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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화. 북부공을 매장했다 (140/208)

140화. 북부공을 매장했다2021.09.02.

16562828778511.jpg“공개모집 중이던데?”

클라비스가 은식기로 음식을 썰며 말했다.

16562828778511.jpg“자기 이름을 가장 위에 올려놓고 동참할 사람을 구하고 있대. 정말이지, 보기 드문 낭만주의자야.”

클라비스는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그러자 맞은 편에 앉은 니힐이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중얼댔다.

1656282877852.jpg“반응은?”

16562828778511.jpg“어떨 것 같아?”

1656282877852.jpg“지탄받고 있겠지.”

니힐은 고민 없이 대답했고, 제법 정확한 통찰에 클라비스는 더 짙게 웃었다. 황제와 추기경이 모처럼 마주 앉아 식사하는 날, 그들의 식탁에 오른 화제는 황제 시해범의 근황이었다. 공작들의 행방이 묘연해지자 용감한 무리가 황제와 추기경의 침소를 덮쳤다. 하지만 그들의 위대한 시도는 무참히 실패했고, 니힐은 그중 유일한 생존자인 사제에게 명했다. 오늘 날짜에 맞춰 처형당할 자를 선발하라고. 그런 명령을 내린 지 벌써 보름이 지났다. 그래서 니힐이 근황을 묻자 클라비스가 내놓은 답이 이거였다.

16562828778511.jpg“맞아, 어디서도 좋은 말은 못 듣더라고. 하긴 당연하지.”

그 신실한 사제는 죽일 사람을 차마 직접 고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제 식구를 희생시키지도 못했다. 그래서 그는 차라리 감정에 호소하는 편을 택했다. 제국을 위해 황제를 죽이려 했으나 실패했고, 그 대가로 머릿수를 채워 죽어야 하니 함께해달라고 말이다. 일종의 선동이었다. 하지만 교수대에 빈자리를 만들어놓고 함께 해달라고 해봤자 주위에선 분노할 뿐이었다. 사람들은 그 사제가 괜히 벌집을 건드렸다며 비난했고, 그의 희생도 제 잘못에 대한 비루한 면피가 아니냐며 평가절하했다. 불똥이 튈까 무서워진 가족과 친구들은 진즉에 그 곁을 떠났다.

16562828778511.jpg“개중엔 돈을 주면 명단을 채워주겠다는 사람도 있고, 일이 꽤 재밌게 돌아가던데?”

클라비스가 가볍게 지껄이자 니힐이 무정한 얼굴로 그를 흘끗 올려다봤다. 시선을 느낀 클라비스가 빙긋 웃었다.

16562828778511.jpg“왜? 웃으니까 이상해?”

그 태도에 니힐의 눈이 가늘어졌고, 클라비스는 더 곱게 웃으며 덧붙였다.

16562828778511.jpg“원하면 울어줄게. 13년 전처럼.”

클라비스의 겸양 섞인 도발에 니힐이 입을 열었다. 버릇없는 동생을 질책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쏟아진 건, 몇 마디 말이 아니라 새빨간 피였다. 니힐은 아무 조짐 없이 왈칵 피를 토했고, 클라비스는 놀라서 저도 모르게 일어났다. 클라비스가 몸을 일으키자 니힐이 말했다.

1656282877852.jpg“앉아.”

16562828778511.jpg“……독이야?”

1656282877852.jpg“아니.”

니힐이 자신의 은식기를 보며 대답했다.

1656282877852.jpg“심장이 부서졌다.”

나직이 중얼댄 니힐의 손에서 은식기가 우그러졌다. 황제는 은으로 된 나이프를 마치 종잇장처럼 구겨버리더니, 그걸 도로 던지며 말했다.

1656282877852.jpg“당장 서부의 상황을 알아 와. 누가 내 명령을 어겼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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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비드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본 건, 울먹이는 소년이었다.

16562828806815.jpg“저하, 정신이 드세요?”

1656282880682.jpg“촉새……?”

루비드가 잠긴 목소리로 중얼대자, 엔지는 진이 다 빠진 얼굴로 주저앉았다.

16562828806815.jpg“다행이다…….”

루비드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엔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1656282880682.jpg‘이 녀석이 왜 여기 있지?’

아니, 그전에 여긴 어디지? 사고가 상황을 따라가지 못했다. 루비드는 자신이 왜 누워 있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엔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물었다.

1656282880682.jpg“여기가 어디냐?”

16562828806815.jpg“장벽의 요새예요, 저하. 기사들이 접경지에 쓰러져 계신 저하를 발견해서 모셔왔어요.”

1656282880682.jpg“이우라…….”

16562828806815.jpg“네?”

1656282880682.jpg“이우라 플레누스하고 레나 루벨, 동부공은?”

16562828806815.jpg“기사들이 찾은 건 저하뿐이었어요. 같이 계셨나요?”

엔지가 간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같이 있었냐고? 같이 있었다. 별이 폭발하듯 세상이 뒤집히기 전까지는. 루비드는 몸을 일으키며 마지막 순간을 되짚었다.

1656282880682.jpg‘레나 루벨하고 실랑이하던 아줌마, 나자 아이테르너 맞나?’

맞는 것 같다. 그 아줌마가 아니라면 이우라가 부른다고 달려나가지도 않았을 거다. 갑자기 나타난 아줌마가 칼리고의 심장을 부러트렸고, 그 다음 세상이 무너졌다. 그게 루비드가 기억하는 전부였다.

16562828806815.jpg“저하……?”

엔지가 울먹이는 눈으로 루비드를 불렀다. 소년은 혼자 생각하는 루비드 앞에서 여전히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절박한 눈빛에 루비드가 혀를 차며 말했다.

1656282880682.jpg“같이 있었어. 지금도 아마 멀쩡하겠지. 죽인다고 죽을 놈들도 아니고.”

루비드의 투덜댐에 엔지는 또다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곤 한결 밝아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16562828806815.jpg“다들 큰일 나신 줄 알았어요. 한 달이나 소식이 없어서…….”

1656282880682.jpg“한 달?”

16562828806815.jpg“네?”

루비드가 돌연 눈을 크게 떴다. 한 달이라니, 무덤에서 제법 머물긴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애당초 무덤의 시간은 이쪽보다 더 빠르지 않나?

1656282880682.jpg“우리가 자리를 비운 지 한 달이나 됐다고?”

16562828806815.jpg“아, 네. 정확히는 25일이요.”

1656282880682.jpg“그럼 그동안 지휘는?”

16562828806815.jpg“남부공 저하요. 그, 다행히 무사하셨어요.”

다행이라고 말하는 엔지의 목소리가 잠시 떨렸다. 아직 아무 소식이 없는 유니 때문이었다. 엔지가 심란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말을 이었다.

16562828806815.jpg“그리고 저희 아버지도 여기 계시고요…….”

1656282880682.jpg“루벨 후작?”

16562828806815.jpg“근신 중이시지만 긴급상황이라는 서신을 받고 오셨어요.”

루비드의 눈썹이 구겨지자 엔지가 급히 덧붙였다. 그래서 루비드도 추궁하는 대신 되물었다.

1656282880682.jpg“그래서 그 둘이 망자들을 막았다고?”

16562828806815.jpg“그게, 실은 보름 전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요.”

1656282880682.jpg“이상한 일?”

16562828806815.jpg“저하께서 동쪽 숲에서 발견한 까마귀 머리 망자들……. 기억하시죠?”

까마귀 머리 망자. 당연히 기억한다. 서쪽에 오자마자 찾아낸 것들이니까. 이우라와 루비드는 배교자인 까마귀를 찾기 위해 숲을 수색하다 그것들을 발견했고, 그것들을 통상의 방법으로는 처리할 수 없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목책을 세워 가둬둔 채 감시하고 있었다.

16562828806815.jpg“그 망자들이 나와서 균열의 망자들과 싸우고 있어요.”

1656282880682.jpg“뭐?”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에 루비드는 눈을 크게 떴다가, 도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1656282880682.jpg‘황제가 망자의 왕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 아닌가?’

그 까마귀들이 황제가 다스리는 것들이라면 말이다. 루비드는 입술을 질근대며 깨물다가 엔지에게 재차 물었다.

1656282880682.jpg“함정을 판 놈은 찾았어?”

16562828806815.jpg“네?”

1656282880682.jpg“요새에 균열이 생기게 제단을 심어둔 놈들 말이야.”

16562828806815.jpg“앗, 아뇨. 조사를 하기는 했는데 아무것도…….”

1656282880682.jpg“조사는 누가 했는데.”

16562828806815.jpg“아, 아버지가요.”

엔지의 불안 섞인 대답에 루비드는 다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다. 어쩌다 돌아오긴 했지만, 루비드는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 그 시각, 유니는 균열이 보이는 언덕에 혼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아까 저 균열에서 엄청난 소리가 났다. 그리고 코앞에서 벼락이 치는 것처럼 빛이 번쩍거렸다. 그게 불과 두어 시간 전인데,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조용하다.

16562828921007.jpg“대체 다 무슨 일이야.”

그렇게 종알대는 유니의 얼굴엔 불만이 가득했다. 이곳, 동부 사람들의 은신처에서 지낸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그런데 아가씨는 여전히 감감무소식이고 영감님도 찾으러 올 기미가 없다. 그래서 유니는 아가씨든 남부공이든 돌아오면 방임도 학대라고 강하게 항의할 작정이었다.

16562828921007.jpg‘별일은 없겠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쉰 유니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붕붕 저었다.

16562828921007.jpg‘당연히 별일 없지!’

그럼, 우리 아가씨가 어떤 분인데. 유니는 주먹을 꼭 쥐며 약한 마음을 떨쳤다.

16562828921026.jpg“유니야!”

그때 언덕 아래서 유니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진이었다. 유니는 벌써 밥 시간인가 하며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하지만 진이 달려와 전한 건 밥 소식이 아니라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16562828921026.jpg“뱀이 없어졌습니다!”

16562828921007.jpg“뭐라고?”

제국어로는 존댓말 밖에 할 줄 모르는 소년, 진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16562828921026.jpg“헛간에 있는 망자 뱀, 사라졌습니다.”

16562828921007.jpg“도망친 거야?”

16562828921026.jpg“아닙니다, 말 그대로 사라졌습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유니는 눈을 깜빡이다가 퍼뜩 놀라 되물었다.

16562828921007.jpg“그럼 망자의 왕이 쓰러진 거야?”

16562828921026.jpg“그런가 봅니다!”

유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망자의 왕이 또 하나 쓰러졌다. 유니는 이게 레나의 활약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16562828921007.jpg‘그럼 이제 돌아오시는 건가?’

유니가 들뜨자 진이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말했다.

16562828921026.jpg“그런데 뱀이 사라지는 바람에 까마귀 형님하고 연락할 방법이 없어졌습니다.”

16562828921007.jpg“앗, 그러고 보니…….”

16562828921026.jpg“그래서 어른들이 제국 쪽을 둘러보기로 하셨습니다. 소식이 있으면 전해주겠습니다!”

진은 친절히 말하며, 곧 밥 시간이니 너무 늦지 않게 오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그로써 다시 혼자가 된 유니는 식전 산책이나 할 겸 숲길로 들어섰다. 유니는 레나가 그리웠다. 전쟁터에서도 이렇게 오래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곧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 유니는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보니 평소보다 깊은 곳까지 들어오고 말았다.

16562828921007.jpg‘아차.’

너무 멀리 왔다. 이러다 길이라도 잃으면 큰일인데. 그렇게 생각한 유니는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막 돌아서는 순간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16562828921007.jpg‘뭐지?’

뭔가를 스치는 매서운 소리가 반복해서 들려왔다. 유니는 호기심에 소리가 난 방향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 소리는 구릉 아래서 들려왔다. 그래서 유니는 몸을 잔뜩 낮추고 낭떠러지 너머를 슬쩍 내다보았다.

16562828921007.jpg‘사람이다.’

아니나 다를까 낭떠러지 밑에 웬 사람이 있었다. 큰 남자였고, 심지어 칼을 들었다. 게다가 그는 북부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제국인을 발견한 유니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16562828921007.jpg‘혼자인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게다가, 대체 뭐 하는 거지? 그 남자는 혼자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훈련 같은 건 아니었다. 그의 행동은 마치 보이지 않는 적에게 둘러싸인 듯 절박했다. 퍽 희한한 광경이라 유니는 그 남자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어차피 누군진 모를 테니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나 보자는 심산이었다.

16562828921007.jpg‘어? 저 사람…….’

하지만 뜻밖에도 유니는 그 남자를 알아보았다.

16562828921007.jpg‘……북부공?’

두엄의 궁에서 본 적이 있다. 북부공 이우라 플레누스. 유니는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헛숨을 삼켰다.

16562828921007.jpg‘저 사람이 왜 여기에…….’

아가씨랑 같이 무덤에 떨어진 거 아니었나? 가만, 그렇다는 건…….

16562828921007.jpg‘아가씨도 나오신 건가?’

유니는 마음이 앞서 주위를 두리번댔다. 그 바람에 유니가 손으로 짚었던 흙과 돌멩이가 자르륵 떨어졌다. 미세한 소리에 이우라가 고개를 치켜들었고, 결국 유니는 이우라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정면에서 본 이우라의 두 눈은 마치 제정신이 아닌 듯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16562828921007.jpg“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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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니가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이우라가 검을 휘둘렀다. 유니가 앉아 있던 언덕이 썩둑 잘려 나간 건 그 직후의 일이었다.

16562828921007.jpg“엑……?”

불길한 예감이 유니를 덮쳤고, 예감은 곧 현실이 되었다. 북부공이 날린 참격이 언덕을 무너트렸다. 상당한 양의 돌과 흙이 우르르 쏟아졌고, 그 위에 있던 유니도 썰매 타듯 주욱 미끄러졌다.

16562828921007.jpg“으야악!”

갑작스런 추락에 아이는 힘껏 소리치며 낙엽처럼 데굴데굴 굴렀다. 봉변을 당했지만 유니는 아파하지도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칼을 든 미친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유니가 다시 일어났을 때 북부공은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다만 유니와 함께 무너진 언덕이 커다란 흙더미를 이루고 있을 뿐이었다.

16562828921007.jpg‘뭐, 뭐지?’

유니는 아픈 팔꿈치를 어루만지며 그 무덤 같은 것을 바라보았다. 눈을 한차례 깜빡인 유니는, 곧 상황을 이해하고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16562828921007.jpg‘북부공을 매장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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