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유니가 주인님2021.10.18.
남부공의 사과에 린은 고민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정작 머릿속은 텅 비어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남부공만이 아니라, 지금 자신을 바라보는 동포들에게도 말하고 싶었다. 나를 미워하지 않는지, 받아들일 수 있는지, 그리고 용서할 수 있는지를. 린이 용기 내어 운을 떼려는데, 그의 무릎이 휘청하고 꺾였다. 치열하게 싸운 몸이 더 견디지 못하고 흔들리자 휘가 그를 받쳐주었다.
“괜찮으시오?”
그렇게 묻는 휘의 어조는 린이 까마귀 탈을 쓰고 있을 때와 다름이 없었다. 린은 그것에 깊이 안도하며 동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빛도 고요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외부인이 아니라 동료를 보는 눈이었다. 린은 그들의 시선에 안심하며 휘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우리도 모르오. 별안간 저 붉은 창이 벌어져 마을을 덮쳤소. 급한 대로 도망치다가 숲에서 저 양반을 만났지 뭐요.”
휘가 동부어로 속닥이며 남부공을 눈짓했다. 그러자 남부공은 자기 얘기 하는 걸 알고 어흠 헛기침을 토했다. 그렇게 시선을 주고받는 모습이 초면 같지 않았다. 린은 그 모습을 어색하게 번갈아 보다 되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들 무사하오. 다만 그 아이가…….”
“그 아이?”
“유니라는 아이가 아까부터 보이질 않소.”
겨우 추스른 린의 가슴이 또 한 번 쿵 하고 곤두박질쳤다.
*** 그 시간, 레나는 여전히 달리고 있었다. 레나도 도중에 망자들을 몇 번 조우했다. 하지만 채찍으로 거꾸러트린 후 말을 달려 도망친 탓에 레나의 상태는 아직 양호했다. 물론 양호한 건 겉모습뿐, 속은 이미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제발 무사해 줘…….’
레나의 눈앞에 유니의 모습이 어른댔다.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했다. 구하고 싶다고. 나를, 그리고 우리를 닮은 저 아이를 구하고 싶다고. 어쩌면 대리만족이었는지도 모른다. 가장 필요할 때 보호받지 못한 내 꼴이 처량해, 너만은 다르길 바랐다. 레나는 그런 마음으로 유니를 찾아갔고, 그를 구하고 나서 깨달았다. 나만 이 아이를 구한 게 아닌 걸, 이 아이도 나를 구했다는 걸. 마침표를 찍기 위한 여정이었다. 이미 벌어진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레나는 망자의 왕이 되어 돌아왔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끝이 정해진 삶. 그런 레나에게 유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과거와 함께 침몰할 자신이 남길 수 있는 유일한 미래. 그게 유니였다. 레나를 고통 속에서 견디게 한 것이 비트라의 시라면, 그리고 레나를 강하게 만든 것이 레지나였다면, 그를 부드럽게 다듬은 건 유니였다. 아직도 기억난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유니를 보며 느낀 신기한 감정들. 그저 이 아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켜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때의 생각은 곧 애정이 되었고, 그건 레나를 슬프게도 하고 기쁘게도 했다. 생면부지의 타인도 느끼는 애정을 부모에게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새삼 절망스러웠다. 동시에 자신에게 나눠줄 수 있는 마음이 있는 것에 안심했다. 비록 냉정한 부모를 만나 사랑도 미움도 받지 못한 채 철저하게 이용당했지만, 그럼에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에 몇 번이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 마음으로 돌본 아이였다. 유니는, 레나에게 그런 아이였다.
“……저씨!”
레나가 초조함을 삼키며 종횡무진 달릴 때였다. 불현듯 소란스러운 발굽 소리를 뚫고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니?’
레나는 황급히 말을 멈췄다. 그러곤 다시 뒤로 돌아가 귀를 기울였다. 그러길 잠깐, 곧 레나의 귀에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싸우는 소리.’
레나는 소리가 멀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말에서 내렸다. 그러곤 우거진 나무에 몸을 숨기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접근했다. 이윽고 레나는 한층 낮은 지대에서 사자 왕의 망자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무언가를 몰고 있었다. 레나는 그들이 누굴 쫓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채찍을 휘둘렀다. 망자들을 내동댕이친 후 레나는 그대로 언덕에서 뛰어내렸다. 그러곤 다시 달려드는 망자들을 검으로 도륙해버렸다. 서너 합 만에 망자들을 제압한 레나는 연기로 변하는 피를 닦으며 주위를 두리번댔다. 그때 등 뒤에서 한 목소리가 레나를 반겼다.
“아가씨!”
유니였다. 유니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레나는 안도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조금 당황했다. 유니가 웬 남자에게 안겨 있었다. 레나도 익히 아는 남자였다.
“……이우라 씨?”
그는 북부공 이우라였다. 비록 제복 외투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셔츠는 흙투성이에 구겨져 너덜너덜하지만, 얼굴도 머리도 엉망인 데다가 군데군데 생채기까지 가득해 부랑자 꼴을 면치 못하고 있지만, 그는 어쨌든 확실히 이우라였다. 그 만신창이의 이우라는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댄 채 한 손엔 검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유니를 안고 있었다. 전혀 상상도 못 한 조합에 레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엉망이 된 이우라도 참신하지만 유니와 이우라도 만만찮게 혁명적이다. 레나가 그들을 가만히 쳐다보자 유니가 이우라의 팔을 탁탁 치며 채근했다.
“아, 이것 좀 놔봐요!”
유니는 이우라의 팔을 뿌리치더니 레나에게 달려들어 와락 안겼다.
“아가씨, 엄청 걱정했어요!”
“……제가 할 말 같은데요.”
레나는 안도와 놀람이 뒤섞인 얼굴로 유니의 뺨을 들어올렸다. 엉망인 이우라와 달리 유니는 아주 멀쩡했다.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어쩌다가 여기까지 온 거예요?”
“저 아저씨 때문에요.”
레나의 물음에 유니는 가감 없이 이우라를 가리키며 일러바쳤다. 레나는 다시 이우라를 돌아보았고, 또 한 번 당황했다. 이우라는 아주 분한 눈으로 레나와 유니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눈빛이 마치 루비드 같았다. 사납기는 한데 점잖지는 못한, 툭 치면 제 분에 못 이겨 왈왈 짖어댈 것 같은 눈빛. 궁지에 몰린 루비드의 눈빛이었다. 그 눈을 이우라가 똑같이 하고 있다. 전혀 안 닮은 형제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닮은 꼴에 레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하지만 이 상태가 가장 당황스러운 건 레나가 아니라 이우라였다. . . . 균열이 더 크게 찢어지기 전날, 이우라는 삐걱대는 몸을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움직이는 데 지장은 없나.’
아직 성한 몸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무리 없이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우라는 이대로 떠날까 하다가 도로 자리에 앉았다. 도움을 받았다. 무례하고 시끄러운 꼬마지만, 심지어 자신을 기만했지만 어쨌든 이 정도 회복한 건 그 꼬마 덕분이다. 그러니 움직이기 전에 다시 한번 물어나 볼 생각이었다. 제국의 요새로 가겠냐고. 만약 그 아이가 가겠다고 하면 데려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안 가겠다고 하면…….
‘레나 루벨의 배후를 의심할 수밖에.’
레나의 하녀는 서부 요새로 오던 중 실종됐다. 그 후 여기로 흘러온 게 순전한 우연이라면, 꼬마는 당연히 요새로 돌아갈 것이다. 거기가 원래 있어야 할 곳이고, 그래야 제 주인을 만날 테니까. 하지만 동행을 거부한다면 다른 가능성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곳에 있는 배교자들이 레나 루벨과 내통하고 있을 가능성을.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이우라는 눈을 가늘게 뜨며 미간을 좁혔다.
‘만약 의심이 사실이라면?’
처단해야 한다. 고민할 것도 없이. 이곳에 있는 배교자들이든, 레나 루벨이든, 그 꼬마든. 그게 서부를 감독하는 자신의 역할이니까. 이우라는 가늘게 뜨고 있던 눈을 결국 질끈 감았다. 이우라는 이제껏 자신의 역할에 의구심을 품어 본 적이 없다. 갈등한 적도, 망설인 적도 없다. 선친의 유언 때문이었다.
―부디 복수하지 말아라. 싸워서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있다.
―몸을 낮춰라. 숨을 죽이고 네가 지켜야 할 자들을 지켜라.
―너는 단지 너 하나가 아니다.
강직한 아버지는 실패했다. 대신 목숨을 걸고 가족과 가문을 지켰다. 그걸 아는 이우라는 똑같은 의무를 짊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러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했다. 아버지를 존경하는 마음과 그 시절 품었던 신념을 스스로 저버렸다. 황제의 정체를 눈감기 위해서였다. 이제껏 그것이 옳은 길이라 믿어왔는데, 돌연 나자가 그 믿음을 흔들었다. 그래서 이우라는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웠다.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가 이우라를 상념에서 깨웠다. 힐끗 시선을 돌리니 오두막의 삐걱대는 문틈으로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레나 루벨의 하녀였다. 허술한 나무판자 사이로 서로의 얼굴이 훤히 보이는 상황인데, 그 아이는 굳이 노크하고선 이렇게 종알댔다.
“아저씨의 존엄을 위한 노크예요. 들어가도 되죠?”
아이는 그렇게 말하며, 아직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종종걸음으로 들어왔다. 그 아이는 오늘도 어김없이 먹을 것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가 들고 온 바구니에는 새 붕대도 담겨 있었다.
“붕대 갈아요.”
꼬마는 그렇게 말하며 이우라의 머리에 감긴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굳은 피가 떨어지는 게 느껴졌지만 이우라는 가만히 있었다. 아이는 이런 게 익숙한지 능숙하게 붕대를 다시 감고 후처리도 꼼꼼히 끝냈다. 꼬마가 자신의 코앞에 작은 몸통을 내밀고 붕대를 가는 동안 이우라는 만감이 교차했다. 꼬마는 오늘도 복면을 썼다. 그런 주제에 자신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심지어 가까이 다가와 치료한다. 내가 제국의 공작인 걸 알면서. 나는 네 모든 것을 부숴버릴 수도 있는 사람인데. 이우라는 이 꼬마의 행동이 불만스러웠다. 너도 지켜야 할 것이 있을 터다. 하지만 그건 그 얄팍한 복면으로는 감출 수도 지킬 수도 없다. 내가 의무를 다하기 위해 네 복면을 벗겨내고 너의 배후를 쓸어버리면, 너는 그제야 자신의 어리석은 선의를 후회할까? 어쩐지 기분이 나빠진 이우라는 자신의 어깨로 내려온 아이에게 나직이 말했다.
“왜 이렇게까지 하지?”
“네?”
“나는 널 해칠 수도 있다.”
“아저씨 인성에 문제 있어요?”
하지만 아이는 도리어 버릇없이 투덜댈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이우라의 어깨에 붕대를 감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그 안일함이 이우라를 조금 더 언짢게 만들었다. 아니, 화나게 만들었다. 이우라는 자신의 두려움을 이 꼬마가 조금이나마 느끼길 바랐다. 그래서 옆에 앉은 꼬마의 가는 목을 말없이 움켜쥐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남자의 큰 손이 목덜미를 휘감았지만 아이는 여전히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래서 이우라가 힘을 주어 아이의 목을 잡았지만, 그럼에도 꼬마는 절대 기죽지 않았다.
“미리 말하는데 여기서 더 하면 나도 가만히 안 있어요.”
“가만히 안 있으면?”
이우라가 묻기 무섭게, 꼬마가 그의 안면을 박아 버렸다. 돌처럼 딱딱한 이마로. 턱에 강한 충격을 받은 이우라는 저도 모르게 물러났고, 아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부목을 댄 이우라의 부러진 팔을 콱 밟아버렸다. 이우라는 가까스로 비명을 참았다.
“아저씨, 뭔데요? 왜 심술을 부려요, 다 큰 어른이. 외로워요?”
그리고 꼬마는 여전히 눈앞에서 얼쩡대며 태연하게 종알댄다.
“나름 산전수전 다 겪어보고 하는 말인데, 정말 해를 끼칠 사람은 그런 말 안 해요. 아닌 척하면서 확 덮치죠. 그럼 아저씨처럼 주절대는 사람은 뭐다? 관심이 필요한 사람이다.”
꼬마가 멋대로 지껄인다. 겨우 통증을 가라앉힌 이우라가 유니를 매섭게 쏘아봤다. 그럼에도 꼬마는 겁먹지 않고, 오히려 그 앞에 쭈그려 앉아 눈을 맞추며 물었다.
“아저씨는 도움받는 게 그렇게 불편해요?”
꼬마의 물음에 이우라는 섬뜩함을 느꼈다.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이우라가 말없이 노려보기만 하자 꼬마, 유니가 당당하게 말했다.
“불편해하지 말아요, 친절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