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6화. 투사 (176/208)

176화. 투사2022.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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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2837640419.jpg“딸을 일곱 번이나 죽이려 한 죄를 묻겠습니다.”

레나의 선언에 카르도는 눈을 홉떴다. 저 얘길 여기서 꺼내다니, 같이 죽자는 건가? 아니, 동부공의 변절을 폭로한 시점에서 레나 루벨은 이미 거리낄 게 없는 상태다.

16562837640422.jpg“당신 미쳤군.”

카르도가 욱신대는 어깨를 움켜쥐며 으르렁댔다.

16562837640422.jpg“이 자는 미쳤소!”

그러곤 청중을 향해 다시 소리쳤다.

16562837640422.jpg“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식으로 법정을 모욕할 리 없소!”

1656283764044.jpg“닥쳐라.”

카르도의 불같은 외침 위로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쏟아졌다. 니힐이었다. 황제는 이 촌극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궁금하다는 듯, 카르도의 입을 막고 레나를 눈짓했다. 카르도가 마지못해 입을 다물자 레나가 다시 말을 이었다.

16562837640419.jpg“카르도 루벨, 당신은 6년 전 딸을 제물로 팔고 백작위를 산 사실을 인정합니까?”

보다 구체적인 심문에 쥐 죽은 듯 조용하던 귀족들이 다시 술렁였다. 카르도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단호히 부정했다.

16562837640422.jpg“헛소리.”

16562837640419.jpg“그럼 그날로부터 3개월 후, 그 딸을 보호 중이라고 주장한 자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거주지인 남부 부둣가를 불태운 사실은 인정합니까?”

두 번째 물음에 카르도의 표정이 설핏 굳었다. 레나가 그 일을 어떻게 아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그 사이 귀족들이 쑥덕였다.

16562837640458.jpg“6년 전 부둣가?”

16562837640458.jpg“그거 아니에요? 창관에 불이 나 전부 타 죽은.”

귀족들만 소곤댈 뿐 카르도는 말이 없었고, 레나는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16562837640419.jpg“6년 후 딸이 돌아왔을 때 집사를 시켜 독을 마시게 한 사실은 인정합니까? 그 후 무덤에서 기사들과 딸을 습격한 사실을, 그 딸이 이곳 두엄의 궁을 지킬 때 망자를 균열로 유인한 것과 서부 접경지에서 까마귀로 변장해 딸을 다시 무덤에 떨어트린 사실, 마지막으로 업화의 권능을 사용해 딸을 또 태워죽이려 한 사실까지. 당신은 자신의 죄를 단 하나라도 인정합니까?”

레나는 화내지 않고, 슬퍼하거나 냉정하게 굴지도 않으면서 카르도의 만행을 하나하나 나열했다. 그럴 때마다 카르도의 턱에는 힘이 들어갔고 지켜보는 귀족들의 탄성도 이어졌다.

16562837640422.jpg“……가당치 않은 모함이오.”

16562837640419.jpg“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그리고 사정을 모르는 분들은, 카르도 루벨 씨가 왜 그렇게까지 자기 딸을 죽이는 데 혈안이었는지 궁금하실 거예요.”

레나가 청중을 돌아보는 순간, 그의 발치에 화염이 솟구쳤다. 카르도가 레나의 입을 막기 위해 짜낸 업화였다. 화염이 드세게 피어오르자 귀족들이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카르도는 여기가 어딘지도 잊어버린 듯 격분하며 소리쳤다.

16562837640422.jpg“날 어디까지 모욕할 셈인가……!”

하지만 카르도는 말을 채 잇지 못했다. 핑 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무언가가 뺨을 스친 탓이었다. 선뜩한 감각에 숨을 멈춘 순간, 위에서 찌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6283764044.jpg“닥치라고 했을 텐데.”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드니 손가락을 뻗은 니힐이 보였다. 황제의 형형한 시선에 카르도의 눈동자가 태풍 속의 풀잎처럼 떨렸다.

16562837640422.jpg‘안 돼…….’

이대로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 얘기를 꺼내게 해서는 안 된다. 겨우 손에 넣은 고귀함이, 지난 20년간 애써 유지한 품위가 진창에 처박히게 된다.

16562837640422.jpg‘저 입을 막아야 한다.’

궁지에 몰린 카르도는 차라리 레나와 함께 불타 죽어버릴까 생각했다. 영영 조롱을 당할 바엔 차라리. 카르도는 어금니가 으스러지도록 악물다가 돌연 눈을 크게 떴다.

16562837640422.jpg‘잠깐.’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16562837640422.jpg‘그때 권능이 통하지 않았다.’

서부 접경지에서 레나 루벨과 리그난 아이테르너를 함께 태우려 했을 때. 이미 태웠다고 생각한 리그난은 멀쩡했고, 레나에게는 불길이 닿지도 않았다. 그리고 돌연 번지듯 피어난 백합. 팔이 타버린 충격 때문일까, 여전히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던 그 순간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카르도가 그때를 뒤늦게 떠올린 사이, 레나가 열기에 말린 옷을 털며 다시 운을 뗐다.

16562837640419.jpg“6년 전 자작이던 카르도 루벨에겐 정적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애증을 가진 백작이었습니다.”

레나가 말하기 무섭게 귀족들은 끄덕였다. 다들 누구를 이야기하는지 아는 눈치였다.

16562837640419.jpg“백작은 어떤 경로로 카르도 루벨의 약점을 알아냈고, 궁지에 몰린 카르도 루벨은 위기를 면하기 위해 거래를 택했습니다. 당시 서부공이던 클라비스 시렌치움에게 딸을 넘기고 북부의 백작위를 받기로.”

16562837697326.jpg“사실이다.”

클라비스의 이름에 사람들이 놀랄 틈도 없이, 이우라가 끼어들어 말했다.

16562837697326.jpg“이 건은 북부에서 보증한다. 카르도 루벨을 영입한 것은 클라비스의 권유 때문이었다.”

이우라의 덧붙임에 귀족들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일이 점점 커지고 있다. 루벨만이 아니라 그라샤까지 연관된 상황이라니. 철저히 구경꾼이던 이들은 점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16562837640419.jpg“카르도 루벨의 딸인 나는 클라비스에게 팔렸고, 그 사람은 나를 서부 성으로 데려가 그곳에 숨겨둔 균열에 밀어 넣었습니다.”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니힐을 바라보았다. 오래전 헤어진, 소중한 친구의 일부를.

16562837640458.jpg“그, 그럼 경은 이미 그때 무덤에 갔던 겁니까?”

이야기가 멈춘 것에 조바심이 났는지 한 노신사가 방청석에서 물었다. 재판 중 허용되는 일이 아니지만 레나는 너그럽게 대답했다.

16562837640419.jpg“네.”

그것을 시작으로 몇 명의 간 큰 귀족이 질문을 더 얹었다. 그런데 어떻게 돌아왔냐, 무슨 일이 있었냐, 클라비스 추기경은 왜 그런 짓을 한 거냐. 장내가 소란해지자 이우라가 단상을 내리치며 정숙을 요구했다. 그에 흥분했던 귀족들이 움찔하고 입을 다물자, 그 틈에 한 숙녀가 영악하게 물었다.

16562837640458.jpg“카르도 공의 약점은 뭐죠?”

이우라가 서늘히 노려보자 그 숙녀는 눈치를 보면서도 작게 덧붙였다.

16562837640458.jpg“경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카르도 공은 어떤 약점을 감추려고 딸까지 판 걸까요?”

그때 카르도는 목에 잔뜩 힘을 줬다. 그러지 않으면 저 숙녀를 잡아먹을 듯 쏘아볼 것 같았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레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16562837640419.jpg“케이크를 탐냈죠. 남들보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다시 언급된 케이크에 귀족들의 얼굴이 멍해졌다. 그 모습을 보며 레나도 자조했다. 아, 왜 자꾸 케이크라는 표현을 쓰게 되는 걸까. 클라비스 시렌치움, 그 징그러운 인간이 한 말인데. 화자를 향한 혐오감에도 불구하고 표현은 마음에 들어 저도 모르게 따라 하게 된다.

16562837640419.jpg“클라비스 추기경이 나를 균열로 밀기 전에 한 말이에요.”

6년 전, 클라비스는 두려움에 떠는 레나에게 말했다.

16562837726071.jpg―혹시 망자를 본 적 있니?

16562837726071.jpg―그래, 없구나. 저택에서 예쁜 옷 입고 케이크를 먹느라 아직 못 봤구나?

16562837726071.jpg―괜찮아, 그건 타고난 복이야.

그자는 참 고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었다. 레나가 그 발언을 기억나는대로 전하자 귀족들의 안색은 더 해쓱해졌다. 서부 성에 균열을 만들어 사람을 밀어 넣고 있었다니, 그러면서 저런 말을 지껄였다니. 가만, 그럼 서부에 갑자기 대균열이 벌어진 건……? 조각이 맞물리는 느낌에 귀족들이 경악할 때, 레나가 말을 이었다.

16562837640419.jpg“망자가 온 땅에 가득하고, 누군가는 전장에서 죽고 누군가는 나라를 빼앗기고, 또 누군가는 굶주리는 세상에서 케이크를 먹을 수 있는 건 대단하죠. 그야말로 특권이에요. 여기 모인 사람들 정도만 누릴 수 있는.”

레나의 과장 섞인 찬사에 귀족들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말마따나 그렇기 때문에 귀족이라 불리는 거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귀족들의 숨길 수 없는 자부심에 레나는 빙그레 웃으며 덧붙였다.

16562837640419.jpg“하지만 그건 단지 타고난 복이 아니라 싸워서 빼앗은 전리품에 가깝죠. 이기면 얻고, 지면 뺏기는. 그래서 이기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해야 하는.”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쏘아보는 카르도를 마주 보았다.

16562837640419.jpg“나는 그렇게 아버지를 위해 팔렸고, 내 주변 세상은 빠짐없이 거기 동조했어요. 루벨 가의 하인들, 서부공의 부관과 기사들, 그리고 내 어머니까지. 모두를 위한 희생양이 된 거죠.”

레나의 회고에 니힐의 얼음 같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현실감이 사라지고 눈앞으로 해묵은 기억이 쏟아졌다. 100년 전에도 재판이 열렸었다. 그때 나는 판결자가 아닌 죄인이었다.

16562837640458.jpg―레지나 그라샤,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가?

화를 내며 묻던 목소리. 기억한다. 모두 기억한다. 그때도 이런 가을이었다.

16562837640458.jpg―폭정과 횡령으로 나라를 어지럽힌 죄!

16562837640458.jpg―섭리를 거슬러 여자들과 음행한 죄!

16562837640458.jpg―동맹국 지원을 핑계로 백성들의 고혈을 짜낸 죄!

얼토당토않은 죄목이 하늘을 더럽혔지만 햇살은 여전히 찬란하던 그 가을.

16562837640458.jpg―죄인은 이상의 혐의를 인정하는가?

1656283764044.jpg―아니.

그곳에서 나는 답했다.

1656283764044.jpg―아니.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오직 홀로.

1656283764044.jpg―아니.

혼자인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꼭 그들이 말한 죄의 수만큼 대답했다.

1656283764044.jpg―나의 죄는 무력함 뿐, 그 외의 것은 단 하나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칼날이 하늘에 걸린 단두대 앞에서. 떨림을 참으며. 코르셋을 조인 허리를 여느 때처럼 세우며 말했다. 아, 그때 너희는 어떻게 했지? 웃었지. 참으로. 가소롭다는 듯이. 신기루처럼 떠오른 과거에 니힐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팔걸이를 으스러트리는 순간, 파란 하늘로 다시금 홍염이 솟구쳤다. 난데없는 불길에 니힐이 퍼뜩 정신을 차리자, 귀족들의 비명을 뚫고 카르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62837640422.jpg“현혹되지 말고 보시오, 저자의 정체를. 저자에겐 권능이 통하지 않소!”

그 외침을 증명하듯 화염 속에서 레나가 멀쩡한 모습을 드러냈다. 불 속에서도 타지 않는 모습에 귀족들이 기겁하자 카르도가 다시 목소리를 돋웠다.

16562837640422.jpg“무덤이 혼자 떨어져도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인가? 만약 정말 무덤에서 돌아왔다면 그건 악마나 망자 둘 중 하나일 거요!”

1656283764044.jpg“세 번째다.”

카르도의 외침 끝에 건조한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미간을 찡그린 채 머리칼을 쓸어넘기는 니힐의 목소리였다.

1656283764044.jpg“닥쳐.”

니힐은 신경질을 내며 옥좌에서 일어났다. 그가 일어날 때 팔걸이를 쥐고 있던 손에서 우수수 조각이 떨어졌지만, 카르도는 어지러운 불길 때문에 그것을 보지 못했다. 카르도가 미처 거두지 못한 불을 니힐이 짓밟았다. 그대로 카르도의 코앞까지 다가간 니힐이 쉰 목소리로 중얼댔다.

1656283764044.jpg“재판은 끝났다. 너는 히엠스 그라샤다.”

다음 순간, 카르도가 무언가 느낄 겨를도 없이 니힐의 손이 그의 가슴을 꿰뚫었다. 사방에서 거친 숨소리가 터져나왔다. 차마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경악하는 귀족들의 아우성이었다. 레나와 이우라 역시 눈을 크게 뜨고 니힐의 갑작스러운 행동을 바라보았다.

16562837640422.jpg“윽…….”

카르도는 울컥 피를 토하며 충혈된 눈으로 니힐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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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까지 타오르는 집요한 시선에 니힐은 혀를 차며 팔을 빼냈다. 그러자 카르도는 인형처럼 무너져, 눈도 감지 못한 채 숨을 멈췄다. 아버지의 허망한 최후에 레나가 얼어붙자, 니힐이 몸에 튄 피를 털며 물었다.

1656283764044.jpg“하고 싶은 말은 다 했나?”

레나는 미처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니힐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1656283764044.jpg“그럼 연극은 집어치워.”

니힐은 그렇게 말하며 바닥에 흥건한 피를 걷어찼다. 이미 엉기기 시작한 핏방울이 진흙처럼 날아가 제단에 들러붙었다. 사람들이 상황을 이해할 겨를도 없이, 세상을 찢듯 붉은 균열이 열렸다. 다시 한번, 이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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