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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화. 연극에 불과했다 (145/208)

145화. 연극에 불과했다2021.09.20.

비트라. 레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 익숙한 서명을 더듬었다.

16562829937132.jpg“왜 그래?”

16562829937138.jpg“이 서명…….”

16562829937132.jpg“알아?”

린의 물음에 레나는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16562829937138.jpg“유명한 시인이에요.”

16562829937132.jpg“그럼 대필을 시킨 건가?”

린이 무심코 중얼댔고, 그 말에 흔들리던 레나의 눈이 반짝 커졌다.

16562829937138.jpg“아,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린의 말마따나 니힐이 자신의 전기를 비트라에게 맡겼을 수 있다. 비트라의 활동 시기도 꼭 100년 전이니,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16562829937138.jpg“……그런데 이게 왜 여기 있을까요?”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의 편지가 서부에, 그것도 니힐의 망자가 있던 곳에 남아 있는 건 이상하다.

16562829937138.jpg“여긴 클라비스 추기경이 관리하는 구역인데.”

16562829937132.jpg“클라비스와 친분이 있었을 수도.”

16562829937138.jpg“친분…….”

비트라와 클라비스가? 레나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16562829937138.jpg‘차라리 늑대와 양이 동거한다고 하지.’

그 시인과 그 추기경이 친구라니. 레나는 미간을 좁힌 채 시인의 서명을 바라보았다.

16562829937132.jpg“레나?”

16562829937138.jpg“네?”

16562829937132.jpg“안 뜯어 봐?”

16562829937138.jpg“아, 봐야죠.”

멍하니 있던 레나는 서둘러 편지를 뜯었다. 그런데 봉투 끝을 길게 찢는 순간 안에서 내용물이 우수수 떨어졌다. 레나가 당황해서 편지를 주우려는데, 옆에 있던 린이 먼저 몸을 숙여 떨어진 편지를 수습했다. 린이 편지에 묻은 먼지를 털며 물었다.

16562829937132.jpg“전에 좋아한다고 했던 시인이 이 사람이야?”

16562829937138.jpg“네? 아, 네.”

16562829937132.jpg“그래서 당황했어?”

16562829937138.jpg“당황이요?”

린의 물음에 레나는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억지로 피운 웃음은 눈꽃처럼 순식간에 도로 녹았고, 평정을 가장하려던 레나는 결국 인정했다.

16562829937138.jpg“그런가 봐요.”

린의 말마따나 당황한 것 같다. 비트라의 흔적이 이 진창 속에서 발견된 게 너무 불편해서, 자신이 당황하는지도 모르고 당황했다. 레나의 실토에 린이 갸웃대며 되물었다.

16562829937132.jpg“좋아하는 시인이 황제의 편이었을까 봐?”

16562829937138.jpg“……그냥 좋아하는 시인이 아니에요.”

16562829937132.jpg“그럼?”

16562829937138.jpg“존경…… 아니, 숭배의 대상이죠.”

급소를 찔린 레나가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숭배라는 말에 린의 표정은 미심쩍어졌다. 린이 두려운 눈으로 쳐다보자 레나는 발끈해서 비트라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그가 얼마나 위대한 시인인지, 그의 시가 얼마나 감동적인지 줄줄이 늘어놓았다. 직전의 동요를 포장하고픈 탓이었다. 린은 그 필사적인 변명을 가만히 듣다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 표정을 본 레나가 조금 분한 목소리로 중얼댔다.

16562829937138.jpg“……어쩐지 괘씸한 표정이네요.”

16562829937132.jpg“보여?”

표정만이 아니라 대답도 괘씸하다. 우롱당했다는 생각에 레나의 눈매가 매서워졌고, 위기를 느낀 린은 서둘러 변명했다.

16562829937132.jpg“놀린 거 아니야.”

16562829937138.jpg“그럼요?”

16562829937132.jpg“잠깐 상상해봤어.”

레나가 여상한 눈빛으로 린을 추궁했다. 그에 린은 체념한 듯 입을 열었다.

16562829937132.jpg“만약 이 시인한테 실망하면, 나한테 더 의지해줄까 싶어서.”

생각도 못한 대답이었다. 이번엔 레나가 할 말을 잃었고, 린은 그 시선을 피하려고 애꿎은 편지만 다시 톡톡 털었다. 린도 알고 있다. 레나가 시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홀로 견디던 시절 다정한 시구에 위로 받았단 사실도. 그래서 린은 오히려 두려워졌다. 레나가 그 시만 간직한 채 기어이 혼자 떠날까 봐. 잠깐의 정적 후, 레나가 한숨을 쉬며 중얼댔다.

16562829937138.jpg“고인에게 질투하면 못 써요.”

16562829937132.jpg“못 쓸 것까지야.”

린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레나의 어깨에 턱을 기댔다. 아까 일에 대한 화해의 표시였다. 그걸 알아들은 레나는 뒤에서부터 안겨 온 연인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자신에게 의지해 달라니. 서운한 마음을 곱게도 표현했다. 그게 퍽 기특하지만, 마냥 예뻐하긴 어렵다. 이 남자는 그게 얼마나 위험한 말인지 알고나 있을까? 레나는 못된 연인 때문에 흔들리는 마음을 애써 다잡았다. 아니, 다잡으려고 했다.

16562830020932.jpg―권능과 저주도 사라졌으니 떠나라. 더 이상 제국의 일에 관여하지 말고.

때마침 떠오른 나자의 목소리에 레나는 재차 한숨을 토했다. 지독히도 시험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16562829937138.jpg“편지 펴봐요.”

레나가 어수선한 기분을 떨치려고 린을 재촉했다. 그러자 린은 여전히 뒤에서 레나를 안은 채 팔만 앞으로 내밀어 편지를 펼쳤다.

16562829937138.jpg“……이런 건 누구한테 배웠어?”

16562829937132.jpg“원래 할 줄 알았어.”

레나가 민망함에 항의했지만 린은 속삭이며 더 가까이 다가왔다. 결국 레나도 될 대로 되란 심정으로 그의 가슴에 등을 기댔다. 그러곤 비트라의 편지를 린과 함께 찬찬히 펼쳐보았다. ―나는 황제 니힐의 전기를 쓴 자입니다. 그에 대한 진실을 전하고자 편지를 남깁니다. 내가 가진 미약한 진실이 당신에게 도움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16562829937138.jpg“……비트라가 쓴 문장이 맞네요.”

레나가 첫 문단을 읽자마자 중얼댔다. 단어의 마디마디에서 상냥함이 느껴졌다. 레나는 이 포근한 문장을 잘 알고 있었다.

16562829937138.jpg“혹시 사칭은 아닐까 했는데.”

레나는 힘없이 자조했다. 푸념하는 레나를 린이 더 가까이 감쌌다. 연인은 서로에게 의지한 채, 그 오래된 편지를 읽어내렸다. ―나는 이제부터 니힐에 대해 말하려고 합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원치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주받은 폭군이나 희대의 악녀, 혹은 용서받지 못할 짐승이라 칭하는 편이 더 익숙하고 만족스러울 테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굳이 진실을 전하는 이유, 우리의 역사가 당신들에게 이정표가 되길 바라는 까닭입니다. 지금은 니힐이 된 황제의 원래 이름은 레지나였습니다. 레지나는 그라샤의 6대 국왕의 장녀로 뛰어난 왕재였습니다. 그는 용맹하고 총명할 뿐 아니라 자애로웠고, 연약한 자들의 사정을 살피는 인내심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는 정녕 훌륭한 왕의 재목이었으나 애석하게도 기회가 없었습니다. 보수적인 그라샤의 왕가와 귀족들이 여왕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의 남동생인 클라비스 그라샤가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동생을 아끼던 레지나는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1790년, 남매의 운명은 뒤집혔습니다. 모든 시대는 파도처럼 오르다 정점에서 부서지는 법, 그라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라샤의 다섯 번째 왕인 히엠스 그라샤가 누리던 황금기가 저물며 왕국은 쇠락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왕의 권위가 흔들렸고 권력은 분산되었으며 오랫동안 억눌러 온 문제는 하나둘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 위태로운 시절, 그라샤의 여섯 번째 왕은 히엠스 그라샤의 유언대로 유약한 왕자가 아닌 강인한 공주를 다음 왕으로 세웠습니다. 레지나는 자신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대범하게도 이것을 기회로 여겼습니다. 자신이 이 위기를 이겨내고 나라를 일으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참으로 가련하게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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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6562830020967.jpg“레나가 민중 앞에서 사과를 했다고?”

여느 때처럼 글을 끼적이던 클라비스 대공이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비서가 전해온 이야기 때문이었다. 1792년 여름, 이어지는 가뭄과 흉작으로 민심이 사납던 시절이었다.

16562830020967.jpg“왕이 머리를 숙일 때까지 신하들은 옆에서 뭘 하고?”

온화한 클라비스 대공이 언성을 높이며 채근했다. 그에 비서는 송구하다는 표정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걸 보다 못한 클라비스가 자리를 박찼다.

16562830020967.jpg“레나에게 가봐야겠어.”

16562830020932.jpg“전하.”

클라비스가 깃펜을 놓고 일어나자 비서가 막아섰다.

16562830020932.jpg“거리의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상황을 먼저 살피셔야 합니다.”

16562830020967.jpg“누나한테 가는데 무슨 상황을 살피라는 거야?”

그렇게 되묻는 대공은 아직 열여덟 살이었다. 왕족이지만 권위보다는 자유를 사랑하는 클라비스 그라샤. 섬세함과 다정함을 간직한 그는 마치 갓 태어난 새를 닮았다. 그리고 그 어리숙한 녀석을 회유하는 건, 잔뼈 굵은 귀족에겐 눕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16562830020932.jpg“국왕 폐하께서 난처해질까 염려되어 그렇습니다. 성난 민심을 겨우 달래놓았는데 괜한 빌미를 제공하다니, 안 될 일입니다.”

16562830020967.jpg“그러니까 내가 가는 게 무슨 빌미가 되냐고.”

16562830020932.jpg“전하, 폐하께선 뭐든 조심하셔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조금만 참으십시오.”

비서의 만류에 클라비스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하지만 단지 그뿐, 대공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누이가 왕이 된 지 햇수로 3년이 지났다. 왕이 된 첫해, 레지나는 희망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다음 해에도 레지나를 향한 지지는 굳건했다. 그런데 작년 말, 레지나가 동맹국인 시렌치움으로 군대를 보내며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시렌치움이 군대를 요청한 건 민란을 제압하기 위해서였고, 시렌치움의 민란은 굶주림에 참다못한 자들의 아우성이었다. 그걸 무력으로 제압한 레지나는 더 이상 민중의 사랑을 받을 수 없었다.

16562830020967.jpg“그건 레나가 한 일이 아니야.”

클라비스는 괴로운 얼굴로 중얼댔다. 레지나는 시렌치움의 요청을 거절하려고 했다. 그걸 반대하며 몰아붙인 건 귀족들이었다.

16562830020967.jpg“이건 모함이야. 다들 작정하고 레지나를 궁지에 몰고 있어.”

16562830020932.jpg“과한 생각이십니다.”

16562830020967.jpg“과하다고? 지금 돌아가는 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클라비스는 언성을 높이며 테이블을 내리쳤다. 하지만 그의 노여움은 덧없이 짧았다.

16562830020967.jpg“……미안해, 경에게 소리칠 일이 아닌데.”

16562830020932.jpg“송구합니다.”

16562830020967.jpg“레나가 너무 걱정돼.”

16562830020932.jpg“압니다, 어떤 마음이신지.”

마음 약한 클라비스는 힘없이 사과하며 얼굴을 가렸다.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내가 좀 더 강했다면 레나가 이런 일을 겪지 않았을 텐데. 내가 내 짐을 너한테 떠넘겨 버렸어. 클라비스는 무력한 자신을 원망하며 괴로워했다. 그리고 그 괴로움이 목 끝까지 차올랐을 때 깃펜을 들어 시를 썼다. 나는 묻고 싶습니다. 당신이 오늘 눈을 떴을 때 평안했는지. 외롭게 싸우고 있을 누나를 떠올리며 한 자 한 자 시를 적어 내렸다. 머잖아 누나를 만날 수 있을 거라 믿으며 응어리진 마음을 조용히 글로 풀었다. 하지만 클라비스의 소망과 달리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왕이 머리를 숙이고 반년 후, 폭도들이 의회와 법정을 장악했다. 그러곤 레지나에게 없는 죄를 뒤집어씌우고 모함하며 모욕했다. 그 소식에 클라비스도 더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왕궁으로 향하려 했지만 이번에도 그의 비서를 비롯한 측근들이 막아섰다.

16562830020967.jpg“비켜.”

16562830020932.jpg“안 됩니다, 전하.”

클라비스는 그들을 싸늘히 노려보더니 무작정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자 가신들이 클라비스의 양팔을 잡고 막았다. 마치 포로처럼 붙잡힌 클라비스는 경악해서 소리쳤다.

16562830020967.jpg“감히!”

16562830020932.jpg“선왕의 유지입니다.”

16562830020967.jpg“뭐?”

바락 소리치던 클라비스는 놀라서 말을 잃었다. 선왕의 유지라니, 지금 선왕의 얘기가 왜 나오지? 클라비스가 당황해서 쳐다보자, 그의 비서가 잔잔히 말을 이었다.

16562830020932.jpg“전하, 이젠 전하께서도 아셔야 합니다. 선왕 폐하께선 오직 그라샤의 미래를 염려하셨습니다.”

16562830020967.jpg“그게 무슨 소리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클라비스는 답답해하며 비서를 채근했다. 그에 비서는 대공을 붙잡은 가신들을 물리고, 대공의 집무실 금고에 숨겨둔 유서를 꺼냈다.

16562830020967.jpg“뭐야, 이게?”

16562830020932.jpg“히엠스 그라샤 선왕 폐하께서 우리의 상황을 예측하고 남기신 편지입니다.”

히엠스 그라샤라는 이름에 클라비스는 머뭇대다가 그 편지를 낚아챘다. 그러곤 편지의 내용을 단숨에 훑어내렸다. 클라비스의 두 눈이 떨리기 시작한 건 그 직후의 일이었다. 시대가 변하니 혁명에 대비하라. 지금까진 왕들이 서로 싸웠지만 앞으로는 백성들이 왕에게 맞설 것이다. 밑바닥에서 숨죽이던 자들이 군림하던 자들을 모조리 끌어내 목을 벨 것이다. 그러니 수모를 당하기 전에 계집아이를 왕으로 세워 민중에게 넘겨주어라. 여자를 태우면 두려움과 죄책감이 남으니, 마음의 빚이 생기면 왕가에 다시 충성할 것이다. 그 후 다음 왕으로 사내를 세우면 왕국은 다시 100년을 견딜 것이다. . . . 그랬습니다. 이것이 그라샤에서 여왕이 탄생한 까닭이었습니다. 위대한 레지나 그라샤의 꿈은, 처음부터 연극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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