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진실을 찾아온 당신께2021.09.16.
죽음은 인간을 정화한다. 죽음은 육체를 재우고 영혼을 씻어내며, 한 생애를 마친 이들을 새로운 세계로 인도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 너머로 도달하지는 못했다. 죽음이 시작되는 곳, 이제는 무덤이라 불리는 그 초입에는 죽어서도 여전히 산 자처럼 머물며 배회하는 자들이 있다. 바로 망자들이다.
―우리를 이곳에 주저앉힌 건 지극한 슬픔.
―쌓아 올린 업.
―그리고 해결되지 않은 한.
백합을 닮은 무고한 망자들은, 왕이 된 레나에게 자신들을 그렇게 설명했다.
‘나는 큰 잘못을 한 사람들만 망자가 되는 줄 알았어.’
망자들과 지내며 말보다 생각으로 의사를 전하는 게 익숙해진 레나가 중얼댔다. 그러자 망자들도 다시금 속삭였다.
―이곳은 생과 사의 경계.
―죽음의 법칙도 삶의 법칙도 적용되는 곳.
―살아 있는 세계는.
―잘못한 자들만 벌하지 않아.
띄엄띄엄 이어지는 망자들의 목소리에 레나는 긴 숨을 토해냈다. 살아 있는 세계는 잘못한 자들만 벌하지 않는다. 이토록 부당하고도 온당한 말이 또 있을까. 레나 루벨을 비롯한 용서받지 못한 자들은 잘못 없이 벌을 받았고, 그 대가로 이렇게 가라앉았다.
‘너무 많아.’
레나가 자신의 일부가 된 자들을 돌아보며 중얼댔다.
‘너희가 셀 수 없이 많아서 슬퍼.’
레나를 둘러싼 새하얀 백합들판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흐드러지게 핀 그들은 흐드러지게 진 그들이었다. 그들은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한 명 한 명 이야기를 듣는 동안 못해도 몇 년은 흐른 것 같았다. 어쩌면 당연했다. 이들은 한 마리의 짐승에게도 뜯겨나가지만, 짐승은 한 명의 희생자로 만족하지 않으니까.
‘이렇게 많은데 왜 지금까지 나서지 않은 거야?’
이렇게 많다면, 다른 망자들처럼 왕을 세우고 활개를 칠 수 있을 텐데. 레나의 물음에 돌아온 대답은 단순했다.
―약해서.
야만의 시대였다. 옳고 그름보다는 강함과 약함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세상을, 이들은 앞서 살아왔다. 약한 것에겐 어떠한 권리도 없기에 그들은 여전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알려줘.’
망자들을 살피던 레나가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지나에게 왕이 되어달라고 했을 때처럼, 너희가 바라는 걸 나한테 말해줘.’
―우리가 바라는 건 존재.
―이름의 회복.
―승자의 역사 뒤편에.
―우리 또한 존재했다는 사실.
‘너희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싶은 거야?’
레나의 물음에 망자들은 손짓으로 끄덕였다. 그래서 레나는 되물었다.
‘그게 알려지면 너희는 편해질 수 있는 거야?’
레나는 그들이 존재하고자 하는 이유를 다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렇게 한풀이를 하려는 건가 생각했다. 오해였다.
―우리가 좌절함은.
―숱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네가 존재하기 때문.
‘나?’
망자들이 다시 목소리를 모아 설명하자, 레나는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그 가련한 왕에게 망자들이 대답했다.
―우리는 너를 통해.
―우릴 찢어발긴 시대가 여전함을 느끼며.
―우리의 죽음이 미풍보다 덧없음을 깨달아 울었다.
망자들의 속삭임에 레나는 또 한 번 멍해졌다. 그들이 구해달라고 한 게 자신들이 아니라 레나였던 걸 깨달았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우리가 바라는 건 세상이 우리의 존재를 이제라도 아는 것.
―모든 변화는 아는 것에서 시작되기에.
레나는 숨을 얕게 쉬며 그들의 말을 곱씹었다. 이미 죽은 자들은 빼앗긴 것을 돌려받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만 위로받기를 원했다. 그들을 위로하는 방법은, 그들을 해친 세상이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었다.
‘변화…….’
변화라는 말에 레나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이 타인인 자신을 위해 기도한 이유를. 그들에게 레나는 타인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레나는 같은 일을 겪은 자신의 일부였고, 동시에 아직 가라앉지 않은 가능성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레나의 아픔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며 회복과 변화를 바라고 있었다.
―네 존재를 세상에 새겨줘.
―또 다른 네가 우리의 일부가 되지 않게.
―구해줘.
그때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잔잔히 들판을 스치더니 점차 거세졌다.
‘이건…….’
―부르고 있어.
‘누가?’
―산 자가.
―죽은 자를.
―제단과 피로.
직후 몰아치는 광풍에 망자들의 목소리가 흩어졌다. 레나도 휘청대다가 중심을 잡았다. 미친 듯 불던 바람이 기어이 허공을 찢으며 미세한 균열을 만들어냈다. 레나는 주저하다가 그 작은 균열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이가 있어.’
레나는 균열 너머로 보이는 광경에 눈을 크게 떴다. 가면을 쓴 자들이 어린애 하나를 묶어두고 기괴한 의식을 벌이고 있었다. 그걸 본 레나는 이를 악물었다. 어릴 적 무력하게 울던 자신이, 덧없이 떠밀려 무덤으로 떨어진 자신이 떠올랐다.
―구해줘.
―제발.
―구해주세요.
용서받지 못한 자들이 속삭였다. 망자들의 간청에 레나는 균열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아직 살아 있는 레나는 그 비좁은 틈을 통과할 수 없었다. 그러나 레나는 단념하지 않았다.
‘내가 갈게.’
내겐 아무도 안 왔지만. 당신들의 말처럼 저 아이는 또 다른 나니까.
‘가서 구할게. 그리고 알려주고 올게. 우리가 존재한다는 걸.’
왕의 선언에 망자들이 몸을 낮춰 경의를 표했다. 망자들은 왕의 맹세를 받아들이며 그를 위해 길을 텄다. 레나를 둘러싼 흰 공간이 날리는 깃털처럼 흩어졌다. 이윽고 레나는 다시 원래 있던 곳, 칼리고와 싸우고 레지나와 충돌한 그 장소로 되돌아왔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붉은 무덤은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레나를 좌절하게 만들었던 레지나도, 여전히 그 자리에서 레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레나와 린은 조심히 걸음을 옮겼다. 목책으로 막혀 있던 구역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동굴인지 통로인지 알 수 없는 비좁은 길을 지났다. 그 길을 다 지나자 황량한 공터가 나왔다. 그곳은 레나와 린의 예상대로 텅 비어 있었다.
“여기예요?”
“응.”
레나의 물음에 린이 대답했다. 여기에 있었다. 린이 어릴 때 본 까마귀들은 바로 여기서 저들끼리 끝도 없이 춤을 춰댔었다.
“풀 한 포기 나지 않았네요.”
레나가 흙이 드러난 바닥을 보며 중얼댔다. 이곳은 마치 기사들이 훈련하는 연병장처럼 바닥이 고르게 다져져 있었다. 까마귀들이 쉼 없이 땅을 밟아댄 탓이었다.
‘정말 다 밖으로 나간 건가?’
레나가 주위를 쭉 살피는데 린이 어깨를 두드렸다.
“저기.”
린이 가리킨 것은 공터 건너편이었다.
“문이 있어.”
레나가 두리번대자, 린이 수풀 사이를 재차 가리키며 말했다. 린의 말마따나 저 멀리 문이 있었다. 온갖 풀과 넝쿨에 둘러싸여 웬만해선 알아차리기 어려운 문이었다. 레나와 린은 곧장 달려갔다. 문은 아래로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아무래도 지하로 향하는 문 같았다.
“자물쇠가 걸려 있어.”
“그러네요.”
레나는 침착하게 대답하며 녹슨 자물쇠를 발로 차서 부숴버렸다.
“……열어달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알아요.”
레나는 가볍게 대답하며 사슬마저 집어 던졌다.
“못해도 십 년은 안 열어본 문 같네요.”
레나가 삐걱대는 경첩을 억지로 잡아 벌리며 중얼댔다. 문을 열자 예상대로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보였다.
“여기 이런 공간이 있을 줄은.”
“클라비스 추기경이 만든 걸 거예요.”
린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뒤늦게 생각난 듯 말했다.
“그런데 그 얘길 왜 나한테 안 하고 너한테…….”
진이 건네준 일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진의 당부대로 여태 함구했던 레나는 괜히 속인 것 같아 미안한 듯 해명했다.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겠죠.”
“새삼 무슨.”
“분명히 말하던데요? 제국의 일은 제국에서 알아서 하라고.”
그리고 까마귀 형님은 제국 사람이 아니라고도 했지.
“다들 알고 있는 거죠? 린 씨의 정체.”
“아마도…….”
린은 힘없이 웃으며 계단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러곤 어두운 발밑을 살피며 레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딱히 필요는 없지만 레나는 연인의 에스코트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계단은 제법 길게 이어졌고, 두 사람은 문에서 비치는 빛에 의지해 조심히 걸음을 옮겼다. 어둠 속에서 점점 밑으로 내려가는 기분이 묘했다. 그래서 레나는 린의 널따란 등을 바라보며 자그맣게 물었다.
“린 씨는 어떡할 거예요?”
“뭘?”
“나중에, 니힐의 시대가 끝난 다음에요.”
니힐의 시대가 끝난 다음. 린에겐 너무 막연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레나가 장난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는 동부 사람들 앞에서 까마귀 탈을 벗어도 되겠죠?”
“글쎄.”
“왜요?”
“어색할 것 같아.”
린의 대답에 레나는 작게 웃음 터트렸다. 그러고 다시 숨을 마실 때, 레나의 눈빛은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어색할 게 뭐 있어요. 예쁜 얼굴인데 자랑해야죠.”
예쁘다는 말에 린이 괴로워했다. 레나는 린의 반응을 고스란히 느끼며, 또 사랑스러워하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이젠 거리낄 것도 없고.”
레나는 여기까지 말하고 멈췄다. 하지만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저주가 사라졌으니까, 이제 마음껏 행복해져도 될 거예요.”
레나가 태연히 한 말에 린이 우뚝 멈춰 섰다. 앞서가던 린이 멈추는 바람에 레나도 덩달아 멈췄고, 그대로 정적이 흘렀다. 무거운 침묵 후, 굳은 듯 서 있던 린이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왜 그런 말을 해?”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화가 났다는 걸 충분히 알 수 있는 목소리였다. 그래서 레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그가 레나에게 이렇게 따지듯, 추궁하는 투로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마음껏 행복해지라니, 이건 대놓고 잘 가라는 말이었다.
“……미안해요.”
레나는 결국 잘못을 인정했다.
“방금 한 말은 실수였어요.”
레나의 사과에 린은 숨을 깊게 마시더니 다시 걸음을 옮겼다. 조용히 앞서가는 린을 보며 레나는 마음이 한층 더 무거워졌다. 경솔했다. 지금까지 잘 꾸며왔는데, 영원히 행복할 수 있는 연인인 척 시치미를 떼며 함께 해왔는데. 원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레나는 린이 저주에서 해방된 게 자신을 떠날 이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자신이 린을 보내줘야 하는 이유가 되거나. 레나는 스멀대는 마음을 애써 누르고 침묵하는 린의 뒤를 따랐다. 한층 아래로 내려온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주위를 살폈다. 지하는 그리 넓지 않았고, 오래 묵혀둔 만큼 퀴퀴한 냄새가 났다.
“너무 어두운데.”
린은 직전의 대화를 잊은 것처럼 말했다. 그는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주변을 더듬다가 테이블에 쌓인 책 몇 권을 찾아냈다. 린은 그대로 테이블을 밀어 빛이 비치는 계단 앞까지 옮겼다.
“무슨 책이에요?”
레나도 린처럼 태연을 가장한 채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린은 부스러질 것 같은 책장을 조심히 넘기더니 미심쩍은 투로 대답했다.
“니힐의 전기…… 같은데?”
린의 말대로 책 안에 담긴 내용은 니힐의 일대기였다. 하지만 제국인들이 익히 보아온 것처럼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는 않았다.
“이거, 초안 아닐까요?”
옆에서 같이 보던 레나가 중얼댔다. 맞는 말 같았다. 책은 인쇄된 것이 아니라 빈 공책이었고, 어지러운 도식 위에 낱장의 메모가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 안에는 황제에 대해 기술할 내용과 구성을 고민한 흔적도 있었다. 그걸 찬찬히 살펴보던 레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그래?”
“필체가 익숙해요.”
레나는 고개를 갸웃대며 몇 개의 철자를 유심히 살폈다. 그러곤 책장을 연신 넘기며 무언가를 찾았다. 오래된 잉크의 흔적을 더듬던 레나의 손이 문득 멈췄다. 책장에 편지가 꽂혀 있었다. 그리고 그 편지의 뒷면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진실을 찾아온 당신께. 늦었지만 당신들의 시대를 돌려드립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비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