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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화. 저울추 (155/208)

155화. 저울추2021.10.25.

레나는 자기가 뭘 잘못 들은 줄 알고 이우라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우라가 굳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1656283244116.jpg“죽은 자들에게서 벗어날 길이 있다면 나도 그쪽을 택하겠다.”

나직이 선언하는 이우라의 시선이 유니를 향했다. 유니는 뭘 보냐는 듯 말똥말똥한 눈으로 그를 마주 봤다. 덕분에 이우라는 한층 더 기가 찼다. 필사적으로 끌고 온 신념을 저런 어린애 때문에 무르다니. 물론 저 아이가 이우라의 마음을 혼자 뒤집은 건 아니다. 니힐과 나자, 죽은 아버지, 그리고 루비드는 마치 같은 무게의 저울추처럼 이우라의 마음에 억지로 균형을 맞췄다. 그래서 그는 이 지긋지긋한 평형상태를 버리지 못한 채 견뎌왔다. 그런데 저 아무것도 모르는 꼬마가 그 위에 은근슬쩍 발을 얹었다. 그래서 균형이 와장창 깨져버렸다. 보기 좋게 휘말렸다는 생각에 이우라는 은근히 화가 났고, 그래서 그의 표정은 또다시 루비드적으로 변했다. 그 낯선 모습에 레나가 유니를 내려다봤지만, 유니는 나는 모르는 일이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뿐이었다.

16562832441167.jpg“……반가운 소리네요.”

이우라의 돌변이 의아했지만, 레나는 나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며 견제하던 북부공이 협조를 해준다면 큰 힘이 될 것이다. 아버지에게도 큰 압박이 될 것이고. 그래서 레나는 의심을 뒤로한 채 선선히 말했다.

16562832441167.jpg“돕겠다면 거절은 하지 않을게요. 그 이야기는 돌아가서 마저…….”

하지만 레나는 하던 말을 맺을 수 없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무언가가 지면과 충돌하며 그들을 덮친 탓이었다. 사방으로 흙과 자갈이 튀었고, 레나는 유니를 감싸며 황급히 물러났다.

16562832441175.jpg“뭐야, 저게…….”

레나의 팔 안에서 유니가 중얼댔다.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무언가가 퍼덕였다. 검고 거대하고 기괴하게 움직이는 것. 그것은 장막 같은 날개를 가진, 그리고 까마귀의 머리를 한 숙녀였다. 그것은 고풍스러운 드레스를 입었으나 풍성하게 치장한 몸은 오히려 부속물 같았다. 본체처럼 살아 움직이는 건 날개였고 몸은 교수대에 달린 시체처럼 이리저리 흔들릴 따름이었다.

1656283244116.jpg“까마귀?”

이우라가 그것을 알아보고 중얼댔다. 커다란 날개가 생기기는 했지만 저건 분명 그가 목책으로 가둔 까마귀였다. 이우라가 상황을 파악할 겨를도 없이, 퍼덕이던 까마귀가 돌연 부리를 벌리며 달려들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이우라가 급히 검을 쥐는데, 레나가 한발 먼저 검격으로 까마귀를 밀어냈다. 하지만 레나는 오히려 혀를 찼다.

16562832441167.jpg‘단숨에 베려고 했는데.’

깃털에 막혀 검이 들어가질 않았다. 까마귀가 날개를 휘둘러 다시 레나와 이우라를 위협했다. 하지만 날개 한쪽이 꺾여서인지 다가오지는 못하고 그 자리에서 퍼덕이는 것에 그쳤다. 레나는 다시 파고들어 끝을 보려다가, 거센 바람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16562832441175.jpg“아가씨, 위에요!”

유니도 같은 걸 보고 소리쳤다. 하늘에서 까마귀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16562832441167.jpg“일단 따라와요!”

그걸 본 레나는 유니를 옆구리에 끼고 이우라에게 소리쳤다. 언덕을 오른 세 사람은 묶어둔 말에 올라탔다. 레나는 고삐를 잡으며 힘껏 피리를 불었다. 하지만 그 소리는 린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그가 있는 곳에도 까마귀가 떨어지고 있었다. ***

16562832441199.jpg“저걸 봐!”

16562832441199.jpg“이쪽으로 오고 있어!”

동부 사람들이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들의 외침 직후, 하늘에서 까마귀들이 쏟아졌다. 땅을 부술 듯이 내려온 그것은 너덜너덜해져서 검은 피를 뚝뚝 흘렸다. 마치 찢어진 종이 인형처럼 만신창이가 된 까마귀는 사람을 보자마자 괴성을 지르며 땅을 기었다. 마치 굶주린 짐승이 먹잇감을 노리듯, 그들로 모자란 피를 보충하려는 듯이.

16562832469807.jpg“다들 피해.”

린이 다시 검을 쥐며 말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만신창이였고, 서 있는 것도 버거운 지경이었다. 사람들이 주춤대기만 할 뿐 선뜻 돌아서지 못하자 린이 재차 소리쳤다.

16562832469807.jpg“어서 움직여!”

16562832441199.jpg“잠깐, 그 몸으로 혼자 어쩔 셈이오?”

린의 독촉에 휘가 반박했다. 그러곤 활을 든 사람들에게 고갯짓했다.

16562832469807.jpg“그만둬!”

하지만 린이 급히 제지했다.

16562832469807.jpg“저것들은 그런 식으로는 못 막아.”

이미 해봤다. 과거, 저들을 숲속에서 발견했을 때. 하지만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아 수년간 버려둬 왔다. 그런 것들이 지금은 날개까지 돋아나 더 흉포하게 굴고 있다. 괜히 화살 따위를 날렸다간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를 노릇이다.

16562832469807.jpg“어서 대피시켜.”

16562832441199.jpg“……감당할 수 있겠소?”

린이 재차 다그치자 휘가 주저하며 물었다. 그는 까마귀였다. 망자를 제 수족처럼 부리는 기이한 능력의 까마귀. 그러니 평소라면 걱정할 필요 없지만, 이번엔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를 비호하는 망자 군단이 보이지 않는다. 휘가 이변을 눈치채고 묻자 린은 굳은 얼굴로 끄덕였다. 거의 동시에 노인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16562832469855.jpg“저 꼴을 보게. 감당이 될 것 같나?”

남부공이었다. 남부공의 방해에 린이 인상을 쓰자 노인은 혀를 차며 웃었다.

16562832469855.jpg“성미는 원래 그 모양인가 보군.”

16562832469807.jpg“그런 소릴 할 때가……!”

16562832469855.jpg“그래도 오만한 얼굴보다는 지금이 한결 나은가?”

남부공의 웃음 섞인 말에 린의 얼굴은 더 일그러졌다. 이 와중에도 까마귀들은 땅을 기며 다가오고 있다. 하늘에서는 또 다른 놈들이 떨어진다. 이런 식으로 시간 낭비를 할 때가 아니었다. 린이 목소리를 돋워 다시 소리치려고 할 때였다. 남부공이 대뜸 주먹을 휘둘러 린의 턱을 후려쳤다. 정확한 타격에 린의 턱이 덜컥 흔들렸다. 린은 놀라서 남부공을 쳐다보더니 그대로 다리가 풀려 쓰러졌다.

16562832441199.jpg“이보시오!”

휘가 쓰러지는 린을 받으며 소리쳤다. 하지만 남부공은 모르는 척 딴청을 피웠다.

16562832469855.jpg“후련하군.”

16562832441199.jpg“뭐요?”

16562832469855.jpg“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일세. 10년이 맞나? 아니, 7년 정도겠군.”

동부공이라는 새파란 꼬마가 버르장머리 없이 굴며 염장을 지르기 시작한 건, 아마 그 정도. 그런데 미운 정도 정이라고, 그 오만불손한 놈이 저렇게 다 헤져서 쓰러진 꼴은 제법 안쓰럽다. 남부공은 그렇게 생각하며 실없이 웃었다. 그러곤 휘를 등 뒤로 세우며 말했다.

16562832469855.jpg“데려가게.”

16562832441199.jpg“당신…….”

16562832469855.jpg“그 만신창이 놈보단 내가 낫지.”

휘는 남부공의 의도를 깨닫고 탄식했다.

16562832441199.jpg“괜찮겠소?”

16562832469855.jpg“제국의 공작된 몸, 이 정도 뒷감당도 못 할까.”

16562832441199.jpg“당신의 기사들을 데려오겠소.”

16562832469855.jpg“가서 숨기나 하게. 내 기사들은 알아서 올 테니.”

남부공은 그렇게 말하며 날개가 꺾인 까마귀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동시에 거대한 불길이 솟구쳐 까마귀들을 삼켰다. 가아악! 까마귀들이 불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16562832469855.jpg“게다가 여기 올 때쯤이면 다 끝나 있을 걸세.”

남부공의 호언장담에, 그리고 일전에 본 것보다 더 경이로운 불의 크기에 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묻고 싶었다. 당신이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만약 시간이 충분해서 까닭을 물었다면, 휘는 이런 대답을 들었을 것이다.

16562832469855.jpg‘사죄의 뜻일세.’

남부공은 빚을 갚고 싶었다. 제국이 이들에게 저지른 만행을, 또 그걸 까맣게 모르고 이제껏 동부공을 오해하고 경멸한 것을. 고작 이걸로 보상이 될 리는 없지만, 남부공은 무수한 과오 중 하나라도 덜어내는 심정으로 그들의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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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2832469855.jpg“그만 가게.”

남부공의 재촉에 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남부공의 풍채가 이전보다 왜소해진 게 마음에 걸리지만, 휘는 자신의 사람들을 챙기기에도 벅찼다.

16562832441199.jpg“당신의 아이는 반드시 찾아내겠소.”

16562832469855.jpg“그래, 부탁함세.”

남부공은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그리고 발소리가 멀어지는 걸 확인한 후 품에서 작은 약병을 꺼냈다. 루벨 가의 꼬마가 출전하는 그에게 전해준 약이었다.

16562832469855.jpg“잘 버텨주면 좋겠군.”

남부공은 그렇게 말하며 약병의 약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몸이 타는 기분이었다. 입안은 텁텁하고 목은 칼날을 삼킨 것처럼 괴롭다. 엔지가 준 차를 마시며 좀 나아진 상태가 도로 악화한 느낌이었다. 아마 급격히 움직이고 힘을 쓴 탓일 것이다. 하지만 남부공은 초조해하지 않고 의연히 몸을 세웠다. 그러곤 하늘의 끝과 끝을 손으로 주욱 그어 떨어지는 까마귀들을 불태웠다. 힘을 짜낸 남부공은 쿨럭하고 기침을 토했다. 침이 흐른 것 같아 손등으로 턱을 쓸다가 혀를 찼다. 침이 아니라 피였다. 남부공은 피를 뱉어내며 다른 방향에서 떨어지는 까마귀들에게도 업화를 선사했다. 그러곤 앞서 했던 말을 수정했다. ‘버텨주면 좋겠군’이 아니라 버텨야 한다. 그래야 그 후작 놈의 꼬리를 잡아 족치지. 남부공은 부득 이를 갈며 다짐했다. 심증은 충분하지만 물증이 없어 그냥 두었다. 당최 어느 구멍으로 독을 넣었는지 알 수가 없어 속수무책 당했지만, 돌아가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조용히 이를 갈던 남부공은 문득 레나와 엔지를 떠올리며 혀를 찼다.

16562832469855.jpg‘어찌 그런 자에게서 그런 딸과 아들이 나왔는지.’

특히 엔지, 손을 덜덜 떨면서도 자신에게 차를 올리던 소년 사제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댔다. 늘 의연한 레나와 달리 아직 어리고 미숙한 소년이었다. 동시에 놀랄 만큼 영특한 아이이기도 했다.

16562832469855.jpg‘그런 걸 보면 닮은 구석이 있기는 하군.’

루벨 후작도 영리하기로는 정평이 나 있지. 아마 엔지는 그 머리를 물려받았을 것이다. 그뿐일까, 준수한 외모도 소공자라는 지위도 그 아비로부터 받았다. 그럼에도 루벨은 절대 좋은 아비라 할 수 없다. 레나에게 뿐만 아니라 엔지 루벨에게도. 남부공은 엔지가 자신의 침소로 불쑥 찾아왔던 날을 떠올렸다. 그 소년은 대체 어떤 각오로 내게 차를 가져왔을까. 그리고 어떤 심정으로 차만 올릴 뿐 내리 침묵했을까. 똑같은 무게를 가진 저울추를 짊어졌지만 그럼에도 외면하기보단 행동한 엔지 루벨. 어린 자식에게 그런 부담을 준 자를 좋은 아비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남부공은 끌끌 혀를 차며 웃었다. 그러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불길로 잡아 삼켰다. 해방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까마귀를 막는 건 아까만큼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16562832469855.jpg‘남의 욕을 할 때가 아니군.’

남부공은 업화와 함께 타오르는 고조감을 애써 누르며 중얼댔다. 내게 후작의 됨됨이를 욕할 자격이 있나? 가족들을 태워죽인 불길을 쥐고 희열을 느끼는 내게. 남부공은 흐려지는 의식을 붙잡으며 다시 하늘을 향해 팔을 휘저었다. 화염이 허공의 까마귀를 집어삼켜 별똥별을 만들었다. 불꽃이 그를 홀리려는 듯 황홀하게 움직였다. 이래선 몸이 아니라 정신이 먼저 무너질 것 같았다. 남부공은 자신이 지켜야 할 것들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다잡았다.

16562832469855.jpg‘어서들 오거라.’

그러곤 간절히 기다렸다. 남부의 기사든 레나 루벨이든, 이 불을 보고 와주기를. 다행히 남부공의 예상은 잘 맞아떨어졌다. 레나도 남부의 기사들도 숲에서 치솟은 불을 봤다. 그리고 그걸로 남부공의 위치를 예측했다. 하지만 그들만은 아니었다. 남부공이 부르지 않은 한 사람도, 그 불길에 환희하며 그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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