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니힐의 심장2021.11.22.
“어떻게…….”
레나는 얕게 신음하다가 퍼뜩 깨달았다.
“지배?”
레나의 확인에 린의 몸을 장악한 나자가 대답했다.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을 줄 알았다.”
나자는 레나와 린에게 떠나라고 했다. 니힐은 내가 칠 테니, 너희는 더 이상 제국에 관여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나자의 말을 무시한 채 황궁으로 돌아왔고, 결국 니힐의 시퍼런 서슬 앞에 섰다.
“그래서 지배를 걸었다는 건가요?”
“너희가 니힐의 보복을 감당 못 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나자는 권능을 사용해 린에게 스며들었다. 혹시라도 니힐이 린을 죽이려 하면 나서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나자의 추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알현실에서의 일을 지켜본 나자는 다소의 이채를 담아 레나를 바라보았다. 린의 황금빛 눈동자가 레나를 향했고, 거만하게 내려다보는 시선에 레나는 저도 모르게 말을 돌렸다.
“당신은 어떻게 감당할 생각이었는데요?”
“기습 후 도주.”
“……아들의 인생을 얼마나 더 망칠 생각이죠?”
“살릴 수만 있다면 얼마든.”
레나가 어이없다는 듯 말하자 린이 찌르는 듯한 눈으로 대답했다. 그 공격적인 시선에 레나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 떨렸다. 경멸에 찬 린 씨의 얼굴이라니. 레나는 묘하게 자극적이라고 생각하다가 저 안에 누가 있는지 깨닫고 삿된 생각을 급히 지웠다. 그사이 나자가 다시 재촉했다.
“시간이 많지 않아.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하고 싶다.”
린을 장악한 나자의 요구에 레나는 별수 없이 그를 자신의 방으로 이끌었다. 함께 복도를 지나며 레나는 린의 옆얼굴을 힐끗 바라보았다. 황금색으로 변한 눈이 지나치게 야성적이다. 그 모습도 분명 멋지긴 한데, 레나는 역시 검은 눈의 순둥한 린이 좋다고 생각했다.
“왜 쳐다보지?”
레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나자가 힐끗 눈을 돌리며 물었다.
레나는 린이 왜 나자를 무서워하는지 알 것 같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린 씨는 지금 어디 있죠?”
“자고 있다.”
이 와중에 자고 있다니. 레나는 시도 때도 없이 몸을 빼앗기는 약혼자가 조금 불쌍해졌다. 저번엔 칼리고, 이번엔 나자. 레나는 린이 둘 중 어느 쪽을 더 싫어할까 생각하며 나자에게 되물었다.
“린 씨가 동의한 일인가요?”
나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레나는 이게 나자의 독단인 걸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린 씨의 몸이에요. 설령 부모라 해도…….”
“알고 있다. 내게 지배당한 걸 알면 이 애도 역겨워하겠지.”
하지만 항의하던 레나는 나자의 대답에 오히려 말문이 막혔다.
“어차피 잠깐이다. 잠깐 빌린 후엔 더 나타나지도 참견하지도 않겠다.”
망자는 그렇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 덤덤한 태도가 오히려 절박하게 느껴져 레나도 더는 뭐라 할 수 없었다. 이후 두 사람은 묵묵히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런데 방으로 돌아온 레나는 또 한 번 뜻밖의 상황과 조우했다.
“아가씨, 어서 오세요!”
유니의 반가운 인사는 여느 때와 같았지만, 유니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의 모습은 몹시도 이질적이었다.
“……양다리였나?”
린의 목소리로 흘러나온 의심에 레나는 기겁하며 린의 어깨를 쳤다. 그러곤 나자가 또 뭐라고 하기 전에 불청객에게 물었다.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거죠?”
오해받는 게 싫어, 최대한 딱딱하게 그 남자의 이름을 호명했다.
“이우라 플레누스 씨.”
레나의 물음에 이우라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이우라에게 차를 대접한 장본인, 유니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아가씨가 초대하신 거 아니에요?”
“초대한 적 없어요.”
“정말요?”
“초대받았다고 한 적 없다.”
“뭐요?”
레나와 이우라가 번갈아 내놓은 대답에 유니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이우라에게 손가락을 힘껏 뻗었다.
“어린애를 속이다니 이런 비열한……!”
유니의 삿대질 섞인 비난에 이우라는 다시 찻잔을 들며 시선을 피했다. 유니는 차를 도로 뱉으라며 손을 뻗었고, 이우라는 팔을 높이 들어 팔딱팔딱 뛰는 아이가 찻잔을 빼앗아가지 못하게 막았다.
‘이게 무슨…….’
레나는 그 화기애애한 모습을 얼떨떨하게 지켜보았다. 유니야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행동하는 아이니까 그렇다 쳐도, 저 이우라 플레누스가 작은 하녀를 상대하는 모습은 희한하다 못해 기괴했다. 마치 사자가 병아리를 입안에 넣고 놀면 저런 모습일 것 같았다. 레나는 황당해하면서도 상황을 살폈다. 아무래도 자신이 돌아오기 전에 이우라가 한발 먼저 찾아왔고, 유니는 그가 약속하고 찾아온 줄 알고 차를 내준 모양이다. 북부공이 남부공 대리의 처소까지 찾아오다니. 게다가 그는 뒤따르는 기사 없이 혼자였다.
“보아하니 공식 방문은 아닌 것 같은데…….”
“맞아요. 이 아저씨 창문으로 왔어요.”
“……무슨 용건이신데 월담까지 하신 거죠?”
레나는 일러바치는 유니를 뒤로하고 이우라에게 물었다.
“묻고 싶은 게 있다.”
이우라도 유니의 강력한 방해를 이겨내며 평소처럼 냉철하게 말했다.
“나자를 황궁으로 부르겠다는 건 진심인가?”
이우라의 물음에 레나는 저도 모르게 린을 쳐다봤다. 나자는 눈동자 색을 감추려는 듯 시선을 밑으로 내리깔고 있었다.
“동부공을 살릴 핑계였나? 아니면 불러서 뭘 할 셈이지?”
“그건 왜 물으시죠? 대답이 필요하시면 이유를 먼저 밝히세요.”
레나의 경계에 이우라는 잠시 입술을 물었다. 그는 답지 않게 주저하더니, 이내 나직이 말했다.
“황제는 반역을 막지 않는다.”
“무슨 뜻이죠?”
“오히려 반란을 바란다. 그래야 보복할 수 있으니까.”
이우라의 무거운 목소리에 레나의 눈빛도 가라앉았다. 이우라의 어깨에 매달려 장난을 치던 유니도 마찬가지였다.
“공작들이 서부에 있는 동안 황제를 시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들었어요, 그건.”
“시해자들이 아무 제지 없이 황제의 침소에 도달한 것도 들었나?”
“아뇨.”
“황제의 의도다. 암살에 대비하지 않고 오히려 기다리는 것. 죽지 않는 몸으로 살아 있는 자들을 학살할 빌미만 기다리는 게 니힐 그라샤다. 경이 나자 불러들여 황제를 공격한다면 그 또한 훌륭한 빌미가 되겠지.”
“그래서 결론이 뭐지?”
마지막 말은 린의 목소리를 빌린 나자의 말이었다. 나자는 긴 서론에 진저리가 난 듯 딱 잘라 물었다.
“황제를 자극하지 말라고 할 셈인가?”
“아니.”
하지만 이우라는 함께 각을 세우는 대신 조용히 고했다.
“나자를 불러 황제를 칠 생각이라면 나도 돕겠다.”
이우라는 그렇게 말하며 조용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니힐이 동부공을 위협할 때 이우라는 움직일 수 없었다. 황제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동생을 걷어차던 순간과 남부공이 황제에게 머리를 짓밟히던 모습이 차례로 떠올라 분노가 치밀었지만, 정작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너무 오랫동안 길들어 있었다. 고요히 타오르는 자색 눈이 레나를 향했다. 레나는 그걸 보며 이우라의 돕겠다는 말이 사실 도와달라는 말이었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황제에게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그는 계속 말하고 있었다.
“도망치라는 말은 아무도 안 듣는군.”
나자가 이우라를 보며 혀를 찼다.
“하지만 돕겠다는 말은 마음에 든다.”
그리고 덧붙인 말에 이우라는 그리 반갑지 않은 표정으로 린을 바라보았다. 이우라가 도움을 청하는 대상은 동부공이 아니라 레나였다. 그래서 지금 이우라에겐 동부공이 멋대로 으스대는 꼴이었다. 그 기색을 눈치챘는지 나자가 평소보다 가벼운 투로 말했다.
“나다, 애송이.”
이질적인 호칭에 이우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나자는 의아해하는 이우라를 향해 눈을 들었고, 그의 황금빛 눈을 마주한 이우라는 설핏 굳었다. 이우라는 그 눈을 알아보았다. 옛 스승의 야성을 마주한 이우라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은…….”
“설명은 필요 없겠지. 네 눈치라면.”
나자는 그렇게 말하며 이우라가 앉아 있던 테이블로 다가갔다. 아니나 다를까 이우라는 저도 모르게 나자에게 의자를 빼주었다. 나자가 의자에 앉자, 옆에서 지켜보던 유니가 놀란 눈으로 중얼댔다.
“린 씨 아니에요?”
“이 소동물은 뭐지?”
“확실히 린 씨치고는 말버릇이 사납네요.”
“유니, 이리 와요.”
자칫하면 나자가 유니를 물거나 유니가 나자를 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레나는 유니를 급히 챙겼다. 그로써 레나도 테이블에 앉게 되자, 나자는 비로소 나타난 용건을 밝혔다.
“나도 묻고 싶은 바였다. 레나 루벨, 날 황궁으로 끌어들여서 어쩔 셈이지?”
사실 나자는 레나의 제안에 제법 솔깃했다. 지루한 전쟁을 건너뛰고 니힐과 대면할 수 있다면 나자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피와 전쟁이 새삼스러운 건 아니지만, 린이 그것을 싫어한다면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나자의 직설적인 물음에 레나가 대답했다.
“왕들의 심장을 한곳에 모을 생각이에요.”
“레지나를 깨울 생각인가?”
나자의 간파에 레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기대를 못 버렸군.”
나자가 웃음기 없이 조롱했다.
“결론은 다르지만 과정이 같다면 협조하겠다. 다만 입궁 후 나는 내 할 일을 할 것이다.”
“……좋으실 대로.”
“이우라.”
나자가 이우라를 돌아보자 이우라는 정중히 대답했다.
“네.”
“나는 니힐을 죽일 거다.”
“가능합니까?”
“네 아버지가 어떻게 실패했는지 안다.”
이우라의 아버지인 전대 북부공도 니힐을 죽이려 한 적이 있었다. 그는 거의 성공했다. 아니, 성공했다고 믿었다. 강력한 참격으로 니힐을 몰아붙이고 사람의 형태가 남지 않을 만큼 매섭게 난도질했다. 하지만 니힐은 그의 결의를 비웃듯 되살아났다. 그러곤 그의 용맹함을 높이 사 자비를 베풀었다. 자식들을 바치고 전장에서 스스로 죽으면 가문을 존속시켜주기로 했다. 전대 북부공이 이우라에게 복종을 당부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미 해보았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도 넘을 수 없는 존재인 걸 확인했기 때문에. 전대 북부공은 자신이 보고 겪은 것을 장자에게 알려주었고, 그래서 이우라도 니힐을 죽일 수 없는 존재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 견고한 믿음 앞에서 나자가 말했다.
“니힐에겐 네 개의 심장이 있다. 아니, 그중 하나는 부서졌으니까 이젠 세 개군. 남은 세 개의 심장을 모두 부수지 않는 한 니힐은 죽지 않는다.”
“……왜 세 개입니까?”
이우라는 정말이냐고 되묻는 대신 다른 것을 확인했다. 계산이 맞지 않는다. 망자의 왕은 니힐 본인까지 포함해 모두 다섯이다. 그러니 나자가 부순 칼리고의 심장을 제외해도 니힐에게는 첼레스테와 히엠스 그라샤, 프리무스, 그리고 자신의 심장이 남아 있어야 한다. 이우라의 예리한 물음에 나자가 이례적으로 옅게 웃었다.
“니힐의 심장은 니힐에게 없다.”
뜻밖의 대답에 이우라가 미간을 좁혔다. 그 앞에서 나자가 설명을 이어갔다.
“니힐이 무덤에 버렸다. 그래서 왕들의 심장을 취할 때도 반쪽밖에 빼앗지 못한 거다. 완전한 심장을 얻을 그릇이 못 되니까.”
“그럼 니힐의 심장은 여전히 무덤에 있는 겁니까?”
“아니, 부서졌다. 어떤 계기로.”
나자는 그렇게 말하며 레나를 쳐다봤다.
“니힐이 100년간 내버려 둔 왕들에게서 남은 심장을 빼앗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다.”
나자가 레나에게 시선을 맞춘 채 말했다.
“심장이 부서져 더 이상 존속할 수 없어서.”
레나는 나자의 황금빛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그리운 마음에 그만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