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7화. 애도 (157/208)

157화. 애도2021.11.01.

16562832870446.jpg“남부공이 죽었대.”

클라비스의 단조로운 목소리에 니힐이 힐끗 눈을 돌렸다. 턱을 괴고 앉은 니힐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내 동생과 똑같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16562832870451.jpg“사인은?”

16562832870446.jpg“진짜구나.”

니힐의 무심한 물음에 클라비스가 가볍게 탄식했다. 니힐은 이미 그의 사망을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돌아온 권능 때문이다.

16562832870446.jpg“사인은 뭐, 배교자에게 습격을 당했다네?”

남부의 빌 알레스 그라샤 공은 망자와 싸우던 중 배교자의 습격을 받아 용맹히 전사했습니다. 전령은 이렇게 소식을 전했다. 물론 클라비스는 그걸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대신 어느 뻔뻔한 남자를 떠올렸고, 결국 성공했구나 생각하며 웃었다.

16562832870446.jpg“서부는 결국 망자들에게 빼앗겼고. 이것도 이미 알지?”

클라비스의 물음에 니힐은 침묵했다. 긍정이었다. 당연히 안다. 그의 까마귀들이 전선에서 패퇴한 걸 고스란히 느꼈으니까. 완전한 심장을 가진 왕이 나타났다. 기존의 반편이들과 달리 완전하고 강력한 힘을 가진 왕이. 다른 왕들의 심장을 차지했지만 니힐 본인도 반쪽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나자 아이테르너의 귀환을 묵과할 수 없었다.

16562832870451.jpg“공작들은?”

16562832870446.jpg“귀환 중이야.”

16562832870451.jpg“쓸모없는 것들.”

니힐이 차갑게 혀를 차자, 클라비스는 니힐의 발아래 몸을 숙였다. 그러곤 힘없이 웃으며 손수건을 꺼냈다.

16562832870446.jpg“너무 야박하게 굴지 마. 적어도 오늘은 애도해야지.”

클라비스는 그렇게 말하며 니힐의 피 묻은 발을 닦아주었다. 니힐의 발은 피로 흥건했다. 뿐만 아니라 황좌로 이어지는 대리석 계단엔 붉은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발을 피로 적시고 황좌에 앉은 새하얀 황제. 스산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지만, 그 아래 펼쳐진 참극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황제를 알현하는 중앙홀은 본래 눈부신 대리석과 황금으로 장식된 장소였다. 하지만 지금은 본연의 빛을 모두 잃고 오직 붉은색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비참하게 널브러졌고, 그 사이로 피가 넘실댔다. 소요가 있었다. 황제의 목을 노렸던 사제가 함께 처형당할 자들을 지목했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외면당한 그 고결한 사제는 결국 제 손으로 죽을 자들을 골랐다. 벌을 받는 처지인 걸 망각했는지, 마지막까지 숭고한 사명을 감당하고 싶었는지 귀족들 중에서는 특별히 부패한 자들을 골랐다. 부패한 자들은 필연적으로 강한 자들이었고, 당연히 자신에게 쏟아진 날벼락에 저항했다. 아무리 황제라도 우릴 이렇게 죽일 수는 없다며 황궁으로 쳐들어왔다. 그로써 저렇게, 추기경에게 애도받는 신세가 되었다. 동생의 가식에 니힐이 눈을 가늘게 떴다.

16562832870451.jpg“반역자를 애도하라고?”

16562832870446.jpg“싫다면 남부공만이라도. 알레스 가의 마지막 꼬마잖아.”

클라비스가 누나의 작은 발을 손에 쥔 채 속삭였다. 그 아이가 태어나던 날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무척 오래전 일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기억이 난다. 그때는 그래도 인간다운 구석이 남아 있던 때니까. 게다가 남부공의 조부는 클라비스와 함께 큰 친구이기도 했다.

16562832870446.jpg“정말 작은 꼬마였는데, 간만에 나와 보니 다 늙어 있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그 애가 날 애송이 취급할 때마다 어찌나 재밌던지.”

클라비스는 추억을 더듬더니, 이내 목소리를 바꿔 가볍게 말했다.

16562832870446.jpg“그랬는데 결국 죽어버렸네.”

16562832870451.jpg“슬픈가?”

16562832870446.jpg“아니.”

16562832870451.jpg“그럼?”

니힐의 물음에 클라비스는 짙게 웃었다. 그러곤 피로 얼룩진 등 뒤를 돌아보며 중얼댔다.

16562832870446.jpg“부러워 죽겠어.”

  . . . 제국 60년.

16562832870446.jpg“난 언제쯤 죽을 수 있어?”

클라비스 대공이 10년 만에 누이를 찾아와 한 말이다. 늦은 밤 찾아온 클라비스는 니힐 앞에서 지긋지긋한 가면을 벗었다. 달빛 아래 드러난 대공의 얼굴은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16562832870446.jpg“날 좀 봐. 주변 사람은 다 노인이 됐는데 난 여전히 이런 모습이야.”

그렇게 말하는 클라비스의 두 눈엔 절망이 가득했다. 황제의 유일한 혈육인 클라비스 대공은 홀로 칩거 중이었다. 그에 사람들은 여러 추측을 내놓았다. 황제가 살아 돌아온 후, 그리고 제국에 망자가 들이닥친 후 황제를 가장 가까이서 보좌하던 대공이 왜 갑자기 숨어버렸을까? 누군가는 황제가 대공을 유배 보냈다고 하고, 누군가는 대공이 황제를 떠났다고 했다. 또 누군가는 천사처럼 아름답던 대공이 자신의 늙어 가는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해 숨었다고 했다. 마지막 추측은 언뜻 허황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대공은 십수 년 전부터 가면을 쓰며 철저히 얼굴을 감췄다. 그래서 호사가들은 낭만주의자였던 대공이 제 처지를 비관 중이라며 수군댔다. 모두 대공의 심정을 까맣게 모르고 지껄이는 천박한 시비였다.

16562832870446.jpg“머리카락만 세고 몸은 전혀 늙지 않아. 어떻게 된 거야? 응?”

클라비스는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쥐었다. 한때 태양처럼 찬란했던 금발이 이제는 거미줄처럼 투명했다. 그것만이 칠순을 넘긴 그가 얻은 노화의 흔적이었다. 클라비스가 절박하게 묻자, 니힐이 싸늘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16562832870451.jpg“고작 그걸 물어보러 온 거냐?”

16562832870446.jpg“뭐……?”

16562832870451.jpg“고작 그것 때문에 10년 만에 찾아왔냐는 말이다.”

니힐의 추궁에 클라비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고작이라니. 미치기 직전인데 고작이라니. 클라비스는 니힐을 원망스럽게 쳐다보다가, 신음 섞인 목소리로 고백했다.

16562832870446.jpg“……죽지를 않아.”

어렵게 운을 뗀 클라비스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16562832870446.jpg“죽어보려고 했는데 죽을 수가 없었어.”

얼굴을 가린 손이 천천히 내려와 목을 감싸 쥐었다. 아, 목뼈가 부러지던 감각이 지금도 생생하다. 직접 고른 원단으로 재단사에게 띠를 만들라 일렀었다. 길고 아름다운 띠를. 재단사는 그게 어디에 쓰일지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 만들었다. 클라비스는 그 띠로 죽을 셈이었다. 더는 기다릴 수가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이었다.

16562832870446.jpg“……분명 죽음 직전까지 갔는데 결국 죽지 못했어. 대신 다른 자들이 말라 죽어 버렸어.”

힘겹게 말을 잇던 클라비스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16562832870446.jpg“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누나, 대체 나한테……!”

클라비스가 슬피 울자 니힐이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동생의 젖은 뺨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16562832870451.jpg“너는 또 도망칠 셈이었구나.”

누나의 차가운 목소리에 흐느끼던 클라비스는 덜컥 얼어붙었다.

16562832870451.jpg“클라비스 그라샤, 내 어리석은 동생. 넌 예전에도 도망쳤지. 혼자서, 날 버리고.”

16562832870446.jpg“누나…….”

16562832870451.jpg“그때 나는 너만이라도 지켜야겠다는 마음으로 버텼다.”

니힐의 마른 손이 클라비스의 턱 끝을 들어 올렸다.

16562832870451.jpg“그렇게 지킨 너다. 그런 널 쉽게 잃을 수야 없지.”

지킨다는 표현이 무색하게 니힐의 목소리는 무정했다. 그 또한 클라비스를 미치게 하는 것들 중 하나였다.

16562832870446.jpg“아직도 날 원망하는 거야……?”

16562832870451.jpg“아니.”

클라비스의 서글픈 물음에 니힐은 단조롭게 대답했다.

16562832870451.jpg“네까짓 건 원망받을 자격도 없어. 꼭두각시에 불과한 주제에 무슨.”

니힐의 말이 비수처럼 심장을 찔렀다. 클라비스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멍하니 니힐을 바라보았다.

16562832952503.jpg

  아.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나는 어쩌다 죽음의 안식마저 박탈당했나. 모함과 음해로 처형된 레지나가 죽음을 찢고 돌아왔다. 처음엔 그의 생환이 놀랍고 또 기뻤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세상의 이치가 뒤틀렸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불길했지만, 차마 그런 기색을 드러내지 못하고 누나를 환영했다. 하지만 돌아온 누나는 이전과 같지 않았다. 이전처럼 총명하지도, 공정하지도, 다정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클라비스는 그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 가족에 대한 애정이나 왕족으로서의 의무감 때문은 아니었다. 클라비스가 무언가 잘못된 걸 알면서도 서성인 이유는, 한심하게도 죄책감 때문이었다.

16562832870451.jpg“이젠 네 차례다. 내가 널 위해 존재한 것처럼 너도 날 위해 존재하는 거다.”

그리고 니힐은 그것을 안다.

16562832870451.jpg“내가 죽지 않는 한 너는 절대 죽을 수 없다.”

그걸 알고 잔인하게 이용한다. 아. 이걸 왜 이제야 눈치챘을까. 얼음처럼 차가워진 니힐의 두 눈이 어떤 의미인지, 왜 이제야 눈치챘을까. 이건 복수야? 클라비스는 묻고 싶었지만 질문을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니힐이 그렇다고 할까 봐 두려운 탓이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이미 천천히 미쳐가던 클라비스가 더 본격적으로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은. 자신이 죽을 수 없다는 사실을 완벽히 확인한 그때부터였다. . . . 그날 이후 벌써 40년이 지났다. 오직 죽음을 바라게 된 날로부터 40년. 그동안 여러 시도를 했지만 이렇게 여전히 살아 있다. 그리고 너희들은 나를 두고 하나둘 멋대로 떠난다. 이 미친 세계에 나만 영원히 남겨두려는 듯이.

16562832870446.jpg“사실 남부공은 살 만큼 살았지. 권능을 받고 그렇게 오래 버틴 녀석은 지금까지 없었잖아? 꽤 정이 들었는데 섭섭해.”

클라비스가 너스레를 떨며 니힐의 발을 내려놓았다. 니힐은 표정 없이 다리를 꼬았고, 클라비스는 그의 눈치를 보다 넌지시 속삭였다.

16562832870446.jpg“나자가 나타난 건 정말 의외고. 왜, 꽤 예뻐하던 아이였잖아.”

클라비스의 속삭임에 니힐이 힐끗 시선을 내렸다.

16562832870451.jpg“즐거운가 보지?”

16562832870446.jpg“설마. 그냥 신기해서.”

니힐이 노려보자, 클라비스는 싱글대는 얼굴로 변명했다.

16562832870446.jpg“이렇게 될 줄은 상상 못 했으니까. 그 애가 망자의 왕이 된 것도, 누나에게 반기를 드는 것도.”

하지만 말과 달리 클라비스는 지금 즐거웠다. 반갑고 기뻤다. 이대로 나자가 니힐을 죽여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아쉬워했다.

16562832870446.jpg‘이러다간 밀리겠어. 레나 양.’

내가 공들여 만든 괴물인데, 이런 식으로 나자에게 주목을 뺏기면 곤란하다. 물론 죽을 수만 있다면 누구의 손을 빌리든 상관없지만, 그래도 기왕 여기까지 온 거 노력의 결실을 보고 싶다. 내가 만든 괴물이 날 죽이기 위해 몸부림쳤으면, 복수를 위해 니힐을 치고 내게도 냉혹한 죽음을 선사했으면, 그러면 얼마나 황홀할까? 클라비스는 자신의 각본에 만족했다. 하지만 좀처럼 진척이 없어 염려스러웠다. 왜 그러는 거야, 레나. 왜 발톱을 숨긴 채 순한 양 같이 구는 거야. 뭘 꾸미는 거야. 네 비열한 아비와 나를 어서 죽이려 들어 봐.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 응?

16562832870446.jpg“남부공의 공석은 어떻게 할 거야?”

잠시 궁리하던 클라비스가 순진무구한 얼굴로 운을 뗐다.

16562832870446.jpg“남부공한텐 자식도 없는데. 게다가 남부공이 죽는 바람에 남부공 대리의 위치도 애매해졌고.”

16562832870451.jpg“레나 루벨.”

16562832870446.jpg“응, 레나 루벨. 누나가 오랜만에 기억한 아이. 제법 쓸만하니까 되도록 가까이 둬야지.”

클라비스는 그렇게 말하며 곱게 웃었다.

16562832870446.jpg“그래서 말인데…….”

천사의 얼굴에 뱀의 혀를 숨긴 남자가 황제에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조금 더 역경을 주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레나 루벨 양에게는. 마침 약속한 것도 있으니, 그것도 겸사겸사 지킬 겸. 겉으로는 여유로운 척 판을 짜고 있지만 사실 클라비스는 조금 절박했다. 그는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영영 벗어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16562832979139.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