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미안해2022.01.17.
니힐의 시선이 린에게 박혔다.
“넌 왜 안 변하지?”
그는 까마귀가 되지 않은 린을 의아한 듯 바라보다가 물었다.
“설마 부족하니?”
니힐은 믿기 어렵다는 듯 중얼대더니 만신창이가 되어 쓰러진 나자의 머리채를 붙들었다. 나자가 니힐의 손에 끌려 올라오자 린이 눈을 부릅떴다. 니힐은 그 얼굴을 무표정하게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친히 채워주마.”
나에 대한 증오를.
“이 녀석이 무덤에서 올라온 이유는 너도 알겠지.”
니힐이 나자의 턱을 들며 말했다. 나자는 더 움직일 수 없는 듯 니힐의 손길에 맥없이 흔들렸다. 그 모습에 린의 눈동자도 함께 흔들렸지만, 니힐은 나자의 얼굴을 그에게 손수 보여주며 쐐기를 박았다.
“그러니 이걸로 두 번째다. 너 때문에 네 어미가 죽는 건.”
“그…….”
니힐이 나자를 향해 손을 치켜드는 순간 린의 입에 다급한 말이 맴돌았다. 그러지 마, 그만 둬, 대충 이런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니힐에게 붙잡힌 나자가 눈을 돌려 린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눈이 마주친 찰나 나자가 입술을 달싹였다. 미안. 나자가 입술로 속삭인 직후, 그의 가슴에서 검은 피가 솟구쳤다. 기어이 나자의 심장까지 차지한 니힐이 여보란 듯 린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이래도 나를 미워하지 않을 거냐고 묻듯이.
“으…….”
나자가 안개로 흩어지자, 애써 참고 있던 린의 입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
소리를 지르는 린의 얼굴로 검은 깃털이 솟구쳤다. 마치 살얼음처럼 일어난 털이 눈물마저 뒤덮었다. 니힐을 향한 증오와 함께 그에게 종속되어가는 감각이 린을 미치게 만들었다. 까마득한 어둠이 린 앞에 입을 벌렸다. 저 안으로 떨어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았지만, 이미 까마귀로 변하기 시작한 그에게 추락 외의 선택은 없었다.
“린.”
그때, 익숙한 부름과 다정한 손길이 그를 깨웠다.
“자신을 잃지 마.”
레나였다.
“사랑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했잖아.”
레나가 그의 뺨을 어루만지자 변화가 멈췄다. 어둠으로 탁해졌던 눈동자는 다시 빛을 찾고, 얼굴 위로 번지던 검은 깃털도 시든 꽃잎처럼 하나둘 떨어졌다. 린이 다시 돌아오자 레나가 서글피 웃으며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울지 마.”
레나의 상냥한 음성에 린의 두 눈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지옥 한복판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크게 벌어진 균열 아래 까마귀들이 춤추고, 그 위에 군림한 황제는 모든 역경을 이겨냈다. 저 막강한 존재에게서 벗어날 방법이 과연 있을까 싶어 린은 절망했다.
“괜찮으니까 울지 마.”
그런 연인을 위해, 레나는 여느 때처럼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제 내 차례야.”
“이길 수 있어……?”
“아마 못 이길 거야.”
린이 신음하듯 묻자 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자의 심장마저 손에 넣은 니힐은 더 막강하고 흉악한 존재가 되었다. 아무리 레나라도 그를 상대하기는 불가능했다. 레나의 대답에 린이 고개를 떨어트리자, 레나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하지만 지지도 않아.”
이어진 말에 린의 눈이 크게 뜨였다. 린이 놀라서 바라보자 레나는 여상히 웃으며 린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그러니까 울지 말고 기다려.”
레나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까지 니힐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레나와 린을 지켜보고 있었다. 영원히 춤추는 자로 변하던 동부공이 되돌아왔다. 니힐은 자신의 지배에서 벗어난 동부공과 그를 막은 레나 루벨이 불쾌했다. 때문에 레나를 바라보는 니힐의 눈빛은 나자와 싸울 때보다 더 흉흉해졌다. 하지만 레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양 탄식했다.
“순식간에 이 지경이 됐네요.”
레나는 씁쓸한 얼굴로 두엄의 궁을 돌아보았다. 법정으로 꾸려졌던 궁전은 폐허가 되었고, 죄인은 판결을 받기도 전에 죽었다. 그리고 수많은 배심원은 까마귀가 되어 소리 없이 춤춘다.
“아버지에게 제대로 사과받고 싶었는데, 덕분에 영영 불가능하게 됐어요.”
레나는 혼자 푸념하다가 니힐을 보고 변명했다.
“원망하는 건 아니에요. 재판을 연 건 당신 때문이기도 했으니까.”
“웃기는군.”
니힐은 날카롭게 반응했다. 실제로 카르도의 재판을 보며 자신의 재판을 떠올린 탓이었다. 그래서 니힐은 은근히 자신을 긁는 레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무슨 말을 하든 결말은 하나야. 반역자인 너희는 죽고 나는 다시 군림한다.”
“계속 복수하겠다는 뜻이군요.”
자기 자신에게. 니힐의 서슬에 레나는 쓰게 웃었다.
“그 전에 알고 싶지 않아요? 당신의 심장인 레지나가 어떻게 됐는지.”
“둘 중 하나겠지. 네게 패했거나, 스스로 굴복했거나.”
어느 쪽이든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걸 빌미로 수작을 부리는 레나 루벨도, 마찬가지로 용납되지 않는다. 니힐의 언짢은 심기를 대변하듯 제자리에서 춤추던 까마귀들이 스텝을 밟으며 레나에게 다가갔다. 레나는 마치 가면무도회에서 혼자 가면을 빼앗긴 사람처럼 춤추는 까마귀들 사이에 갇혔다. 하지만 레나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나는 당신이 버리고 간 자들의 왕이 됐어요.”
“그 비천한 패자들.”
“그래서 그들이 당신을 원했죠. 당신도 비천한 패자니까.”
까아악! 까마귀 서너 마리가 소리를 지르며 레나에게 달려들었다. 레나는 채찍의 손잡이로 가장 먼저 달려온 자의 부리를 막았다. 그러곤 그를 밀어내며 뒤따라온 까마귀들까지 함께 떨쳤다. 나가떨어진 까마귀들이 다시 달려들자 레나는 채찍을 펼쳐 그들의 발목을 후려쳤다. 아직 망자가 아닌, 살아 있는 까마귀들은 더 일어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버둥댔다. 까마귀를 제압한 레나가 니힐을 보며 물었다.
“기분 나빴나요?”
니힐은 대답 없이 레나를 쏘아봤다. 그의 마음은 처음 무덤에 떨어졌을 때, 용서받지 못한 자들을 뿌리친 그 날과 달라진 게 없었다. 레나는 시간이 멈춘 황제를 보며 말했다.
“그들이 당신에게 전해달라는 말이 있어요.”
“집어치워.”
니힐은 냉랭히 거부했다. 듣지 않아도 뭐라고 할지 뻔했다. 원망하거나 경멸하거나, 아니면 뭐라도 되는 양 연민하거나. 셋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니힐은 레나의 입을 막으려고 다시 까마귀를 움직였다. 그런데 까마귀가 소리치기 전에 레나가 먼저 말했다.
“미안하대요.”
뜻밖의 말에 니힐이 미간을 찌푸렸다. 동시에 까마귀들도 우뚝 멈췄다. 니힐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바라보자, 레나는 담담히 덧붙였다.
“너무 늦었지만, 당신에게 사과하고 싶다고 해요.”
. . . 망자의 왕이 된 레나가 백합 속에서 다시 돌아왔을 때, 레지나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무덤의 붉은 하늘 아래, 레지나와 충돌했던 그곳에 석상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레지나를 발견한 레나가 고요한 목소리로 물었다.
“날 기다린 거야?”
레나의 물음에 레지나가 고개를 들었다. 레지나는 잠시 시간을 끌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들을 만났나?”
“만났어.”
“그들이 널 왕으로 삼았어?”
레나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레지나는 더 말이 없었고, 레나는 그만 몸을 돌렸다. 그러자 레지나가 다급히 레나를 붙잡았다.
“어디 가?”
그렇게 묻는 레지나는 평소답지 않았다. 늘 당당하고 거침없던 언행은 온데 없고 어딘지 눈치를 보는 모습이었다.
“우릴 닮은 애를 봤어. 그 애한테 가야 해.”
레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그에 레지나는 황망한 모습으로 서 있더니, 곧 여느 때와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게 할 말은 없어?”
“별로.”
레나는 솔직히 답했다. 진심이었다. 레지나의 배신에 마음이 산산이 부서졌지만 그건 이미 지난 일이었다. 원망하는 마음도 더는 없다. 물이 간절한 건 갈증이 극심할 때뿐, 이미 다른 것으로 목을 축인 레나에게 레지나는 이미 지나간 아픔이었다.
“네가 한 말은 이해했어. 네 입장도. 배신감을 느낀 건 사실이지만 담아두진 않을게. 네 의무감과 죄책감에 도움을 받았으니까.”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스스로에게 오히려 놀랐다. 내 유일한 친구, 그리고 스승. 내 세상은 너 하나뿐이었는데, 너를 이토록 쉽게 놓아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게 서로에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레나도 클라비스의 누나인 레지나를 이전처럼 따르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작별을 고했지만, 정작 레지나는 아무 말이 없었다. 침묵이 이어지자 레나는 몸을 돌렸다. 그대로 균열이 생긴 곳까지 달려갈 작정이었다. 그런데 미련인지 변덕인지, 레나는 저도 모르게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레지나는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깨진 석상 같은, 표정도 감정도 읽을 수 없는 모습이 어쩐지 눈에 밟혔다. 그래서 레나는 묻고 말았다.
“너는 왜 이 사람들을 선택하지 않았어?”
“……증오가 너무 커서.”
“아니, 그 후에.”
복수를 선택한 네가 너를 버리고 간 후에.
“그때 다시 왕이 되어 달라고 했잖아.”
용서받지 못한 자들은 복수를 선택한 레지나가 버리고 간 조각을 손수 맞췄다. 그라도 자신들의 왕이 되어주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레지나는 그마저도 거부했다. 레나가 그 이유를 물었지만 레지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레지나의 침묵에 레나는 묘한 이끌림을 느꼈다. 어쩐지 이대로 가면 안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레나는 레지나에게 다가가 그의 깨진 뺨에 손을 얹었다. 축복을 빼앗긴 왕이 어루만지자 대리석 조각 같던 레지나가 본래 모습을 되찾았다. 금발을 늘어트린 젊은 왕. 그는 울고 있었다.
“레지나…….”
레나는 놀라서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상상도 못 했다. 설마 레지나가 울고 있을 줄은. 그는 언제나 강하고 자신만만하며,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행동하던 존재였다. 그런 사람이 왜…….
‘아.’
얼떨떨하게 서 있던 레나는 문득 깨달았다. 레지나가 여기서 자신을 기다린 이유. 그걸 뒤늦게 깨달은 레나는 레지나에게 달려가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레나가 자신의 품에 안기자 숨죽여 울던 레지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의 호흡을 느낀 레나가 괴로워하며 말했다.
“미안해.”
“무슨…….”
“제대로 보지 않아서 미안해.”
레나의 사과에 레지나가 얼어붙었다. 레지나는 마치 치부를 들킨 사람처럼 굳어버렸고, 레나는 아픈 심정으로 레지나를 올려다보았다.
“다 떠넘기려고 해서 미안해.”
어느새 레나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레지나가 그걸 황망히 바라보는 사이 레나가 속삭였다.
“너도 똑같은 사람인 걸 잊어서 미안해.”
아이의 작은 목소리가 죽은 왕의 심장을 관통했다. 레지나는 악몽에서 깬 사람처럼 레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허물어지듯 무릎을 꿇었다. 레지나는 레나가 돌아올 때까지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죄책감 때문이었다. 책임감 때문이었고, 레나를 향한 애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모두를 합쳐도 절반에 차지 않았다. 레지나가 여기서 서성인 진짜 이유는, 그 또한 왕을 기다리는 용서받지 못한 자이기 때문이었다. 그 마음을 들켜버린 레지나는 비로소 무너져 오열했다. 평생 강인했던, 죽어서도 연약함을 드러낼 수 없던 부서진 왕은 백합 왕의 품에 안겨 난생처음으로 목놓아 울었다. 레나도 입술을 깨물며 그를 꽉 끌어안았다. 레지나. 내 유일한 친구, 그리고 스승. 내 세상 하나뿐이던 너. 그런 너를 놓아준 후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모두가 왕이라 부르며 손을 뻗던 너도, 실은 구원을 바라는 인간이었다는 걸.
. . .
“당신을 보자마자 왕이 되어달라고 해서.”
다시 허물어진 두엄의 궁에서 레나가 말했다.
“그 전에 당신의 심정을 헤아리지 않아서.”
그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니힐에게.
“그게 너무 미안하대요.”
그의 일부가 간절히 기다려온 말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