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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화. 재판 (175/208)

175화. 재판2022.01.03.

소란스럽던 장내가 고요해졌다. 장막 뒤에 앉아 있던 레나는 그 소리로 카르도 루벨이 입장한 것을 알았다. 드디어 재판이 시작된다. 레나가 옅게 한숨을 쉬자, 린이 조용히 손을 잡아주었다. 자신을 감싸는 손길에 레나는 빙긋 웃었다. 그러곤 연인을 향해 속삭였다.

16562837400115.jpg“다녀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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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카르도 루벨이 선 곳은 두엄의 궁 홀의 정중앙, 제단이 쌓여 있는 곳이었다. 카르도가 제단 앞에 서자 심문관과 판결자도 이어 자리에 앉았다. 심문관은 북부공 이우라, 그리고 판결자는 황제 니힐이었다.

16562837400127.jpg‘추기경은 어디 있지?’

카르도는 숨을 죽이고 상황을 살폈다. 오만한 얼굴의 이우라나 무심한 눈빛의 니힐은 예상 그대로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황제를 그림자처럼 보좌하는 클라비스가 보이질 않았다.

16562837400127.jpg‘이대로 내뺄 셈인가?’

나만 여기 쓰레기처럼 버려두고? 카르도는 이를 악물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래, 그 뱀 같은 자에겐 기대하지 않는 편이 낫다. 이제껏 그래왔듯, 이번에도 스스로 해내면 될 일이다. 카르도는 그렇게 생각하며 어깨 아래서 느껴지는 통증에 집중했다. 업화에 휘감긴 팔이 숯처럼 타서 무너지던 감각이 아직 생생하다. 그 지독한 기억이 카르도의 정신을 더 날카롭게 만들었다.

16562837400135.jpg“재판을 시작한다. 카르도 루벨, 앞으로.”

이우라가 호명하자 카르도는 음울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마치 원망하듯 이우라를 바라보았다. 이 모든 게 나를 내친 네 탓이라는 듯이. 하지만 이우라는 냉랭히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16562837400135.jpg“그대는 살인과 반역의 혐의로 법정에 섰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무고한 자를 살해한 죄, 그리고 제국과 그 근본인 황제에게 위협이 되는 일에 가담한 죄, 인정하는가?”

16562837400127.jpg“아니오.”

카르도는 묻기 무섭게 대답했다.

16562837400127.jpg“그 무엇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건 나를 음해하려는 레나 루벨과 당신, 이우라 플레누스의 억측입니다.”

카르도는 감정을 배제한 채 여전히 품위 있는 태도로 선언했다. 사실 그는 레나와 이우라가 어떤 준비를 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레나의 고발 사실을 알게 된 건 제도를 떠난 후였고, 접경지에서 레나에게 제압된 후엔 죄인으로 취급되며 모든 정보를 차단당했다. 때문에 카르도는 자신의 죄명이 살인과 반역이라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아니. 그래서 카르도는 오히려 당당하게 행동했다.

16562837400127.jpg“내가 의심받는 이유가 남부공의 뒤를 이었기 때문이라면, 나를 남부공으로 임명한 황제 폐하도 공범이라는 뜻입니다.”

황제를 걸고 넘어지는 항변에 귀족들이 술렁였다.

16562837400127.jpg“불합리한 심증 외에 증거가 있습니까? 만약 없다면 공이 해명하십시오. 헌신하던 나를 내치고 음해하는 이유가, 한 여성 때문이 아니라는 걸.”

카르도의 발언에 귀족들의 시선은 이우라를 향했다. 한 여성이라면 레나 루벨의 이야기인가? 저 냉정한 북부공이 여자에게 혹해 이런다고? 카르도의 의도대로 귀족들은 스캔들을 상상하며 눈을 빛냈다. 하지만 이우라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16562837400135.jpg“증인을 부르겠다.”

증인이라는 말에 카르도의 심장이 잠시 철렁했다. 그는 집사가 엔지를 어떻게 했는지 아직 보고받지 못했다. 설마, 실패하지는 않았겠지. 카르도는 애써 평정을 가장하며 증인의 등장을 기다렸다. 이윽고 휘장 뒤에서 한 숙녀가 앞으로 나왔다. 남부의 푸른 제복을 입은 레나 루벨이었다.

16562837400127.jpg‘하.’

카르도는 저도 모르게 실소했다. 레나를 보는 순간 오싹한 기운이 등골을 타고 올랐다. 접경지의 요새에서 기이한 힘으로 자신을 제압하던 모습이 떠오른 탓이었다. 동시에 그는 증인이라며 나서는 레나가 가소로웠다. 결국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었다. 카르도는 자신의 딸이 무섭고도 미워,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사이 증인석으로 올라온 레나에게 이우라가 물었다.

16562837400135.jpg“증인, 그대는 최근 서부 접경지에 찾아간 사실이 있는가?”

16562837400115.jpg“있습니다.”

16562837400135.jpg“이유는?”

16562837400115.jpg“빌 알레스 공의 죽음에 대해 조사하려고 했습니다.”

16562837400135.jpg“그래서 단서는 찾았나?”

16562837400115.jpg“아니요.”

레나는 짧게 대답하며 카르도를 돌아보았다.

16562837400115.jpg“그 장소에 나타난 카르도 루벨 공이 업화로 저와 동부공을 공격하고 현장을 태웠습니다. 그래서 조사를 할 수 없었습니다.”

레나의 시선이 닿는 순간 카르도는 끔찍한 통증을 느꼈다. 있지도 않은 팔이 도로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두려움이 쏟아졌지만 카르도는 애써 버텼다.

16562837400135.jpg“사실인가?”

16562837400127.jpg“……사실입니다.”

이우라의 물음에 카르도는 나직이 대답했다.

16562837400127.jpg“하지만 발단은 착오였습니다. 동부 기사들이 접경지에서 배교자인 척 위장하고 있었습니다.”

카르도는 애써 말을 맺으며 회심의 미소를 삼켰다. 그래, 이제 확실히 알았다. 증거가 없으니 정황으로 몰아가려는 속셈인걸. 그리고 말 뿐이라면 이쪽도 얼마든 공격할 수 있다.

16562837400127.jpg“나는 배교자들을 소탕하던 중 서부의 배교자가 동부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진상을 파악하고자 찾아간 접경지에서 동부공을 마주쳤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동부인이라는 말에 귀족들이 술렁였다.

16562837400127.jpg“동부 기사들은 제복을 숨긴 채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모습을 배교자로 오해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동부공이 나를 매도했고, 그대로 연행되어 동부인이 서부에 숨어 있는지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동부인이 서부에 있고, 그게 리그난 아이테르너와 연관이 있다. 카르도가 돌려서 던진 말에 재판의 흐름이 묘하게 갈라졌다. 귀족들은 리그난 아이테르너가 변절자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다시 흥분했다. 카르도가 노린 바였다. 이대로 진흙탕을 만들어 본질을 흐리자. 어차피 진위는 확인할 수 없다. 주장과 반박만 오갈 뿐. 그리고 황제가 분노할 사안은, 아무리 생각해도 나보다는 리그난 아이테르너 쪽이지.

16562837400127.jpg“단순한 우연은 아닐 겁니다. 동부인이 발각되지 않게 일부러 나를 막아선 겁니다.”

카르도는 힘주어 말하며 황제를 쳐다보았다. 황제는 여전히 무심한 눈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고, 잠자코 듣던 이우라가 레나에게 물었다.

16562837400135.jpg“반박할 말이 있나?”

16562837400115.jpg“없습니다. 전부 사실이에요.”

카르도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16562837400127.jpg‘전부 사실이라고?’

레나는 너무나 쉽게 인정했다. 그에 카르도의 눈빛이 황망해지자, 레나가 덧붙였다.

16562837400115.jpg“동부공은 서부에 동포를 숨겨두고 있었어요. 3년 전, 황제 폐하께서 죽이라고 명한 사람들을요.”

레나 루벨은 마치 그날의 날씨를 말하듯, 연인의 비밀을 폭로하고 담담히 웃었다. *** 엔지는 침울한 얼굴로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어제 루비드가 전해준 레나의 편지였다.

16562837458775.jpg‘결국 못 만났어…….’

엔지는 울고 싶은 마음으로 창틀에 머리를 박았다. 그러곤 두엄의 궁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16562837458775.jpg‘지금쯤 재판을 시작했겠지?’

그때였다.

16562837486415.jpg“엔지군, 안녕.”

가벼운 목소리와 함께 클라비스가 나타났다. 뜻밖의 방문에 엔지가 놀라서 물었다.

16562837458775.jpg“재판이 벌써 끝났나요?”

16562837486415.jpg“모르겠네, 아마 막 시작했을걸?”

16562837458775.jpg“그런데 왜…….”

추기경은 공식 석상에서 늘 황제의 곁을 지켰다. 그런데 재판을 빠지고 여기 오다니. 엔지의 의문을 눈치챈 듯 클라비스가 빙긋 웃었다.

16562837486415.jpg“그거 누나가 보낸 편지야?”

클라비스의 물음에 엔지는 흠칫 놀라 편지를 감췄다.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실수를 깨달은 엔지는 얼굴이 빨개졌고, 클라비스는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16562837486415.jpg“걱정 마, 안 훔쳐볼 테니까.”

16562837458775.jpg“왜, 왜 여기 계신 거예요? 재판은 어쩌고.”

16562837486415.jpg“음, 그냥 재꼈어. 땡땡이.”

16562837458775.jpg“땡땡이를 왜 여기서…….”

엔지의 노골적인 거부에 클라비스는 야박하다는 둥 나한테 그래도 되냐는 둥 헛소리를 지껄였다. 엔지가 석연치 않게 쳐다보자 클라비스도 이내 장난기를 덜어내며 엔지를 마주 보았다.

16562837486415.jpg“나는 원래 재판은 안 가. 별로 안 좋아하거든. 그건 누나도 마찬가지겠지만.”

엔지는 누나라는 말에 흠칫 놀랐다. 그 말이 자신의 누나, 레나 루벨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16562837486415.jpg“그래서 그냥 여기로 왔어. 이제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16562837458775.jpg“시간이요?”

16562837486415.jpg“누나가 그랬다며. 널 다치게 하지 않겠다고.”

엔지가 저택에서 구출된 직후, 유니가 찾아와서 전해준 말이다. 엔지가 얼떨떨하게 끄덕이자 클라비스는 생긋 웃으며 창가로 걸어갔다. 그러곤 창문 너머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16562837486415.jpg“어떻게 해야 가주인 카르도 루벨을 고발하면서 식솔인 엔지 루벨을 지킬 수 있을까? 혹시 알아?”

16562837458775.jpg“……아뇨, 저는 모르겠어요.”

16562837486415.jpg“나는 알아.”

클라비스가 달콤하게 속삭이며 창문을 열었다. 늦가을의 서늘한 바람이 밀려들어 왔다. 찬 바람에 엔지는 몸을 움츠렸고, 클라비스는 오히려 기쁜 듯 두 팔을 벌렸다.

16562837486415.jpg“너희 누나는 이제 결판을 내려는 거야.”

16562837458775.jpg“결판이요?”

16562837486415.jpg“응. 네 아버지하고 뿐만이 아니라, 이 지긋지긋한 제국하고도.”

클라비스는 그렇게 말하며 짙게 웃었다. 드디어 염원을 이룬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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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562837400115.jpg“동부공은 서부에 동포를 숨겨두고 있었어요. 3년 전, 황제 폐하께서 죽이라고 명한 사람들을요.”

레나 루벨의 폭로에 장내가 얼어붙었다. 카르도는 당황해서 레나와 이우라를 번갈아 보았고, 이우라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귀족들은 숨을 쉬는 것도 잊고 황제, 니힐 그라샤를 쳐다보았다. 시선이 집중되자 턱을 괴고 앉아 있던 니힐이 허리를 세웠다. 그러곤 의자 등받이에 몸을 파묻으며 중얼댔다.

16562837542188.jpg“그래?”

16562837400115.jpg“네. 단 한 명도 죽지 않고 그곳에 있어요.”

레나는 눈치가 없는 사람처럼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더니 심문관의 자리에 선 이우라를 눈짓하며 말을 이었다.

16562837400115.jpg“하지만 이우라 씨의 잘못은 아니에요. 이우라 씨는 그때 그분들이 망자에게 먹히는 걸 직접 봤거든요. 다만 문제는 그 망자가 동부공이 권능으로 지배하던 망자였다는 거죠.”

이번엔 눈길이 이우라에게 쏠렸다. 이우라는 이미 아는 이야기인 듯 표정 없이 서 있었다.

16562837400115.jpg“동부공은 그렇게 사람들을 빼돌렸고, 그 사람들은 서부의 대균열 근처에서 지냈어요.”

16562837542205.jpg“어떻게 그런…….”

16562837400115.jpg“놀랍죠?”

방청석에서 한 신사가 신음하자 레나는 명랑하게 되물었다.

16562837400115.jpg“아마 상상하기 힘들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 숲속에서, 심지어 이따금 망자가 나타나는 곳에서 맨몸으로 터를 잡다니,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 있다니. 황궁에 계신 여러분은 정말 상상조차 하기 힘들 거예요. 왜냐하면, 이곳엔 원하는 것 이상의 케이크가 있으니까.”

케이크라는 말에 귀족들의 표정이 멍해졌다. 그들을 보며 레나가 환하게, 동시에 서글프게 웃으며 덧붙였다.

16562837400115.jpg“하지만 이제는 알아야겠죠. 당신들의 그 케이크가 어디서 왔는지.”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니힐을 돌아보았다. 마치 허락을 구하는 듯한 눈빛에, 니힐은 다시 몸을 기울여 턱을 괬다.

16562837542188.jpg“해 봐.”

니힐의 허락이 떨어지자, 레나는 혼란에 빠진 귀족들을 뒤로한 채 카르도 앞에 섰다. 레나가 다가오자 카르도는 저도 모르게 주춤댔다. 한쪽 팔을 잃은 충격이 레나의 접근으로 다시 치솟았다.

16562837400115.jpg“카르도 루벨. 당신의 죄를 묻습니다.”

두려워하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레나가 담담히 말했다.

16562837400115.jpg“빌 알레스 공을 살해한 혐의는 증거가 충분하지 않으니 더는 추궁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지금부터, 딸을 일곱 번이나 죽이려 한 죄를 묻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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