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4화. 이우라 플레누스의 굴복 (154/208)

154화. 이우라 플레누스의 굴복2021.10.21.

16562832227848.jpg“친절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거니까요.”

꼬마는 여느 때처럼 으스대며 말했다. 덕분에 이우라는 얼이 빠졌다. 친절? 그건 의무가 아닌 얄팍한 변덕이다. 이우라가 제국의 의무를 짊어지며 철저히 배제해 오던 것이기도 했다. 친절이니 선의니 하는 것들. 그건 의지할 수도, 의존해서도 안 될 개념이었다. 웃기지도 않는 흰소리에 이우라는 조용히 생각했다.

16562832227854.jpg‘……복면을 벗겨버릴까.’

그럼 이 꼬마가 긴장할까? 비로소 자신의 위태로운 처지를 깨달을까? 함부로 친절을 베푼 대가가 무엇인지 알게 될까? 그렇게 생각하던 이우라는 환멸을 느끼며 속으로 혀를 찼다. 이 이상 어린애에게 진지해져봤자 자기 꼴만 우스워질 뿐이다. 피곤해진 이우라는 결국 시선을 피했고, 유니는 그의 옆얼굴을 오히려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우라는 유니가 정도를 모르고 까분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유니는 생존을 위해 상대의 본성을 헤아리던 아이였다. 때문에 거의 본능처럼 발을 뻗을 곳을 안다. 어디까지 다가가야 괜찮은지 알고, 어느 정도 간섭해도 되는지를 안다. 그리고 그런 유니의 견해로, 이 북부공은 행동만 과묵할 뿐 어지간한 사람보다 속 시끄러운 양반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별로 위험하지 않다.

16562832227848.jpg‘왜냐하면 혼자서 삽질하니까.’

유니는 스스로의 판단에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래, 혼자서 삽질. 이 아저씨에 대한 가장 정확한 표현이다. 만약 이우라가 ‘날 도와주면 돌아가서 보상하겠다.’라고 했다면 유니는 오히려 경계했을 거다. 미끼로 상대를 이용하려 드는 인간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우라는 철저히 불리한 와중에 ‘왜 이렇게까지 하지?’라고 말했다. 상식적이지도 않고 사리에도 맞지 않는, 자신이 그어둔 선이 분명한 자들이나 할 법한 말이었다. 그래서 유니는 북부공의 자의식이 참으로 비대하다고 생각하며 앞선 물음에 대답했다.

16562832227848.jpg“도움받는 게 자존심 상할 순 있는데 어쩔 수 없잖아요. 여긴 제국이 아니라 아무도 없는 숲속이고, 아저씨는 다쳤으니까. 그럼 이유는 충분한 거 아니에요?”

유니가 이렇게까지 말했지만 북부공은 알아먹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유니는 두 주먹을 허리에 얹고, 한층 더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16562832227848.jpg“도움을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여유가 없다면 이해할게요. 부끄러워할 건 없어요. 나는 친절한 사람이니까요.”

  . . . 시끄러운 꼬마는 시끄럽게 굴다가 돌아갔다. 그래서 이우라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혼자 밤을 맞았다. 분명 낮에 나오려고 했는데 멍하니 생각하는 사이 어느덧 어둠이 내렸다. 결국 여기서 하룻밤을 더 보내게 된 이우라는 조용히 오두막 밖으로 나왔다. 그러곤 빈터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에 별이 가득했다. 그리고 한없는 별빛은 이미 심란한 그의 마음을 더 부추겼다. 이우라는 그 꼬마가 친절 운운한 것이 왜 그렇게 거슬렸나 생각해보았다. 답은 뻔했다. 그 말이 자신의 못난 부분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비겁하게 황제의 눈치나 보는, 북부공의 허울뿐인 자신을. 북부의 왕이 되며 타인에게 친절하게 구는 법 따윈 잊었다. 대신 황제의 비위를 맞추는 법만 새로 배웠다.

16562832227854.jpg‘……나는 틀리지 않았어.’

환멸을 느낀 이우라는 스스로를 위해 애써 변명했다. 자신이 비겁해진 대가로 지켜낸 것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위안을 얻기 위해 한 그 생각은 이우라의 얼굴을 도리어 일그러지게 만들었다. 동생의 냉랭한 모습이 떠오른 탓이었다. 결국 이우라는 눈을 질끈 감아 별빛을 외면했다. 나는 정말 틀리지 않았나? 두렵게 묻는 이우라의 뇌리에 나자의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16562832227875.jpg―제국의 만행에 가담한 대가는 니힐을 쳐서 갚겠다.

가장 존경하던 이의 선언에, 애써 견뎌오던 이우라는 부서질 것만 같았다. . . .

16562832227848.jpg“좋은 아침요. 아저씨, 잘 잤어요?”

꼬마는 다음날에도 어김없이 나타났다. 아무래도 이 꼬마는 우연히 획득한 인간 남자를 다친 개나 고양이처럼 취급하는 것 같았다. 어제 유니에게 잔뜩 까인, 덕분에 밤새 뒤척여야 했던 이우라는 유니를 본체만체하며 외면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유니는 뻔뻔하게 오두막 안을 헤집고 다녔다. 그러다 문득 꼬마가 물었다.

16562832227848.jpg“아저씨, 슬슬 돌아가야죠? 몸도 많이 나았으니까요.”

그 물음에 이우라는 비로소 꼬마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꼬마는 이전보다 진지한 투로 덧붙였다.

16562832227848.jpg“만약 돌아가면 우리 동네 다시 안 올 거죠?”

16562832227854.jpg“……이제 와서 두려운가?”

이우라는 꼬마의 염려를 눈치채고 되물었다. 꼬마는 부정하지 않았다.

16562832227848.jpg“걱정이 안 된다면 거짓말이죠. 아저씨는 제국 사람이니까.”

16562832227854.jpg“날 죽게 뒀으면 생기지 않을 걱정이었다.”

16562832227848.jpg“맞아요, 걱정을 떠안으면서까지 구해준 거라고요.”

이우라가 비난조로 말했지만 유니는 그것을 공치사로 돌렸다. 덕분에 이우라는 잠시 할 말을 잃었고, 그 사이 유니가 당당히 요구했다.

16562832227848.jpg“그러니까 아저씨도 제 친절에 보답해주세요.”

친절, 그놈의 친절, 책임지지도 못할 친절. 이우라는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딱 잘라 거절하고 꼬마의 반응을 감상하기로 했다. 지켜야 할 것을 뒤로한 채 대책 없이 행동한 대가는, 나이가 어리다고 피해 가는 게 아니니까. 그렇게 마음먹은 이우라가 막 운을 떼려던 찰나였다. 콰과과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진동이 밖에서 들려왔다. 천둥도 산사태도 아닌, 하지만 그에 견줄 만큼 거대하고 압도적인 소리였다. 유니와 이우라는 놀라서 오두막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러곤 가슴이 서늘해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이 숲과 인접한 균열이 더 벌어지고 있었다. 마치 빙하가 부서지는 듯한 굉음을 내며 세상의 경계를 점점 더 찢어나갔다. 이런 광경은 유니도 이우라도 처음이었다.

16562832227848.jpg“어어?”

손차양을 하고 균열을 보던 유니가 돌연 소리를 질렀다. 새빨간 균열에서 무언가가 마구 쏟아져나왔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은 모두 하늘을 날고 있었다. 용의 형상을 한 망자들이었다. 유니가 그것을 관찰하는 사이에도 균열은 점점 더 벌어졌다. 그리고 공중이 아닌 지면 위로도 망자가 마구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유니와 이우라는 그걸 미처 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사실을 비로소 깨달은 건, 망자들의 발소리가 지척까지 다가온 후였다.

16562832227854.jpg“도망쳐!”

유니보다 한발 먼저 소리를 들은 이우라가 낮게 윽박질렀다.

16562832227848.jpg“뭐, 왜요?”

16562832227854.jpg“망자가 오고 있다.”

16562832227848.jpg“네?”

유니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짓자 이우라는 두말을 하는 대신 유니를 들쳐 안았다. 급한 마음에 도망치라고 했지만, 이 꼬마가 혼자 도망쳐본들 얼마나 도망치겠나 싶은 탓이었다.

16562832227848.jpg“아저씨, 잠깐만요!”

그런데 유니가 돌연 발버둥을 쳤다. 이우라가 잠시 주춤대는 사이 유니는 그의 팔에서 뛰어내렸다. 그러곤 후다닥 오두막으로 달려갔다. 이우라는 이 와중에 뭘 챙기려고 저러나 답답하게 지켜봤다. 그런데 잠시 후, 유니가 뜻밖의 것을 낑낑대며 들고 나왔다. 일전에 내다 버렸다고 한 이우라의 검이었다. 그 검을 오두막에서 꺼내온 유니를 보며 이우라는 망할 꼬마라는 말을 저도 모르게 중얼댔다.

16562832227848.jpg“아저씨, 자요!”

이우라는 검과 꼬마를 단숨에 낚아챘다. 거의 동시에 피 냄새를 맡고 달려온 망자들이 수풀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네발짐승의 몸을 가진 망자들이 땅을 박찼다. 이우라는 부목을 댄 팔로 아이를 안은 채 참격을 날렸다. 그 위력적인 권능에 짐승들이 썰려나갔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더 벌어진 균열로부터, 망자들은 끝도 없이 몰려나오고 있었다. 그때부터 이우라는 말 그대로 전쟁 같은 시간을 보냈다. 혼자 수십 마리의 망자를 상대했다. 성치도 않은 몸으로, 아이를 안은 채로. 그로써 새로운 상처가 생기고 오래된 상처는 다시 벌어졌다. 그 와중에 아이를 버릴까 하는 생각이 몇 번이고 들었다. 짐을 덜어내면 몸이 가벼워질 것이다. 미끼를 던져주면 망자들의 주의를 끌 수 있을 것이다. 합리적인 발상이 몇 번이나 뇌리를 스쳤지만, 이우라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유니를 놓지 못했다. 자신의 어깨를 붙잡은 손이 너무 간절해서, 그 손을 놓치면 나락으로 떨어질 것만 같아서. 그렇게 만신창이가 됐을 때였다.

16562832227848.jpg“아저씨, 나 내려놔요! 혼자 도망칠 수 있어요!”

이우라의 불안정한 호흡을 눈치챈 듯, 유니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덕분에 이우라는 기가 막혔다. 내려놓으라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아니, 반갑게 여겨야 하는 소리다. 하지만 이우라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짜증 비슷한 것을 느꼈다. 유니가 옆에서 알짱거릴 때 느낀 것과 같은 감정이다. 친절 운운하며 주제넘게 설교할 때도 이런 기분이었다. 정말이지 어이가 없어서, 답답하고 짜증 나서, 왠지 비참해서. 어처구니없게도 부러워서. 결국 이우라는 더 참지 않고 자신이 아는 대로 유니를 호명했다.

16562832227854.jpg“레나 루벨의 하녀.”

레나의 이름이 나오자 유니가 깜짝 놀라는 게 느껴졌다. 정말 정체를 잘 숨겼다고 믿었나 보다. 이우라는 참으로 같잖다고 생각하며 물었다.

16562832227854.jpg“너는 이름이 뭐지?”

16562832227848.jpg“……유니요.”

16562832227854.jpg“유니.”

이우라는 유니의 이름을 되뇌더니, 반쯤 흘러내린 꼬마의 몸을 단호히 추스르며 말했다.

16562832227854.jpg“내게 명령하지 마라.”

16562832227848.jpg“네?”

16562832227854.jpg“네가 가르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으니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유니가 또 한 번 네? 하고 되물었다. 하지만 이우라는 더 말하지 않고 검을 들었다.

16562832310402.jpg

*** 레나가 나타난 건 그로부터 얼마 후였다. 마침 시기적절하게 등장한 구원자였지만 이우라는 레나를 그리 반기지 않았다. 뒤도 안 돌아보고 자신을 내팽개친 유니 때문이지만, 레나와 유니는 그걸 알 리 없었다. 그래서 레나는 이우라 플레누스가 왜 루비드 플레누스마냥 불만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지 궁금해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레나는 일단 그에게 인사했다.

16562832310408.jpg“고마워요, 내 친구를 구해줘서.”

16562832227848.jpg“아녜요, 아가씨. 먼저 구해준 건 저예요.”

레나의 감사 인사에 유니가 냉큼 끼어들었다. 덕분에 레나는 조금 더 혼란스러워졌다. 레나가 눈을 깜빡이는데, 돌연 이우라의 음성이 들려왔다.

16562832227854.jpg“레나 루벨.”

레나를 호명한 이우라는 만신창이임에도 불구하고 곧게 서서 레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명백한 적대에 레나의 표정도 굳었다. 그 살벌함에 놀라기는 유니도 마찬가지였다. 이우라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16562832227854.jpg“나는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다.”

16562832310408.jpg“갑자기 무슨 말이죠?”

16562832227854.jpg“정말 황제의 뜻을 거스를 수 있다고 생각하나?”

뜻밖의 물음에 레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덤에서 튕겨져 나오기 직전에 이우라가 했던 말이다. 그는 니힐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하며, 이렇게 말했다.

16562832227854.jpg―강자와 맞서다 죽는 것은 고결한가?

16562832227854.jpg―죽음과 패배를 예상하면서도 덤벼드는 건 현명한가?

16562832227854.jpg―만족스럽긴 하겠지. 하지만 그러고 나면 뭐가 남지? 그 후 남겨질 자들은?

16562832227854.jpg―대책이 없는 것보단 차라리 비굴한 것이 낫다.

레나는 그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16562832310408.jpg“답은 정해져 있지만 당신이 정말 원하는 게 내 대답인지는 모르겠네요.”

그러곤 오히려 이렇게 되물었다.

16562832310408.jpg“당신도 황제의 뜻을 거스르고 싶나요?”

핵심을 찌르는 물음에 이우라의 눈이 더 가늘어졌다. 그는 독인지 약인지 알 수 없는 쓴 물을 앞에 둔 심정으로 읊조렸다.

16562832227854.jpg“도박을 할 수는 없다.”

그러기엔 지켜야 할 것들이 너무 많으니까. 아버지의 전철을 밟아 가족들을 고통에 밀어 넣을 수는 없으니까.

16562832227854.jpg“그러니 대답해라. 너는 정말 황제와 맞설 생각인가?”

이우라의 물음은 진지했다. 그래서 레나도 질문을 멈추고 간결히 대답했다.

16562832310408.jpg“네.”

16562832227854.jpg“승산은, 있나?”

16562832310408.jpg“네.”

16562832227854.jpg“무엇을 위해서?”

16562832310408.jpg“내게 친절했던 사람들을 위해서요.”

레나의 대답에 이우라의 시선이 유니를 향했다. 눈이 마주치자 유니는 멀뚱대며 그를 마주 보았다. 정말이지 저 속 편한 꼬마는 자신이 북부공을 얼마나 괴롭혔는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이우라가 루비드와 꼭 닮은 눈으로 울분을 삼키자, 레나가 저도 모르게 눈치를 보며 되물었다.

16562832310408.jpg“대답이 됐나요?”

16562832227854.jpg“충분하다. 정녕 황제와 싸울 생각이라면…….”

그렇다면 날 먼저 막아봐라. 레나는 이우라가 이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했다. 예전에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레나의 예상은 틀렸다. 이우라는 여전히 어린 하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이렇게 말했다.

16562832227854.jpg“……나도 돕겠다.”

16562832365765.jpg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