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살아가기를 바랍니다2021.09.30.
낯선 괴물의 등장은 왕의 송사조차 뒷전으로 만들었습니다. 기괴한 괴물이 사람을 학살하는 와중에 여왕의 재판 결과를 궁금해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왕국의 경비대는 추풍낙엽처럼 흩어졌고, 사람들에겐 국경의 군대를 기다릴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때 니힐이 나섰습니다. 그는 칼날 같은 바람을 일으키고 불길을 다스리며 경악스러운 괴물들을 해치웠습니다. 그리고 우왕좌왕하던 기사들을 모아 자신의 까마귀들과 함께 도시로 흩어진 괴물을 쫓게 했습니다. 그로써 일말의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붉은 균열이 남아 있는 한 싸움은 끝나지 않을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니힐이 또 한 번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는 균열이 생겨난 바닥, 그 돌판에 흥건한 피를 물로 닦아내 균열을 닫았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균열이 닫힌 것에 감탄했지만,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니힐이 닦아낸 것이 그가 단두대 앞에서 흘린 피였다는 걸. 왕이 흘린 피가 균열을 만든 셈이라는 걸. 하지만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피를 닦아냈지만 이미 핏자국이 스민 돌바닥에선 다시 균열이 열리려는 조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니힐은 그 돌판을 산산이 조각내서 깨트렸고, 그것을 식별할 수 있게 특별한 문양을 새겼습니다. 그러곤 까마귀들에게 그것을 동서남북으로 흩어놓으라 명했습니다. 까마귀는 니힐의 명령대로 그 돌을 들고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이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당시로서는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한 달 후, 먼 곳에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대륙 각지에 균열이 생겨 괴물들이 몰려나왔다는 소식이었습니다. . . . 균열과 괴물의 등장에 그라샤를 비롯한 수많은 나라가 혼란에 빠졌습니다. 사람들은 겁에 질렸고 답을 구했습니다. 그들을 구제한 것은 이번에도 니힐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균열에 들어가 보았으며, 그곳에서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곤 내게 명했습니다. 이것으로 백성들의 동요를 가라앉힐 이야기를 만들라고 말입니다. 나는 기꺼이 명령에 따랐습니다. 그 외엔 나라의 혼란을 가라앉힐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공된 이야기로 가짜 위안을 주는 건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내가 그걸 깨달은 건, 그로부터 십수 년이 지나서였습니다.
***
“글씨가 흔들리네요.”
묵묵히 편지를 읽던 레나가 말했다. 편지의 거의 끝부분이었다. 편지를 써 내려가는 게 힘에 부친 듯, 정갈하던 비트라의 글씨가 점점 흐트러지고 있었다.
“섬세한 사람이었나 보네.”
린의 평가에 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이 쓴 시만 봐도 그렇다. 비트라는 선하고 다정한 사람이다. 비록 만나본 적은 없지만 레나는 그의 저작물을 통해 그의 성품을 확신했다. 때문에 레나는 그의 동요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레나를 보며 린이 조심히 운을 뗐다.
“……이 사람은 어떤 신분이었을까?”
린은 아까 레나가 가진 것과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니힐의 신하들은 대부분 망자가 된 것 같은데.”
그 와중에 살아남아 니힐을 옆에서 지켜본 자.
“왕가의 일원……일지도 모르죠.”
레나는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트라의 정체가 궁금하기는 레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직은 아무것도 섣불리 추정할 수 없기에, 레나는 묵묵히 편지의 마지막 장을 펼쳤다. *** 니힐은 자신의 친족에게 권능을 나눠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제후로 삼아 확장된 그라샤의 영토를 다스리도록 했습니다. 처음엔 니힐로부터 받은 권능으로 평화를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권능을 받은 자들은 미쳐서 파멸했고, 균열은 닫히고 열리기를 반복하며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니힐은 이 모든 것을 무심한 눈으로 지켜볼 뿐이었습니다. 니힐의 본심을 알 수 없게 된 나는 결국 그에게 직접 물어보았습니다. 붉은 균열이 생긴 첫날 내가 본 까마귀들의 정체, 제단이라 불리게 된 돌을 흩어놓은 목적, 그리고 니힐이 제후들에게 나눠준 권능의 부작용까지. 짚이는 모든 것이 불길하고 의심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로써 돌아온 대답은 애초에 그가 알려준 사실과 전혀 달랐습니다. 니힐은 자신이 그날 단두대에서 죽었음을 비로소 밝혔습니다. 무덤으로 떨어져 저주스러운 선조를 만난 것도. 무덤과 망자의 왕에 대한 이야기는 대부분 사실이었습니다. 다만 니힐은 가장 중요한 것을 빼놓았습니다. 자신이 용서받지 못한 왕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진실을 알게 된 나는 스스로의 무지와 과오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쓴 전기 때문에 사람들은 복수를 위해 돌아온 왕을 황제로 추대하게 되었습니다. 니힐의 악의와 분노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채, 레지나가 생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철저히 기만당한 셈이었습니다. 나는 내 잘못을 깨달았지만 그것을 바로잡을 힘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도망쳤고, 언젠가 이곳에 도달할 당신에게 편지를 남기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긴 편지를 읽어준 당신이 어느 시대의 사람인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당신은 얼마나 먼 미래인가요? 생각보다 가까운 날인가요? 그 시대의 그라샤는 지난 과오를 조금이라도 씻어냈나요? 멀든 가깝든, 당신은 우리의 시대로 피해 입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너무 먼 나중의 사람이 아니기를 조심히 바랍니다.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못된 것을 돌이키기 위해선 그 갑절의 시간이 필요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뒤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고통을 주어 정말 미안합니다. 그리고 염치없지만 당신이 잘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어쨌든 희망은 살아 있는 자에게만 허락되는 것이니 말입니다. 제국 23년 가을의 어느 날, 당신께 씁니다. *** 편지를 다 읽은 레나는 복잡한 기분으로 편지지를 접었다.
“잘 살아가기를 바란다니…….”
레나는 비트라의 마지막 말이 어쩐지 자신을 향한 말 같았다. 무덤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레나 루벨을. 레나가 쓰게 중얼대자 지켜보던 린이 말했다.
“무책임하네.”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웃지 마.”
린이 옅게 미소를 짓는 레나를 질책했다. 레나가 짐짓 놀라 쳐다보자, 그는 표정 없이 덧붙였다.
“웃을 일이 아니잖아.”
그렇게 말하는 린은 조금 화가 난 것 같았다. 우연이겠지만 비트라의 편지는 아주 정확하게 주인을 찾았다. 그는 편지를 통해 사과했다. 자신들의 과오로 이유 없이 희생양이 된 후대에게, 레나에게. 린은 그 사실에 화가 났다. 비트라의 무책임한 편지보다도, 그걸 다 받아들인 듯한 레나의 태도가 속상했다. 그 모습을 보던 레나가 갸웃대며 물었다.
“왜 토라졌어요?”
“토라졌다니…….”
린은 이 와중에도 자신을 귀여워하는 레나 때문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너는, 이대로 괜찮아?”
“그런 거 묻지 않기로 했는데.”
“피하지 말고.”
레나가 습관처럼 웃어넘기려 하자 린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의 진지한 눈빛에 레나도 결국 미소를 지웠다.
“이 편지 때문이 아니라 전부터 계속 고민했어. 모든 일이 끝나고, 네가 무덤으로 가는 게 과연 맞는 일인지.”
“린 씨, 그 얘기는…….”
“안 하기로 했지. 정확히는 못 했지. 네가 원치 않았으니까. 네가 나한테 허락한 건 무덤으로 가기 전까지니까.”
연인이 되기 전, 린이 레나를 잡으며 약속한 일이었다. 레나는 헤어질 때 마음이 아플 테니 린을 좋아하지 않겠다고 했다. 린은 그런 레나를 붙잡았다. 누구든 결국 헤어진다는 말로, 그러니 주어진 시간 동안 함께하자면서. 지금까지 그 말을 잘 지켜왔다. 하지만 함께 지내는 동안 마음이 커지며, 그리고 시대의 문제를 점차 알게 되며 생각이 변했다. 이건 부당하다. 얼마 전까진 거스를 수 없는 재앙으로 받아들였다. 저주나 무덤, 망자, 그리고 황제의 화풀이까지도. 하지만 알고보니 그건 재앙이 아니라 인간의 악의였다. 린은 그 어처구니없는 것을 운명으로 여기며 순응하고 싶지 않았다.
“나한테 그다음을 말할 자격은, 아직도 없어?”
“린 씨…….”
린의 무거운 물음에 레나가 작게 탄식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레나는 그를 달래거나 해명하지 않았다. 그게 야속해진 린은 자신의 손끝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 저주가 사라진 걸 알았을 때 기뻐할 줄 알았어.”
“당연히 기뻤어요.”
“마음껏 행복해지라는 말도 기뻐서 한 거야?”
린의 물음에 레나는 난감해졌다.
―저주가 사라졌으니까, 이제 마음껏 행복해져도 될 거예요.
아까 레나가 한 말이다. 린을 화나게 한 말이기도 했다. 실수였다고 곧장 사과했는데 린은 아직 마음에 남은 모양이다. 마음이 상할 말이기는 했다. 마음껏 행복해지라니, 영영 안 볼 사람에게 하는 작별 인사나 다름없었다.
“저주가 사라진 지 하루도 안 됐는데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어. 마치 저주가 아니면 내 옆에 있지 않을 것처럼”
린의 나직한 말에 레나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 의외로, 아니. 정확히 의표를 찔린 탓이었다. 린의 말마따나 그가 가진 저주는 레나가 그의 곁에 머물기로 결심한 이유 중 하나였다. 굳이 의식한 적은 없지만 그 저주 때문에 린에게 더 안정감을 느꼈다. 어차피 다른 연인을 얻을 수 없으니 내가 잠시 머물러도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마음을 고스란히 들킨 레나는 스스로에게 놀랐다.
“맞구나.”
린이 레나의 표정을 읽고 중얼댔다. 그의 상처받은 목소리에 레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린은 이미 어두운 얼굴로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걸 본 레나는 발끈해서 린의 양 뺨을 찰싹 소리 나게 붙잡았다.
“매도하지 마.”
레나는 단호히 말하며 린의 마른 뺨을 꽉 눌렀다.
“기회가 있다고 아무나 건드리지는 않아.”
“건드…….”
“알잖아, 네가 사라졌을 때 내가 얼마나 절박했는지.”
건드린다는 표현에 난색 하던 린은, 레나의 다음 말에 그대로 녹아버렸다. 오해하기엔 서로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안다. 그들은 만난 이래 상대가 세상에 단 하나인 것처럼 아껴왔다. 그래서 점점 가까워지는 끝을 더 견딜 수 없었다.
“그럼 쉽게 포기하지 마.”
린이 레나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며 말했다.
“보낼 생각부터 하지 말고 같이 있을 방법을 찾아줘. 나도 그럴 테니까.”
린은 자신의 뺨을 감싼 레나의 양손을 조심히 모아쥐었다. 그러곤 그의 손가락에 입을 맞췄다.
그게 어떤 애원보다 처절하게 느껴져서, 레나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혹시 날 따라올 생각은 하지 마. 절대.”
“당장 결론을 내자는 게 아니야. 적어도 미리 포기하지는 말자는 거야.”
“……왜 그렇게 필사적이야?”
“사랑하니까.”
“읍…….”
레나의 질색에 내리 심각하던 린이 웃음을 터트렸다. 저도 몰래 웃어버린 린은 재빨리 웃음을 지우고 레나를 다시 바라보았다. 대답을 촉구하는 눈빛이었다. 그 시선에 레나는 한층 더 난감해졌다. 포기하지 말라니. 주어진 시간 동안 사랑하자고 해놓고 이제 와서. 레나는 멋대로 희망을 불어넣는 린이 야속했다. 그래서 대답을 피했지만 린은 끈질겼다. 그가 계속 시선을 맞춰오는 통에 레나는 결국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러자 방금 읽은 편지 마지막 구절이 거짓말처럼 떠올랐다. ―염치없지만 당신이 잘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어쨌든 희망은 살아 있는 자에게만 허락되는 것이니 말입니다.
“……린 씨 정말 몹쓸 사람이네요.”
더는 자신의 마음을 감출 수 없던 레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알겠어요.”
레나의 대답에 린의 눈이 커졌다.
“정말?”
“네.”
“거짓말.”
“죽을래요?”
레나는 자신을 농락하는 린을 웃으며 위협했고, 린은 두려워하면서도 반신반의하며 레나를 바라보았다. 더 고집을 부릴 줄 알았다는 얼굴이었다. 레나는 그 얼굴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다가,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그런 말 하고 싶지 않았어요.”
“무슨 말?”
“마음껏 행복해지라는 말.”
레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래도 되나 싶었다. 동시에 떠나라는 나자의 목소리도 다시금 떠올랐다. 여러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지만 레나의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레나는 린의 손길이 너무 따뜻해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긴 망설임 끝에, 결국 레나는 항복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방법이 있다면 찾을게요. 린 씨와 함께 있을 방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