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사랑하기를 택한 사람2021.08.26.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요? 린의 희미한 물음에 나자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안 그랬을 거야.”
안 어울리게 얕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살아 있는 줄 알았으면.”
그렇게 속삭이는 소리는 차라리 신음에 가까웠다. 그래서 무심코 물었던 린은 찬물을 맞은 사람처럼 얼어붙었다. 늘 무심하던 나자의 눈동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더 없이 괴로운 듯, 안타까운 듯, 그리고 상처입은 듯. 그는 고요히 눈물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린이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자 나자는 턱에 힘을 주며 말했다.
“널 빼앗은 건 그 사람들이었어.”
나자는 어렵사리 말하고 다시 이를 악물었다. 그의 두 눈이 분노로 일렁였다.
“널 죽인 것처럼 속였어. 난 네가 죽은 줄 알았어.”
나자의 두 눈에 독기가 차올랐지만 린은 그 시선이 더는 두렵지 않았다. 린을 대하는 나자의 태도가 애원에 가까워서, 빌며 호소하듯이 처량해서 더는 두려워 할 이유가 없었다. 대신 두려움이 있던 곳에 혼란이 차올랐다. 린은 숨을 가쁘게 쉬며 하염없이 눈물을 떨어트리는 나자를 바라보았다. 우는 모습이 낯설었다. 눈물은커녕 피도 흘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 강한 사람이 우는 모습에 린은 영문 모를 죄책감을 느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누구예요?”
“널 낳은 사람.”
짧게 대답한 나자의 얼굴엔 눈물만큼이나 후회가 가득했다. 그야말로 최악의 재회였다. 대륙의 동쪽 끝에 위치한, 이름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 형제들에게 쫓기던 나자는 큰 상처를 입고 그 낯선 나라까지 피신했다. 그곳에서 한 남자를 만났고, 아이를 가졌다. 원래는 몸을 회복하자마자 제국으로 돌아가 형제들을 죽이고 공작위를 차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 눈을 뜨고 옹알대며 걷기 시작하자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어졌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가문을 저버린 남자와 이 고즈넉한 산속에서 아이를 키우며 살아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러나 그 작은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나라의 오만한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고결한 혈통에 이방인의 피가 섞이는 걸 원치 않았다. 그래서 남자의 부모는 절연한 아들의 거처를 끈질기게 찾아내,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정체 모를 이방 여자에게서 아이를 빼앗았다. 나자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아이를 되찾기 위해 무리 지어 찾아온 장정들을 쓰러트리고 아이를 데려간 나이 많은 여자를 쫓았다. 그러자 그 여자는 나자를 벌레 보듯 쳐다보며 경멸하더니, 아이를 계곡아래 강물로 던져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아이를 뒤로 빼돌리고 강보를 집어던진 거였다. 하지만 당시의 나자는 그걸 구분할 이성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아이가 떨어졌다고 착각한 나자는 베이고 찔린 몸으로 곧장 그 뒤를 따랐다. 절벽이나 다름 없는 곳에서 몸을 던져 얼음장 같은 물속에서 아이를 찾아 헤매고 또 헤맸다. 그러나 그가 탈진 직전에 찾아낸 건 아이를 감쌌던 강보뿐이었다. 그로써 꿈은 깨졌다. 사랑으로 가득했던 심장도 꼭 그만큼 조각나 깨졌다. 제국에서 온 여자는 다시 제국으로 돌아갔고, 형제들의 핏물을 밟고 공작이 되었다. 그리고 동부를 정복하라는 황제의 명령이 떨어졌을 때 거리낌없이 앞장섰다. 사랑 비슷한 것을 나눈 남자의 나라였지만 아무렴 좋았다. 제 처자식도 지키지 못한 남자에겐 더 이상 흥미는 없었다. 그래서 그랬다. 그래서, 그들을 직접 찾아갔다. 마음껏 짓밟고 진창에 처박아도 되는 존재라고 생각해서. 그날, 나자는 제 아이를 빼앗은 늙은 여자를 곧장 알아보았다. 그 여자도 제 아들을 빼앗은 젊은 여자를 바로 알아보았다. 생살을 가르는 행위에 거리낌은 없었다. 그것은 뻔하디 뻔한 복수였다. 하지만 그 시시한 복수극은 늙은 여자가 죽기 직전에 남긴 한마디로 결이 바뀌었다.
―장 안에 있다.
유언이라기엔 너무 변변치 못한 말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말은 오히려 강하게 뇌리에 남았고, 나자의 시선은 자연히 그 여자가 등지고 있던 장으로 향했다. 나자는 그 문을 열었다. 그리고 나자의 핏빛 세계는 잿빛으로 탈색되었다. 8년만이었지만 나자는 자신의 아이를 한눈에 알아봤다. 그리고 자신이 직전에 벌인 일을 모조리 후회했다. 아이는 겁에 질려 있었고, 제 입을 손으로 틀어막은 채 울고 있었다. 정녕, 최악의 재회였다. 옛 이야기를 힘겹게 토해낸 나자는 후회와 원망이 뒤섞인 눈으로 이를 악물었다. 그러곤 하염없이 우는 눈으로 자신의 어린 아들을 바라보았다. 죽은 줄 알았던 아이가 살아 돌아왔지만 차마 다가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지켜보며 시간이 이 간극을 좁혀주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간절히 기다리고 기다린 게 바로 너였다. 나자의 이야기에 린의 어린 뺨도 덧없이 젖어 들었다. 린은 혼란스러워하며 멍하니 눈물만 떨어트렸다. 기억은 없지만 그리움은 남아 있었다. 달려가서 안기고 싶었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두 팔로 끌어안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두 다리는 뿌리를 내린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너도 절대 그 사람을 용서하지 마.
그렇게 말한 소년은 어제 죽었다. 그리고 그가 남긴 말은 벗어날 수 없는 구속이 되어 린을 가뒀다. 그로써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린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내가 살아 있는 걸 알았으면, 안 그랬을 거예요?”
“안 했어, 아무것도!”
나자는 외치듯 대답했다.
“네가 거기 있는 걸 알았으면, 네가 살아 있는 줄 알았으면……!”
나자는 알리고 싶었다. 여전히 널 생각한다고,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다고 린에게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자의 절박함은 상상도 못한 방향으로 왜곡되어 오히려 린을 압박했다.
“내가 살아 있는 줄 알았으면…….”
그 말은 이 모든 게, 내가 죽은 줄 알고 저지른 일이란 뜻일까? 그럼 결국 내 탓인 거야? 린은 정상적으로 사고할 수 없었다. 온갖 생각이 어지럽게 난무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너무 많이 죽였잖아. 절대 용서하지 마. 나 때문이야? 내가 자식이 아니었으면. 친구들이 기억나지 않아. 죽었으니까. 저 사람의 자식이 아니라서. 그리고 혼자 살아남은 나는, 학살자의 아들. 린의 얼굴에서 핏기가 모두 빠져나갔다. 그 창백한 얼굴을 보며 나자가 상처 입은 듯 말했다.
“날 무서워하지 마…….”
나자는 더 견딜 수 없는 듯 몸을 일으키며 속삭였다.
“내가 네 엄마야.”
그 한마디에 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자가 일어나자 린은 주춤 물러났다. 그가 걸음을 떼자 아예 돌아섰다. 힘겹게 버티던 린은 결국 집무실에서 뛰쳐나왔다. 린이 달아나자 나자가 뒤에서 소리쳤다. 가지 말라고, 기다리라고 절박하게 외쳤다. 그 무섭던 사람은 마치 버림받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듯 린을 쫓았고, 린은 죽을 것 같은 심정으로 도망쳤다. 이대로 저 사람에게 잡히면, 그래서 안기면 모든 게 끝날 것 같았다. 그때 소년의 뒤엉킨 머릿속에서 갓 죽은 친구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너도 절대 그 사람을 용서하지 마.
물론이다. 물론 그래야 한다. 키워주신 조부모님, 형님이었던 아버지, 친구들, 이웃들, 함께 지내던 그 많은 사람. 그들의 새빨간 마지막 모습은 린의 뇌리에 선명히 남아 있다. 린은 그들을 배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숨이 막히게 달리며 한가지 결론에 다다랐다. 복수, 할 수 있어. 벼랑 끝에 몰린 린은 창문을 등지고 돌아섰다. 그를 쫓던 나자는 아이의 텅빈 눈을 보고 덜컥 멈춰 섰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찰나의 직감에 나자가 손을 뻗는 순간, 린은 미련 없이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다. 언뜻 비명이 들린 듯도 하지만 그 소리는 바람에 섞여 곧 사라졌다. 린은 추락하며 눈을 감았다. 바라는 건 오직 한가지였다. 부디 죽고 나면 그 어느 쪽도 아닌 채 영영 사라지길. 그렇게 소년은 죽음을 택했다. *** 두려워 들여다보지 않았던 기억이 산산히 부서져 눈처럼 내렸다. 그 가운데 선 린은 피하지 않고 내리는 기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빼앗겼으니 복수하라는 칼리고의 부추김은 린을 조금도 흔들지 못했다.
“복수라면 이미 했으니까.”
내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간 자에게, 그의 아들을 눈앞에서 죽여 빼앗는 것으로 린은 이미 혹독한 복수를 했다. 하지만 그로써 더 잃은 건 나자가 아닌 린이었다. 분명 죽을 만한 높이에서 추락했는데 린은 며칠 후 멀쩡히 깨어났다. 머리에 아문 상처가 남아 있지 않았다면 꿈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막 깨어난 린에게 전해진 건 나자의 죽음과 완전히 뒤집힌 운명이었다. 나자는 린을 살리기 위해 그에게 권능을 넘겼다. 그러려면 죽어야 했지만 그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한 번 아이를 놓쳐 살육자로 살았다. 그 아이를 겨우 되찾았는데 또 이렇게 놓친다면, 나자는 스스로를 용서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니힐에게 서신을 보낸 후 자신의 모든 것을 아들에게 양도했다. 권능도 작위도, 하나뿐인 생명까지도.
“완벽하게 복수했지만 잃은 건 내 쪽이었어.”
린은 담담히 말하며 칼리고를 바라보았다.
“결국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당신처럼.”
그때 린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동정심이었다. 린은 진심으로 동정했다. 빼앗겼다는 이유로 복수를 권리로 여기며 살아온 그를, 그로써 빼앗긴 것 이상의 것을 스스로 내버리고 영원히 고독해진 그 왕을. 린의 시선에 칼리고는 당황한 듯 안색을 굳혔다. 경멸 섞인 동정은 익숙했다. 하지만 이렇게 순전한 연민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건 어떤 모욕보다 뼈아팠다. 칼리고는 천천히 얼굴을 일그러트리더니 종국엔 역린을 치인 용처럼 이를 드러내며 린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칼리고의 손톱과 이빨은 린에게 닿지 못했다. 그사이 당도한 레나가 그를 막아 부숴버린 탓이었다. 뱀왕이 남긴 마지막 조각마저 흩어지고, 내리던 기억도 그쳤다. 다시 고요해진 들판에서 두 사람이 만났다.
“꿈이야?”
린의 물음에 레나는 엷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은 듯, 린은 더 묻는 대신 레나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레나는 어깨가 젖어 드는 것을 느끼고 린을 안아주었다.
“계속 후회했어.”
린이 잠긴 목소리로, 마치 악몽에서 막 깨어난 사람처럼 말했다.
“그때 한 선택을.”
성에서 몸을 던지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죽은 사람은 그가 아닌 나자였다. 결과적으로는 모두를 위한 복수를 한 셈이었다. 내게 매달려 울던 어머니를 나 대신 죽이는 것으로. 그 대가로 린은 저주받았다. 사무치게 외롭지만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하지만 린이 잃어버린 더 큰 것은 따로 있었다. 황제에게 동부의 반란군 소탕을 명령받았을 때, 린은 또 한 번 궁지에 몰려 차라리 죽을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때 린을 일으킨 건 한 통의 편지였다. 나자가 죽기 전 황제에게 보낸 편지. 황제가 내던지듯 린에게 건넨, 나자의 유서나 다름 없는 문장들. 린은 막다른 곳에서 나자의 편지를 펼쳐보았다. 그 안엔 나자의 차가운 필체로 황제에게 자비를 구하는 글이 적혀 있었다. 나자는 허락 없이 후계자를 정한 것을 부디 용서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편지 끝부분에는 격식에 맞지 않는 한 문장이 사족처럼 달려 있었다. ―부디 제 아들을 살려주십시오. 그것은 마지막 순간, 아무 원망도 없이 쓰인 나자의 마지막 문장이었다. 린은 그 문장 때문에 죽을 만큼 아파했고, 또 죽고자 하는 마음을 이겨냈다. 날 위해 그런 말을 남긴 당신을 내가 어떻게 미워할까. 사랑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어 그저 견뎌왔을 뿐이다.
“시간이 있었으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린이 덧없이 물었다. 만약 다른 선택을 했다면, 내가 당신에게서 나를 빼앗지 않았다면 나도 당신을 빼앗기지 않았을 텐데. 누구보다 날 사랑하고 생각하던 당신을. 이렇듯 시간은 언제나 부족하다. 사랑하기에도 이겨내기에도, 그리고 용서하기에도. 레나는 조용히, 하지만 사무치게 후회하는 린을 더 꼭 끌어안았다. 린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잃은 사람이었고, 자신이 놓친 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빼앗겼다는 이유로 함께 빼앗는 대신 타인을 돕기로 한 사람이었다. 그걸 알게 된 레나는 마치 시를 읽는 기분으로 연인을 보듬었다. 불현듯 레지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굳이 용서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동정은 해라. 그 또한 빼앗긴 자다.
레나는 그 말의 진짜 의미를, 연인을 통해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