지 않았다. 기절하지도 않았다. 이미 다 부서진 마음으로는 두려워하는 것도 놀라는 것도 할 수 없었다. 침묵이 흘렀다. 기다렸다던 나자는 정작 말이 없었다. 결국 그 적막을 깨트린 건 린이었다.
“우리 부모님은 절 누구 보다 아끼셨어요. 돌아가시던 날까지도요.”
린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형님이 계셨어요. 집엔 잘 안 계시지만, 절 보러 오실 때마다 장에서 뭘 사오셨어요.”
그러곤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말했다.
“친구도 많이 있었는데 지금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 얼굴도 이름도, 도저히.”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멋대로 입을 빌린 것 같았다. 그렇게 담담히 읊조리고서, 린은 나자에게 물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요?”
나자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전해지지 않았다. 마치 책장이 찢겨나간 책처럼 그 순간은 감춰졌고, 어느새 린은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지고 있었다. 린은 떨어지며 멍하니 생각했다. 나는 왜 추락하고 있지? 아, 보고 싶지 않았구나. 그래서 뛰어넘었나 봐.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라서. 그걸 자각한 순간 소년은 점차 자라 청년이 되었다. 하지만 추락은 계속되었다. 나락 끝에서 그를 맞이한 건, 거대한 뱀의 입이었다. *** 린의 고요한 들판에 폭풍이 몰아쳤다. 급작스러운 바람에 레나는 놀라서 걸음을 멈췄다.
‘뭐지?’
청명하던 하늘마저 어둡게 물들고, 산과 들의 모든 것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리고 하늘에서 마치 뱀처럼 보이는 검은 형상이 내려왔다.
“저건…….”
레나는 중얼대자 레나를 돕는 자들이 속삭였다.
―사념.
―뱀왕이 남긴 조각.
―이곳에 침식하려는 의지.
그때 다시금 바람이 몰아치더니, 칼리고의 음성이 세상을 뒤흔들었다.
―너도 저주하지 않았느냐.
―증오하고 원망하지 않았느냐.
―너라면 내 심정을 알 것이다.
칼리고의 사념은 이곳이 마치 제 세상인 양 목소리를 높였다. 레나는 귀를 막고 견디다가 눈을 크게 떴다. 칼리고의 사념 사이로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레나는 그를 곧장 알아보고 소리쳤다.
“린!”
레나는 린을 발견하자마자 그에게 달려갔다. 그 와중에도 칼리고의 그림자는 린을 에워싼 채 독사처럼 꼬셨다.
―그러니 함께 복수하자.
―우릴 괴물로 만든 자에게.
칼리고가 속삭일 때, 린은 무릎을 꿇은 채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우는 것도 같고 괴로워하는 것도 같았다. 그래서 레나는 다급해졌다.
―나는 네 심정을 안다.
―사랑하기에 미워하는 것도.
―갈구하기에 복수하는 것도.
린의 고요하던 세상이 요동치고 쾌청하던 날마저 흐려졌다. 그 와중에 이미 패한 왕은 그를 끊임없이 부추긴다.
“린, 듣지 마!”
레나가 린에게 달려가며 소리쳤다. 그 소리를 비웃듯 칼리고의 그림자가 모습을 바꿨다. 안개 같던 뱀은 차츰 사람의 형상을 띄더니, 칼리고의 본 모습을 이루었다. 그가 얼굴을 가린 린에게 손을 포개며 속삭였다.
―조각난 심장의 수를 헤아려라.
―그것이 세상이 널 난도질한 증거이니.
칼리고의 사념은 끈질기게 유혹했다. 린이 자신과 같은 존재가 되길 바라며, 서서히 그에게 침식했다. 그러자 미동도 하지 않던 린이 천천히 반응했다. 린은 얼굴을 가리던 손으로 칼리고의 손을 맞잡았다. 그 간절한 손길에 칼리고는 짙게 웃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그의 웃음은 도로 지워졌다.
“……틀려.”
린이 칼리고의 손을 밀어내며 잠긴 목소리로 중얼댔다.
“나는 그 사람을 미워하지 않아.”
차마 사랑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미워할 수도 없다.
“그래서 괴로운 거야.”
린의 희미한 속삭임에 폭풍이 잦아들었다. 린은 조용히 탄식하며 고개를 들었다. 다시 쏟아진 모든 기억에도 불구하고, 그의 두 눈은 고요했다. 폭풍이 멈추자 린의 기억은 찢겨나간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갔다. 보고 싶지 않아서,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 뛰어넘어 버린 순간으로. 그때 그곳에서, 나자는 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