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이대로 떠나면2021.09.13.
“그럼 나한테 시험해 봐요.”
레나의 제안에 린은 일순 멍해졌다. 시험해 보라니. 그렇게 말하는 레나는 방금 막 씻고 온 탓에 조금 젖어 있었다. 그래서 린은 저도 모르게 주위를 돌아봤다. 그들을 둘러싼 숲은 고요했고, 동시에 안락했다. 달리 표현하면 은밀하기도 했다. 한차례 주변을 살핀 린은 난처한 듯 중얼댔다.
“여긴 밖인데…….”
연인의 곤혹스러운 목소리에 레나는 눈을 깜빡였다. 레나의 고개가 천천히 기울었지만 시선을 피한 린은 그걸 미처 알 수 없었다.
“몰랐네요.”
그래서 레나는 조금 어이없는 목소리로 중얼댔다.
“권능이 실내에서만 쓸 수 있는 건 줄은.”
“어……?”
레나가 웃음을 참는 소리에 린이 고개를 들었다. 그때 린을 바라보는 레나의 표정엔 황당함 한 꼬집과 장난기 한 줌, 그리고 가끔 띨띨한 연인을 향한 애정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그 얼굴을 마주한 린은 가혹한 현실을 차츰 자각했다. 시험해 보라는 게 그런 뜻이 아니었어……? 시험해보라는 레나의 말을 멋대로 곡해한, 그리고 그걸 들켜버린 가련한 수컷은 하늘이 노랗게 변하는 기분을 느꼈다. 덕분에 레나는 연인의 하얀 얼굴이 점점 불타오르는 진풍경을 고스란히 감상할 수 있었다. 린이 자괴감에 눈을 질끈 감자 레나가 다정히 말했다.
“괜찮아요, 귀여웠어요.”
위로인지 놀림인지 알 수 없는 한마디가 린을 더 괴롭혔다. 그는 결국 얼굴을 가리며 영혼으로 몸부림쳤고, 레나는 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넓은 어깨를 안아주었다.
“린 씨, 파렴치.”
“이런 나라도 사랑해줘.”
“이미 엄청 하고 있어요.”
“고맙습니다.”
린의 감사 인사에 레나는 더 크게 웃었다. 그리고 린은 수치심이 가실 때까지 레나에게 얌전히 다독임을 받았다. 두 사람이 느긋하게 연애를 하는 이곳은 깊은 숲속이었다. 그들은 전날 여기서 눈을 떴고, 쏟아지는 비를 피해 동굴에서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린은 날이 밝자마자 이변을 깨달았다. 레나가 계곡으로 씻으러 간 사이, 그는 자신이 지배하는 망자들의 위치를 파악하려 했다. 그들과의 거리를 가늠해 여기가 어딘지 알아볼 셈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더 이상 지배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권능으로 사로잡은 수많은 망자는 그가 부르면 언제나 존재감을 전해왔는데, 어찌된 일인지 지금은 모든 감각이 고요했다.
“어느 쪽인지 모르겠어. 망자가 사라진 건지 권능이 사라진 건지.”
린이 짐짓 심각하게 말했다. 가능성은 둘 다 있었다. 칼리고는 쓰러졌고 심장마저 부서졌으니까.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레나가 자신에게 시험해 보라고 했지만, 린은 오해를 풀고도 주저했다.
“피 나게 해야 하잖아.”
“조금인데요, 뭐.”
레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자신의 입술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하지만 레나가 손끝을 물기 전에 린이 그 손을 붙잡아 제지했다. 레나가 까닭을 묻듯 바라보자, 린은 레나의 손을 제 입으로 가져왔다. 그러곤 피가 날 리 없게 아주 살짝 깨물었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레나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레나의 손에 깍지를 꼈다. 레나는 린의 시선이 한결 차분해진 걸 느끼고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여긴 밖이에요.”
이번엔 린이 웃었다. 그가 입을 맞춰온 건 그다음이었다. 린은 귀부인의 손등에 입을 맞출 때처럼 정중하게 다가왔다 도로 물러났다. 그다음엔 귀여운 아기나 동물에게 하듯 포근히 입을 맞추고 입술을 뗐다. 그리고 다시 이어진 입맞춤은 부드럽게 뺨을 쥐고 하는 연인의 키스였다. 마치 탐색하듯 세 번이나 짧게 입을 맞춘 린은 굽혔던 몸을 일으키며 레나를 바라보았다. 레나는 순식간에, 그리고 연달아 벌어진 애정행각에 놀라 눈만 크게 뜨고 있었다. 그들은 연인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접촉은 언제나 폭력적이고 일방적이었다. 특히 레나에게 그것은 린은 제압할 작정으로 시도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 까닭에 레나는 이런 따스한 키스가 낯설었다.
“시험, 하는 거예요?”
레나가 동요를 숨기려는 듯 물었다. 린은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레나에게 가까이 가며 대답했다.
“시험 말고 확인.”
“무슨 차이예요?”
“시험이라고 하면 이용하는 것 같잖아.”
린의 낯간지러운 대답에 레나는 웃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여유도 겨를도 없었다. 린이 앞서 했던 것과 전혀 다른 농도로 다시 입을 맞춰왔다. 지금껏 자신을 괴롭혀온 저주에 또 방해받지는 않을까 염려하듯 한 번씩 멈추며 다시, 또다시, 그리고 다시 입을 맞췄다. 그들의 입맞춤이 길게 이어진 건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한 후였다. 정말 사라졌어. 린이 자신의 무릎에 앉은 레나를 더 가까이 당기며 속삭였다. 그때 그의 얼굴은 홀가분한 듯 안타까운 듯, 기쁜 듯 슬퍼 보였다.
. . .
“린 씨, 파렴치…….”
“이런 나라도…….”
“사랑은 하지만 감당은 못 하겠네요…….”
레나가 얼굴을 가린 채 신음처럼 중얼댔다. 레나 루벨은 주도권을 빼앗기는 것을 싫어하며, 그래서 밀린다 싶으면 더 과감히 치고 나가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천하의 레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가련해서 귀엽던 자신의 연인이 아주 간만에 치명적인 수컷 행세를 하는데 철저히 말려버렸다. 레나는 그게 분하기보다는 민망해 한동안 낯을 들 수가 없었다. 간신히 열기를 식힌 레나가 조금 뾰족한 투로 물었다.
“확인은 됐어요?”
“응.”
린이 얌전히 대답했다. 레나는 그게 더 얄미워 한차례 눈을 흘기고 말했다.
“칼리고의 심장이 부서진 게 맞나봐요.”
나자가 규를 꺾는 순간 빛과 폭발이 일어났다. 그래서 제대로 보지 못해 확인이 필요했는데, 이로써 확실해졌다. 왕위가 계승되었다. 린의 권능과 저주가 사라진 게 증거였다.
“그럼 결국 그 사람이 왕이 된 건가?”
“아마도요.”
린이 어두운 목소리로 중얼대자 레나가 끄덕였다.
“레지나가 경계하던 일이에요.”
“경계?”
“새로운 왕이 탄생하는 거요. 아직 균열이 열려 있는데 더 강한 힘을 가진 망자가 나타난 셈이니까요.”
“……그렇네. 위험한 상황인 거지?”
“잘 모르겠어요.”
린의 물음에 레나의 눈빛도 무겁게 가라앉았다. 실은 레나도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 상황이 위험한지 안전한지, 좋은지 나쁜지조차도. 나자 아이테르너는 분명 상상을 초월할 만큼 강한 왕이 될 거다. 그렇다고 그의 존재를 위협으로 예단하기는 어렵다. 그는 아직 린을 생각했고, 니힐에게만 뚜렷한 적의를 드러냈다.
―알고 있다. 네가 니힐의 조각과 나눈 약속을.
―권능과 저주도 사라졌으니 떠나라. 더 이상 제국의 일에 관여하지 말고.
레나는 나자가 한 말을 가만히 곱씹었다.
‘떠나라니…….’
그 말은 내가 할 일을 대신 해주겠다는 뜻인가? 용서받지 못한 자들에게 한 맹세, 레지나와 나눈 약속, 그리고 아버지와 풀어야 할 숙제도?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레나는 씁쓸히 웃었다. 조금, 아니. 어쩌면 꽤 마음이 흔들렸다. 무덤에서 돌아올 때 했던 결심을 다 버리고 이대로 떠나면 정말 좋겠다 싶었다. 언젠가 유니가 말한 것처럼, 그냥 같이 행복하게.
“왜?”
“아니요…….”
린이 레나의 묘한 표정을 보고 묻자, 레나는 시치미를 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자연스레 말을 돌렸다.
“황제도 심장이 부서진 걸 눈치 챘을 거예요.”
“……난리가 나겠군.”
“아마도요.”
“빨리 돌아가야겠네.”
그로써 레나와 린은 ‘여기가 대체 어디인가’라는 최초의 문제로 되돌아갔다. 망자를 부르는 데 실패한 린이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일단 서부는 맞는 것 같아.”
“어떻게 알아요?”
“나무나 풀의 종류가 동부보다는 서부에 가까워 보여서.”
“그게 구별이 돼요?”
레나가 놀란 얼굴로 묻자 린은 조금 쑥스러워하며 끄덕였다. 린은 소년 시절 황제의 명령으로 서부 접경지에서 지독하게 굴렀다. 그런 탓에 서부의 환경도 제법 빠삭하게 꿰고 있었다. 그리고 이 숲의 크고 거친 나무의 수형은 동부보다 서부에 가까운 특징이었다. 대강의 위치를 헤아린 두 사람은 숲을 빠져나갈 요량으로 움직였다. 그런데 우거진 숲속을 지나며 린은 묘한 기시감에 휩싸였다. 단지 나무 수형만이 아니라 숲 자체가 대단히 익숙했다. 그리고 그건 단지 기분이 아니었다. 숲을 헤치던 레나와 린은 돌연 나타난 허허벌판 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췄다.
“여기 설마…….”
레나도 린과 비슷한 걸 느낀 듯, 숲이 뚝 끊긴 지점을 보며 중얼댔다. 숲이 이어져야 할 곳에 뜬금없는 공터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널따란 공간엔 숯 더미가 된 나무 따위가 아직 남아 있었다. 지난봄, 큰불이 난 흔적이었다.
“맞는 것 같아.”
린이 비로소 깨달은 듯 중얼댔다. 그래, 익숙한 게 당연하다. 여긴 린이 까마귀 행세를 하며 북부공을 유인한 숲이었다. 그리고 그의 주의를 끌기 위해 큰불을 낸 곳이었다.
“결국 서부접경지 안이군요.”
레나가 한시름 놓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가 어딘지 알았으니 요새로 돌아가는 건 이제 시간문제였다.
“이우라가 이쪽에 기사들을 배치했지.”
“네, 그 까마귀들을 감시한다고 했죠.”
까마귀들. 까마귀 머리를 가진,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들. 린은 소년 시절 그들을 본떠 까마귀 탈을 만들고 제국의 공적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지난 봄엔 동포를 숨기기 위해 그 까마귀들을 이우라에게 미끼로 던져줬다. 그로써 까마귀들과 조우한 이우라는 목책을 세워 그들을 가두고 기사들을 배치해 감시했다.
“그런 것 치곤 숲이 너무 조용한데?”
어제부터 오늘까지, 레나와 린은 이미 한나절 넘게 숲을 헤맸다. 아무리 넓은 숲이라도 이 정도 움직였으면 순찰 중인 기사와 마주쳐야 정상이다. 두 사람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도달했다. 북부에서 세운 목책과 임시 소초에. 다만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목책은 다 허물어져 잔해가 뒹굴고 있었다.
“그리 오래된 흔적은 아닌 것 같아.”
린이 엉망이 된 소초를 돌아보며 중얼댔다.
“이건 안에서 밀고 나온 흔적이고요.”
레나도 목책이 쓰러진 방향을 살피며 추측했다.
“저 안에 있는 건 까마귀들일 텐데.”
“주위에 핏자국은 없어.”
레나와 린은 이곳에 널린 단서를 조합했다. 그로써 대략의 정황을 추론해냈다. 북부 기사들이 감시하던 까마귀가 돌연 목책을 부수고 밖으로 나왔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아마 싸워도 소용없는 걸 알고 있는 기사들이 먼저 물러난 듯하다. 그렇다면, 밖으로 나간 까마귀들은 지금 어디 있는 거지?
“만약 요새 쪽으로 향했다면…….”
“그건 아닐 것 같아요.”
린이 최악을 가정하자 레나가 넌지시 부정했다. 레나의 단언에 린이 까닭을 묻듯 바라보았고, 레나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실은 진이라는 아이가 제게 일지를 넘겨줬어요.”
“일지?”
“클라비스 추기경이 아직 서부공일 때, 서부 경비대가 쓴 일지요.”
처음 듣는 이야기에 린의 눈썹이 굽어졌다. 레나는 린이 배신감을 느끼지 않길 바라며 설명을 계속했다.
“그 일지에 동쪽 숲에서 영원히 춤추는 자들을 감시한다는 내용이 있었어요.”
“영원히 춤추는 자들이라니.”
그 낯선 이름에 린은 소름이 돋았다. 무도회의 옷을 입은 까마귀들이 끊임없이 춤추던 모습이 떠오른 탓이었다.
“클라비스가 그들을 숨겨두고 있었어요.”
“그렇다는 건…….”
린이 미심쩍은 얼굴로 중얼대자 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들이 니힐의 망자일지도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