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업화2021.12.27.
“남부공을 살해한 게 정말 아버지라면…….”
이미 심증을 굳힌 레나가 어두운 목소리로 예측했다.
“그때 너희 고향 사람들을 봤을지도 몰라.”
“아마 그렇겠지.”
린도 비슷한 생각인지 굳은 얼굴로 끄덕였다.
“바로 나서지 않은 건 남부공을 살해한 혐의를 피하기 위해서였고.”
“하지만 이대로 넘어가진 않을 거야.”
레나의 말마따나 카르도는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을 거다. 자신에게 껄끄러운 동부와 북부를 한 번에 정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니까.
“더 이상 아버지가 날뛰게 두지 않을 거야.”
레나가 자책을 삼키며 말했다.
“허무하게 잃는 건 한 번으로 족해.”
마음을 다진 레나는 협상을 위해 떠나기 전, 린과 함께 카르도를 끌어낼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며칠 후, 카르도가 배교자 소탕에 나섰다는 소식이 어김없이 들려왔다.
***
“어떻게…….”
카르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레나와 동부공을 번갈아 보았다.
‘약점을 감추려고 뒤따라 온 건가? 아니면, 처음부터 함정인가?’
“변명할 말이 있나?”
동부공의 살벌한 추궁에 상황을 살피던 카르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배교자 무리인 줄 알았소.”
“변명을 하려거든 성의껏 해라. 서부의 숱한 곳을 놔두고 여기까지 들어와서 배교자인 줄 알았다고?”
동부공의 멸시 어린 추궁에 카르도는 어금니를 물었다. 말마따나 단지 배교자 소탕을 위해 여기까지 왔다는 말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리고 지금 설득력을 잃으면 카르도는 빼도 박도 못 하게 동부 기사들을 습격한 꼴이 된다.
“……첩보를 받았소. 이곳에 동부인으로 보이는 배교자들이 있다고.”
결국 카르도는 동부공과 척을 지고 명분을 챙기기로 했다.
“그들은 제국에 특히 반발했던 자들이니 그냥 둘 수 없어 달려왔는데, 나야말로 공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군.”
카르도는 그렇게 말하며 여유롭게 웃었다.
‘시기가 조금 앞당겨졌을 뿐, 어차피 내 손으로 치워야 할 작자다.’
카르도는 이걸 오히려 기회로 삼기로 했다. 어쨌든 이 주변에 동부인이 숨어 있는 건 분명하다. 저렇게 검은 머리 기사들만 모아다가 눈속임을 시도한 게 증거다. 동부인만 생포해서 데려갈 수 있다면, 동부공은 죽여도 된다. 반역자를 처단한 셈 치면 되니까. 그렇게 생각한 카르도는 일부러 동부공을 도발했다.
“그러는 공은 여기까지 무슨 일이신지. 굳이 이 먼 곳까지 행차하셨다는 건, 뭔가 숨기는 게 있다는 뜻인가?”
“그 말 그대로 돌려드리고 싶네요.”
그런데 대답이 뜻밖의 방향에서 들려왔다. 레나였다.
“숨기는 게 없다면 이 먼 곳까지 행차하실 리 없을 텐데, 굳이 불까지 낸 건 증거를 태우기 위해서였나요?”
증거? 알 수 없는 말에 카르도가 눈살을 찌푸리자, 레나가 태연히 덧붙였다.
“우리는 남부공의 죽음에 대해 밝히려고 왔어요. 저하께서 그토록 허망이 돌아가신 게 의아해 알아보니, 여기 오자마자 병이 나셨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혹시 음독하신 게 아닐까 싶어 조사차 나온 건데 이렇게 용의자를 만날 줄이야.”
‘이것들이…….’
레나의 천연덕스러운 설명에 카르도는 기가 찼다.
‘이런 식으로 몰아가려는 수작인가?’
“북부에서 소환장을 보냈을 텐데 아직 여기 있다는 건 재판을 거부한다는 뜻이겠지.”
동부공도 카르도의 급소를 덤덤히 짚어냈다.
“증거인멸을 시도한 정황도 확인했으니 직접 연행하겠다.”
동부공의 선언과 함께 동부 기사들이 카르도와 남부 기사들을 포위했다. 요새로 급습한 탓에 남부 기사의 수는 대여섯밖에 되지 않았다. 명백한 열세였지만 카르도는 오히려 짙게 웃었다.
“같잖은 이유를 잘도 가져다 붙이는군.”
동시에 화염이 그의 주변에 솟구쳤다.
“크윽!”
카르도에게 접근하던 기사들이 황급히 열기를 피했다.
“그렇다면 나는 동부공이 동부인을 숨기기 위해 나를 공격했다고 주장해야겠군.”
그래, 어차피 모든 역사는 강자를 위해 쓰여진다.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
“정당방위로 인한 사망사고는 불가피했던 것으로.”
카르도는 혼자 중얼대며 웃었다. 그의 기분을 대변하듯 불길도 커졌다. 모든 것을 불사르고 싶은 충동도 함께 강해졌다. 카르도가 레나와 동부공을 향해 팔을 휘저었다. 불길이 그의 의지를 따라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물러나라!”
몸을 굴려 피한 동부공이 기사들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기사들이 반응할 겨를도 없이 다시금 불길이 몰아쳤다.
“레나!”
동부공이 몸을 던져 레나를 감쌌다. 살갗을 긁는 열기에 동부공은 재차 소리쳤다.
“밖으로 나가라!”
요새 안에서는 저 불길을 피할 방법이 없다. 동부공은 그렇게 판단한 듯 기사들에게 윽박질렀고, 카르도는 싱긋 웃으며 길을 내주었다. 기사들이 한결 사그라진 불을 밟으며 출구로 달려 나갔다. 레나와 동부공도 그 뒤를 따르려 할 때였다.
“어딜 가려고.”
카르도의 조롱과 함께 낮아졌던 불이 도로 거세졌다. 그로써 레나 루벨과 리그난 아이테르너는 기사들과 떨어진 채 카르도의 불길 속에 갇힌 꼴이 되었다. 레나와 동부공의 굳은 얼굴을 보며, 카르도는 덧없이 탄식했다.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내가 널 직접 태워죽이는 날까지.
“……새삼스러울 게 있나요?”
“아니, 없다.”
카르도는 짧게 대답하며 손끝을 튕겼다. 그 순간 동부공의 발밑에서 솟구친 불이 그의 전신을 집어삼켰다.
“린!”
“움직이지 마라.”
레나가 연인에게 손을 뻗자 카르도가 경고했다.
“어차피 너도 곧이다.”
카르도는 스스로 생각한 것보다 덤덤히 말했다. 앓던 이 같던 딸을 제압했는데, 뛸 듯이 기쁜 마음은 없었다. 오히려 옅은 슬픔이 잔잔히 밀려왔다. 카르도는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궁금했다. 질척질척하게 발밑을 꺼트리는 과거도 지긋지긋했다. 그는 다만 이 진창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카르도의 심정을 눈치챈 듯, 레나가 억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내게 단 한 번이라도 미안했던 적 있어요?”
“있다.”
카르도는 짧게 대답했다가 정정했다.
“있었다.”
“언제요?”
“네가 다시 나타나기 전에 가끔.”
아니, 자주. 어쩌면 꽤 많이. 만약 네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도 종종 네게 미안한 마음을 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널 추모할 자신이 없구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물어볼게요.”
몰아치는 불길 속에서 레나가 희미하게 속삭였다.
“정말, 제게 용서받고 싶지 않으세요?”
“그만 무덤으로 돌아가거라.”
카르도는 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레나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그리고 불이 꺼졌다. 갑작스런 이변에 카르도는 눈을 부릅떴다. 동부공에게 한 것처럼 레나를 불로 덮어버릴 셈이었다. 그런데 도리어 불이 사라지다니, 카르도는 당황해서 다시 불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 했다. 그런데 수족처럼 움직이던 불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이 무슨……!”
카르도는 경악하며 사라져버린 불꽃을 찾아 두리번댔다. 그리고 방황하는 그의 시야에, 몸을 일으키는 동부공이 들어왔다.
“어, 어째서……?”
카르도는 마치 꿈을 꾸는 기분으로 동부공을 바라보았다. 불에 뒤덮였던 그는 그을린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건 골수마저 녹이는 불이다. 살아 있는 것이 그 속에서 멀쩡할 수는 없다. 카르도는 이 농간을 깨부수려는 듯 다시 권능을 끌어올렸다. 그런데 레나의 발밑에서 불꽃 대신 새하얀 꽃이 피어났다. 백합이었다. 카르도가 그 꽃을 아연히 바라보자, 레나가 카르도를 향해 걸음을 뗐다. 레나의 걸음마다 요새의 단단한 돌바닥에서 백합이 피어났다. 이해하지 못할 광경에 카르도는 하얗게 질려 딸을 바라보았다. 그와 얼굴을 마주한 레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를 용서하고 싶었어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날 위해서.”
어느덧 백합이 군락을 이루었다. 하얀 꽃이 가득 번지자 카르도는 그것을 피해 뒷걸음쳤다. 카르도는 그 꽃이 독이나 불이라도 되는 것처럼 두려워했고, 레나는 서글픈 얼굴로 아버지와의 거리를 좁혔다.
“하지만 더는 안 되겠어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요.”
“다가오지 마라!”
뒷걸음질 치던 카르도가 버럭 소리쳤다. 어느새 벽이 등에 닿아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그는 사냥감이 된 감각에 진저리를 내며 다시금 업화를 일으켰다. 권능을 사용했다. 불꽃을 짜냈다.
“이럴 수가…….”
하지만 황제에게 받은 힘은 더 이상 기적을 베풀지 않았다. 카르도의 눈동자가 짧은 순간 빠르게 흔들렸다. 퇴로를 찾는 짐승처럼 초조한 눈빛이었다. 레나가 그를 측은히 바라보자 카르도의 표정엔 증오심이 가득 담겼다.
“너는 끝까지……!”
카르도의 호통에, 레나는 조용히 물러났다. 딸이 자신을 끝까지 미워하는 아버지를 외면하자, 아버지의 손에서 비로소 화염이 솟구쳤다.
“하!”
카르도는 권능이 돌아온 줄 알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레나가 물러나며 돌아온 업화는 이전처럼 그의 의지를 반영하지 않았다. 원한 적도 없는데 불이 카르도의 손에서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났다. 동시에 이제껏 느껴본 적 없는 고통이 그의 팔뚝을 집어삼켰다.
“크윽!”
이변을 눈치챈 카르도는 불을 떨쳐내려고 팔을 휘저었다. 하지만 불길은 그에게 달라붙은 채 더 활활 타올랐고, 살갗이 타는 감각에 카르도는 비명을 질렀다.
“크아악!”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레나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등 뒤로 다가온 린이 손으로 레나의 얼굴을 덮어 주었다. 레나가 무덤에서 무엇이 되었는지도 모르고, 그 앞에서 감히 권능을 쓰려다가 제 팔을 태우게 된 카르도는 처절하게 괴로워하며 울부짖었다. 그 소리가 끊어지기 직전, 레나가 린의 손을 치우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재와 불덩이가 떨어지던 곳에서 다시 백합이 피어나 업화를 삼켰다. 불이 차츰 줄어들자 카르도는 숨을 헐떡이며 쓰러졌다. 한쪽 팔이 다 타버렸지만, 그는 놀랍게도 정신을 잃지 않았다. 땀으로 온몸이 젖은 카르도는 겨우 뜬 눈으로 레나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해명을 바라는 것 같았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레나는 그 눈빛에서 어린 시절의 자신을 떠올렸다. 마찬가지였다. 나도 어릴 때 그런 심정으로 당신을 보며 자비를 구했다.
“참고 기다린 게 무색하네요. 결국 이런 결말이라니.”
이 지경이 되어서도 자신의 과오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를 보며 레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드린 기회가 아버지에겐 필요가 없었던 거겠죠. 설령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 해도 아버지는 같은 결정을 할 거예요.”
가능하다면 화해하고 싶다는 건 진심이었다. 하지만 화해를 원하지 않는 당신을 이대로 방치해 내 소중한 사람들을 더 다치게 할 수는 없다. 레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정신을 잃어가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적어도 재판은 받게 해드릴게요.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