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환희2021.11.11.
“어……?”
레나는 자기가 우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턱 끝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황급히 눈물을 훔쳤지만 레나의 뺨은 금세 도로 젖어들었다. 다시 닦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길 몇 차례, 레나는 눈물을 막을 수 없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가리며 움츠렸다. 거짓말 같았다. 남부공의 장례식도, 그가 누운 관도, 그의 마지막 모습도. 모두 가짜 같았다. 어떻게 갑자기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신경을 곤두세운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은 돌보지 않고 주위를 날카롭게 경계했다. 레나가 그렇게 뒷전으로 날려버린, 그래서 허공을 부유하던 마음을 린이 되찾아 주었다. 그걸 깨닫는 순간 레나는 비로소 슬퍼졌다. 그 노인은 정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곧잘 놀렸고, 잔소리할 땐 보란 듯이 귀를 막았다. 그리고 만약 내가 떠나게 되면, 내 어린 친구를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남부공과 보낸 순간들이 떠오르자 그의 빈자리가 여실히 느껴졌다. 마음에 구멍이 난 것 같아 레나는 한참을 흐느꼈고, 그동안 린은 어깨를 빌려준 채 잠자코 기다렸다. 서늘한 바람에 호수의 달빛이 넘실댔다. 그 바람결을 따라 숨죽인 울음소리도 차츰 잦아들었다.
“레나.”
레나의 숨소리가 한결 차분해지자, 린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우리 결혼하자.”
생각지도 못한 말에 레나는 울다 말고 린을 쳐다봤다. 크게 떠진 눈과 가득한 눈물이 달빛에 반짝였고, 린은 레나의 얼굴을 감싸며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러자 레나의 눈에선 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우는 사람한테 이게 무슨 짓이야?”
레나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타당한 지적에 린이 겸연쩍은 듯 중얼댔다.
“좀 비겁한가?”
“좀?”
좀이 아니라 말도 못 하게 비겁하다.
놀라서 눈물이 다시 터진 레나는 억울해하며 얼굴을 가렸고, 그 모습에 린은 조용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 모습을 귀여워해도 될지, 아니면 조금 더 심각한 표정을 유지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린은 갈등하다가 잠자코 레나의 어깨를 안았다. 그러자 레나도 린의 가슴에 순순히 이마를 기댔다. 그러길 한참, 린이 레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싫어?”
“갑자기 뭐야?”
“갑자기 아닌데.”
상상은 이전부터 했다. 그리고 결심은 저주가 풀린 날부터. 그때 레나는 린이 자신을 떠날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다. 린은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으니 레나에게 먼저 다가가기로 마음먹었다. 강한 듯 위태로운 너에게 청혼하기로 결심했다. 네가 위험하고 복잡한 내 곁을 지켜준 것처럼.
“그래서 싫어?”
“……그게 무슨 뜻인지 알기나 해?”
“응.”
“무슨 뜻인데?”
“같이 살자는 뜻이야.”
린의 대답에 레나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더니 적잖이 억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 책임질 수 있어?”
당당히 말하려고 했는데 레나는 저도 모르게 울먹이고 말았다. 레나에게 린은 시를 닮은 사람이었다. 외워두고 간직할, 무덤 속에서 이따금 떠올리며 위로받을 마지막 시였다. 그런데 린은 그걸로 만족하지 않고 천천히, 그리고 충실히 다가와 레나가 포기한 것들을 일깨웠다. 죽음이 너무 가까워 잊어버린 것들을 찾아서 다시 안겨줬다. 그래서 함께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린의 고백에 응하며 걱정한 것이 모두 이루어진 셈이었다.
“나는 니힐하고 같아.”
어느 때보다 살고 싶어진, 그래서 두려워진 레나가 항의하듯 말했다.
“내가 여기 있으면 무덤으로 가는 길도 계속 열릴 거야.”
“알고 있어.”
“알면서…….”
“찾았어, 널 여기 남겨둘 방법.”
린의 말에 레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싸우면 돼.”
린은 담담히 대답했다. 하지만 그가 말한 방법은 차마 대책이라 할 수 없는 아집이었다.
“균열이 열리고 망자가 나오면 싸울 거야.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건 안 돼.”
기대했던 레나는 도로 실망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 전쟁을 계속하겠다고? 나 때문에 망자들이 나타나는 걸 알면서 지켜보라는 거야?”
“너 때문이 아니야. 네가 아니어도 마찬가지야.”
그러나 린의 대답은 또다시 레나의 상식을 뛰어넘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해야 했어. 니힐이 살아 있을 때부터.”
“니힐……?”
“죄 없는 사람을 처형하면서 시작됐어. 제국도, 망자와의 전쟁도.”
무고한 레지나 그라샤. 그의 죽음 역시 어쩌면 만인을 위한 것이었다. 그가 그대로 죽었다면 훗날 역사를 위한 희생이었다고 평가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외부자의 안일한 판단일 뿐, 배신당한 당사자의 원한은 무덤을 찢을 만큼 깊이 사무친 것이다.
“그걸 알면서 같은 일을 반복할 순 없어. 희생양 만들어 평화를 찾느니 계속 싸우는 편이 나아.”
비트라의 편지를 읽고 린이 내린 결론이었다. 이전까지는 그도 레나가 무덤으로 돌아가는 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믿었다. 한 사람의 무고한 삶보다 무수히 많은 이의 삶이 더 중요하다고 당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비트라의 편지를 읽고 니힐의 사정을 알게 되며 그는 의심하게 되었다. 레나를 무덤으로 돌려보내는 일이 레지나였던 니힐을 처형시킨 것과 과연 무엇이 다른가 하고. 다르지 않았다. 똑같았다. 카르도가 가문을 위해서라며 딸을 희생시킨 것도. 첼레스테가 자신의 갓 태어난 자식에게 인장 반지를 끼운 것도. 히엠스 그라샤가 사람들을 이교도와 마녀로 만들어 불태운 것도. 테메툼 칼리고가 하렘으로 제공된 여인들을 매일 범하고 살해한 것도. 모두 같은 일이었다. 누군가의 평화를 위해 이루어진 누군가의 희생이었다. 그리고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사이 인간은 사라지고 죽음과 망자만 남았다. 괜찮다고 믿으며 외면하는 동안 죄와 업은 무덤에 고스란히 쌓여 문턱을 만들고 산 자의 세계를 침범했다. 그게 지금 그들이 살아가는 제국이었다.
“그러니까 무덤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돼. 그건 너 혼자 치러야 할 대가가 아니야.”
린의 치우침 없는 목소리에 레나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가슴이 아파서. 하지만 그 아픔은 슬픔이 아니라 기쁨이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밀려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환희였다. 그 순간 레나는 깨달았다. 내 안에 있는 이들이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걸. 영겁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이 말을 간절히, 사무치게 바라왔다는 걸. 레나는 정답을 찾아낸 린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러곤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의 청혼에 대답했다. *** 이른 아침, 유니는 평소보다 느리게 눈을 떴다. 어제 울며 잠든 탓인지 머리가 멍했다. 그래도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오늘도 아가씨는 바쁠 것이다. 그러니 옷만이라도 준비해놔야지. 유니는 그렇게 생각하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러다 맞은편 침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
아가씨의 침대가 텅 비어 있었다. 깨우기 전까지 일어나는 법이 없는 아가씨도 보이질 않았다. 유니는 괜히 철렁해서 침실 밖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거실에도 아가씨는 없었다. 황망하게 두리번대던 유니의 눈에 테이블에 놓인 샌드위치와 고이 접힌 종이가 보였다. 유니는 주저하며 그 앞으로 다가가 종이를 펼쳐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건 레나가 유니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작별의 편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유니의 가슴은 또 한 번 내려앉았다. 유니는 그대로 얼어붙은 듯 서 있다가, 이내 입술을 깨물며 편지를 읽어내렸다. ―유니에게. 어제 유니가 한 말을 계속 생각해봤어요. 그리고 내가 잘못한 걸 알았어요. 그동안 불안하게 했다면 정말 미안해요. 편지의 첫머리는 레나의 사과로 시작했다. ―너무 늦었지만 유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지금까지 숨겼던 내 이야기예요. 그리고 이어진 문장에는 이제껏 레나가 하지 않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무덤과 망자에 대한, 그리고 망자의 왕이 된 레나에 대한 선뜻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악필로 빽빽이 적혀 있었다. 유니는 소파에 앉아 그것을 찬찬히 읽어내려갔다. 중간중간 놀라기도 하고 충격도 받았다. 하지만 아이는 눈을 똑바로 뜨고 아가씨의 이야기를 천천히 받아들였다. ―그래서 내가 살아 있는 사람인 걸 잊어버리고 늘 떠날 생각을 했어요. 그게 옳은 일이라고 믿었으니까요. 긴 이야기 끝에 레나는 자신이 모호하게 행동한 이유를 고백했다. 유니는 그 문장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런데 최근에 생각이 조금 바뀌었어요. 만약 살 수 있다면 살고 싶어요. 유니와 린 씨 곁에서, 가끔 남부공 저하의 이야기도 하면서요.
“하…….”
숨을 죽이고 편지를 잃던 유니는 저도 모르게 긴 숨을 내쉬었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모든 게 정리되면 린 씨와 방법을 찾기로 했어요. 결과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미리 포기하지는 않기로 했어요.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줘요. 나도 유니와 앞으로 계속 함께 있고 싶어요. 맺음말까지 읽은 유니는 찡해진 코를 잡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래서 천장을 노려보며 손부채로 눈을 부쳤다. 겨우 위기를 넘긴 유니는 편지 끄트머리에 남은 문장을 마저 읽었다. ―추신. 어제 들은 것처럼 지금까지 모은 돈은 다 유니 앞으로 돌려놓았어요. 혹시 내가 계속 살게 되면 방 한 칸 내줄 수 있나요? 대신 경비나 보안은 책임질게요. 그 마지막 문장에 유니는 결국 실소를 터트렸다. 전날의 서운함을 모두 씻어낸 유니는 편지를 향해 씩씩하게 끄덕였다. 암요. 이래야 우리 아가씨죠. *** 공작이 된 카르도 루벨은 자신의 출세를 성대하게 자축했다. 서부에서 망자들이 내려오고 있지만, 그로써 대량의 피난민이 발생했지만 카르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황궁의 귀족들은 카르도가 베푼 연회에 기꺼이 참석했다. 공작들이 서부로 나가 있는 동안 황궁에서도 많은 일이 있었다. 반란이 연이어 일어났고, 다들 아는 사람 두어 명을 잃었다. 그로써 은연중 희석되었던 두려움도 다시 짙어졌다. 귀족들은 황제와 제국이 미친 걸 재차 확인했고, 그 안에서 견디기 위해 광기에 참여하는 편을 택했다. 그러기 위해선 고상하게 깔깔대며 취할 수 있는 연회가 제격이었다. 카르도가 베푼 연회는 수도에 있는 알레스 가의 대저택에서 사흘간 이어졌다. 그의 고상함에 걸맞은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한 연회였다. 다만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루벨 가의 영리한 후계자가 단 한 번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 . . 남부공의 장례가 치러진 지 닷새 후, 황제가 공작들을 호출했다. 소식을 받은 레나는 이전처럼 먼저 남부공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런데 집무실의 문 앞에서는 순간 뜻밖의 고성이 들려왔다.
“아무리 그래도 이럴 수는 없습니다!”
죽은 남부공, 빌 알레스를 보좌하던 비서의 목소리였다.
“빌 알레스 저하께서 애써 지켜내신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걸 끌어오다니요! 이런 식으로 자금을 빼내면 남부는 끝장입니다!”
레나가 소리를 듣고 멈춰서자, 남부의 기사 하나가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새 남부공 저하께서 남부를 재건하던 인력과 비용을 빼서 군자금으로 쓰겠다고 하셨습니다.”
“……큰소리가 날 만하네요.”
빌 알레스는 폐허가 된 남부를 재건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무덤을 정복하라는 황제의 명령에 따를 여력조차 없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레나를 대리인으로 고용했다. 지금 카르도가 건드린 것은 빌 알레스가 그렇게 지켜낸 기반이었다. 때문에 비서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지만 카르도는 듣지 않았다.
“제국이 없으면 남부도 없소. 제국의 위기가 코앞인데 자신의 안위만 염려하면 쓰나.”
카르도의 뻔뻔함에 비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를 때였다.
“그 문제는 저와 상의하시죠, 카르도 씨.”
레나가 집무실로 들어가며 언쟁에 끼어들었다. 그러자 카르도의 측근들 사이에서 홀로 싸우던 비서는 반색했고, 카르도는 레나의 여상한 호칭에 낯빛을 굳혔다.
“추가 자금이나 병력은 필요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 제가 고용된 거니까요.”
“경이 관여할 바가 아니오.”
“남부공 저하께서는 토벌에 관한 모든 것을 제게 위임하셨습니다.”
“나는 빌 알레스 공이 아니오.”
“계약을 승계했으면 조건도 따르셔야죠.”
레나가 서슬을 숨긴 채 미소 짓자 카르도 역시 눈빛에 칼날을 품고 마주 웃었다. 그로써 언쟁이 일단락되자 레나는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황제 폐하께서 부르셨다고 들었는데, 알현하기 전에 잠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하시오.”
“여기서요?”
레나가 사람들을 장난스럽게 눈짓하자, 카르도는 한숨을 쉬며 가신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그로써 단둘이 남자 카르도가 목소리를 바꿔 되물었다.
“우리에게 할 말이 더 남았느냐?”
“딱 세 가지만 물어볼게요.”
카르도가 눈살을 찌푸리는 사이 레나가 말했다.
“아버지가 남부공을 죽였나요?”
레나의 가감 없는 물음에 카르도는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내 원수 같은 딸은 눈치까지 빠르구나,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