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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화. 추궁 (161/208)

161화. 추궁2021.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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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283368152.jpg“아버지가 남부공을 죽였나요?”

16562833681528.jpg“그래.”

딸의 물음에 카르도는 곧장 긍정했다. 그러더니 웃는 낯으로 덧붙였다.

16562833681528.jpg“이미 날 의심하고 찾아온 모양인데 아니라고 해도 믿겠느냐? 그러니 그런 셈 치자.”

1656283368152.jpg“정말 대단하시네요.”

아버지의 대답에 레나의 눈도 반달 모양으로 곱게 접혔다.

1656283368152.jpg“어릴 땐 아버지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남들 다 하는 실수를 한 적이 없었으니까요.”

레나는 탄식에 가깝게 감탄했다. 그러곤 안쓰럽다는 듯 카르도를 바라보았다.

1656283368152.jpg“그런데 지금 보니 무결한 게 아니라 재주가 좋은 거였네요. 모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덮어씌우는 재주가.”

레나는 말하면서도 기가 막혔다. 네가 의심해서 그런 셈 치겠다니, 어린 시절의 레나라면 화들짝 놀라서 도리어 변명했을지도 모른다. 레나는 아버지의 됨됨이에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1656283368152.jpg“몰라서 물어본 게 아니라 대답이 듣고 싶어서 물어본 거였어요.”

16562833681528.jpg“예상한 대답이었느냐?”

1656283368152.jpg“네.”

레나의 온화한 대답에 카르도는 더 짙게 웃었다. 그러곤 속으로 생각했다.

16562833681528.jpg‘증거는 없다.’

카르도가 남부공을 쫓아 요새를 비운 건 극소수만 아는 사실이고, 그때 사용한 석궁도 용병이나 사냥꾼들이 흔히 쓰는 조악한 것이다. 한마디로 증인도 증거도 없는 상황인데, 카르도는 레나가 경솔히 묻는 의도가 궁금했다.

16562833681528.jpg“그럼 이제 어쩔 셈이냐? 황제에게 고발이라도 하겠느냐?”

1656283368152.jpg“아니요, 굳이.”

16562833681528.jpg“굳이?”

1656283368152.jpg“판결을 다른 사람에게 맡길 마음은 없어요.”

제 손으로 끝을 보겠다는 뜻이다. 레나의 서슬 퍼런 말에 카르도는 잠시 이마를 짚었다. 레나의 눈치를 보던 시절이 있었다. 서부로 향하기 전, 레나가 망자의 왕을 연달아 해치웠을 때. 그때 카르도는 굴복하는 마음으로 레나를 집에 초대했고 오히려 처절한 수모를 당했다. 하지만 그건 공작이 되기 전, 북부공에게 내쳐지고 입지가 위태로워졌을 때의 일이다. 지금은 그때와 모든 게 다르다. 분명 다른데, 레나는 여전히 위에서 자신을 심판할 것처럼 굴고 있다.

16562833681528.jpg“……여전히 말은 잘하는구나.”

1656283368152.jpg“지금까진 말뿐이었죠.”

레나의 오만함에 카르도는 애써 언짢음을 참았다.

16562833681528.jpg“세 가지를 묻겠다고 했지. 나머지는?”

1656283368152.jpg“엔지는 어디 있죠?”

16562833681528.jpg“동생에게 관심이 있었느냐?”

1656283368152.jpg“질문 말고 대답을 듣고 싶네요. 엔지는 지금 어디 있죠?”

카르도는 레나가 제 약점만 정확히 찔러댄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16562833681528.jpg“집에 있다. 알다시피 그 애는 몸이 많이 약하니까.”

1656283368152.jpg“아무리 약해도 아버지가 공작이 됐으면 얼굴을 내비칠 만한데.”

16562833681528.jpg“레나 경이 걱정한다고 전해주마.”

카르도의 농에 레나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레나는 웃음기를 모두 지우고 냉랭히 경고했다.

1656283368152.jpg“엔지는 건드리지 마.”

그 서늘한 경고에 카르도는 짐짓 당황했다. 레나가 이토록 솔직하게 위협한 건 처음이었다. 저도 모르게 움찔 놀랐던 카르도는 곧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16562833681528.jpg“네 동생이 아니라 내 아들이다.”

1656283368152.jpg“맞아요, 아들이죠. 도구나 소유물이 아니라.”

레나가 날 선 눈을 누그러트리며 말했다.

1656283368152.jpg“부디 잊지 않으셨으면 해요. 마지막 순간 아버지의 편을 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엔지일 테니까.”

16562833681528.jpg“마지막?”

레나의 저주 같은 경고에 카르도가 차갑게 웃었다. 동시에 레나의 발치에서 화르륵 불길이 일었다. 갑작스레 피어난 화염에 레나는 뒤로 물러났고, 권능으로 딸을 위협한 카르도는 팔짱을 끼며 거만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16562833681528.jpg“내게 마지막은 없다. 적어도 너보다 먼저 끝을 보지는 않을 것이다.”

카르도는 더 이상 온화함을 연기하지 않았다. 제국의 공작이 된 이상 본색을 감출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그에 레나는 놀랍지도 않다는 듯, 흐트러진 망토를 털며 말을 이었다.

1656283368152.jpg“여전히 제게 용서받을 생각은 없으시군요?”

16562833681528.jpg“허.”

내심 긴장하고 있던 카르도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16562833681528.jpg“정말 내가 비는 꼴을 보고 싶으면 더 영리하게 굴지 그랬느냐?”

그러곤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16562833681528.jpg“내가 너라면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귀족들을 회유했을 거다. 남부의 늙은이와 네 약혼자를 진즉에 이용하고, 내 입지가 위태로워졌을 때를 놓치지 않았을 거다.”

카르도는 레나가 앞서 놓친 기회들을 나열했다. 분명 레나는 유리했다. 마음만 먹으면 아비인 후작을 궁지에 몰고 파멸에 이르게 할 순간이 몇 번이나 있었다. 하지만 레나는 그 천금 같은 기회를 모두 날려버렸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 또 용서라니.

16562833681528.jpg“이젠 늦었다. 네 뒤를 봐주던 노인은 죽었고 이젠 나도 네 약혼자와 똑같은 공작이다. 그런데 여전히 용서 운운하다니, 아직도 너와 내 위치가 이전과 같다고 생각하느냐?”

1656283368152.jpg“위치가 왜 중요하죠? 용서를 비는 건 약자가 아니라 잘못한 사람의 일이에요.”

레나의 순진하다 못해 멍청한 말에 카르도의 입매가 비틀렸다. 그러자 레나도 방긋 웃으며 덧붙였다.

1656283368152.jpg“물론 아버지께 이런 상식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리고 아버지가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시는 위치도…….”

레나는 말을 멈추며 자신의 발 앞을 바라보았다. 카펫 위에선 아직도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카르도가 남부공을 죽여서 얻은 업화였다. 남부공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지만, 레나는 꾹 참으며 타오르는 불길 위로 발을 내디뎠다.

1656283368152.jpg“예전과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너무 들뜨진 마시고요.”

레나가 그렇게 말하며 발로 비비자 불길은 거짓말처럼 꺼져버렸다. 업화가 너무 쉽게 사그라지자 후작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레나는 여상히 온화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1656283368152.jpg“다시 말하지만 용서를 비는 건 잘못한 사람이 할 일이에요. 그리고 이건 아마도 마지막 기회고요. 아버지는, 정말 제게 용서를 구할 마음이 없으신가요?”

레나가 속삭이듯 물었다. 그래서 카르도는 레나가 지옥에서 올라온 주제에 성녀처럼 군다고 생각했다. 자애로운 듯 잔인한, 참으로 증오스럽지만 동시에 몹시도 자랑스러운 내 딸. 카르도는 업화를 밟아 끈 레나의 강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릴 때는 그저 어여쁘기만 한 아이였는데. 영리한 동생에 비하면 특출난 구석 하나 없는 아이였는데. 그때는 왜 이런 보물인 줄 몰랐을까. 파국으로 치닫다 못해 지옥 끝까지 도달한 관계이지만, 카르도는 이 와중에도 레나가 새삼 아까웠다. 아니, 아깝다기보다는 신기했다. 그를 진즉에 알아보지 못한 스스로가 의아했다.

16562833681528.jpg‘미리 알았다면…….’

후회하던 카르도는 문득 깨달았다. 미리 알았어도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을. 레나가 계속 자작 가의 영애였다면 지금처럼 강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레나 루벨은 무덤에서 돌아왔기 때문에 성립된 존재다. 그걸 이해한 순간 카르도는 묘한 희열을 느꼈다.

16562833681528.jpg‘너도 나처럼 역경 속에서 단련됐구나.’

그로써 지금 이 모습이 완성된 거다. 사냥꾼에서 공작이 된 자신처럼. 그래, 너도 악착같이 견디며 한 계단씩 올라왔구나. 그래서 버림받던 날보다 한참 더 높이 도달했구나. 그리고 나 역시 너라는 벽을 만나 다시 한 단계 올라섰다. 이 얼마나 잔인하고도 위대한 부녀지간인지. 카르도는 자신과 레나가 서로에게 마지막 남은 계단이라고 생각했다. 오직 한쪽만 밟고 올라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올라서는 자만이 원하는 바를 이룰 것이다. 레나에게 짙은 동질감을 느낀 카르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16562833681528.jpg“없다.”

그리고 처음으로 솔직히 대답했다.

16562833681528.jpg“단 한 번도 없었다. 모든 걸 버리고 네게 용서를 구할 생각은.”

그러기엔 지금까지 쌓아 올린 것이 너무 많다.

16562833681528.jpg“원망하려면 해라. 이 비정한 것이 네 아비다. 그 피를 물려받은 게 너고. 그러니 원하는 게 있다면 네 손으로 빼앗아라. 나 역시 그리할 테니.”

카르도는 위선도 가식도 버리고 덤덤히 고백했다. 그래서 레나는 드디어 마주한 아버지의 민낯에 희미하게 웃었다.

1656283368152.jpg“참 이상하죠. 어떤 사람은 잘못한 것도 없이 용서를 구하고, 어떤 사람은 잘못하고도 용서를 구하지 않고.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요?”

레나는 자조하듯 중얼대더니 아버지의 진심에 고개를 끄덕였다.

1656283368152.jpg“곧 알게 되겠죠. 아마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될 거예요. 아버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레나는 예언하듯 말하며 다시 카르도를 바라보았다.

1656283368152.jpg“아버지의 뜻이 정 그러시다면. 함께 마지막까지 가봐요.”

  *** 황제의 차가운 시선 앞에 다섯 사람이 섰다. 새로운 남부공과 그의 대리인, 동부공, 그리고 북부 형제는 평소보다 더 서늘한 황제의 서슬에 시선을 내리깔았다.

16562833791375.jpg“폐하께서 심려가 크십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황제의 뒤에서 클라비스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16562833791375.jpg“서부를 정리하라고 했더니 도리어 빼앗기질 않나, 가져오라고 한 심장은 부숴 먹지를 않나, 게다가 꼴사납게 패하고 도망치다니……. 이래서야 정말 면목이 없네요.”

클라비스의 빈정거림에 루비드가 부득 이를 갈았다. 클라비스가 그걸 보고 뭐라고 덧붙이려 할 때였다.

16562833791383.jpg“긴말은 됐으니 본론으로.”

16562833791375.jpg“그런데 자비로운 폐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셨네요. 다들 축하합니다.”

니힐이 끼어들자 클라비스는 장난스럽게 꼬리를 내렸다. 그러곤 니힐의 명령대로 순순히 본론으로 넘어갔다.

16562833791375.jpg“다들 아시다시피, 망자들이 서부를 완전히 장악한 덕분에 전면전은 어렵게 됐어요. 그래서 무덤에 들어가 사자를 가둔 왕을 먼저 치려고 해요.”

지금 서부를 장악한 망자는 하나가 아닌 둘이다. 때문에 손을 쓰기가 더 어려우니, 클라비스는 왕을 먼저 치는 방법을 제안했다.

16562833791375.jpg“그럼 서부의 망자도 수가 반으로 줄겠죠. 마침 두엄의 궁의 보수도 잘 끝났으니, 그곳에 무덤으로 가는 길을 내드릴게요.”

클라비스의 제안은 타당했다. 그런데 이우라가 이례적으로 끼어들어 반대했다.

16562833819551.jpg“문제가 있다.”

16562833791375.jpg“문제?”

16562833819551.jpg“무덤의 시간이 역전됐다.”

역전이라는 말에 클라비스가 의아하게 쳐다봤다. 그에 이우라는 무덤에서 칼리고를 칠 때 겪은 일을 설명했다.

16562833819551.jpg“무덤에서 나흘가량 보내고 돌아오니 밖에선 한 달이 지나 있었다.”

16562833791375.jpg“정말인가요?”

클라비스가 반신반의하며 레나와 린, 루비드를 돌아보았다. 같은 일을 겪은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사자 왕의 토벌을 준비하고 있던 클라비스는 난감한 듯 턱을 매만졌다.

16562833791375.jpg“갑자기 무슨 이변이죠?”

16562833791383.jpg“심장이 밖으로 나온 탓이겠지.”

클라비스의 혼잣말에 뜻밖에도 니힐이 대답했다. 다들 의아한 눈으로 니힐을 쳐다봤지만 그는 아무 설명 없이 턱을 괴며 중얼댔다.

16562833791383.jpg“계속 재미없는 소식이 들리는군. 나자 아이테르너가 나타나면서 특히.”

그렇게 말하는 황제의 시선은, 마치 예정된 것처럼 린을 향했다.

16562833791383.jpg“나자의 아들. 네 어미가 내게 반역하고 전쟁을 선포했다. 그럼 나자의 부탁으로 살려둔 너를 내가 어찌해야 할까?”

니힐이 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턱을 괸 손가락으로 입술을 누르며 말했다.

16562833791383.jpg“선전포고에 대한 답으로 너를 찢어서 보내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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