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침노 당한 왕2021.09.23.
“서쪽에서 소식이 왔어.”
백발의 추기경이 황제의 곁에 앉으며 말했다.
“균열로 사라졌던 자들 중에서 루비드만 돌아왔대.”
“루비드?”
“있잖아, 북부의 귀여운 꼬마. 너한테 대들던.”
고개를 갸웃대던 니힐은 그제야 깨달은 듯 끄덕였다. 그러곤 이렇게 중얼댔다.
“가장 쓸모없는 게 돌아왔군.”
“푸핫!”
니힐의 가차없는 평가에 클라비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모처럼 가식 없는 진짜 웃음이었다.
“그러지 마, 나름 열심히 하는 아이란 말이야.”
클라비스는 루비드를 두둔하며 작게 덧붙였다.
“난 그 애 금발이 좋아.”
클라비스는 그렇게 속삭이며 니힐의 하얗게 센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우리에게도 그토록 찬란한 시절이 있었다. 지금 와선 모두 빛바랜 과거일 뿐이지만.
“다른 보고는?”
니힐의 채근에 클라비스는 자조를 삼키며 말했다.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이 죽었대.”
“심장은.”
“부서졌고.”
“누구 짓이지?”
“나자.”
뜻밖의 이름에 늘 고요하던 니힐의 눈빛이 변했다. 미미하게나마 놀란 기색이었다.
“한이 많은 아이잖아, 나자도.”
그 얼굴을 본 클라비스가 일부러 얄궂게 지껄였다.
“아무튼 루비드 군이 전한 이야기로는 그래. 이만하면 쓸모 있지 않아?”
클라비스가 농을 던졌지만 니힐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 밖에 다른 변동은 아직 없어. 까마귀들도 잘 싸우고 있다나봐.”
“그렇겠지.”
“문제라면 너무 시끄럽게 울어대서 기사들이 겁먹었다는 정도인데, 그 버릇은 죽어서도 나아지질 않네. 살아 있을 때도 어지간히 깍깍대더니.”
클라비스는 그렇게 말하며 날카롭게 비웃었다. 비웃지 않을 수 없었다. 제 안위를 위해 젊고 어린 왕의 목을 바친 자들이 그 왕에게 사로잡혀 영원히 춤추고 있다. 죽어서도 죽지 못하는 비참한 꼴로. 클라비스는 그 사실이 너무 유쾌해서, 그리고 비참해서 한참이나 큭큭대며 웃었다. 아, 그러고 보니. 클라비스는 웃다 말고 생각했다.
‘까마귀들이 있던 곳에 뭘 뒀었는데. 그게 뭐였더라?’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떠올릴 수 없었다. 너무 오래 산 자의 비애였다.
‘뭐, 상관없나.’
클라비스는 기억나지 않는 걸 억지로 생각해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게 뭐든 하등 쓸모없는 일이겠지. 과거의 나는,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었으니까.
*** 히엠스 그라샤의 유서를 확인한 클라비스 대공은 결국 저택에 감금되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믿을 수 없었다. 감히 누구도 왕의 아들로 태어난 그를 힘으로 억류할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그의 모든 말은 명령이고 그의 모든 행동은 권리였다. 하지만 왕권이 흔들리며 그라샤의 아들이 타고난 권력도 덧없이 흔들렸고, 클라비스는 자신에게 들이닥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덫에 걸린 짐승처럼 불안에 떨었다. 그리고 그를 다음 왕으로 정한 자들은 그 연약한 청년을 끊임없이 종용했다.
“이건 모두 전하와 그라샤를 위한 일입니다.”
“힘들겠지만 이겨내셔야 합니다. 나라의 존망이 걸린 일입니다.”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그라샤 왕조의 명맥이 전하께 달렸습니다.”
그때마다 클라비스는 그만하라고 소리쳤다. 그러곤 진저리를 내며 레지나를 찾았다. 클라비스는 레지나에게도 사실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신들은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폐하가 알면 충격이 크실 겁니다.”
“도움이 되기보다는 해가 될 뿐입니다.”
그들은 남매를 철저히 갈라놓았다. 그리고 93년 7월. 폭도들이 레지나 그라샤를 기어이 법정에 세웠다. 귀족들의 용인하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때 클라비스는 병상에 누워 있었다. 일주일 넘게 식음을 전폐하여 기력이 쇠한 까닭이었다.
“전하, 식사는 하셔야 합니다. 이러다간 정말 몸이 상하십니다.”
가신들이 간청했지만 소용없었다.
“레지나를 만나고 싶어.”
대공은 왕을 만나고 싶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생의 의지를 놓아버린 듯한 그 모습에 가신들도 난감해졌다. 만약 클라비스가 죽어버리면 그라샤의 왕위를 두고 난장판이 벌어질 텐데, 그럼 클라비스를 옹립하려고 준비해온 이들도 입지가 위태로워질 터였다. 때문에 완강하던 가신들은 결국 클라비스에게 한발 양보했다.
“레나!”
그로써 간신히 왕궁으로 돌아온 클라비스는 레지나를 보자마자 꽉 끌어안았다. 1년 만이었다. 꼭 1년 만에 본 누나는 전보다 훨씬 마르고 수척했다. 그럼에도 타고난 품격은 여전했다. 사방이 적인 왕궁에서 홀로 견디고 있지만, 레지나는 정갈한 모습으로 묵묵히 제 일을 하고 있었다. 이 또한 이겨내리라 마음먹은 듯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클라비스?”
“누나…….”
“아무 연락도 없더니 왜 갑자기…….”
레지나의 물음에 클라비스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연락이 없었다니. 매일 너한테 편지를 썼는데, 나는 네가 바빠서 답장을 못 하는 줄 알았는데. 클라비스는 이를 악문 채 흐느꼈고, 레지나는 모든 걸 이해한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어린 남매는 서로를 안고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을 감내했다. 이윽고 겨우 울음을 그친 클라비스가 말했다.
“레나, 왕위를 내게 넘겨.”
“뭐?”
“안 그러면 죽어.”
“그랬다간 네가 위험해질 거야.”
“아냐, 누나!”
레지나가 고개를 젓자 클라비스는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쳤다. 그러곤 레지나의 놀란 얼굴을 보며, 치미는 흐느낌에 이를 악물었다.
“……나는 괜찮아. 나는, 내가 누나 대신 왕이 되면 다 괜찮을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클라비스의 신음 섞인 속삭임에 레지나가 무언가 눈치챈 듯 되물었다. 레지나의 추궁에 클라비스의 두 눈은 다시 눈물로 가득 찼다.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어…….”
“제대로 말해, 정해져 있었다니 뭐가?”
주저하던 클라비스는 결국 레지나에게 히엠스 그라샤의 유언을 전했다. 덜덜 떨며, 목소리를 쥐어짜며 모든 것을 폭로했다. 그러곤 두려운 심정으로 레지나를 바라보았다. 그때 클라비스의 눈동자에 비친 것은 거짓말 같은 레지나의 적막이었다.
“누나…….”
레지나는 놀라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우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해한 표정이었다. 지금까지 있던 모든 일에 대해. 레지나를 둘러싼, 그래서 허물기 위해 노력했던 벽은 사실 벽이 아니라 방패였다. 뚜렷한 의도를 가지고 여왕을 고립시킨 거대한 악의였다. 실체를 비로소 알게 된 레지나는 피가 식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니까 그만해, 레나.”
클라비스가 침묵하는 레지나에게 다시 애원했다.
“그럼 목숨은 건질 수 있어.”
“……목숨은 건진다고?”
레지나가 되물었다. 클라비스는 그게 동조의 의미인 줄 알고 성급히 끄덕였다.
“죄를 인정하고 물러나면 유폐로 끝낼 수 있어. 이미 대신들한테 약속을 받았어. 누나를 살리기로. 유폐는 너무 걱정하지 마. 상황이 좀 잠잠해지면 바로 꺼내줄 테니까…….”
“죄를 인정하라고.”
“누나…….”
“대체 무슨 죄를 인정하라는 거지?”
레지나의 반문에 클라비스는 할 말을 잃었다. 살려면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레지나의 서늘한 눈빛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침몰하는 배인 줄 모르고 키를 잡은 게 내 죄인가? 널 위한 희생양으로 선택된 게 내 죄야? 아니면, 그걸 까맣게 모르고 왕 노릇 하며 견뎌온 게?”
레지나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가기 차다는 듯이, 참으로 우습다는 듯이.
“그건 내 죄가 아니야.”
레지나는 그렇게 말하며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클라비스는 저 표정을 알고 있었다. 저건 레지나가 정말 화가 났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일단은 살아야 할 거 아니야…….”
“그게 사는 거니?”
레지나의 물음에 클라비스는 다시금 말문이 막혔다.
“내 모든 걸 부정하고 없는 죄까지 뒤집어쓰고 숨만 붙어 있으면 사는 거야?”
“레나, 제발…….”
“난 그렇게 사는 법 몰라.”
모든 음모에도 불구하고 레지나의 강인함과 고결함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게 클라비스를 더 괴롭게 만들었다.
“날 위해서 살아주면 안 돼?”
클라비스가 신음하며 레지나에게 매달렸다.
“나도 널 위해 살 테니까, 응?”
클라비스의 애원에 레지나가 옅게 웃었다. 분명 부드러운 미소였지만 클라비스는 아득히 절망했다. 자신을 향한 레지나의 시선이 누나가 아니라 왕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레지나가 손을 뻗어 클라비스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러곤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넘기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사랑해, 클라비스. 내 편은 너뿐이야.”
레지나는 자비롭게 웃으며 클라비스의 어깨를 밀었다. 그만 가라는 뜻이었다. 다정한 듯 잔혹한 작별 인사에 클라비스가 소리쳤다. 레지나를 붙잡고 다그쳤다. 레지나는 단호한 얼굴로 그를 다시 밀어냈고, 결국 근위병이 들어와 대공을 붙잡았다. 그게 남매의 마지막이었다. 그로부터 석 달 뒤, 더위가 한풀 꺾인 가을에 레지나의 처분이 결정되었다. 레지나의 혐의는 폭정과 횡령, 음행, 백성에 대한 기만이었다. 모두 사실과 다름에도 레지나는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모든 일은 준비된 듯 빠르게 진행되었다. 폭도들은 처형 장소로 왕궁을 택했다. 그들은 왕이 으스대던 곳에서 왕이 죽기를 바랐다. 그들은 레지나를 증오했고, 자신들의 증오를 즐겼다. 세상의 비극이 레지나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여겼으며 그의 죽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 믿었다. 하지만 정작 그들 중 레지나를 제대로 아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처형 당일, 레지나는 코르셋을 조였다. . . . 그 시각 클라비스 대공은 자신의 저택에 갇혀 있었다. 그는 누이가 처형된다는 소식을 듣고도 왕궁에 갈 수 없었다. 성난 군중에게 얼굴을 보이면 안 된다는 가신들의 강권과 강압 때문이었다. 결국 그 무력한 왕자가 할 줄 아는 거라곤 창문 앞에 엎드려 하염없이 우는 것뿐이었다.
“살려주세요…….”
클라비스는 신께 빌었다. 레지나를 살려달라고,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달라고 기도했다.
“살려주세요, 레나를 살려주세요.”
누나에겐 아무 죄도 없습니다. 그러니 신이시여, 레지나를 외면하지 마세요. 제발. 하지만 아무리 빌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고, 침묵하는 신에게 진저리가 난 클라비스는 이를 악물며 엎드린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창밖의 하늘이 클라비스를 마주했다. 그날 가을 하늘은 투명할 정도로 맑았다. 기적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하늘이었다. 광활히 펼쳐진 하늘 앞에서, 클라비스는 우는 것도 잊고 그것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는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문을 열자 바람이 밀려와 그를 어루만졌다. 찢어질 듯 아프던 가슴이 부드럽게 술렁였다. 책상에 흩어놓은 종이는 마치 생명을 얻은 것처럼 팔락이며 날아다녔고, 일렁이는 커튼의 움직임마저 무언가의 계시처럼 신성하게 느껴졌다.
묘한 예감이 들었다. 클라비스는 몸을 돌려 날리는 종이로 하얗게 번진 방 안을 돌아보았다. 책상에 놓인 성서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의심하지 않고 망설이지 않고 책상 앞으로 가 성서를 펼쳤다. 특정 구절을 찾으려고 한 건 아니었다. 그저 지금 느껴지는 이 신비한 느낌을 신의 언어로 이해하고 싶었다. 더듬대며 책장을 넘기던 중 성서의 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보라, 내가 사자를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그때, 장엄하게 푸르던 하늘 위로 균열이 솟구쳤다. 난생처음 보는, 지옥의 불길 같은 균열이었다. 그날은 1794년 10월, 레지나 그라샤가 처형당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