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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화. 세상의 법칙 (142/208)

142화. 세상의 법칙2021.09.09.

이우라의 논리는 명료했다. 레나 루벨의 하녀가 나타났다. 행방불명이라더니 두발과 의복이 깨끗하다. 안정적인 거처에 머문다는 뜻이다. 하지만 얼굴을 가리고 폐허나 다름없는 오두막을 이용한다. 그 거처가 제국에 우호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저 찐 감자는 하녀가 머무는 곳에 빵이 없거나 귀하다는 의미. 이우라는 일련의 정보를 종합해, 레나 루벨의 하녀가 배교자들에게 의탁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16562829208981.jpg‘팔은 부러진 건가?’

이우라는 부목이 대어진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부러진 게 맞는지 가만히 있어도 열감이 느껴졌다. 팔 뿐만이 아니었다. 몸 구석구석 안 아픈 곳이 없었다. 특히 머리는 조금만 움직여도 깨질 듯 아팠다. 머리는 무덤에서 칼리고의 궁이 무너질 때 다친 상처고, 팔과 몸의 부상은 아까 토사에 깔리며 입은 것이었다. 자신의 상태를 확인한 이우라는 몸을 낮춰야 하는 상황인 걸 인정했다. 이 꼴에 비참함이나 씁쓸함은 없었다. 이미 예전에 굴복한 남자는 자신의 처지에 순응하는 게 익숙했다.

16562829208989.jpg“아저씨는 제국의 기사죠?”

그래서 하녀가 자신을 겁 없이 기만하는 것도 그냥 두었다.

16562829208989.jpg“기회 봐서 돌려보내 줄게요. 그러니까 몸 나을 때까지 여기 얌전히 있어요.”

하녀는 잘 속였다고 믿는 눈치였다. 그 당당한 태도에 이우라는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연 그 꼬마가 눈썹을 곤두세웠다.

16562829208989.jpg“아저씨, 대답 안 해요?”

이우라는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16562829208989.jpg“내가 생색내려고 그러는 건 아닌데요, 고맙다는 인사는 둘째치고 듣는 척은 해야죠. 예의잖아요, 예의.”

아이가 바닥을 탕탕 치며 말했고, 이우라는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16562829208981.jpg‘뭘 믿고 이렇게 당당하지?’

본인도 감춰야 할 게 있어서 얼굴을 가렸을 텐데, 더욱이 내가 누군지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하지만 꼬마는 한없이 기세등등하고 기고만장했다. 꽤 어이가 없었지만, 이우라는 자신의 처지를 상기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

16562829208981.jpg“알겠다.”

꼬마는 그제야 만족한 듯 씩 웃으며 몇 가지 주의사항을 전달했다. 매일 먹을 걸 가져오겠다, 오두막 밖으로는 되도록 나가지 말아라, 특히 저 빨간 옷은 입지 말아라 등등이었다. 그때마다 이우라는 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는 복잡한 현안을 떠올렸다. 요새로 귀환하는 방법, 무덤에서 만난 나자의 존재와 의도, 루비드와 동부공과 레나 루벨의 상태, 그리고 부재중 변했을 서부의 상황까지. 해결할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그래서 이우라는 이 하녀에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기로 했다. 꼬마가 기웃대든 말든 놔두고 몸이 회복될 때까지 시간만 벌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한 이우라는 종알대는 아이를 옆에 둔 채 도로 눈을 감았다. ***

16562829209018.jpg―네가 이우라 플레누스인가?

차가운 목소리였다.

16562829209018.jpg―널 가르치라는 서신을 받았다.

눈빛은 오만했다.

16562829209018.jpg―북부공에겐 도움을 받았으니 성의껏 돌봐주마.

마치 강철 같은 사람. 그게 나자 아이테르너에 대한 이우라의 첫인상이었다. 선대 북부공은 이우라와 시간을 오래 보내지 못했다. 저주스러운 처형 강박 때문이었다. 그는 혹여 자신이 아들의 목을 칠까 두려워하며 나자에게 이우라를 맡겼다. 강인하기로 소문난 동부공 밑에서 보고 배우라는 의도였다. 당시 나자 아이테르너의 나이는 스물일곱, 이우라 플레누스는 열두 살이었다. 나자는 전대 동부공의 수많은 자식 중에서 가장 우수했다. 하지만 3년간 실종되었다가 돌아온 탓에 지지기반이 약했다. 그런 나자가 동부공의 작위를 승계받게 도운 것이 북부공이었다. 북부공은 나자가 강력한 우군이 되어줄 것을 기대하며 그를 도왔고, 그의 기대는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큰 빚이 있기에 나자는 이우라를 기꺼이 맡았다. 뿐만 아니라 그를 아주 정성스럽고 혹독하게 가르쳤다.

16562829209018.jpg―이것도 못 하면 죽어야지.

16562829209018.jpg―이걸 못 버티면 죽는 수밖에.

16562829209018.jpg―이 정도가 한계라면 곧 죽겠군.

덕분에 나자는 보름도 채 되지 않아, 이우라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두려워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16562829209018.jpg―무조건 해내라는 게 아니다.

16562829209018.jpg―이유를 만들어라. 네가 해내고, 버티고, 한계를 넘어설 이유를.

16562829209018.jpg―그것을 가진 자와 가지지 않은 자의 차이는 크다.

나자는 무정할 뿐 무리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강하고 유능하며 군더더기가 없었다. 차갑지만 그래서 더 위대하게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단 한 번, 나자도 눈빛이 흔들린 적이 있었다. 이우라가 동부에 온 지 어느덧 두 해를 넘겨 이제 돌아갈 날을 기다리던 시기였다. 이별을 앞둔 어느 날, 그는 나자에게 용기내어 물었다.

16562829208981.jpg―저하께선 황제의 통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6562829209018.jpg―최악이라고 생각한다.

고민 끝에 꺼낸 말인데, 나자의 대답은 이번에도 담백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이우라는 어안이 벙벙해 되물었다.

16562829208981.jpg―그런데 왜 따르십니까?

16562829209018.jpg―황제에겐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16562829208981.jpg―자격…… 말입니까?

16562829209018.jpg―싸워서 이긴 자의 자격.

그리고 지금도 계속 이기고 있는 자의 자격. 나자의 대답에 이우라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16562829208981.jpg―그게 폭정을 휘두를 자격이 됩니까?

16562829209018.jpg―불만이면 싸워라. 네가 이기면 해결될 일이다.

나자의 거친 논리에 이우라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소년이 답답한 듯 턱에 힘을 주고 서자 나자가 중얼댔다.

16562829209018.jpg―강한 자는 얻고 약한 자는 빼앗긴다. 그게 세상의 법칙이다.

더 없이 나자 아이테르너다운 말이지만, 그날은 뭔가 달랐다. 이우라는 그때 나자의 눈빛이 포악하기보다는 쓸쓸해 보였다고 기억한다. 그게 동부에서 잃은 아들 때문이었던 걸, 이우라는 나자가 죽고 나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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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그랬다. 강철 같던 당신도 결국 죽었다. 내가 당신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은 건, 아직 아버지의 죽음을 곱씹고 있을 때였다. 실은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내게 남긴 것에 대해. 하지만 당신은 내게 시간을 주지 않았고, 나는 내 아버지나 당신처럼 황제의 개가 되었다. 그게 세상의 법칙이라고 배웠으니까. 그런데 이제 황제를 치겠다니. 나를 그렇게 가르쳐놓고서 이제 와서. 당신이 떠난 이곳엔, 내가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 . . . 이우라는 오한과 불쾌감에 눈을 떴다. 어두웠다. 공기는 습했고 몸을 누인 짚더미는 다 젖어 질척질척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허물어지기 직전의 오두막은 그 비를 막지 못했다. 이우라는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켰다. 안 그래도 성치 않은 몸에 습기까지 들어차 여기저기가 욱신대며 아팠다. 제대로 먹은 게 없어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아까 하녀가 가져온 음식은 성인 남자가 끼니를 채우기 턱없이 부족했다. 게다가 이우라는 그마저도 다 먹지 않고 남겨두었다. 그 하녀가 다시 온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16562829208981.jpg‘의무가 아니니까.’

처음에야 놀란 마음에 도왔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일은 그 하녀에게도 위험하다. 배교자들에게 신세를 지면서 제국의 공작을 숨기다니. 아무리 어려도 이게 배신행위라는 건 알 것이다. 그걸 아니까 얼굴을 가렸을 테고. 그래서 이우라는 그 꼬마가 이성을 찾으면 갈등할 거라고 생각했다. 마침 비까지 내리니 결론은 더 쉽게 날 거다. 생면부지의 남자가 아니라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쪽으로. 이우라는 늘 그랬듯 이성적으로 판단했다. 그의 판단이 빗나가는 일은 없었다. 적어도, 오늘까지는.

16562829208989.jpg“아저씨!”

빗소리 너머에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62829208989.jpg“아저씨, 괜찮아요? 앗, 일어났네요.”

어긋난 오두막의 문을 열고 한 아이가 나타났다. 예의 그 하녀였다.

16562829208989.jpg“갑자기 비 와서 깜짝 놀랐어요. 추워요?”

그 하녀는 밤중에 비를 뚫고 온 듯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더니 오자마자 이우라에게 따끈하게 데워진 찻주전자를 떠안겼다. 찬 곳에 있던 이우라는 그 온기에 짐짓 놀랐다. 그래서 하마터면 물을 뻔했다. 이 시간에 여긴 왜 왔냐고. 하지만 날 것 같은 충동은 이우라의 목울대를 넘지 못했다. 그리고 하녀는 오두막을 돌아다니며 비 새는 곳을 살피느라 그의 심정을 조금도 헤아리지 못했다. 늦여름의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 . . 다음날에도 하녀는 이우라를 찾아왔다. 그런데 빈손이었다. 이우라는 이해했다. 배교자 무리에 얹혀 지내는 입장이라면 여분의 식량을 확보하는 게 불가능할 것이다. 아니, 무리하게 식량을 훔치다 꼬리를 밟히는 것보다는 이편이 차라리 낫다. 이우라는 이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판단은 또 빗나갔다.

16562829208989.jpg“아저씨 얼마나 먹어요? 어른이니까 많이 먹겠죠?”

꼬마는 영문 모를 말을 혼자 떠들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한두 시간 후에 옷이 거의 젖어서 돌아왔다. 그때 꼬마는 바구니를 들고 있었는데, 그 안엔 제법 큰 물고기가 서너 마리나 담겨 있었다. 강에서 혼자 고기를 잡아 온 것도 황당한데, 그 어린애는 불을 피우고 물고기를 손질하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척척 해냈다.

16562829208989.jpg“자요.”

그렇게 생선구이를 완성해 내미는 꼬마에게서 이우라는 짙은 야생의 기운을 느꼈다. 귀족 영애의 하녀가 왜 이런 걸 할 줄 아는 거지? 아니, 놀랍지도 않다. 그 레나 루벨의 하녀라고 생각하면. 이우라는 조용히 납득하며 꼬마가 내민 생선구이를 받았다. 하지만 그걸 선뜻 입에 대지는 않았다. 이우라가 뜸을 들이자 지켜보던 유니가 왜 안 먹냐고 재촉했다. 그러자 내리 침묵하던 이우라가 비로소 입을 뗐다.

16562829208981.jpg“……내게 바라는 게 있나?”

16562829208989.jpg“딱히요.”

하지만 꼬마는 단호했고, 덕분에 이우라는 조금 무안해졌다. 이우라가 홀로 굴욕을 삼킬 때였다.

16562829208989.jpg“근데 아저씨 혼자예요?”

바라는 게 없다던 꼬마가 뒤늦게 생각난 듯 물었다.

16562829208989.jpg“그, 웬만하면 다른 사람이랑 같이 다니지 않아요? 여기까지 혼자 왔을 것 같진 않은데.”

아무리 영악해도 꼬마는 꼬마였다. 그렇게 묻는 하녀의 두 눈엔 간절함이 가득했고, 이우라는 이 하녀가 레나 루벨에 대해 궁금해한다는 걸 눈치챘다.

16562829208981.jpg“동행은 있었다.”

16562829208989.jpg“오, 와. 정말요.”

이우라의 대답에 꼬마가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16562829208989.jpg“그 사람들은 어디 있어요?”

하녀가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지만 이우라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한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 그 시각, 유니와 이우라가 궁금해하는 사람 중 두 사람은 함께 있었다. 연인인 그들은 플레누스 형제와 달리 아직 아무도 만나지 못한 채, 서부의 외딴 숲속 어딘가를 헤매는 중이었다.

16562829293221.jpg“권능이 사라진 것 같다고요?”

레나의 물음에 린이 머뭇대며 대답했다.

16562829320192.jpg“아직 확실한 건 아니야.”

그렇게 말하는 린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작았다.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래서 레나는 연인의 안색을 살피다가 선뜻 제안했다.

16562829293221.jpg“그럼 나한테 시험해 봐요.”

시험이라는 말에 린은 뭘 잘못 들은 사람처럼 눈을 크게 떴다. 유니가 아가씨의 소재를 궁금해하던 그 시각, 레나는 자신의 약혼자를 궁지에 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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