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니힐2021.09.27.
편지를 읽어내리던 레나와 린은 다섯 번째 장에서 잠시 숨을 돌렸다.
“조금 쉴까요?”
레나의 제안에 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연인의 몸을 안고 있던 팔을 빼냈다. 편지의 내용 때문에 이 장난스러운 자세가 겸연쩍어진 탓이었다.
“전에 이야기해준 그대로네.”
린이 남은 편지의 분량을 헤아리며 중얼댔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레나와 린도 아는 이야기였다. 레나는 레지나를 통해 그가 어떻게 처형되었는지 알게 되었고, 린 역시 그 사실을 레나에게 전해 들은 바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아는 건 고립된 레지나의 시점이어서, 그 주변 상황을 알리는 비트라의 편지는 상당히 새로웠다. 그리고 이 편지에서 주요하게 설명하는 한 인물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클라비스는 우리가 아는 것과는 거의 다른 사람이고.”
“그러게요…….”
레나는 린의 평가에 깊이 동의했다. 어리석은, 연약한, 무능한, 한심한, 그리고 불쌍한. 모두 이 편지에서 클라비스를 수식하는 말이었다.
“100년 전이니까, 어쩌면 정말 그랬을 수도 있죠.”
레나는 무거운 마음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가볍게 말했다. 사실 레나는 아까부터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편지의, 그러니까 비트라의 시점이 클라비스와 유독 가깝다고 느낀 탓이었다. 편지는 그 시절의 클라비스를 바로 옆에서 본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했다.
‘정말 친구인가?’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친구라기엔 클라비스를 향한 시선이 지나치게 냉소적이다. 그 상냥한 시인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아니면 부관이던가.’
그나마 가능성이 높지만 이것도 썩 와닿지 않는다. 비트라는 대공을 감금한 자들의 입장도 절대 두둔하지 않았다.
‘비트라는 대체 어떤 입장이었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레나의 뇌리로 오래전 클라비스가 한 말이 떠올랐다.
―루비드에게 꽃을 준 거 말이야. 혹시 시를 따라 한 거야?
―차라리 꽃을 바치겠습니다, 맞나?
―별로 좋아하는 건 아니야. 그냥 아는 거지.
그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묘하게 걸린다. 곰곰이 생각하던 레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린의 손에서 편지를 빼앗으며 햇살이 내리는 계단에 걸터앉았다.
“정말 중요한 건 이 다음부터예요.”
“니힐이 처형당한 후?”
“네. 그다음 얘긴 못 들었으니까요.”
레지나는 마지막 순간 자신의 이야기를 레나에게 모두 해주었다. 하지만 자신의 일부인 니힐이 지상으로 돌아가 한 일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니힐과 갈라져 버림받은 처지이기에 본인도 모르는 탓이었다. 그러니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레나와 린은 계단에 나란히 앉아, 남은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았다.
*** 클라비스는 푸른 하늘 위로 길게 벌어진 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건 마치 상처 같기도 하고, 하늘이 길게 웃는 입 같기도 했다. 게다가 그 새빨간 틈은 정확히 그라샤 왕궁 위에 놓여 있었다.
‘저게 대체…….’
넋을 놓고 있던 클라비스는 종이가 날리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책상에 놓인 성서의 책장이 바람에 날려 팔락이고 있었다. 그걸 본 클라비스는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정말 기적이 일어난 건가?’
착각이었다. 클라비스가 느낀 것은 기적이 아니라 극한에 몰린 자의 가련한 자가당착이었다. 하늘을 찢은 것도 신의 도움 따위가 아니었다. 그건 죄 없는 왕의 정당한 분노였고, 동시에 한없이 부당해질 복수심이었다. 저택의 다른 자들도 저 균열을 발견했는지 창밖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클라비스는 정신을 다잡고 문으로 달려갔다.
“열어라! 왕궁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확인하겠다!”
“송구합니다, 전하. 소식은 추후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문밖에 선 기사들은 바깥을 아직 보지 못했는지 단호하게 대꾸했다. 클라비스는 답답해하며 다시 문을 두드렸다.
“밖을 봐! 지금 왕궁 위에……!”
클라비스는 기사들에게도 이변을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미처 그럴 겨를이 없었다.
“누, 누구냐!”
기사들의 고함과 무기를 뽑는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보다 한발 먼저, 아스라이 먼 곳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아아악…… 꺄아악……. 저택의 다른 층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뜻밖의 비명에 클라비스는 덜컥 얼어붙었다.
“멈춰라!”
그리고 문밖에서 들려온 긴박한 음성은 그를 겁에 질리게 만들었다. 이어 갑옷이 움직이는 소리, 무언가 달려오는 소리, 그리고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까마귀?’
클라비스가 기이한 울음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한 직후, 문밖에서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으아악!”
동시에 쿵쿵대며 무거운 것이 쓰러졌다. 그 와중에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고, 차단된 시야는 클라비스에게 오히러 더 극심한 공포를 선사했다.
“무, 무슨 일이야?”
클라비스가 입술을 달싹이며 물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애당초 목소리가 너무 작았다. 부끄러움을 느낀 클라비스는 최대한 근엄하게 다시 말했다.
“방금, 무슨 일이지?”
이번엔 제법 큰 목소리였지만 대답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무언가 질척한 것이 그의 발을 적셨다.
“으……!”
발밑을 확인한 클라비스는 질겁하며 물러났다. 문틈으로 피가 번져오고 있었다. 대리석 바닥에 피 웅덩이가 퍼지는 것을 보며 클라비스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철컥, 쇳소리와 함께 문고리가 흔들렸다. 밖에서 문고리를 잡고 돌린 모양이었다. 굳게 잠긴 문은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밖에 있는 무언가는 단념하지 않았다. 철컥철컥철컥철컥. 연신 헛돌던 문고리가 뚝 멈췄다. 이제 끝났나 싶은 찰나, 쾅 소리와 함께 문이 흔들렸다. 마치 도끼 찍는 소리가 나며 단단한 적삼목 문이 쩌적 갈라졌다. 쾅! 쾅! 쾅! 연이어 굉음이 나더니 기어이 무언가가 문을 뚫고 비죽 튀어나왔다. 클라비스는 창이나 검 끝을 예상했다. 그런데 정작 문을 뚫고 나온 건 그런 날붙이가 아니었다. 그건 매끈한 유선형에 칠흑처럼 검었다. 클라비스의 눈엔 마치 악마의 손톱으로 보였다. 실제로 그것은 거대한 악마가 구멍을 후비듯 좌우로 흔들리며 이미 갈라진 문을 부수는 데 열심이었다. 결국 문에 큰 구멍이 났고, 클라비스는 그 구멍을 통해 불청객의 실체를 확인했다. 문밖에 선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까마귀였다. 아주 거대한, 거의 사람만큼이나 큰 까마귀의 머리. 까마귀와 눈이 마주친 클라비스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우습게도 그 까마귀는 목부터 사람이었다. 심지어 옷을 입고 있었는데, 클라비스는 저 까마귀가 입은 벨벳 정장을 금방 알아봤다. 저건 클라비스를 여기 가둔 가신 중 하나의 옷이었다. 클라비스는 까마귀가 왜 저 옷을 입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까마귀가 결국 부서진 문을 넘어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클라비스는 기절했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마차에 있었다. 단단한 말발굽 소리에 깨어난 클라비스는 퍼뜩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떻게 된 거지?’
클라비스는 마차 창문에 드리운 커튼을 걷었다. 그러자 새빨간 빛이 눈을 어지럽혔다. 석양은 아니었다. 화재도 아니었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붉은 빛이 사방에 가득했다. 그 낯선 광채 때문에 클라비스는 조금 늦게 깨달았다. 여기가 왕궁 앞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없어?’
왕궁 앞 광장은 고요했다. 사람들이 왕의 처형 장면을 보려고 몰려나왔을 법도 한데, 아니면 폭도들이 장악하고 떠들썩하게 무리를 짓고 있을 법도 한데 광장은 텅 비어 있었다. 그래서 클라비스는 이게 꿈인가 싶을 정도였다. 마차는 하늘을 찢은 붉은 균열 앞으로 나아갔다. 왕궁의 정문과 정원을 지나, 왕좌가 있는 본궁 앞에서 멈췄다. 그동안 클라비스는 운반되는 가축처럼 얌전히 기다렸다. 다시 기절하지 않은 것만 해도 유약한 왕자에겐 대단한 일이었다. 이윽고 마차의 문이 열렸다. 밖에서 문을 연 자는, 끔찍하게도 아까 본 까마귀였다. 클라비스는 왜 이런 악몽이 지속되는지 의문을 품으면서도 순순히 마차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하늘을 찢는 붉은 균열을 지척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아…….”
클라비스는 본궁 위에 정확히 내리꽂힌 붉은 균열을 보며 탄식했다. 그는 홀린 듯 궁으로 향했다. 까마귀들이 본궁의 거대한 문을 열어 대공의 입장을 도왔다. 이윽고 나타난 궁 안의 광경에 클라비스는 또 한 번 탄식하고 말았다. 그곳에 하늘로 높이 뻗은 균열의 근원이 있었다. 그리고 레지나는 홀 한가운데 뻗친 균열이 왕좌라도 되는 양 등지고 앉아 있었다. 기이한 광경이었다.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레지나의 좌우로 까마귀들이 신하처럼 줄지어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발밑엔 피가 빗물처럼 고여 있었다. 클라비스가 입장하자 머리가 하얗게 센 레지나가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와라, 내 동생.”
“레나……?”
클라비스의 부름에 레지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클라비스는 그걸 미처 모르고 덜덜 떨며 걸어왔다.
“누나, 너 맞아? 머리카락이 왜 그래? 저 까마귀들은 뭐고, 이 피는 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죄인들을 심판했다.”
“심판……?”
“적어도 없는 죄를 만들어내진 않았어.”
레지나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대며 품에 끼고 있던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까마귀가 그것을 공손히 받아 클라비스에게 가져갔다.
“봐라. 레지나 그라샤의 죄목이다.”
클라비스는 주저하며 까마귀가 내민 두루마리를 펼쳐보았다. 그 안에는 레지나 그라샤의 죄와 악행이 낱낱이 적혀 있었다. 모두 만들어진 가짜였다. 클라비스는 혼란스러워하며 말했다.
“이건 누나의 죄가 아니야.”
“판결은 이미 끝났어. 레지나 그라샤는 죄인이다.”
“하지만 그건……!”
“이 나라와 법정이, 그리고 백성들이 내린 결론이야. 그래서 나도 그들의 방식에 따르기로 했다.”
“레나…….”
클라비스가 신음하자 왕좌에 턱을 괴고 있던 레지나가 눈을 치떴다.
“그렇게 부르지 마라.”
“뭐?”
“날 더는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라. 죄인의 천한 이름이다.”
레지나의 날카로운 말에 클라비스는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더 묻고 싶은 게 산더미같이 많았다. 지금 등지고 앉은 그 균열은 대체 뭔지, 저 까마귀들은 또 무엇인지. 하지만 차마 물을 겨를이 없었다.
“나는 니힐이다.”
레지나가, 아니. 니힐이 자신의 새 이름을 선언하며 몸을 일으켰다. 니힐이 일어나자 붉은 균열이 요동쳤다. 그것은 마치 니힐과 연결된 것처럼, 니힐을 붙잡아 두려는 것처럼 그의 팔다리를 물고 늘어졌다. 균열이 번쩍이며 충격을 일으켰지만 니힐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에게 엉긴 것을 떨쳐냈다. 그러자 구멍을 막은 돌을 빼낸 것처럼 균열이 일파만파 퍼지며 궁의 한 면을 다 덮었다. 그 붉음을 등진 채 니힐이 말했다.
“이 나라에 어울리는, 이 나라를 영원토록 통치할 이름이다.”
직후, 균열에서 괴수들이 쏟아져 나왔다. 클라비스가 일평생 본적도 없는 괴물들이었다. . . . 그날 균열을 통해 나온 괴물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했습니다. 왕을 모함한 자들이 죽고, 그것을 방관한 자들이 죽고, 또 이 모든 일에 무관한 자도 죽었습니다. 무능한 클라비스 대공은 겁에 질린 채, 까마귀의 비호를 받으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습니다. 죽은 자가 돌아오며 생과 사가 뒤엉키고 말았지만, 당시엔 그것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니힐의 말을 믿고 그의 전기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니힐은 스스로를 황제라 칭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