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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화. 영원한 춤 (178/208)

178화. 영원한 춤2022.01.13.

니힐의 웃음소리는 마치 내리는 백우처럼 요란하고 거칠었다. 두려움에 몸부림치던 귀족들은 난생처음 듣는 황제의 웃음에 모두 얼어붙었다. 새하얀 황제가 반신을 피로 물들인 채 터트리는 광소는, 과연 웃음이라 불러도 괜찮은가 싶을 정도로 사납고, 잔혹하며, 또 어딘지 처절했다. 니힐이 공들인 장난에 성공한 악당처럼 사랑스럽게 웃었다.

16562838092414.jpg“좋은 얼굴이네. 나도 그런 표정을 지었겠지?”

16562838092422.jpg“……기쁜가?”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자가 나직이 물었다. 니힐의 고개가 나자를 향해 기울자, 나자가 일그러진 얼굴로 다시 중얼댔다.

16562838092422.jpg“복수에 성공해서 만족스럽냔 말이다.”

16562838092414.jpg“아니.”

나자의 추궁에 니힐의 웃음이 뚝 그쳤다.

16562838092414.jpg“전혀.”

황제는 언제 웃었냐는 듯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그러곤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16562838092414.jpg“복수 따위 해봤자 화만 더 날 뿐이야.”

니힐의 고백에 사람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때 니힐의 눈빛은 마치 성찰을 마친 죄인처럼 겸허했다. 그래서 더 기괴했다. 복수가 무의미하다며 살육을 일삼는 망자라니. 이우라와 나자가 할 말을 잃은 사이, 그리고 아직 영문을 다 모르는 귀족들이 얼어붙은 사이 한 음성이 황제에게 가닿았다.

16562838092444.jpg“그럼 이제라도 멈춰.”

린이었다.

16562838092444.jpg“안다면 제발 멈춰. 당신을 모함했던 자들은 이미 다 죽었잖아.”

린은 애써 쓰고 있던 동부공의 가면을 벗고, 자신의 민낯을 드러낸 채 절박하게 말했다. 그에게 황제는 징그러운 존재였다.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어느 한구석도 인간적이지 않은 그런 자였다. 그럼에도 린은 그를 별수 없이 연민했다. 그래서 이제라도 멈추기를, 이만 눈을 감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16562838092414.jpg“멍청한 개.”

하지만 린의 목소리는 니힐을 움직일 수 없었다.

16562838092414.jpg“내가 누구에게 화를 낸다고 생각하는 거냐.”

다만 니힐에게 희미하게 닿아, 그의 진심을 조금이나마 끌어냈다.

16562838092444.jpg“누구에게라니…….”

린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해 혼자 중얼댔다. 그러자 바로 옆에서, 아직 그를 감싸고 있던 레나가 말했다.

1656283812039.jpg“니힐의 복수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린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돌아보자 레나는 담담히 덧붙였다.

1656283812039.jpg“저 사람이 가장 증오하는 건 자기 자신이거든요.”

레나의 폭로에 이미 고요하던 장내는 또 한 번 서리가 내린 듯 얼어붙었다. 하지만 레나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1656283812039.jpg“저 사람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해요. 왕으로서 실패한 자신을.”

그건 자기혐오였다. 애당초 니힐에게 다른 자들은 안중에 없었다. 니힐이 악착같이 세상을 짓밟는 이유는,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다 못해 저지르는 분풀이였다. 그라샤의 마지막 왕, 레지나 그라샤는 실패했다. 자신이 나라를 구할 수 있을 거라 믿고 설치다가 백성들에게 외면당하고 신하들에게 배신당해 목이 잘려 죽었다. 그리고 그게 선대가 짜놓은 함정인 걸 죽기 직전에야 알았다. 니힐은 그 시절의 레지나를 지금도 용서할 수 없었다. 증오스럽고 역겨워서, 자신에게 수모를 떠넘긴 자신이 너무 미워서 매 순간 분노가 치솟았다. 그래서 레지나에게 복수했다. 그가 지키려 했던 것들을 학대하고 부쉈다. 레지나가 남긴 자기혐오, 그게 니힐이었다.

1656283812039.jpg“그러니 영원히 끝나지 않아요. 스스로 멈출 수 있다면 이미 100년 전에 멈췄을 거예요.”

니힐은 자신의 정체를 정확히 알고 있는 레나를 말없이 쏘아보았다. 그리고 나자는 늘어진 채찍을 다시 말아쥐었다.

16562838092422.jpg“그렇다면 갈가리 찢어서 멈춰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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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자의 채찍이 바닥을 내리치자, 귀족들은 다시 혼비백산 밖으로 향하는 문과 창문으로 달렸다. 그런데 돌연 검은 그림자가 날아와 두엄의 궁의 출구를 모조리 막아버렸다. 나자가 다스리는 망자들이었다.

16562838092422.jpg“자리를 지켜라.”

나자가 귀족들에게 명령했다.

16562838092422.jpg“몰랐다는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 그러니 너희 눈으로 똑똑히 봐라, 너희를 지배하던 자의 실체와 최후를.”

나자는 그렇게 말하며 곁눈으로 린을 잠시 쳐다보았다. 린이 그의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는 순간, 나자는 니힐에게 달려들었다. 나자가 채찍으로 니힐을 내리쳤다. 니힐은 팔로 막으며 나자의 복부를 걷어찼고, 중심이 흔들린 나자는 그대로 땅을 짚으며 니힐을 똑같이 걷어찼다. 각자 반대 방향으로 날아간 두 사람은 다시 땅을 박차며 서로를 물어뜯었다. 두 사람의 주먹질과 발길질마다 우드득 소리가 나며 무언가가 부서졌고, 대리석으로 된 두엄의 궁도 요란하게 진동하며 깨지고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콰앙! 굉음과 함께 드디어 충돌이 멈췄다. 상대를 제압하고 몸을 세운 건 다름 아닌 나자였다. 나자는 피투성이가 된 니힐을 밟고 서서 금빛 눈을 형형하게 빛냈다.

16562838092414.jpg“역시.”

니힐이 궁전 벽에 처박힌 채 중얼댔다.

16562838092414.jpg“너는 살아 있을 때도 유능했지. 네가 얼마나 충성스러웠는지 안다.”

니힐이 나자의 발목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답지 않은 감성팔이에 나자가 인상을 찌푸리자, 니힐이 피투성이가 된 고개를 들며 덧붙였다.

16562838092414.jpg“네게 복수를 원하는 자들도 내 안에 있으니까.”

니힐의 새파란 눈과 마주한 순간 나자의 감각이 뒤틀렸다.

16562838092422.jpg―네가 감히!

직후 익숙한 노성이 귓전에 울렸다. 나자가 죽인 동방 여자, 린의 친조모의 목소리였다. 한시도 잊어본 적 없는 음성에 나자는 눈을 부릅떴다.

16562838092422.jpg―학살자!

16562838092422.jpg―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자!

뒤이어 수많은 목소리와 유령 같은 형상이 나자를 뒤덮었다.

16562838092422.jpg“크윽!”

나자는 잇소리를 내며 채찍을 휘둘렀다. 하지만 망령같이 들러붙은 목소리는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 소란스럽게 나자를 흔들었다.

16562838092422.jpg―복수하겠다.

16562838092422.jpg―죽어서도 너를 저주하겠다.

16562838092422.jpg―네 핏줄까지 말려버리겠다!

퍼붓는 악의에 나자는 피가 식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니힐의 손이 나자의 가슴을 꿰뚫었다.

16562838092422.jpg“컥……!”

나자의 입에서 피가 왈칵 쏟아졌다. 나자가 고통스러워하며 니힐을 쏘아보자, 니힐은 표정 없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16562838092414.jpg“대죄인 주제에 건방 떨지 마. 이제라도 위선을 부리면 네 아들이 널 용서할 것 같니?”

16562838092422.jpg“큭……!”

아픈 구석을 찍힌 나자가 이를 악물었다. 니힐은 비웃지도 않고 팔을 더 뻗었다. 이윽고 니힐의 손끝이 나자의 심장에 닿았을 때, 무력한 척하던 나자는 돌연 니힐의 팔목을 비틀어 쥐었다. 그러곤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소리쳤다.

16562838092422.jpg“이우라!”

나자의 고성과 함께, 저편에서 날카로운 참격이 날아와 니힐을 덮쳤다. 파앙! 하지만 이우라의 참격은 니힐의 손끝에 덧없이 막혔다. 예상한 바였다. 니힐이 이우라 쪽으로 주의를 돌린 사이, 나자는 균열 뒤에서 도사리던 망자들을 끌어모았다. 콰앙! 쾅! 콰앙! 쏜살처럼 날아온 검은 용이 니힐을 향해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망치질 소리가 나며 궁전의 기둥이 쓰러지고 천장이 내려앉았다. 그럼에도 용들은 일말의 틈도 없이 용서받지 못한 왕을 내리치고 또 내리쳤다. 지축이 흔들리는 소리에, 그리고 발밑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애써 견디던 귀족들도 하나둘 주저앉기 시작했다. 그중 일부는 질끈 눈을 감았고 일부는 울먹였다. 전쟁터 한복판에 떨어진다 해도 이보다는 평화로울 것 같았다. 한참 후, 영원히 지속될 것 같던 굉음이 멈췄다. 산산조각난 대리석 위로 검은 안개가 자욱했다. 망자가 부서지며 흩뿌린 피였다. 망자의 피는 그대로 기화되어 연기를 내뿜었고, 두엄의 궁은 구름 속에 들어온 것처럼 뿌옇게 흐려졌다. 그 안개 속에 한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귀족들은 그가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마른침을 삼키며 주시했다. 이윽고 안개가 가라앉자, 귀족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탄식했다. 니힐이 쓰러진 나자를 짓밟고 서 있었다. 비록 당장 부서질 것처럼 너덜너덜하게 뜯긴 꼴이지만, 그는 악착같이 견디며 버티고 있었다.

16562838092414.jpg“끝인가?”

니힐의 물음에 나자는 만신창이가 된 얼굴로 웃었다. 그 의기양양한 웃음에 니힐이 인상을 찌푸리는 순간, 그의 등 뒤로 마지막 용이 날아들었다. 뻔한 눈속임에 니힐은 신경질을 내며 팔을 뻗었다. 그의 손끝에서 날아간 참격이 검은 용을 갈가리 찢었다. 하지만 진짜는 그 뒤에 있었다. 마지막 역할을 맡은 이우라가, 조각난 망자를 박차며 니힐의 머리 위로 뛰어들었다. 예상치 못한 이우라의 등장에 니힐이 다시 팔을 뻗었다. 북부공의 가소로운 참격 따위 아까처럼 무마시킬 생각이었다. 그런데 니힐의 눈에 뜻밖의 빛이 번뜩였다. 이우라가 선택한 마지막 공격은 참격이 아니라 검격이었다. 단두대에서 목이 잘려 죽은 왕. 그렇다면 그 최후도 서늘한 칼날 아래 이루어져야 어울릴 터. 이우라는 니힐에게 받은 권능이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움켜쥔 검을 치켜들고 니힐을 노렸다. 참격에 대응하려던 니힐은 짐짓 당황했다. 반대편 팔로 막아보려 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나자에게 붙잡혔던 팔도 이미 산산조각이 난 상태였다. 니힐은 눈을 크게 뜨고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칼날을 바라보았다. 단두대를 닮은 날붙이 아래서 니힐은 이를 악물었다. 용서 못 해. 레지나 그라샤. 나는 절대, 너처럼 되지 않아. 니힐이 눈을 부릅뜨자 그의 목을 감싼 리본이 돌연 피로 물들었다. 이우라가 내리치기도 전에 쏟아진 피가 순식간에 바닥을 덮었고, 환상인지 뭔지 모를 붉은 손들이 위로 솟구쳤다.

16562838176079.jpg“큭!”

예상치 못한 공격이 이우라를 밀쳐냈다. 튕겨 나간 이우라는 착지하자마자 다시 니힐에게 달려들려고 땅을 디뎠다. 그런데 그때 불길한 울음이 터져 나왔다.

16562838092422.jpg―아아아악!

16562838092422.jpg―아아악!

사람의 것인지 까마귀의 것인지 구분되지 않는 소리였다. 이우라는 경악하며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두엄의 궁 구석마다 틀어박힌 귀족들이 하늘을 향해 울고 있었다. 아아악, 아아악, 까아악. 마치 까마귀처럼 우는 그들의 살갗 위로 검은 깃털이 돋아났다. 숙녀의 이마에도, 신사의 수염에도 점점 검은 털이 뒤덮이며 그들의 형상을 바꿨다. 검은 털이 머리를 다 덮자 날카로운 부리마저 뻗어 나왔다.

16562838176079.jpg“까마귀…….”

이우라가 그들을 알아보고 신음하자, 니힐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16562838092414.jpg“받아들여라.”

그 한마디에 이우라의 무릎이 덜컥 꺾였다.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은 이우라는 당황해서 검으로 바닥을 찍었다. 검으로 몸을 지탱해 일어날 작정이었다.

16562838092414.jpg“너 역시 복수를 원하는 자.”

하지만 이어진 니힐의 음성에 이우라는 쥐고 있던 검마저 놓쳐버렸다. 그는 당혹스러워하며 자신의 양어깨를 끌어안았다. 몸에서 무언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 노력을 비웃듯, 니힐이 쐐기를 박았다.

16562838092414.jpg“너희는 모두 내 종이다.”

그 말과 함께 이우라의 목덜미에도 검은 깃털이 돋아났다. 가시처럼 솟구친 깃털이 얼굴을 뒤덮고 단단한 부리를 만들어 냈다.

16562838092422.jpg―아아아악!

붉은 제복을 입은 까마귀도 고개를 치켜들며 울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단두대를 보고 비명을 지르듯이. 두엄의 궁에 있던 귀족들이 검은 깃털에 뒤덮여 통곡하자 니힐은 흡족하게 웃었다. 그래, 너희는 나를 미워하지. 나도 나를 미워한다. 그러니 우리는 같다. 같은 마음으로 영원히 춤추자. 고장 난 태엽에 삐걱대는 오르골 속 인형처럼, 영원히. 니힐의 의지를 느낀 까마귀들이 하나둘 울음을 멈추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둥글게, 둥글게. 니힐은 그들의 춤을 느긋하게 지켜보다 싸늘한 눈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그곳엔 아직 까마귀가 되지 않은 자들이 있었다. 레나 루벨과 리그난 아이테르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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