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보란 듯이2021.11.18.
“선전포고에 대한 답으로 너를 찢어서 보내면 될까?”
황제의 느긋한 물음이 알현실의 공기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포악하기 짝이 없는 언사에 린의 표정이 삽시에 굳었다. 루비드도 동요해서 황제와 동부공을 번갈아 봤고, 이우라의 눈빛은 더 차갑게 얼어붙었다.
“내게 싸움을 걸면서 이 정도는 예상했을 텐데.”
니힐이 중얼대며 몸을 일으켰다.
“네 어미는 이제 네가 어찌 되든 상관없는 모양이지?”
황제가 단상에서 내려와 린의 앞에 섰다. 그는 희고 가는 손으로 린의 가슴을 짚었다. 서늘한 손길이 정확히 심장 위를 짚었지만 린은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견뎠다.
“할 말이 있다면 해 봐. 한마디 정도는 들어주마.”
니힐의 무성의한 횡포에 이우라와 루비드는 예전 일을 떠올렸다. 니힐이 남부공의 머리를 밟아 부수려 했을 때를. 그때와 똑같았다. 니힐은 그때처럼 분풀이를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고 가장 동요한 사람은 린도 레나도 아닌 이우라였다. 이우라는 이를 악물고 레나를 쳐다봤다.
‘이대로 지켜볼 셈인가?’
레나는 황제와 맞서겠다고 했다. 이우라가 그걸 돕겠다고 한 가장 큰 이유는 이런 꼴을 더 보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대체 무슨 생각인지 레나 루벨은 제 약혼자가 궁지에 몰렸는데도 그걸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초조해진 이우라는 다시 동부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언가 이상한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황제의 서슬이 코앞까지 다가왔는데 정작 동부공은 동요하지 않았다. 이우라가 그것을 미심쩍어할 때였다.
“폐하.”
내리 침묵하던 레나 루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상황에 맞지 않게 온화했다.
“일전에 제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신 걸 기억하십니까?”
레나의 부름에 니힐이 힐끗 고개를 돌렸다. 그 무구한 눈빛에 레나가 재차 말했다.
“첫울음을 삼킨 왕의 심장을 가져왔을 때, 제 소원을 하나 들어주기로 하셨습니다.”
레나의 설명에 니힐이 뒤늦게 떠올린 듯 중얼댔다.
“기억한다.”
“그 소원을 지금 빌겠습니다.”
“약혼자를 살려달라고 할 셈이니?”
황제의 물음에 레나는 옅게 미소 지었다. 그래, 니힐이 이렇게 나올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자도 린에게 더 이상 관여하지 말고 떠나라고 했다. 하지만 린은 그렇게 도망치는 사람이 아니었고, 황제가 부르기 전에 레나와 대책을 세웠다.
“아니오.”
“아니라고?”
“나자 아이테르너와 협상하는 것을 허락받고 싶습니다.”
예상을 벗어난 대답에 린과 평행하던 황제의 몸이 레나 쪽으로 기울었다. 클라비스도 흥미가 동했는지 팔짱을 끼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한 레나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가 서부 접경지에서 패한 이유는 살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휴식과 보충이 필요한 우리와 달리 망자들은 재정비가 필요하지 않았고, 결국 우리가 숨을 돌리는 모든 순간이 허점이 되었습니다.”
“산 자는 죽은 자를 감당하지 못하리라.”
클라비스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곧장 북부 형제의 눈총이 쏟아졌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레나 역시 클라비스를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세력전에 소모되는 것은 우리뿐이어서 상대할수록 불리해지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세력을 배제한 채 나자와 싸우고 싶습니다.”
“일대일로 대결을 하겠다는 건가요? 선수처럼?”
클라비스가 못 믿겠다는 듯 되물었다. 그에 레나는 차분히 답했다.
“군대를 동원해봐야 피해만 키울 뿐이니까요.”
“그야 그렇지만, 나자가 그 제안을 수락할 이유가 있나?”
전쟁이 제국에 불리하다는 걸 반대로 말하면 나자에게는 유리하다는 뜻이다. 불리한 쪽에서야 새로운 방법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지만, 유리한 쪽은 굳이 자신의 이점을 버릴 이유가 없다. 클라비스의 원론적인 물음에 레나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있습니다.”
“설명해 봐요.”
“나자의 목표는 제국이 아니라 황제 폐하입니다.”
제법 맹랑한 대답에 클라비스의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우세하다고는 하나 서부에서 황궁까지 군대를 끌고 오는 건 나자에게도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일입니다. 또한 망자들을 끌고와 봤자 폐하께 무용하다는 걸 나자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황궁으로 올 수 있다면 제 제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적장을 초대하자는 거죠? 그치가 황제 폐하의 목숨을 노리는 걸 뻔히 알면서, 황제 폐하가 계신 황궁으로.”
클라비스는 레나가 애써 포장한 핵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러곤 한술 더 떠 쯧쯧 혀를 찼다.
“이래서야 나자의 첩자라고 의심해도 할 말 없겠는걸요? 레나 경.”
클라비스는 일부러 더 해사하게 웃었다. 흥분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레나 루벨이 묘한 판을 짜기 시작했다. 나자를 황궁으로 불러들이겠다니. 니힐을 죽이겠다고 공언한 자를 니힐의 목 앞까지 데려오겠다니. 클라비스는 이 매력적인 제안이 수락되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속내를 숨기기 위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판단은 물론 폐하께서 하시겠지만요.”
클라비스는 니힐을 돌아봤다가 조금 놀랐다. 대화가 오가는 내내 니힐은 레나가 아닌 클라비스를 보고 있었다.
“재미있군.”
니힐의 입에서 이례적인 표현이 흘러나왔다.
“어디 한번 해봐. 나자가 황궁으로 온다면 나도 반갑게 맞아주지.”
니힐은 고민 없이 선뜻 승낙했다. 그 와중에도 시선은 클라비스를 향했고, 때문에 클라비스는 수년 만에 불안함을 느꼈다.
“그렇다면…….”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자, 기다리던 레나가 조심히 운을 뗐다.
“그렇다면 협상을 위해서라도 나자의 아들은 살려두어야 합니다.”
사실 레나에겐 이게 핵심이자 본론이었다. 레나와 린은 니힐이 이 뻔한 수작에 노여워하지 않기를 바라며 대답을 기다렸다. 니힐은 레나와 린을 번갈아 보더니, 린의 가슴을 밀며 돌아섰다.
“또 치마폭 속에서 목숨을 건지는구나.”
니힐이 조롱했지만 린은 수치스러워하지 않았다. 레나와 나자 덕분에 목숨을 건진 건 사실이다. 게다가 굳이 따지자면, 그 둘은 바지가 잘 어울리는 사람들이었다.
“다 좋은데 간과한 게 있네요. 하나가 아니잖아요? 나자는 그렇다 쳐도, 사자를 가둔 왕은?”
“그건 나자를 부르기 전에 정리한다.”
클라비스가 레나를 향해 묻자 니힐이 가로채듯 대답했다. 그러곤 의아해하는 클라비스에게 명령했다.
“길을 열어라.”
“하지만 폐하, 북부공의 말이 사실이라면 시간이…….”
“상관없어.”
클라비스가 북부공이 보고한 문제를 거론하려 하자 니힐이 말을 끊었다. 그러곤 또 한 번 평소와 다른 결정을 내렸다.
“내가 직접 다녀오면 돼.”
. . . 황제는 공작들을 이끌고 두엄의 궁으로 향했다. 그때 니힐의 옷차림은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무장은커녕 맨몸에 가까웠다. 그나마 무덤에 간다고 니힐이 챙긴 것은 일전에 레나가 가져온 인장 반지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보수하고 나선 다들 처음이겠군요.”
클라비스가 두엄의 궁에 들어서며 말했다. 말마따나 레나를 비롯한 공작들은 두엄의 궁이 무너진 이후 여기 오는 게 처음이었다. 그사이 두엄의 궁은 보수를 마쳐 본연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눈부신 대리석으로 된 벽과 황금으로 장식한 기둥은 황궁의 일부답게 찬연했다. 그리고 궁 안에는 이전과 같이 불길한 제단이 놓여 있었다. 니힐이 레지나였던 시절, 단두대가 세워진 바로 그 단상이었다. 니힐은 고개를 조아리는 사제들을 지나, 자신이 최후를 맞이한 곳에 태연히 섰다. 그러곤 클라비스에게 명했다.
“문을 열어라.”
니힐이 망자 토벌에 직접 나서는 건 처음이었다. 이번 무덤 정복은 물론이고, 지난 100년 동안에도 그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불길한 예감이 스쳤지만 클라비스는 순순히 명에 따랐다. 이윽고 사제들이 피를 바쳐 무덤의 문을 열었다. 두엄의 궁에 붉은 균열이 뻗어 나가더니, 일말의 틈도 없이 망자들이 뛰쳐나왔다. 그들은 가장 앞에 있던 니힐에게 달려들었다. 콰드득! 뼈가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니힐의 손아귀에 망자들의 목이 뜯겨나가는 소리였다.
“무슨…….”
루비드는 질겁해서 저도 모르게 중얼댔다. 이어 나오려던 욕은 가까스로 삼켰다. 소리만 내지 않았을 뿐, 놀라기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니힐은 지금껏 게으른 고양이처럼 군림하기만 했지 제대로 실력을 행사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무슨 변덕인지 오늘은 보란 듯이 나서서 망자를 찢어버렸다. 경악하는 신하들을 뒤로한 채, 니힐이 몸에 튄 검은 피를 닦으며 물었다.
“사자 왕의 이름은?”
“사자를 가둔 왕은, 2000년 전 대륙 중앙을 지배한 패왕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폭군의 자질을 가졌다는 예언을 받았고, 성장한 후에는 철의 군대를 앞세워 모든 족속을 노예로 삼았습니다. 이후 그는 반란의 싹을 자르기 위해 정복한 성마다 사자를 풀어…….”
“쓸데없는 건 됐어. 이름.”
“……프리무스. 황제 프리무스입니다.”
클라비스가 대답하기 무섭게 니힐은 균열로 발을 내디뎠다. 이윽고 니힐이 붉은 무덤 속으로 사라지자, 두엄의 궁에 남은 자들은 긴장한 얼굴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시간의 흐름이 역전됐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저렇게 돌진해버리다니. 린은 여기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고민했고, 이우라는 니힐이 부숴버린 망자의 시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루비드는 니힐이 이대로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딱 그 정도 생각을 했을 때였다. 긴장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방금 무덤으로 들어간 니힐의 뒷모습이 눈에 선한데 돌연 균열이 일렁였다. 공작들을 보필하던 기사들은 망자가 나오는 줄 알고 검집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런데 그들이 검을 뽑기도 전에 새하얀 다리가 균열에서 밀려 나왔다. 다리 위로 코르셋 한 벌도 모습을 드러냈고, 그다음으로 나타난 건 니힐의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고위 사제 하나가 되돌아온 황제에게 조심히 까닭을 물었다. 니힐은 무어라 대답하는 대신 아직 균열 안에 있는 팔을 빼내며 두엄의 궁 바닥에 무언가를 집어 던졌다. 절그렁 소리와 함께 거대한 철검이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자 왕의 심장이다.”
믿을 수 없는 말이 태연한 목소리로 흘러나왔다.
철검, 사자 왕의 심장을 바라보는 자들의 얼굴이 경악에 물들었지만, 니힐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이제 나자를 데려와.”
황제는 그렇게 말하며 두엄의 궁을 등지고 돌아섰다. 마치 보란 듯이. *** 니힐이 보여준 파괴력은 두엄의 궁에 있던 모두에게 충격을 안겼다. 레나와 린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레나는 카르도 때문에, 린은 데카를 비롯한 기사들 때문에 연인에게 아무런 말도 건넬 수 없었다. 한참 후, 레나가 호수의 궁에 도착했을 때였다.
“레나 루벨.”
방으로 향하던 레나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린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기사들을 다 물린 듯 혼자였는데, 어쩐지 표정이 딱딱했다. 레나가 그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는데, 린이 돌연 레나의 어깨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하고 싶다.”
“저도요. 곧 해가 지니까 밤에 만나요.”
“아니, 지금.”
린이 단호한 목소리로 거절하고 재촉했다. 날 선 태도에 레나는 놀라서 연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이변을 눈치챘다. 린의 눈동자가 금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 맹수 같은 눈을 발견한 레나는 저도 모르게 중얼댔다.
“……나자?”
레나의 신음 같은 부름에, 린의 몸을 지배한 나자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