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웃음2022.01.10.
엔지의 눈가에 기어이 눈물이 맺혔다. 그의 황망한 시선에 클라비스는 미안한 척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울면 마음이 아픈데.”
엔지는 거칠게 눈물을 닦았다. 그러곤 엄살을 떠는 클라비스를 쏘아보며 되물었다.
“지금 하신 얘기 다 사실이에요? 누나를 데려간 게 전하였다고요?”
클라비스는 부정하지 않고 끄덕였다. 때문에 엔지의 두 눈은 또 한 번 절망으로 물들었다. 카르도 루벨의 재판을 뒤로한 채 찾아온 클라비스는 엔지에게 돌연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니힐이 망자가 되어 돌아온 레지나라는 것도, 자신이 그의 어리석은 동생이라는 것도. 이때까지 엔지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레지나 왕과 시인 비트라에 대해 어느 정도 실마리를 잡고 있던 터라 그 전말을 받아들이는 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어 그가 폭로한 사실에 엔지는 머리를 맞은 듯 어지러움을 느꼈다. 엔지는 천사의 탈을 쓴 클라비스를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아, 왜 진작 눈치 못 챘지? 아버지가 궁지에 몰렸을 때 클라비스 추기경을 찾아간 이유, 추기경에게 공범이라고 말한 이유. 이미 단서는 충분했는데. 나는 왜……. 혼란스러워하던 엔지는 그 이유를 곧 깨달았다. 의지했던 거다. 어쨌든, 자신에게 손을 내밀고 이끌어준 클라비스를. 그걸 깨닫는 다시금 눈물이 차올랐지만, 엔지는 그마저 닦아내고 독기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데려가서 무덤으로 밀었다고요.”
“그래.”
“이 얘기 저만 알고 있지 않을 거예요.”
“이미 다들 알고 있을걸?”
엔지의 가소로운 위협에, 클라비스는 웃으며 창문 너머를 눈짓했다.
“지금쯤이면 말이야.”
엔지는 클라비스를 따라 돌아봤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소년이 애써 사나운 표정을 짓자 클라비스는 비웃으며 그의 미간을 꾹 눌렀다.
“표정 풀어. 이제부터 할 얘기가 진짜니까. 지금 하는 얘긴 저쪽에서는 못 듣는 얘기야.”
“그걸 왜 저한테 하는데요.”
하지만 엔지는 궁금해하기보다는 오히려 경계했다. 더 이상 녹록지 않은 아이를 보며 클라비스의 미소가 가벼워졌다.
“사람들이 모르는 걸 엔지 군이 전해줬으면 해서.”
“그러니까 왜요?”
“음, 진실을 알리고 오해를 풀고 싶어서.”
클라비스의 발랄한 대답에 엔지가 결국 버럭 화를 냈다.
“이제와서 무슨 변명을 하려고요!”
“변명이 아니라 사실이야.”
“무슨 얘길 하든 전하가 한 행동은 절대……!”
“내 얘긴 아무래도 좋아.”
예상치 못한 말에 엔지의 외침이 뚝 끊겼다. 엔지가 할 말을 잃고 쳐다보자 클라비스가 다시 말했다.
“나는 뭐라 불리든 상관없어. 악마든 변태든 희대의 개새끼든, 뭐든. 실제로 그게 맞기도 하고.”
“그, 그럼 오해를 풀고 싶다는 건…….”
“레지나 그라샤.”
클라비스의 짧은 대답에 엔지는 다시 말문이 막혔다.
“적어도 누나에 대한 오해는 풀고 싶어. 이해하지? 너도 동생이니까.”
그때 엔지는 깨달았다. 자신이 클라비스에게 선택받은 이유를. 아, 우리는 둘 다 누나를 짓밟고 누나에게 버림받은 동생이었다. 다른 점이 없는 두 사람은 은밀히 진실을 공유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가 끝날 즈음 하늘 저편에 붉은 상처가 벌어졌다. 100년 전과 꼭 같은 풍경에 클라비스는 행복하게 웃었다. 아, 드디어 시작했나 봐, 라고 속삭이면서.
***
“아아악!”
고통에 찬 목소리가 두엄의 궁을 뒤흔들었다. 출구로 몰린 인파 속에서 지독하게 끼이고 밟힌 신사의 비명이었다. 허공에 새빨간 균열이 벌어진 순간, 귀족들은 이곳에서 벗어나려고 너나 할 것 없이 출구로 몸을 던졌다. 그 바람에 사람들의 풍성한 옷자락이 서로 엉켰고, 문은 넘어진 사람과 거기에 걸린 사람들의 살덩이로 꽉 막혀 오히려 아무도 나가지 못하는 꼴이 되었다. 저들끼리 밟고 밟히며 아우성치는 인간들 위로 검고 날쌘 괴물의 그림자가 스쳤다. 잠자리처럼 가느다란 몸으로 한 뼘의 틈을 비집고 나온, 나자 아이테르너의 망자였다. 그들은 여느 망자들과 달리 혼란에 빠진 인간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다만 정찰하듯 날개를 펼치고 두엄의 궁 안을 배회할 뿐이었지만, 겁에 질린 인간들에겐 그마저도 끔찍한 위협이었다.
“비켜! 당장 비키라고!”
“아아, 제발 밟지 말아요! 제발!”
연이은 고성에, 쓰러진 아버지를 멍하니 보던 레나가 고개를 들었다. 문에 끼어 소리치는 자들을 보며 레나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카르도 루벨은 저들과 나란히 서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저들의 상류계층이 가진 여유나 기품 따위를 손에 넣고자 모든 것을 했다. 하지만 저 모습을 보라. 죽음의 위협 앞에선 저들도 가련한 짐승일 뿐. 고상함과 품위를 논한다면, 지금으로선 고요히 눈을 감은 당신이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 레나가 그 자리에서 아버지의 허망한 죽음을 곱씹을 때였다.
“레나!”
힘이 들어간 목소리가 레나를 찾았다. 소란통에 휘장 밖으로 나온 린이었다. 린은 난장판이 된 두엄의 궁과 앙상한 가지처럼 뻗어나가는 균열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레나!”
재차 외친 그의 눈에 균열 앞에 선 레나가 비쳤다. 레나를 찾아낸 린은 곧장 달려갔다. 그런데 그때 레나도 훨씬 더 빠른 속도로 그를 향해 마주 달려왔다. 린이 이대로 부딪힌다고 생각한 순간, 레나가 그의 목을 안으며 몸을 굴렸다. 핑. 레나에게 떠밀려 넘어지는 린의 귓가에 회초리 소리가 울렸다. 참격이 공기를 찢는 소리였다. 콰앙! 레나와 린이 바닥을 구르는 순간 그들의 뒤에 있던 커다란 기둥이 굉음을 내며 무너졌다.
“이게 무슨……!”
린은 이우라의 짓인 줄 알고 소리치다가, 자신을 싸늘히 노려보는 자를 발견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참격이 날아온 방향에는 황제 니힐이 맨손을 늘어트린 채 서 있었다.
“반역자.”
짧은 힐난을 덧붙이며, 니힐이 린을 향해 다시금 손을 휘저었다. 핑. 피비비빙. 선뜩한 바람 소리가 연이어 울리더니 레나와 린이 앉은 대리석 바닥을 매섭게 긁었다. 생크림이 패이듯 바닥에 깊은 상처가 났지만, 정작 그 위에 앉은 레나와 린에겐 아무런 상처도 나지 않았다. 참격이 그 둘만 보기 좋게 빗겨가자, 니힐은 자신의 손과 그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댔다.
“축복을 빼앗긴 왕.”
니힐의 건조한 부름에 레나가 고개를 들었다.
“알고 있었군요.”
“너는 왜 돌아왔지?”
니힐이 아무 감회 없이 물었다.
“아비에게 복수하기 위해?”
“아니요.”
“나를 마저 부수기 위해?”
“아니에요. 내가 여기 온 건…….”
“그 밖의 용건엔 관심 없어.”
레나가 말을 채 이을 겨를도 없이 니힐이 주먹을 치켜들었다. 황제의 주먹이 바닥을 내리쳐 땅을 꺼트리려 할 때였다. 어디선가 날아든 검은 채찍이 니힐의 손목을 휘감아 그의 동작을 저지했다. 움직임이 봉쇄된 니힐은 채찍이 이어진 곳을 돌아보았다. 길고 매끄러운 채찍은 니힐의 팔과 붉은 균열을 잇고 있었다. 아까보다 한참 더 벌어진 균열이 태풍을 만난 호수처럼 마구 일렁였다. 무덤에서 쏟아지던 붉은 빛에 그림자가 맺혔고, 이윽고 채찍의 반대편 끝을 쥔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협상은…….”
검은 제복을 입은 장신의 여인이 두엄의 궁을 돌아보며 중얼댔다.
“이미 결렬인가?”
나자 아이테르너였다. 나자가 균열을 건너 두엄의 궁을 밟고 서자 니힐의 눈빛이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풀어.”
니힐이 팔목에 감긴 채찍을 당기며 명령했다. 수년 만에 만났지만 나자를 바라보는 니힐의 눈빛은 무심하기만 했다. 나자가 한때 섬겼던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자, 니힐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거역?”
니힐의 짧은 물음에 나자는 바닥에 엎드린 아들을 잠시 돌아보았다. 레나에게 보호받는 린의 모습에, 나자가 눈을 치뜨며 짓씹었다.
“죽어.”
나자가 채찍을 거칠게 끌어당겼다. 니힐의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니힐은 다리를 벌려 중심을 잡고 채찍을 마주 당겼다. 그대로 힘겨루기가 이어지나 싶더니,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채찍이 끊어졌다. 채찍이 끊어지며 두 사람은 함께 뒷걸음질 쳤고, 뒤로 내디딘 발로 그대로 땅을 박차며 다시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쾅! 쾅! 쾅! 굉음을 끌며 두 사람이 연이어 충돌했다. 땅을 부술 듯 공방을 이어가던 중, 나자의 군화가 니힐의 복부를 걷어찼다. 나자에 비해 체격이 작은 니힐은 그대로 날아가 궁전의 벽을 부수며 그 안에 처박혔다. 입구에서 아우성치던 사람들은 굉음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고, 생전의 모습 그대로 선 나자를 보고 더 하얗게 질렸다.
“나자 공…….”
“정말 망자의 왕이 된 건가, 자네……?”
나자를 아는 자들이 질린 눈으로 중얼댔다.
“새삼스러울 게 있나?”
그에 나자가 태연한 목소리로 중얼댔다.
“저것도 망자의 왕인데.”
나자가 그렇게 말하며 가리킨 것은 다 허물어진 벽의 잔해, 그 아래 깔린 니힐이었다. 나자의 단조로운 폭로에 귀족들의 얼굴이 멍해졌다. 그리고 그사이 니힐이 무너진 돌을 치우며 몸을 일으켰다.
“폐, 폐하…….”
“망자의 왕이다.”
귀족들이 놀라서 황제를 부르자 나자가 더 단호히 말했다.
“저건 이미 100년 전에 죽은 복수귀다.”
귀족들은 나가려고 몸부림치던 것도 잊고 그 자리에 멍하니 얼어붙었다. 마치 찬물에 맞은 사람처럼 다들 눈만 깜빡이는데, 그 위로 이질적인 소리가 스쳤다.
“풉…….”
상황에 맞지 않는 명랑한 웃음소리.
“푸훗, 큭큭…….”
니힐이 웃고 있었다. 100년 만에, 처음으로. 돌 더미 사이에 앉은 니힐은 손가락을 깨물며 키득대더니, 종국엔 아예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아하하, 하하하하!”
그 소리가 악몽처럼 두엄의 궁을 뒤흔들었다.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웃기를 한참, 겨우 웃음을 멈춘 니힐이 고개를 들며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중얼댔다.
“좋은 얼굴이네. 나도 그런 표정을 지었겠지?”
100년 전, 내가 너희의 왕이 아니라 제물인 걸 알았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