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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화. 새로운 그림 (164/208)

164화. 새로운 그림2021.11.25.

백합으로 채워진 세계였다. 용서받지 못한 왕이 된 레나는 그곳에서 긴 시간을 보냈다. 헤아리기도 어려운 시간, 망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던 레나를 불러낸 건 한 아이였다. 레나는 그 아이에게 가려고 안락하고도 아찔한 백합 속에서 일어났다. 그로써 다시 무덤으로 돌아왔을 때, 레지나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마치 석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레지나를 발견한 레나가 고요한 목소리로 물었다.

16562834412155.jpg“날 기다린 거야?”

나락으로 떨어질 땐 레지나를 원망했지만, 되돌아온 레나의 음성엔 배신감도 분노도 담겨 있지 않았다. 온화하지만 힘 있는 음성에 레지나가 고개를 들었다. 긴 침묵 후 부서진 왕이 백합의 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게 레나가 기억하는 레지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 . .

16562834412161.jpg“니힐은 붕괴하고 있다.”

린의 목소리가 레나를 상념에서 깨웠다. 잠시 옛날 생각을 하던 레나는 정신을 차리고 린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해 같은 금빛이었다. 린의 몸을 빌린 나자의 말에 이우라가 되물었다.

16562834412166.jpg“그걸 막기 위해 왕들의 심장을 강탈했다는 겁니까?”

16562834412161.jpg“그래.”

16562834412155.jpg“아니요.”

레나와 나자가 동시에 대답했다. 이후 시선은 레나 쪽으로 모였다. 내리 침묵하던 레나가 돌연 입을 열자, 이우라와 나자가 영문을 묻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레나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16562834412155.jpg“그건 방편이에요.”

16562834412166.jpg“방편?”

16562834412155.jpg“심장이 세 개여도 자신의 것 하나만 못해요. 그 상태로는 오래 못 버틸 거예요.”

16562834412166.jpg“그럼 다른 목적이 있다는 건가?”

16562834412155.jpg“니힐의 진짜 목적은 전복이에요.”

레나의 대답에 나자의 눈은 커지고 이우라의 눈은 가늘어졌다. 두 사람이 상반된 반응을 보였지만 레나는 개의치 않고 찬찬히 설명했다.

16562834412155.jpg“겪어봐서 아시겠지만 현세와 무덤은 시간의 흐름이 달라요. 원래대로라면 무덤의 시간이 더 빠르게 흘러야 하죠.”

16562834412166.jpg“어째서지?”

16562834412155.jpg“죽은 자의 시간은 무한하니까요.”

그래서 무덤에서는 살아 있는 자도 음식이나 휴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무한한 시간에 귀속되며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16562834412155.jpg“하지만 최근 그 흐름이 바뀌었죠. 우리가 칼리고의 성에 갔을 때부터.”

16562834412166.jpg“……왕들의 심장이 황궁에 있기 때문인가?”

이우라의 의구심 섞인 말에 레나는 힘없이 웃었다. 정말 무섭도록 눈치가 빠른 사람이다. 계속 적대했다면 얼마나 피곤했을지 상상하기도 싫을 정도다.

16562834412155.jpg“맞아요. 망자들은 왕이 있어야 모습을 드러낼 수 있어요. 왕의 심장이 밖으로 나왔다는 건 그에게 속한 망자들도 다 지상에 있다는 뜻이에요.”

16562834412166.jpg“그래서 시간까지…….”

레나의 말을 곱씹던 이우라는 비로소 이해했다. 니힐이 눈 깜빡할 사이에 사자 왕의 심장을 가지고 돌아올 수 있던 이유. 니힐이 왕들의 심장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가 있는 곳이 곧 죽은 자의 세계라서, 시간마저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추기 때문에.

16562834412161.jpg“부서진 후에도 세상은 놓지 않겠다는 건가.”

나자가 서늘하게 그늘진 눈으로 중얼댔다. 단지 존속을 위해 심장을 수집했다면 그의 탐욕에 혀를 내두르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레나가 말한 것이 진짜라면, 니힐이 가진 것은 탐욕이라는 말로 설명되지 않는다.

16562834412166.jpg“왜 그렇게까지 악의를 품은 거지?”

이우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에 대한 답을 알지만, 레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16562834412161.jpg“원인을 찾을 필요 없다. 이제 와선 그게 뭐든 변명에 불과하니까.”

나자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이우라의 고민을 끝냈다. 그러곤 황금빛 눈을 들어 레나에게 말했다.

16562834412161.jpg“레나 루벨, 너의 협상에 응하겠다. 내게 길을 열어라.”

16562834412155.jpg“그 후에는요?”

16562834412161.jpg“황궁에 도달한 날, 니힐과 함께 무덤으로 돌아가겠다.”

그의 심장을 갈가리 찢어서. 그러기 위해 죽은 자를 일으키고 세상을 부수더라도.

16562834412161.jpg“네가 너만의 방식을 고수하듯, 나도 내게 어울리는 방식을 쓰겠다.”

나자의 음성이 점차 느려졌다. 나자는 시간이 된 것을 알고 이우라에게도 말했다.

16562834412161.jpg“이우라 플레누스, 날 돕겠다면 거절하지 않겠다. 추후 다시 만나면 네가 할 일을 알려주마.”

그 말을 끝으로 나자는 눈을 감았다. 그의 밝은 눈동자가 눈꺼풀에 덮여 사라지자 린의 몸이 휘청하며 기울었다. 레나는 그의 몸을 급히 안아 받쳤고, 린은 정신을 잃은 듯 그대로 레나의 품에 쓰러졌다.

16562834412155.jpg“떠난 모양이네요.”

시간이 없다더니 정말 자기 할 말만 하고 가버렸다. 레나는 이용만 당하고 쓰러진 연인을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불편하게 늘어진 그의 몸을 안아 들었다. 장신의 동부공이 청순한 모습으로 운반되자 북부공은 정체 모를 거북함에 눈을 돌렸다. 굳이 표현하진 않았지만, 이우라는 레나와 동부공에게 상반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동부공을 혐오하는 반면, 레나에게는 호감에 가까운 감정이 있었다. 때문에 그는 레나가 동부공과 함께하는 것이 적잖이 의아했다.

16562834412166.jpg‘왜 저런 자와 어울리는 거지?’

잠시 오해하긴 했지만 레나는 비열함과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오히려 강직하고 참을성이 많으며 계산 없이 친절했다. 이우라는 레나가 칼리고와 싸울 때, 루비드와 유니를 대할 때의 모습을 보며 그것을 확인했다. 그런 인물이 자신의 족속을 팔아넘긴 동부공과 연을 맺다니. 이우라는 그게 양과 늑대의 사랑처럼 기괴하다고 생각하다가, 돌연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눈을 홉떴다. 서부에서 별안간 무덤으로 떨어졌을 때, 레나가 기묘하게 비행하던 망자를 감싼 적이 있다.

16562834412166.jpg‘그게 동부공이 지배하던 것이라면?’

동부의 권능이 망자까지 지배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우라는 이제껏 의심해본 적 없는 사실에서 허점을 발견하고 눈을 홉떴다. 동부공이 망자를 지배해 다스릴 수 있다면? 3년 전 내가 본 살육 현장이 정교한 연극이었다면? 연이어 떠오른 가설에 이우라는 유니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유니는 뭘 보냐는 듯 뻔뻔한 눈으로 이우라를 마주 봤다. 장벽 안쪽에서 만난 레나 루벨의 하녀. 이 아이를 보호한 게 정말 배교자였나? 아니, 배교자들은 대부분 장벽 밖에 있다. 그들도 날뛰는 망자는 두려워하니까. 장벽 안팎을 멋대로 휘젓고 다니는 존재는 오직 까마귀뿐. 까마귀, 제국의 공적. 무수히 많은 망자를 수족처럼 부리며, 시시각각 나타나 사사건건 제국에 위해를 가하는 위험인물. 그리고 동부공은, 까마귀의 습격을 받아 행방불명이 됐었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순간, 이우라는 세상이 멈추는 느낌을 받았다. 기억 속에 흩어져 있던 파편이 하나하나 짝을 찾아 맞물렸고 그건 이제껏 그가 보지 못한 새로운 그림을 완성해나갔다.

165628344692.jpg“아저씨?”

이우라의 심각한 얼굴을 본 유니가 갸웃대며 그를 불렀다. 이우라는 허를 찔린 사람처럼 유니를 쳐다보더니, 돌연 침착한 얼굴로 물었다.

16562834412166.jpg“서부에서 너를 보호하던 자들은 다 대피했나?”

165628344692.jpg“네?”

16562834412166.jpg“남부공의 죽음이 그들의 소행이라고 알려졌는데…….”

아직 실체조차 파악하지 못한 ‘그들’. 까마귀의 수하들로 추측되는 무리. 이우라는 그들의 실체를 아는 척 유니에게 넌지시 말했다.

16562834412166.jpg“……동부공도 난감하겠군.”

유니를 통해 가설을 확인할 생각이었다. 이우라의 함정에, 유니는 아이답게 순진무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165628344692.jpg“아저씨, 지금 린 씨가 배교자들 편인지 떠보는 거예요?”

16562834412166.jpg‘젠장.’

이우라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욕했다. 정말 되바라진 꼬마다. 이미 루비드로 되바라짐에 대한 면역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유니는 전혀 새로운 영역의 되바라짐으로 이우라를 공격했다.

165628344692.jpg“그런 거예요? 맞아요? 그런데 직접 물어볼 용기는 없어서 은근히 돌려서 떠보는 거예요? 정말 믿을 수가 없네요. 생명의 은인을 대하는 태도가 이게 뭐람? 하여튼 어른들이란.”

유니는 혀를 쯧쯧 차며 이우라를 도발했다. 뿐만 아니라 그사이 돌아온 레나에게 이우라의 만행을 냉큼 일러바쳤다.

165628344692.jpg“아가씨, 아가씨. 들어보세요. 방금 저 아저씨가 뭐라고 했는지 아세읍!”

16562834412166.jpg“잘못했다, 조용히 해라.”

165628344692.jpg“으으읍!”

이우라는 여전히 근엄한 얼굴과 그렇지 못한 손으로 유니의 입을 막았고, 유니는 욕조 앞의 고양이처럼 버둥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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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2834412155.jpg“쓸데없이 친해졌네요, 두 분.”

레나는 그 모습을 황당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이우라에게 물었다.

16562834412155.jpg“용건이 더 남으셨나요? 나자 씨와 직접 이야기 나누셨으니, 역모도 그쪽과 마저 계획하시면 될 것 같은데.”

레나가 평화로운 목소리로 선을 그었다. 나자와 이우라의 모의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투였다. 그래서 이우라는 손톱을 세운 유니를 놓아주며 물었다.

16562834412166.jpg“경의 방식은 뭐지?”

16562834412155.jpg“무슨 말이죠?”

16562834412166.jpg“나자와 다른 방식이 있다는 건 황제와 싸우지 않겠다는 뜻인가?”

이우라의 물음에 레나는 조금 경계하며 대답했다.

16562834412155.jpg“네.”

16562834412166.jpg“그럼 어쩌겠다는 거지?”

이우라가 재차 물었지만 레나는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16562834412155.jpg“설명해도 이해 못 할 거예요.”

16562834412166.jpg“이해하도록 노력하겠다.”

이우라의 온순한 태도에 레나는 조금 놀랐다. 이렇게 고분고분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레나가 아는 이우라는 자기 기준이 확고해 벽창호 같은 구석이 있었다. 그런 사람이 돌연 태도를 바꾸니 꽤 얼떨떨했다. 왜 이러나 싶어 쳐다봤지만 이우라는 그저 진지하게 레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우라의 진지함에, 레나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16562834412155.jpg“저는 설득하려고 해요.”

16562834412166.jpg“설득?”

16562834412155.jpg“내 말에 귀를 기울여줄 때까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기다려서 스스로 마음을 돌리게 하고 싶어요.”

16562834412166.jpg“황제에게 말인가?”

16562834412155.jpg“황제도요.”

16562834412166.jpg“……그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나?”

16562834412155.jpg“맞아요, 불가능했어요. 한 번도 성공한 적 없는 일이에요.”

레나의 대답에 이우라의 단단한 이마가 움직였다. 레나의 말처럼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는데, 그래도 본인의 말처럼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그 투명한 반응에 레나는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곤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16562834412155.jpg“지금까지는 싸워서 이기는 자가 모든 걸 결정했어요. 하지만 나는 그게 옳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강하지 않다는 이유로 죽은 자가 내 안에 셀 수 없이 많아요.”

이우라는 레나의 마지막 말을 곱씹다 넌지시 되물었다.

16562834412166.jpg“경도 이기기 위해 강해진 것 아닌가?”

16562834412155.jpg“사람이 강해봤자 얼마나 강하죠?”

레나가 질문을 질문으로 받아치자 이우라의 표정이 더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이우라가 빤히 쳐다보자, 레나는 테이블에 올려진 유니의 손 앞에 자신의 손을 뻗어 대보았다. 두 손은 비슷하게 생겼지만 크기가 달랐다. 레나는 유니에 비해 크고, 유니는 레나에 비해 작았다.

16562834412155.jpg“인간은 해처럼 멀리 달리지 못하고 들판처럼 굳건하지도 못해요. 아무리 강해봤자 같은 시절, 같은 장소에 있는 또 다른 인간보다 강할 뿐이에요.”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유니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16562834412155.jpg“우린 모두 상대적으로 강하기도 하고 약하기도 해요.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보다 더 강한 사람이 있을 뿐, 혹은 더 약한 사람이 있을 뿐 나는 언제나 나라는 한 사람이에요.”

분명 그럴 뿐인데 인간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16562834412155.jpg“하지만 인간은 강한 자는 승자로, 약한 자는 패자로 여기며 위치를 정했죠.”

신분으로, 지위로, 그리고 권력으로 귀천과 고저를 나누었다.

16562834412155.jpg“그 와중에 니힐을 무너트린다고 뭐가 달라지죠?”

뭐가 달라지냐니. 폭정이 끝날 것이다. 세상은 질서를 되찾고, 평화가 이룩될 것이다. 이우라는 고민 없이 대답을 떠올렸지만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놓지는 않았다. 어쩐지 정답이 아닐 것 같아서였다. 이우라의 침묵에 레나가 말을 이었다.

16562834412155.jpg“니힐의 자리에 다른 누군가가 올라가는 것뿐이에요. 변하는 건 없어요. 서로의 위치가 바뀌는 것에 불과해요.”

16562834412166.jpg“……누가 올라가든 그 폭군보다는 나을 거다.”

이우라가 항의하듯 중얼댔다. 그래서 레나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용서받지 못한 자들의 왕은 백합처럼 하얗게 웃으며 되물었다.

16562834412155.jpg“대체 누구에게 낫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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