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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화. 들꽃이 피는 곳 (174/208)

174화. 들꽃이 피는 곳2021.12.30.

4년 전이었다. 여느 때처럼 무료하고 덧없던 어느 날, 황혼을 향하던 니힐의 눈에서 무언가 흘러내렸다.

16562837152036.jpg‘뭐지?’

니힐은 손끝으로 자신의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을 찍어보았다.

16562837152036.jpg‘눈물……?’

그것을 자각한 순간 니힐의 무정한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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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2837152036.jpg“윽……!”

이어 정체 모를 격통이 니힐의 가슴을 옥죄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눈물은 하염없이 흘렀다. 고통을 견디던 니힐은 눈을 크게 뜨고 새빨갛게 노을 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 짧은 탄식과 함께 니힐은 깨달았다. 무덤에 버리고 온 심장이 부서졌다는 사실을. . . . 사자를 가둔 왕은 이름 높은 정복자였다. 그는 살아생전 단 한 번도 패한 적 없는 패왕이었고, 무덤에서 니힐에게 패배를 경험한 후 설욕만을 고대하던 긍지 높은 전사였다.

16562837152054.jpg―그대의 강함에 경의를 표한다.

반신이 부서진 사자 왕이 니힐에게 말했다. 니힐이 무심히 내려다보자, 철갑을 두른 왕이 비굴하게 웃었다.

16562837152054.jpg―즐거웠으니 알려주마. 그대의 심장이 누구에게 파괴되었는지.

뜻밖의 말에 줄곧 냉랭하던 니힐이 반응했다. 눈동자에 희미한 호기심이 맺힌 것뿐이지만, 사자 왕은 우습게도 그 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짓밟은 자에게 매료된 탓에, 왕은 말할 필요 없는 사실을 찬탈자에게 고했다.

16562837152054.jpg―산 채로 망자의 왕이 된 자가 그대의 심장을 부쉈다.

16562837152036.jpg“산 채로 망자의 왕……?”

16562837152054.jpg―축복을 빼앗긴 왕. 그대의 곁을 맴도는 레나 루벨이.

예상치 못한 폭로에 니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자를 가둔 왕은 니힐이 묻는다면 아는 것을 더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니힐은 대화를 이어가는 대신, 철갑을 뚫고 그의 심장을 뽑아버렸다. . . . 축복을 빼앗긴 왕, 레나 루벨. 두 이름을 곱씹던 니힐의 귓가에 자박대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16562837152074.jpg“나야.”

나긋한 음성과 함께 클라비스가 화랑으로 들어섰다. 그는 늘 그랬듯 가면같이 웃으며 소식을 전했다.

16562837152074.jpg“레나 루벨이 돌아왔어. 협상에 성공했대.”

니힐은 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자 클라비스는 누나의 생각을 읽은 양 말했다.

16562837152074.jpg“수상하게 잘 풀리지?”

16562837152036.jpg“상관없어.”

수상하다고 생각한 건 사실이지만, 니힐은 클라비스의 빈정댐을 단번에 쳐냈다. 진심이었다. 아무렴 상관없다. 레나 루벨이 망자의 왕이든, 나자와 어떤 작당을 했든. 이를 드러낼 때 심장을 뽑아 부숴버리면 그만이다. 지난 100년간 항상 그랬던 것처럼.

16562837152074.jpg“관대하네.”

클라비스가 옅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16562837152074.jpg“두엄의 궁에 균열을 열면 나자가 그쪽에서 나오기로 했어. 북부공이 무덤에 길을 만들어둔 탓에 균열이 열리는 위치는 저쪽에서도 금방 찾을 거야.”

16562837152036.jpg“그럼 당장 불러.”

16562837152074.jpg“아니, 그 전에 재판이 있어.”

재판이라는 말에 니힐이 힐끗 눈을 돌리자 클라비스가 덧붙였다.

16562837152074.jpg“레나 루벨이 요청한 재판이야.”

16562837152036.jpg“남부공.”

16562837152074.jpg“맞아.”

16562837152036.jpg“졌나 보군.”

니힐은 대수롭지 않게 중얼댔다. 만약 이겼다면, 그래서 입지와 권세가 공고하다면 재판 따위에 불려 나오지도 않을 텐데. 아무래도 새 남부공은 진 모양이다. 한심하게도. 니힐은 재판이라는 말에 별수 없이 자신의 패배를 떠올렸다. 과거, 무력하고도 수치스럽던 그 날을.

16562837152074.jpg“어떻게 할까?”

16562837152036.jpg“허한다.”

니힐은 주저함이 없이 대답했다.

16562837152036.jpg“뭐든 원하는 만큼 하게 해.”

클라비스의 말마따나, 니힐은 관대하게 말했다. 그러곤 자신에게서 벗어나길 염원하는 동생에게 나직이 덧붙였다.

16562837152036.jpg“그런다고 달라질 건 없으니까.”

  *** 루비드가 전해온 소식에 엔지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16562837208643.jpg“아버지의 재판 기일이 잡혔다고요…….”

어젯밤 레나 루벨과 카르도 루벨이 제도로 돌아왔다. 황궁에 들어온 건 새벽이었다. 그런데 고작 몇 시간 만에 기일이 잡히다니, 상황이 이토록 급박하게 돌아가다니.

16562837208643.jpg“지, 지금 어디 있어요?”

16562837208653.jpg“어느 쪽?”

16562837208643.jpg“둘 다요!”

16562837208653.jpg“한쪽은 방에, 다른 한쪽은 감옥에. 하지만 너는 둘 다 못 만나.”

16562837208643.jpg“왜, 왜요?”

16562837208653.jpg“가족이자 증인이니까. 어디로든 치우치지 않게 접촉을 금하기로 했어.”

16562837208643.jpg“그런…….”

엔지가 질린 얼굴로 신음하자 루비드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저 심정을 안다. 어리다는 이유로 진실에서 배제된 채 주위가 파탄나는 걸 구경만 하는 처지를, 루비드는 누구보다 잘 안다.

16562837208653.jpg“……재판이 어떻게 돌아갈지는 아직 아무도 몰라.”

그래서 루비드는 엔지를 조금이라도 돕고자 입을 열었다.

16562837208653.jpg“혐의는 짙은데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

카르도 루벨이 빌 알레스 그라샤를 살해했다는 의심엔 제국의 귀족 대부분이 공감했다. 하지만 그것을 입증할 방법은 아직 없었다.

16562837208653.jpg“너만 모르는 게 아니야. 아마 레나 루벨 외엔 아무도 모를 거야.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루비드는 이렇게라도 엔지를 위로하고 싶었다. 하지만 엔지는 위로받기는커녕, 오히려 다른 부분에 경악했다.

16562837208653.jpg―세 종류의 독초와 북부 동토에서 나는 흙으로 만든 석탄이다.

16562837208653.jpg―보통 벽난로에 넣어두는데 불을 피울 계절이 아니어서 등잔의 기름과 섞었다.

16562837208653.jpg―등불을 켤 때마다 조금씩 독을 마시도록.

아버지가 요새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의 죄를 덤덤히 읊던 그 말이,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고스란히 생각났다.

16562837208643.jpg‘증거, 나밖에 모르는…….’

아니, 집사도 알기야 할 거다. 하지만 집사는 절대 아버지를 배신하지 않을 거다. 아버지의 몰락이 곧 자신의 죽음이니까. 결국 이걸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엔지의 작은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감금된 동안 아버지를 향한 원망은 최고조에 달했다. 하지만 그의 허점을 손수 난자하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엔지가 떨림을 참기 위해 주먹을 꽉 쥘 때였다.

16562837208653.jpg“너는 나설 필요 없어.”

루비드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엔지를 퍼뜩 깨웠다. 엔지가 놀라서 쳐다보자, 루비드는 그의 갈등을 눈치챈 듯 말했다.

16562837208653.jpg“레나 루벨이 네 출석을 요구하지 않았어.”

16562837208643.jpg“저, 저는 증인인데요?”

16562837208653.jpg“이번 재판에는 필요 없다고 부르지 말랬어.”

16562837208643.jpg“이번 재판이라뇨……. 재판이 또 열린다는 보장은 없잖아요.”

공작에게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자는 황제뿐이다. 그리고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황제는 피고인에게 변론의 기회를 충분히 주지 않는다. 사면을 받든 처벌을 받든, 모든 것은 즉결 처분. 그러니 카르도 루벨의 재판 역시 단번에 끝날 가능성이 크다.

16562837208653.jpg“처음부터 부를 마음이 없었나 보지.”

루비드의 말에 엔지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소년의 얼굴에 슬픔이 차오른 건 그다음 일이었다. 엔지가 말한 그대로였다. 누나는 아버지와 달라서 어린 소년을 이용하지 않았다. 단지 보호할 뿐. 엔지는 그게 기쁘고도 슬펐다. 내 강하고 불쌍한 누나가 혼자 어디를 가려는지, 그 소년은 여전히 헤아릴 수 없었다. *** 하늘이 유독 맑은 날, 제국의 공작 카르도 루벨의 재판이 열렸다. 이 초유의 사태에 귀족들은 빠짐없이 입궁해 두엄의 궁으로 모여들었다.

16562837152054.jpg“죽든 살든 대단한 볼거리겠어요.”

한 숙녀가 비웃음을 삼키며 중얼댔다.

16562837152054.jpg“삼일천하라고 밖에는.”

옆에 있던 신사도 조용히 거들었다.

16562837152054.jpg“주제를 모르고 높이 오르다 날개가 타버린 것이지.”

그들과 동행하던 노부인도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우울한 얼굴의 노부인을 뒤로한 채, 두 신사 숙녀는 끊임없이 속닥이며 루벨 공작의 몰락을 즐겼다.

16562837152054.jpg“안 그래도 알레스 가의 방계 후손들이 벼르는 중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일이 터졌네요.”

16562837152054.jpg“누가 아니랍니까. 설마 레나 루벨이 카르도 루벨을 법정에 세울 줄은.”

16562837152054.jpg“이참에 속 시원히 밝혀지면 좋겠어요. 저들이 진짜 부녀인지 아닌지.”

그들은 은근히 속삭이며 두엄의 궁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재판장으로 꾸며져 다소 어수선하지만, 최근에 새로 단장한 두엄의 궁은 매우 화사했다. 대리석과 황금으로 꾸며진 궁을 둘러보며 숙녀와 신사가 다시 속삭였다.

16562837152054.jpg“이제 이 궁전도 이름을 바꿔야겠네요.”

16562837152054.jpg“그러네요. 사실 처음부터 가당찮은 이름이었죠. 두엄의 궁이라니, 참.”

아무리 방치된 폐허 꼴이었다 해도 황궁에 퇴비, 거름이라는 이름이 붙다니, 젊은 귀족들은 천박하다고 생각하며 투덜댔다. 그러자 옆자리에서 이야기를 듣던 노부인이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16562837152054.jpg“이 궁전의 이름을 지은 건 클라비스 추기경의 조부였소.”

16562837152054.jpg“추기경의 조부라면…….”

16562837152054.jpg“황제 폐하의 동생이신 클라비스 대공 전하 말씀입니까?”

젊은이들의 물음에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16562837152054.jpg“선한 사람이었지. 추기경과 외모는 꼭 빼닮았지만, 성품은 정반대였소.”

16562837152054.jpg“그분이 궁전의 이름을 두엄이라고 하신 겁니까?”

앳된 숙녀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되물었다. 그 숙녀에게 두엄의 궁이라는 이름은 썩은 궁전이라는 말과 비슷한 멸칭이었다. 그래서 누군가 악의를 품고 지은 거라고 생각했다. 숙녀의 의문에 노부인이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16562837152054.jpg“황제 폐하께서는 들꽃을 좋아하신다지.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왕이던 시절에는 들꽃을 무척 사랑하셨다고 들었소.”

16562837152054.jpg“그게 궁 이름과 무슨 상관이죠?”

16562837152054.jpg“꽃이 피려면 땅과 거름이 필요하지 않소. 다 무너진 궁전을 없애지 않고 두엄의 궁이라 이름 붙인 건, 비록 폐허가 되었지만 여기서 다시 꽃이 필 거라고 전하고 싶었던 게지.”

노부인의 담담한 말에 숙녀는 부채를 펼쳤다. 그러곤 입을 가린 채 은근히 속삭였다.

16562837152054.jpg“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클라비스 대공은 지하에서 통곡을 하겠네요. 두엄더미에 꽃이 피기는커녕 온 세상이 덩달아 썩어가고 있으니 말이에요.”

숙녀의 신랄한 비웃음에 신사가 헛기침을 했고, 노부인도 못마땅한 듯 그 숙녀를 바라보았다. 눈총을 받게 된 숙녀는 능청스럽게 딴청을 피웠다.

16562837152054.jpg“아! 이제 시작하려나 봐요.”

말을 돌리려는 뻔한 수작이었지만, 신사와 노부인은 잠자코 그 숙녀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사람들이 가득 모인 두엄의 궁으로 드디어 주인공이 입장했다. 카르도 루벨, 한때 북부 기사들을 거느리던 남자가 이제는 그들에게 연행되는 꼴로 법정에 들어서고 있었다.

16562837152054.jpg“저 모습 좀 봐.”

16562837152054.jpg“못 봐주겠군.”

16562837152054.jpg“자기 권능에 당한 거라더군요.”

귀족들이 카르도의 모습을 보며 술렁였다. 카르도 루벨은 평소와 달리 초췌했다. 옷차림은 맵시가 죽어 볼품없었고, 애써 넘긴 머리칼도 흐트러짐을 숨기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는 한쪽 팔을 커다란 천으로 감싸 감추고 있었다. 게다가 그저 다쳤다고 보기엔 천 위로 드러난 부피가 턱없이 작았다. 참으로 초라한 몰골이었지만, 그의 태도만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당당했다. 그래서 귀족들은 오히려 눈을 빛냈다. 끝까지 품위를 잃지 않는 저 남자가 추락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한때 권세를 떨치던 자가 비참하게 발버둥 치는 모습을 동정하고, 인생의 덧없음을 한탄하고, 자신의 무탈한 하루에 감사하고 싶었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재판을 지켜보았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은 기대를 채우지 못했다. 그로부터 불과 반 시간 후, 두엄의 궁에 피와 망자가 흘러넘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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