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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화. 계승 (139/208)

139화. 계승2021.08.30.

16562828553026.jpg“다시 만나게 될 줄 몰랐어.”

레나의 품에서 린이 속삭였다.

16562828553026.jpg“반가워할 수도 무서워할 수도 없었어.”

망자가 된 나자를 처음 봤을 때, 린을 지배한 감정은 짙은 혼란이었다. 내게 생명까지 넘겨준, 내게 목숨을 빼앗긴 어머니. 내게 울며 애원하던, 그리고 내 조국과 가족을 짓밟은 제국의 공작. 나자에 대한 린의 마음은 그의 죽음으로 모두 유예된 채였다.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못한 채 7년이 흘렀다. 그래서 나자가 다시 나타난 순간 댐이 무너지듯 해묵은 감정이 쏟아져, 린은 숨도 쉴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망자의 왕으로 선택될 만큼 죄 많은 어머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1656282855304.jpg“여기로 올 수 있게 도와줬어요.”

린이 혼란스러워하자 레나가 그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1656282855304.jpg“당신 어머니가요.”

레나의 말에 린은 깊이 탄식했다. 레나는 연인이 안타까웠지만 함부로 위로하지 않았다. 나자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 그 역시 누군가에겐 칼리고 만큼 사악하고 황제만큼 잔인했다. 그리고 내 아버지만큼이나 무정했다. 그런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함부로 용서할 수 있을까. 그래서 서글피 침묵하는데, 또 다른 기억이 하늘에서 내렸다.

1656282855304.jpg“이건…….”

레나가 먼저 발견한 그것은 린이 스스로 떠올리지 못하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었다. 동방의 저고리를 입은 나자가 린을 빼닮은 남자와 함께 웃고 있었다. 무언가 소중한 것을 들여다보며, 벅찬 듯 신기한 듯 환히 웃고 있었다. 린이 그리움 속에 묻어둔 나자의 모습이었다. 사계절 가득 채워진 나자의 웃음은 이른 봄에 끊겼다. 그 차가운 봄, 아이가 떨어진 줄 알고 절벽에서 몸을 던진 여자는 차가운 강물 속을 헤매고 또 헤맸다. 아이의 강보만 겨우 찾아낸 여자는 울었다. 강가에 떨어지는 시린 목련 꽃잎을 맞으며, 차라리 숨이 끊어지길 바라며 울고 또 울었다. 그저 우연일까? 린의 강보를 안고 우는 나자의 모습은 나자의 편지를 쥐고 우는 린의 모습과 판에 박은 듯 같았다. 그 모습이 너무 아파 린은 또 한 번 이를 악물고 울음을 삼켰다. 모든 과오를 헤치고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엔 그 역시 빼앗긴 자였다. 비단 나자 뿐일까. 마음이 온전치 못한 모든 이가 마찬가지다. 이 가혹한 세상에선 누구나 빼앗긴다. 그리고 빼앗겼다는 이유로 무엇이 될지 선택한다.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때문에 바라야 한다. 복수보다 기도를 선택한 자들처럼, 더 강한 마음을.

1656282855304.jpg“그만 돌아가요.”

레나의 속삭임에 린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남아 있던 눈물을 마저 떨어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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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자는 린의 얼굴을 고요히 바라보고 있었다.

1656282855304.jpg“음…….”

그러길 한참, 린의 옆에 쓰러졌던 레나가 신음하며 깨어났다. 거의 비슷한 순간 린도 일어나려는 듯 눈꺼풀을 움직였다. 그러자 나자가 린의 눈을 손으로 덮었다. 마치 더 자라는 듯이. 나자의 손길에 의식을 되찾던 린은 다시 잠들었고, 홀로 깨어난 레나는 영문을 몰라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16562828553063.jpg“축복을 빼앗긴 왕.”

시선을 느낀 나자가 레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뜻밖의 말을 꺼냈다.

16562828553063.jpg“너의 뜻을 안다.”

1656282855304.jpg“……무슨 소리죠?”

16562828553063.jpg“니힐 그라샤와 함께 무덤으로 내려올 셈이겠지.”

나자의 물음에 레나는 짐짓 놀랐다. 레나는 나자의 의도를 수상히 여기며 그를 경계했다. 하지만 나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16562828553063.jpg“나도 바라는 바다.”

1656282855304.jpg“바라는 바?”

16562828553063.jpg“니힐의 농간을 더 두고 보지 않겠다.”

그렇게 말하는 나자의 눈은 금빛으로 형형했다. 그 안에 맺힌 감정은 명백한 분노였다.

16562828553063.jpg“황제가 있어야 할 곳은 무덤이다.”

1656282855304.jpg“……그래서요?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거죠?”

나자의 차가운 목소리는 속임수 없이 단호했고, 레나는 혹시나 해서 되물었다. 설마 날 돕겠다는 건가? 가능성이 전혀 없는 말은 아니다. 어쨌든 나자도 황제에게 속아 이용당한 사람이다. 그러니 황제에게 원망을 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레나가 희미한 기대를 품고 바라보자 나자가 대답했다.

16562828553063.jpg“내 목표는 너와 같다. 하지만 너의 방법엔 동의하지 않는다.”

1656282855304.jpg“그럼…….”

당신은 어떤 방법이 있죠? 레나는 이렇게 되물으려 했다. 그런데 레나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돌연 시간이 느려졌다.

1656282855304.jpg‘뭐지?’

레나가 그걸 인지한 건,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은 건 시간이 거의 멈춘 후였다. 어리둥절하던 레나의 눈이 커졌다. 자신의 목 앞까지 들어온 나자의 손끝 때문이었다.

1656282855304.jpg‘갑자기 무슨…….’

레나는 급히 몸을 젖혀 나자의 기습을 피했다. 나자의 손끝이 레나의 목덜미를 아슬아슬하게 스친 순간 늘어지던 시간이 제 속도를 찾았고, 급히 피하는 바람에 중심을 잃은 레나는 그대로 한 바퀴 굴렀다.

1656282855304.jpg“당신!”

예상치 못한 공격에 레나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하지만 나자의 관심은 이미 레나가 아니라 레나의 옆에 있던 칼리고의 심장, 황금으로 된 규를 향하고 있었다.

1656282855304.jpg‘설마.’

레나는 나자의 의도를 눈치채고 땅을 박찼다. 직후 또 시간이 느려졌다. 덕분에 레나는 기가 막혔다.

1656282855304.jpg‘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일거수일투족이 생명의 위협으로 이어지다니, 레나도 이만한 위험인물은 난생처음이었다. 이우라와 그토록 치열하게 싸웠지만 시간이 느려지는 감각을 느낀 건 고작 네다섯 번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단 두 번의 공격으로 레나를 두 번이나 생사의 갈림길에 세웠다.

1656282855304.jpg‘기껏 아들을 구해줬더니.’

레나는 어처구니없어하며 거침없이 날아드는 나자의 다리를 피했다. 그러곤 나자를 그대로 돌려차 버렸다. 쾅 소리가 나며 나자의 턱이 돌아갔다. 제대로 들어갔다 싶은 순간, 강한 힘이 레나의 발목을 낚아챘다. 나자는 무서운 악력으로 레나를 던져버렸고, 허공에 뜬 레나는 급히 채찍을 펼쳐 나자의 허리를 붙들었다. 결국 규로 손을 뻗던 나자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힘겨루기가 시작되자 레나는 채찍을 팽팽하게 당기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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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282855304.jpg“저 심장을 부수고 왕이 될 작정인가요?”

16562828553063.jpg“그렇다.”

1656282855304.jpg“왕이 된 후엔?”

16562828553063.jpg“내 손으로 니힐을 끌어내린다.”

1656282855304.jpg“또 전쟁을 일으킬 셈이군요.”

16562828553063.jpg“내 군대는 이미 죽은 자들이다.”

1656282855304.jpg“황제의 군대는 아니에요.”

레나의 반박에 나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답이 돌아오지 않자 레나가 되물었다.

1656282855304.jpg“왜 내가 의식을 잃었을 때 움직이지 않았죠? 그때 심장을 부쉈으면 이렇게 방해받지도 않을 텐데.”

그건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1656282855304.jpg“린 씨가 걱정돼서 기다린 거죠?”

아들의 이름에 나자의 매서운 눈빛이 일순 누그러졌다. 레나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1656282855304.jpg“다른 사람도 누군가의 아들이란 말은 안 할게요. 다만, 당신 때문에 또 사람이 죽으면 린 씨는 괴로워할 거예요.”

레나의 호소에 나자의 망설임이 짙어졌다. 나자는 자신의 발치에 누운 린을 힐끗 바라보더니 나직이 운을 뗐다.

16562828553063.jpg“알고 있다. 네가 니힐의 조각과 나눈 약속을.”

1656282855304.jpg“……그럼 기다려줘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요.”

16562828553063.jpg“니힐에게 심장을 다 넘긴 후엔?”

이번엔 레나의 말문이 막혔다. 나자가 주저하는 레나의 채찍을 움켜쥐었다.

16562828553063.jpg“그땐 아무도 니힐을 막지 못한다. 설령 약속했다 해도, 이미 세상을 속인 자의 약속 따위 믿을 수 없다.”

1656282855304.jpg“달라요, 레지나는 니힐과…….”

레나가 막 항변하려 할 때였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레나가 펼친 하얀 공간의 일부가 깨졌다. 레나와 나자는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았고, 공간의 깨진 틈새에서 낯익은 얼굴들을 발견했다.

16562828672897.jpg“이건 또 뭐야…….”

얼떨떨해하는 루비드와 그 뒤에 선 이우라였다. 레나는 이우라의 등장에 이마를 짚고 싶었다. 아직 정리가 덜 됐는데 저 골치 아픈 인물이 등장하다니. 레나는 이우라가 또 매섭게 파고들 것을 대비했다. 그런데 막상 이우라의 표정이 이상했다. 언제나 냉정하던 이우라가 눈을 크게 뜬 채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레나는 이우라가 뭘 보고 저렇게 놀라는지 곧 깨달았다. 그의 시선은 나자를 향하고 있었다.

1656282855304.jpg‘아는 사이구나.’

아니, 모르는 게 더 이상하다. 이우라가 북부공이 된 건 8년 전, 린이 동부공이 된 건 7년 전. 그러니까 이우라와 나자는 근 1년간 제국의 공작으로서 어깨를 나란히 했다. 레나가 이우라의 동요를 막 눈치챘을 때였다.

16562828553063.jpg“이우라!”

나자가 돌연 소리쳤다. 나자의 부름에 이우라는 반사적으로 참격을 날렸고, 예리하게 날아온 참격이 레나의 채찍을 끊었다. 나자가 풀려나자 레나는 혀를 차며 돌진했다. 그런데 어느새 달려온 이우라가 레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우라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훈련된 개처럼 착실히 나자를 엄호했고, 그사이 나자는 기어이 칼리고의 심장을 손에 쥐었다.

1656282855304.jpg“기다려요!”

레나가 다급히 소리쳤다. 헛된 외침이었다. 나자의 손이 규에 닿자 고요하던 꽃밭에 돌풍이 들이쳤다.

1656282855304.jpg“윽!”

레나는 충격을 견디기 위해 몸을 낮췄다. 이우라도 비틀대다 중심을 잡았고, 루비드는 아예 주저앉는 편을 택했다. 거센 바람의 중심에서 나자는 칼리고의 심장을 두 손으로 잡고 부러뜨리려는 듯 꺾었다. 나자의 악력에 규가 휘자 격류도 더욱 격해졌다. 어지럽게 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이우라가 목소리를 높였다.

16562828672914.jpg“나자……!”

그 이례적인 외침에 나자가 이우라를 돌아보았다. 그때 나자의 눈빛은 아들을 바라볼 때처럼 애틋하진 않았다. 대신 그 안에 단단한 신뢰가 뭉쳐 있었다. 나자가 이우라에게 말했다.

16562828553063.jpg“고생 많았다. 나머진 내가 하겠다.”

16562828672914.jpg“나머지라니…….”

16562828553063.jpg“제국의 만행에 가담한 대가는 니힐을 쳐서 갚겠다.”

나자의 말에 이우라는 벼락 맞은 사람처럼 눈을 홉떴다. 레나가 그 틈을 노려 다시 달려들었다. 계승을 앞둔 왕 앞에서 힘을 잃은 레나의 망자들도 그를 도우려는 듯 뒤따랐다. 하지만 레나는 끝내 닿을 수 없었다. 강한 힘이 레나를 튕겨냈고, 나자의 두 손에 칼리고의 심장은 결국 박살났다. 나자의 손에서 감당할 수 없는 빛이 폭발했다. 그 빛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세상을 하얗게 물들였다.

1656282855304.jpg“윽!”

레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쏟아지는 충격을 견뎠다. 그때, 돌연 사위가 고요해지며 레나의 귓전에 한 음성이 울렸다.

16562828553063.jpg―많은 심장을 가진 왕의 심장은 부서졌다.

1656282855304.jpg‘나자?’

그건 낮고 탁한 나자의 목소리였다.

16562828553063.jpg―권능과 저주도 사라졌으니 떠나라. 더 이상 제국의 일에 관여하지 말고.

1656282855304.jpg“갑자기 무슨 소리를…….”

16562828553063.jpg―이건 너희가 짊어질 몫이 아니다.

나자의 목소리가 어쩐지 다정하게 느껴진 건 단지 착각일까? 레나는 ‘너’가 아닌 ‘너희’라는 표현에서 이게 린에게 전하는 이야기인 걸 깨달았다.

1656282855304.jpg‘그럼 심장을 부순 이유도 단지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린을 위해서였나? 타당한 의심이었지만 그걸 확인할 겨를은 없었다. 잠시 고요하다고 느낀 사위가 다시 흔들렸다. 새 왕의 탄생에 무덤은 요동쳤고, 기어이 폭발이 일어나 공간을 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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