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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화. 연대 (152/208)

152화. 연대2021.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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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나와 린은 고삐를 휘어잡고 급히 말을 달렸다. 서부의 폐허를 가로지르는 두 사람 옆으로 망자들이 날뛰었다. 네발짐승 형상의 망자들이 벽을 타 넘으며 달려들었고, 용들은 하늘에서 지상을 향해 쏘아지듯 낙하했다. 고풍스러운 옷차림의 까마귀들은 아아악 소리를 지르며 응전했다.

16562831899696.jpg‘빨리, 더 빨리……!’

린은 초조한 마음을 삼키며 말을 혹독하게 몰았다. 그때 린의 정신은 반쯤 나가 있었다. 그는 고향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것 이상으로 두려웠다. 나자가, 자신의 생모가 또 사람들을 죽이도록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대책 없이 무작정 달리는데, 레나가 급히 그를 불렀다.

16562831899702.jpg“린 씨!”

린이 그 목소리에 퍼뜩 깨어나는 찰나, 옆에서 날아온 망자가 린이 타고 있던 말을 덮쳤다. 까마귀와 싸우다가 패대기쳐진 짐승이었다. 말은 순식간에 균형을 잃었고, 린이 낙마하기 전에 달려온 레나가 그를 단숨에 낚아챘다. 레나는 린을 끌어당겨 자신의 뒤에 앉혔다. 위기를 면한 린은 레나의 뒤에서 검을 뽑았다. 다급히 말을 모는 레나를 엄호하기 위해서였다.

16562831899702.jpg“우리에겐 관심이 없어요!”

레나가 말발굽의 거친 진동을 견디며 소리쳤다. 레나의 말마따나 망자들은 레나와 린에겐 아무 관심이 없었다. 오직 패를 나눠 격렬히 싸울 뿐이었다. 용과 짐승이 한 편이었고, 까마귀는 혼자 그들을 상대했다. 짐승이 까마귀의 몸을 물어 제압하면 용이 날아와 발톱으로 까마귀들을 찢어발겼다. 그들의 연계 공격에 까마귀들이 열세에 몰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까마귀들이 돌연 공격을 멈추고 몸을 웅크렸다.

16562831899702.jpg‘뭐지?’

곁눈으로 까마귀들을 살피던 레나가 미간을 좁혔다. 찌이익, 찌익. 까마귀들의 고풍스러운 옷이 찢기더니 그들의 등에서 거대한 날개가 돋아났다. 까마귀의 칠흑색 날개였다.

16562831899702.jpg‘날개가 있었어?’

레나의 경악을 뒤로 한 채, 까마귀들은 땅을 차며 날아올랐다. 그러곤 다시 공중에서 용들과 맞부딪혔다. 지상에서는 둘을 상대해야 하니, 공중에서 일단 하나부터 처리할 심산이었다. 하지만 용들도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나자의 망자들은 칼리고가 다스리던 때보다 한층 강해져서 입으로는 벼락을 토해냈다.

16562831899702.jpg‘유니…….’

유니가 걱정스러워진 레나는 이를 악물며 더 힘껏 내달렸다. 그리고 시가지를 빠져나와 숲에 도달했을 때, 레나와 린은 간절한 마음이 무색하게 걸음을 멈췄다.

16562831899702.jpg“이제 어떡하죠?”

레나의 물음에 린은 입술을 깨물더니, 돌연 제복 코트를 벗어 갈기갈기 찢었다.

16562831899702.jpg“린 씨?”

16562831899696.jpg“얼굴을 가리고 가는 수밖에.”

린은 그렇게 말하며 코트의 원단으로 복면을 만들었다. 그러곤 레나에게도 복면으로 쓸 천을 건넸다. 허접한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두 사람은 다시 말에 올랐다. 원래 동부인들의 은신처는 균열 뒤편에 바로 붙어 있었다. 그런 까닭에 균열이 더 확대된 지금, 숲 근처는 균열로 나온 망자들로 득실댔다. 뚜렷한 목적을 가진 그것들은 역시나 레나와 린을 무시했다. 하지만 간혹 사자 왕의 망자들은 산 자의 살 냄새를 킁킁대며 괜한 관심을 보였다. 간혹 본능에 이끌린 듯 두 사람에게 달려드는 망자들도 있었다. 린이 고삐를 잡는 동안 레나가 채찍으로 망자를 쳐서 돌려보냈다. 큰 위협이 아니었지만, 망자들이 사람을 공격하는 것을 보며 두 사람의 걱정은 더 깊어져만 갔다. 린은 숲길을 헤치며 은신처로 말을 몰았다. 하지만 질주도 잠시, 린은 돌연 우뚝 멈췄다.

16562831899702.jpg“린 씨?”

레나가 의아해하며 말을 세운 린을 돌아보았다. 린이 말을 세운 곳은 더 크게 번진 붉은 균열 앞이었다. 린이 말이 없자, 레나는 불길한 예감에 되물었다.

16562831899702.jpg“설마 여기예요?”

린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나는 당황한 린에게서 고삐를 빼앗아 균열의 경계를 따라 달렸다. 앞으로 쭉 달리니 그제야 사람의 흔적이 보였다. 벌목된 나무, 다져진 오솔길 같은 것이. 레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오솔길을 따라갔다. 그러곤 린처럼 그대로 얼어붙었다. 마을이 보였다. 하지만 그 마을은 이미 균열에 반쯤 먹혀 있었다. 몰려나온 망자들에게 짓밟힌 것인지, 밖에 남은 집들도 다 부서지고 허물어진 채였다.

16562831899696.jpg“안 돼…….”

린은 신음하며 구르듯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러곤 폐허가 된 마을로 달려갔다. 무너진 집, 흩어진 집기, 이리저리 나뒹구는 옷가지들. 린이 그것들을 황망히 바라보는데, 레나가 뒤따라와 그를 다그쳤다.

16562831899702.jpg“시체는 없어요!”

16562831899696.jpg“뭐?”

16562831899702.jpg“봐요, 시체는커녕 핏자국도 없잖아요. 다들 대피한 거예요.”

레나의 말에 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다시 주변을 보았다. 말마따나 집이 부서졌을 뿐, 사람이 다친 흔적은 전혀 없었다.

16562831899702.jpg“균열이 커지는 걸 보고 도망쳤을 거예요. 찾아봐요.”

유니가 걱정스럽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레나는 냉정을 유지하며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16562831899696.jpg“알겠어, 흩어지자.”

비록 말은 한 마리뿐이지만, 린은 더 효율적인 방법을 제안했다. 자신의 안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제안이기도 했다.

16562831899696.jpg“말을 몰고 균열 뒤쪽으로 가줘. 나는 이 아래로 내려가는 능선 쪽으로 갈게.”

16562831899702.jpg“그래서 찾으면요?”

16562831899696.jpg“이걸 불어줘.”

린은 그렇게 말하며 부서진 집에서 찾은 피리를 레나에게 건넸다. 나무를 깎아 만든 손가락만 한 피리였다. 살짝 불어보니 제법 높은 소리가 났다. 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린은 그대로 숲길을 내달렸다. 마치 악몽 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레나와 나눈 직전의 행복이 다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저주가 사라졌으니 조금 더 평범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망자의 왕이 된 나자의 횡포에 또다시 모든 게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가까스로 지켜낸 사람들이다. 그가 제국의 공작 노릇을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잡견에 매국노라는 모욕도 이들을 위해 견뎌왔다. 그것이 잔인한 어머니 대신 자신이 해야 하는 속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또, 이렇게 또……. 절박하게 달리는 린의 귓전에 낮은 짐승 소리가 울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망자는 이미 린의 코앞까지 달려든 상태였다.

16562831899696.jpg“큭!”

린은 두 팔로 앞을 가렸다. 그러곤 온몸으로 달려든 망자와 뒤엉켰다. 망자가 린을 덮쳤고, 린은 그의 날카로운 발톱 아래서 검을 뽑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망자가 이빨을 따각 대며 린을 물어뜯으려 들었다. 그것이 기어이 린의 어깨를 깨무는 찰나, 린의 검이 그것의 몸통을 꿰뚫었다. 크르륵, 망자가 경련하는 사이 린은 몸을 옆으로 빼며 검을 밀어 올렸다. 망자의 몸통이 그대로 찢겨나갔고, 그것은 이내 숨이 끊어져 연기를 피웠다. 유황 냄새가 진동했지만 코를 막을 겨를조차 없었다. 또 다른 망자가 린을 덮쳤다. 린은 그것을 차내고 다시 검을 박아넣었다. 겨우 서너 마리의 망자를 치운 린은 멀리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이를 악물었다. 습관처럼 자신의 상처에서 난 피를 훑다가 권능이 사라진 걸 알고 절망했다. 예전 같으면 곧장 찾았을 텐데. 사람이든 망자든, 원하는 대로 조종했을 텐데. 사라진 권능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지만 린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가파른 계곡을 오르던 린의 등 뒤로 다시금 망자들이 덮쳐왔다. 이번엔 위치가 좋지 않았다. 망자들의 공격을 피하던 린은 그만 발을 헛디뎌 경사진 비탈에서 미끄러지고 말았다. 가까스로 몸을 굴려 충격을 면했지만 그럼에도 온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게다가 목덜미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머리에서 피가 흐르는 모양이었다. 놈들도 피 냄새를 맡았는지 얼굴이 한층 험악해졌다. 군침을 흘리는 표정이었다.

16562831899696.jpg“비켜…….”

린이 검을 세우며 윽박질렀다.

16562831899696.jpg“죽었으면 그만 좀 비키라고!”

린과 망자들이 다시 한번 뒤엉켰다. 붉은 피와 검은 피가 어우러졌다. 망자들은 린의 피를 맛보고 싶어 하며 혀를 날름거렸고, 린은 초조함을 분노로 바꿔 그들을 도륙했다. 처음엔 호각처럼 보였지만 판세는 곧 기울었다. 이미 몇 명의 망자를 돌려보낸 린은 점점 지쳐갔다. 호흡은 가빠졌고 계속해서 흐르는 피 때문에 현기증마저 느껴졌다. 그리고 그 절박한 순간 떠오른 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옛 친구의 목소리였다.

16562831961342.jpg―너도 절대 그 사람을 용서하지 마.

아, 제발. 이제 그만 당신을 용서하게 해줘. 죽어서도 죄를 짓지 말아줘. 린은 절박하게 바라며 망자 한 마리를 다시 베어넘겼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더는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언덕 너머에서 또 한 무리의 망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사신과 조우한 기분에, 비로소 레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너무 지친 탓인지 희한한 생각이 들었다. 나도 저렇게 망자가 되면, 무덤 속에서 레나와 영원히 함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16562831899696.jpg‘바보 같은 생각 하지 마.’

린은 정신을 차리며 스스로를 꾸짖었다. 이대로 죽어버리면 레나에게 절대 용서받지 못할 거다. 린은 이를 악물며 땀과 먼지로 더러워진 복면을 뜯어버렸다. 그러곤 숨을 깊게 들이쉬며 흔들리는 무릎을 세웠다. 망자들이 땅을 박차며 달려왔다. 린이 그중 가장 앞에 있는 놈을 쳐올리려 할 때였다 일순 돌풍이 몰아친다 싶더니, 땅에서부터 화염이 솟구쳐 망자들을 집어삼켰다.

16562831899696.jpg‘무슨…….’

린은 살갗을 스치는 열기에 황급히 물러났다. 끔찍한 업화 속에서 망자들이 지글대며 타들어 갔다. 하지만 두려움을 모르는 망자들은 개의치 않고 불길을 피해 다시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들의 시도는 저지되었다. 파바박! 위에서 내린 화살이 망자들의 위로 쏟아졌다. 그을리고 꿰뚫린 망자들이 비틀댔고, 린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망자들의 목을 그었다. 쓰러진 망자들이 연기로 화하자 린은 화살이 날아온 쪽을 돌아보았다. 그때 화살 한 대가 날아와 린의 뺨을 스쳤다. 린이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뜨자, 언덕 위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62831961342.jpg“아차.”

소년이 혀를 차는 소리였다. 그 소리를 쫓아 위를 보니 활시위를 놓고 뜨악 하는 진과 그 녀석의 귀를 잡고 흔드는 휘가 보였다. 그 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언덕 위에는 익숙한 동부 사람들이 활을 들고 서 있었다. 그들의 무사한 모습에 린은 맥이 탁 풀리는 걸 느꼈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도 잠시, 린은 자신의 꼴을 떠올리고 소스라치게 놀라 얼굴을 가렸다.

16562831899696.jpg‘복면이…….’

벗겨졌다. 자신이 맨 얼굴인 걸 깨달은 린은 겁에 질려 주춤댔다. 그런데 그때 그의 눈에 더 기이한 광경이 들어왔다. 동부 사람들 사이에 한 노인이 서 있었다. 푸른 제복을 입은 노인, 남부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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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2831899696.jpg‘당신이 왜 여기…….’

린이 묵음으로 묻자, 그 소릴 듣기라도 한 듯 남부공과 사람들이 언덕을 내려왔다. 그들이 다가오자 린의 당혹감도 더 깊어졌다. 린은 차라리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애써 그러지 않았다. 어쩌면 이 또한 자신이 감내해야 할 형벌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우두커니 서서 다가오는 이들을 기다렸다. 이윽고 휘를 비롯한 사람들이, 그리고 남부공이 린의 앞에 섰다. 양측 모두에게 배신자인 린은 차마 그들을 보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때, 땅을 향한 린의 시야에 신발 하나가 성큼 들어오더니 누군가가 그를 끌어안았다.

16562831961342.jpg“고맙소.”

휘였다. 휘가 린의 얼굴을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로써 마주하게 된 그 여인은, 마치 어린 동생을 보듯 린을 보며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16562831961342.jpg“이제 충분하니 혼자 싸우지 마시오.”

휘의 속삭임에 린은 머리가 멍해졌다. 아까와 다른 의미로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16562831899696.jpg“나는…….”

천천히 운을 떼던 린은 도로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주저하다가 고개를 돌려 남부공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정말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린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자 남부공이 그에게 다가왔다. 동부공을 향하는 남부공의 눈에는 항상 경멸과 분노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남부공의 눈빛은 고요했다. 남부공이 린의 앞에 섰다. 그러더니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짚었다. 린이 놀라서 숨을 마시자, 남부공이 나직이 말했다.

16562831987327.jpg“그동안 미안했네. 자네를 오해해서.”

그 한마디에 린은 눈을 감았다. 파도가 밀려오는 기분이었다. 사무치던 모든 것이, 파도에 쓸려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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