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엔지 루벨의 확신2021.12.13.
“변태예요!”
엔지의 우렁찬 목소리가 황실의 고풍스러운 침실을 뒤흔들었다. 저질렀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엔지는 새빨갛게 물든 얼굴로 씩씩대며 클라비스를 노려보았다. 클라비스는 생쥐에게 물린 고양이처럼 놀란 얼굴이었다. 그는 답지 않게 순진한 눈으로 엔지를 쳐다보더니, 이내 가벼운 숨소리를 터트렸다.
“하.”
마치 조소 같은 짧은 웃음소리에 엔지는 쭈뼛하고 긴장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클라비스가 어깨를 들썩이며 침대로 쓰러졌다.
“아하하!”
추기경의 맑은 웃음소리에 눈을 부릅뜨고 있던 엔지는 주춤 당황했다. 변태가 웃는다, 왜지?
“푸하하, 아하하하!”
고상한 추기경은 침대를 굴러다니며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이런 욕 처음이야. 지, 지조라니, 무슨 애가 그런 말을……. 아하핫!”
변태가 좋아한다, 왜……? 엔지는 아까보다 한층 불경해진 눈으로 헉헉대며 웃는 클라비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물까지 흘리며 웃어댔고, 힘껏 화를 내던 엔지는 다른 이유로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아, 미치겠다. 이렇게 웃어본 게 얼마 만이야.”
한참 후 클라비스가 눈물을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웃음기를 지우고 겸연쩍게 중얼댔다.
“다 웃고 나니 은근 상처받네…….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거야?”
“아, 아니…….”
엔지는 저도 모르게 부정하려다 멈췄다. 사실 맞다. 엔지는 추기경이 명백한 변태라고 생각했다. 엔지의 침묵에 클라비스가 다시 피식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뭐, 재미있었으니까 무례는 용서할게.”
클라비스는 남아 있던 웃음기를 한숨으로 덜어냈다. 그러곤 엔지와 다정히 눈을 맞추며 말했다.
“못 본 사이 많이 변했네. 하긴, 그런 일을 당했으니 이전 같을 수는 없겠지.”
가식인지 진심인지는 알 수 없지만, 걱정 어린 목소리였다.
“누나한테 가려고 그러지?”
“……네.”
“하지만 레나 루벨은 지금 황궁에 없어.”
엔지가 깜짝 놀라 쳐다보자, 그는 갇혀 있던 소년에게 자상히 설명했다.
“동부공과 다시 서부로 갔어. 나자 아이테르너와 협상을 하겠다면서.”
“그, 그럼 아버지를 고발한 건…….”
“떠나기 전에 고발장을 냈어. 다녀와서 재판을 열 생각이겠지.”
클라비스의 설명에 엔지의 표정이 허탈해졌다. 드디어 누나를 만난다고 생각했는데, 또 엇갈리고 말았다.
“이제 정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겠네, 엔지 군.”
증인으로 지목된 이상, 아버지인지 누나인지 태도를 확실히 밝혀야 한다. 그게 가혹하다고 느꼈는지 클라비스가 혀를 찼다.
“누나에게도 이용당하는 신세라니, 불쌍하게도.”
“아뇨.”
하지만 엔지는 단호히 부정했다.
“레나 루벨이 저를 증인으로 확보한 건 절 구하려고 한 거예요.”
“믿음이 대단한데?”
“믿음이 아니라 판단이에요.”
엔지의 고요한 음성에 클라비스의 눈에는 이채가 서렸다. 서부에서 제도로 돌아올 때까지 보름, 그리고 저택에서 열흘. 엔지는 한 달 가까이 감금되어 있었다. 난생처음 공자가 아닌 죄인의 신분으로 고독을 경험했다. 며칠은 울고, 며칠은 비관하고, 그 후부터는 생각했다. 끊임없이, 치열하게. 그 끝에서 엔지는 별로 놀라울 것 없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의 모든 행동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역사에는 아찔한 우연이 존재하지만 사람에게 우연은 없다. 생각, 마음, 관점, 신념, 사상.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판단과 행동. 그 모든 것은 명확한 이유를 갖는다. 비이성적인 변덕이나 충동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순간의 실수가 아니라 그 사람이 쌓아 올린 과거가 만든 현재의 결과다. 그런 맥락으로 엔지는 아버지를 이해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비로소 인정했다.
“……아버지는 열등감으로 가득 찬 사람이에요.”
엔지가 무거운 표정으로 운을 뗐다.
“그래서 이기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고, 자신이 저지른 일을 후회하거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요. 왜냐면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니까요.”
이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 엔지는 아파하며 말을 이었다.
“만약 누나도 그런 사람이 됐다면 이미 아버지와 손을 잡았을 거예요. 아니, 약점을 가지고 이용했겠죠.”
“복수를 원할 수도 있잖아?”
“그럼 더 그랬겠죠. 실컷 이용하고 버리는 것만큼 효과적인 복수는 없으니까.”
엔지의 확신에 찬 목소리가 클라비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그래서 엔지는 더 힘내서 말을 이었다.
“누나는 강해졌어요. 그리고 용감해요.”
“용감?”
“자신의 길을 똑바로 가고 있어요. 위험해도, 방해를 받아도 멈추지 않아요.”
엔지는 그렇게 말하며 누나가 사랑한 시인, 비트라의 시를 떠올렸다. 그 시인은 기도했다. 잔혹한 갈림길에서 선을 택하는 용기를 달라고. 그건 소수의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모두에게 필요한 기도였다. 남편이 두려워서 자식들을 외면한 여자에게도, 주인이 무서워서 죄 없는 아이에게 독을 먹인 하인에게도. 일찍이 선하지 못한 결정을 한 탓에 옳은 길을 택하는 건 더 어려워졌다. 하지만 레나는 불평하지 않고 그 길을 택했다. 그러기 위해 누나가 얼마나 강해져야 했는지, 엔지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팠다.
“누나는 그런 사람이 됐어요.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차례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누나를 오해해서 추기경 전하께 의지하지는 않을 거예요.”
엔지의 단호한 물리침에 클라비스는 코웃음을 흘렸다. 참으로 가소롭다는 듯, 일부러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저도 모르게 찔린 마음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각오는 알겠지만 너무 야박하게 굴지 마. 증인 확보를 요청한 건 레나 루벨이지만, 어제 엔지 군을 데리러 간 건 나니까.”
클라비스는 자신이 카르도의 속내를 눈치채고 시의적절하게 나섰다며 괜히 으스댔다.
“나 아니었으면 지금쯤 천천히 식어가고 있을걸?”
“그건 감사해요.”
“그건이라니.”
엔지의 한정적 감사에 클라비스가 키들댔다. 엔지는 그 가벼운 태도를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도 아무 이유 없이 행동하신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글쎄, 나는 변태라서 이유 같은 거 없는데.”
변태는 뒤끝이 있다. 하지만 소년은 더 이상 휘둘리지 않았다.
“제게 뭘 원하시는지 이야기해주세요.”
“아직.”
엔지의 요구에 클라비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속삭이듯 덧붙였다.
“하지만 곧이야. 그때가 되면 엔지 군에게 전부 줄게. 이제 정말, 그래도 될 것 같아.”
클라비스는 그렇게 말하며 하얗게 웃었다. 햇살처럼 눈부시지만, 곧 깨질 것처럼 위태로운 미소였다.
“그럼 조금 더 쉬어. 저녁쯤엔 루비드 군도 얼굴을 보러 올 거야.”
클라비스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클라비스가 가려고 하자, 엔지는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전하, 혹시 유니를 아세요?”
“아니? 그게 뭐야?”
클라비스는 태연한 얼굴로 엔지를 돌아봤다. 그래서 엔지도 시치미를 떼고 대답했다.
“동화책에 나오는 여자애 이름이에요.”
“그래? 나는 처음 듣는데, 별로 인기 없는 책인가 보네.”
클라비스는 짧게 중얼대며 돌아섰다. 클라비스가 문을 닫고 나가자, 혼자 남은 엔지는 조용히 한숨을 내뱉었다. ‘그게 뭐냐’고? 정말 처음 들었다면 ‘그게 누구야’라고 물었을 거다. 유니는 누가 들어도 이름이니까.
“거짓말쟁이…….”
엔지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누나의 시집에서 본 서명이 왜 익숙한지, 엔지는 비로소 알 수 있었다. ***
“후우.”
레나는 긴 숨을 내쉬며 쓰러지듯 침대에 엎드렸다. 벌써 나흘째 강행군이다. 오늘도 종일 말을 달린 레나는 녹초처럼 지쳐 있었다. 레나는 나자를 만나기 위해 서쪽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린을 통해서 의사는 확인했지만, 제대로 이야기를 하려면 만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니힐에게도 협상해보겠다고 이야기한 터라 접촉을 생략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거의 다 왔어.’
나자가 제도 쪽으로 꽤 내려온 덕분에 예전처럼 서부 접경지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 레나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몸을 굴려 바로 누웠다. 레나가 누운 이곳은 서부 소도시, 그 일대를 다스리는 지주의 성이다. 너른 들판과 비옥한 토지를 끼고 있어 지방치고는 규모가 제법 큰 도시인데, 오늘 들어올 때 보니 도시의 분위기는 각박하기를 너머 흉흉했다.
‘망자가 코앞까지 다가온 탓이겠지.’
사람들은 망자를 두려워한다. 제국 가장 안쪽에 망자의 왕이 있는 걸 까맣게 모른 채. 레나가 니힐의 새하얀 모습을 멍하니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가벼운 노크와 함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그 나직한 음성에 레나는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문을 반 뼘만 열고, 경계 가득한 표정으로 방문객을 쳐다봤다.
“이 밤중에 무슨 일이시죠, 동부공 저하?”
격식과 거리가 가득한 레나의 물음에, 린도 비슷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문제가 생겼다.”
“문제라면 무슨?”
레나가 되묻자, 린이 문틈으로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혼자 있기 심심해.”
그 애처로운 호소에 레나는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레나는 귀엽고도 요망한 연인에게 기꺼이 문을 열어주었고, 린은 문이 열리기 무섭게 레나의 허리를 팔로 감았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서 내가 다 쫓아냈어.”
레나가 혼내자 린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레나의 방 앞 복도는 호위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레나가 황당하다는 듯 쳐다보자 린은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마냥 그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이 녀석 갈수록 애교가 는다. 레나는 수줍고 다소곳하던 시절의 린을 떠올리며 못 이기는 척 그의 머리를 다독였다. 그러자 린은 용기를 얻은 듯 그대로 밀고 들어와 침대에 레나를 쓰러트렸다. 레나는 조금 기가 막혀서 자기 위에 엎드린 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린은 개의치 않고 한 뼘 거리에서 자그마하게 물었다.
“뭐 하고 있었어?”
린의 나긋하고도 나직한 목소리에 레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웃었다. 이 치명적인 수컷을 어찌할꼬. 레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대답했다.
“그냥 생각.”
“무슨 생각?”
“바깥 상황이라든가, 내일 일정이라든가 뭐 그런.”
레나는 간단히 답하다가 돌연 걱정스러운 눈으로 되물었다.
“내일이면 나자를 만날 텐데, 괜찮아?”
기습적인 물음에, 린은 대답 대신 숨을 길게 쉬며 레나에게 기댔다. 그래서 레나는 위로하듯 그의 등을 토닥토닥 다독여주었다. 부담을 느끼고 있겠지. 린은 나자를 두려워하니까. 레나는 린이 내뱉은 한숨을 그렇게 이해했다. 상당한 오해였다.
“대답 언제 해줄 거야?”
린이 레나의 귀에 입술을 댄 채 물었다. 맥락을 찾을 수 없는 말에 레나는 영문을 몰라 되물었다.
“무슨 대답?”
“우리 결혼하자.”
린의 담담한 목소리에 레나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린은 레나가 자신에게 더 집중해주길 바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에 대한 대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