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북부공을 발굴했다2021.09.06.
“이게 뭔 일이야!”
유니는 기겁하며 생매장된 북부공을 파냈다. 두더지처럼 흙과 돌덩이를 파헤친 유니는 이윽고 반송장 꼴이 된 북부공과 만났다.
“죽었나?”
유니는 이우라의 코끝에 손을 대봤다. 미약하게 숨결이 느껴져 겨우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그렇게 안심하기 무섭게, 유니의 눈에 시뻘건 것이 들어왔다. 이우라의 머리에서 흐르는 피였다.
“어어어?”
유니는 당황하며 이우라의 머리를 들여다보았다. 잘 보니 머리만 다친 것도 아니었다. 얼굴이나 목이나 눈에 보이는 거의 모든 곳에 상처가 있었다. 언덕이 무너지며 쏟아진 건 흙뿐만이 아니었다. 자갈이나 돌도 가득했고, 단단히 압축된 땅은 바위처럼 묵직했다. 거기 깔리면서 여기저기 다친 모양이다.
“이건…… 자업자득이지.”
그러게 누가 대뜸 칼부림을 하랬나? 유니는 이 바보 같은 남자에게 혀를 차면서도 일단 발굴에 힘썼다. 이윽고 이우라가 흙더미 밖으로 완전히 나왔다. 하지만 기절한 듯 깨어나지 않았고, 옆에서 구슬땀을 닦던 유니는 새로운 문제에 봉착했다.
‘이 사람 어떡하지?’
멀지 않은 곳에 동부 사람들의 은신처가 있다. 과연 동부 사람들은 북부공에게도 남부공에게 했던 것처럼 호의를 베풀까? 그건 안 될 것 같다. 남부공은 오히려 철저히 외부인이라 호의를 베푸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북부공은 이곳 접경지를 관리하는 입장이고, 동부 사람들은 여기 숨어 지내는 상황이다. 그러니 양쪽 다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면 죽이려 할 게 불 보듯 뻔했다. 그래서 유니도 자연히 선택의 기로에 섰다. 신세를 지고 있는 동부 사람들에게 북부공의 소재를 알려야 할지, 아니면 북부공을 이대로 숨겨줘야 할지.
‘와, 결정하기 완전 싫어!’
유니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이런 부담스러운 선택 진짜 하기 싫다고.
“그냥 못 본 척하면 편할 것 같은데…….”
그렇게 종알댄 유니는 이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어림도 없는 소리다. 그럼 정말 편하겠지만, 어떻게 본 걸 못 본 척하겠어. 결국 유니는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자신의 속치마를 찢어 이우라의 상처를 닦기 시작했다.
*** 이우라는 달리고 있었다. 아득한 악몽 속에서 그는 늘 그랬듯 달렸다.
―네게 알려줄 것이 있다. 반드시 너만 알고 있거라. 어머니에게도 동생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
그리고 달리는 그의 귓가로 어김없이 목소리가 들렸다. 한시도 잊어본 적 없는 아버지의 목소리.
―황제에 대한 것이다.
부친이 그렇게 운을 뗀 건 이우라가 막 성년을 앞둔 시기였다. 열여섯 살이었다. 아직 어리지만 키는 성인 못지않게 자라, 소공작이라 불리며 출정한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던 시절이었다. 이우라의 선대는 이상적인 군주였다. 용맹과 자비를 겸비했고, 또 영리했다. 그래서 자연히 대항하고자 했다. 제국 중심에 자리를 틀고 독기만 퍼트리는 니힐의 존재에.
―황제는 죽었다. 균열이 생기기 전에 이미, 그는 처형당한 왕이었다.
선대 북부공이 이우라에게 이렇게 속삭인 건, 광인처럼 아들을 죽이겠다고 고래고래 소리친 다음 날이었다. 긍지 높은 이우라의 아버지는 처형 강박에 시달리면 어김없이 이우라를 죽이고 싶어 했다. 때문에 아버지를 존경하면서도 선뜻 다가가지 못하던 이우라에게, 선대 북부공은 어느 날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죽은 자가 원망을 품고 돌아왔다. 그의 모든 행동도 복수일 뿐이다.
그건 북부공에게 대대로 내려온 비밀. 황제를 두려워하며, 자신들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지켜낸 비밀. 하지만 이우라의 선대는 그것을 묵인할 만큼 뻔뻔하지 못했다.
―나는 이 고통을 네게 물려주고 싶지 않구나.
선대의 그런 결심은 죄책감 때문이기도 했다. 고결한 공작은 처형 강박에 빠질 때마다 아들에게 살의를 느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이 구태는 내 대에 끊을 테니 너희는 제대로 된 세상에서 살아다오.
그래서 그는 거짓과 싸우기로 마음먹었다. 황제와 맞서 제국의 어그러진 모든 것을 바로잡고자 했다. 승산은 충분해 보였다. 북부는 제국의 실세였고, 황궁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 황제에 비하면 영향력도 명성도 월등히 앞섰다. 여러 공작 중에서 왕이라 불리는 것도 북부공 뿐이었다. 그래서 선대 북부공은 이 비참한 굴레를 끊고자 반역을 꾀했다. 하지만 그의 꿈은 1년도 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황궁에서 황제를 알현하고 돌아온 선대 북부공은 식음을 전폐하더니 하루건너 처형 강박에 빠졌다. 그는 울고 소리치고 칼을 휘둘렀다. 그러다 자신을 말리는 아들을 제 손으로 죽일 뻔하고 무너져 오열했다.
―황제가 자비를 베풀어 나 하나로 끝내기로 했다.
선대는 괴로워하며 아들에게 실패를 알렸다.
―부디 복수하지 말아라. 싸워서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있다. 몸을 낮춰라. 숨을 죽이고 네가 지켜야 할 자들을 지켜라. 너는 단지 너 하나가 아니다.
그는 탄식하며 아들에게 자신의 자리를 떠넘겼다.
―미안하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선대는 전장으로 나가 예정대로 전사했다. 그로써 이우라는 북부의 왕이 되었지만, 왕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복수하지 말라는 선대의 유언이 그에게서 모든 열기를 빼앗은 탓이었다. 세상엔 싸워서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있다. 그리고 개죽음이라는 것도 있다. 감당하지 못할 일을 벌이다 혼자 죽어버린 선대의 죽음이 아마 그럴 것이다. 선대의 몰락을 곁에서 지켜본 이우라는 지독한 허무에 시달렸다. 그나마 그가 버틴 것은 지켜야 할 자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철없는 동생, 그리고 자신에게 몸을 의탁한 수많은 이들. 이우라는 미친 불길 같은 황제에게서 그들을 지키는 것을 자신의 존재 이유로 삼았다. 그런데 나자가 그의 위태로운 걸음을 막아섰다.
―고생 많았다. 나머진 내가 하겠다.
―제국의 만행에 가담한 대가는 니힐을 쳐서 갚겠다.
안 돼. 건드리지 마. 황제를 건드리면 안 돼. 이우라는 나자를 막고 싶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그의 손은 나자에게 닿지 않았다. 이우라에겐 나자도 싸워서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절박함은 무력함이 되었고 무력함은 두려움으로 이어졌다. 이우라는 죽음을 느꼈다. 황제의 손에 사람들이 조각났다. 지켜야 할 자들은 덧없이 스러지고, 그의 목엔 단두대의 칼날이 들어왔다. 그래서 이우라는 싸웠다. 정작 황제에겐 이빨조차 드러내지 못하는 주제에 싸우고 또 싸웠다. 자신이 무엇을 베는지도 모른 채, 그게 사람인지 허공인지 제 친동생인지도 모른 채 필사적으로 싸웠다. 영원히 이어져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싸움이었다. 그런데 돌연 무언가가 그의 싸움을 중단시켰다. 그게 뭐였지? 의문을 떠올린 순간, 이우라는 꿈에서 깨어났다. 새벽이었다. . . . 둔한 통증이 전신을 건드렸다. 정신을 차린 이우라는 자신의 몸을 찬찬히 살폈다. 그는 정체 모를 오두막 안에 누워 있었다. 주위를 살피던 이우라는 자신의 제복 코트가 벽에 걸려 있는 걸 보고 뒤늦게 제 몸을 살폈다. 셔츠 차림인 이우라는 치료되어 있었다. 머리엔 조악한 붕대가 감겼고 왼팔엔 부목이 묶였다. 정석은 아니지만 제법 꼼꼼한 조치였다.
‘누구 짓이지?’
이우라가 단서를 찾기 위해 기억을 찬찬히 더듬는데, 밖에서 자박대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오두막의 너덜너덜한 문이 열렸다. 그러더니 자그마한 그림자가 빛을 등지며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발랄한 인사에 이우라는 시선을 돌렸다가 짐짓 당황했다. 어쩐지 뻔뻔한 기색으로 등장한 꼬마는,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뭐지?’
복면이라고 해봤자 손수건으로 눈 아래를 가린 것에 불과했다. 굳이 왜 했는지 알 수 없는, 대단히 성의 없는 위장이었다. 그렇게 얼굴을 가린 꼬마는 작은 보따리를 들고 있었다.
“아파요? 당연히 아프겠죠.”
꼬마가 이우라의 옆에 털썩 앉으며 조잘댔다. 그러더니 보따리를 풀었고, 그 안에서는 삶은 감자와 산딸기 따위의 먹거리가 나왔다. 이우라는 이 꼬마에게 악의가 없는 걸 확인하고 찬찬히 눈을 돌렸다. 그러자 꼬마가 이우라의 의도를 눈치챈 듯 다시 종알댔다.
“칼 찾아요? 그거 내다 버렸어요. 어제 보니 완전 막 휘두르시던데.”
내다 버렸다는 말에 이우라가 굳은 표정으로 꼬마를 쳐다봤다. 그러자 복면 꼬마가 발끈해서 대들었다.
“저기요, 생명의 은인을 그렇게 쳐다보시면 안 되죠. 제가 조금만 덜 착했으면 아저씨 이미 골로 갔을걸요?”
아저씨……? 아저씨로 전락한 이우라는 침묵했고 복면 꼬마는 옆에서 배 안 고프냐며 감자 따위를 디밀었다. 한편 악의 없이 이우라에게 타격을 입한 꼬마, 유니는 상황이 꽤 순조롭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날뛰진 않네.’
만약 이우라가 너는 누구냐 여긴 어디냐 내가 누군지 아느냐며 추궁하고 덤비면 부러진 팔모가지를 치받고 도망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우라는 얌전했고, 덕분에 유니도 한시름 마음을 놓았다. 이곳은 산중에 버려진, 동부인들의 은신처와 그리 떨어지지 않은 오두막이다. 전날 유니는 불굴의 의지로 이우라를 여기까지 끌고 온 후 기진맥진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곤 이 사태를 최대한 평화롭게 매듭지을 방법을 내리 고민했다.
‘대충 몸이 나으면 눈을 가리고 말에 태워 내보내는 거야.’
이 정도가 유니가 떠올릴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동부 사람들이나 북부공이나 서로의 존재를 알아봤자 좋을 것 없다. 그래서 유니는 이우라를 이 산에서 조용히 내쫓는 것으로 결말을 짓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몇 가지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했다.
‘말은 어디서 구하지?’
동부 사람들이 귀한 말을 선뜻 내줄 리 없다. 빼돌리는 건 더더욱 불가능.
‘그럼 영감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하지만 그때까지 북부공을 숨길 수 있을까? 그 전에, 북부공이 얌전히 있을까?
‘살고 싶으면 협조하라고 하자.’
제아무리 북부공이라도 다친 몸으로 무기도 없이 다수의 사람을 상대하긴 부담스러울 거다. 그러니 여기가 대충 도둑소굴인척하면서 착한 내가 너 하나 몰래 숨겨준 거라고 연기해보자. 그럼 이 사람도 얌전히 굴겠지. 그렇게 결정한 유니는 얼굴도 가렸다. 제국의 공작이 일개 하녀의 얼굴을 어떻게 알아보겠나 싶긴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는 생각이었다. 여기까지 계획한 유니는 스스로의 용의주도함에 만족했다. 그래서 혼자 의기양양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관찰하던 이우라는 홀로 조용히 생각했다. 행방불명이라 알려진 레나 루벨의 하녀가 왜 복면을 쓰고 있는지에 대해서.
‘정체를 숨길 생각인가?’
하지만 얼굴이라면 어제 이미 봤다. 그런데도 얼굴을 가리고 히죽대는 걸 보면 자길 못 알아볼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모양이다. 물론 어린애가 순진하고 안일한 건 별문제가 아니다. 다만 이우라가 미심쩍은 건 왜 굳이 정체를 숨기냐는 거였다. 이우라의 시선이 유니가 가져온 익힌 감자, 유니의 깨끗한 외모, 이 허름한 오두막을 차례로 스쳤다. 그리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배교자들과 지내고 있는 건가?’
그러지 않고야 레나 루벨의 하녀가 굳이 얼굴을 가릴 이유는 없다. 이우라는 몇 번의 추론으로 유니가 숨기고 싶어 하는 것을 거의 간파했다. 하지만 유니는 그걸 까맣게 모른 채 여전히 으스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