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멸망 앞에2022.01.20.
하늘이 야속하리만치 푸르던 그 날, 그라샤의 젊은 왕은 코르셋을 조였다. 그것은 단두대 앞에서도 놓지 못한 그의 마지막 품격, 그리고 존재. 죽음을 앞둔 레지나는 단두대의 네모난 틀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성난 군중의 함성이 소란스러웠지만 레지나에겐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때 레지나의 귓가에 맴돈 것은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은 동생의 목소리였다.
―레나, 너는 잘할 거야.
―나 대신 누나가 왕이 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넌 정말 뛰어나니까, 사람들도 곧 알아볼 거야.
아, 그 덧없는 축복을 지켜내고자 발버둥 치던 나날이여. 이 죽음이 내 역할인 걸 왜 이제야 알았나. 그래도 의미 있는 삶이었다. 내 죽음으로 들불 같은 분노가 가라앉으면 그곳에서 새로운 백 년이 시작될까. 내가 흘린 피가 두엄이 되어 들꽃이 피어나면 내 사랑하는 자의 시처럼 너희 모두에게 꽃을 바치게 될까. 레지나는 단두대 앞에 몸을 숙일 때까지도 품위를 잃지 않았다. 군중이 그의 냉정함을 징그러워하며 마녀라고 욕했지만, 그래도 레지나는 마지막까지 견뎠다. 죽음마저 고결했다고 전해져야 하니까. 내 사랑하는 동생, 클라비스에게. . . . 죽는 순간까지 숨조차 편히 쉬지 못한 그는 죽어서도 왕이라 불리며 주저앉을 기회를 빼앗겼다. 엎드려 울 자격을 잃어 마음 일부를 찢어서라도 견뎠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깨진 조각의 모습을 택했다. 그런 레지나에게 미안하다는 레나의 속삭임은 그 모든 것에 대한 보상이었다. 레나는 레지나의 눈물을 닦아주며 자신의 안에서 흐르는 탄식을 느꼈다. 용서받지 못한 자들이 레지나를, 왕이 아니라 그저 한 사람인 그를 깨닫고 후회하는 소리였다. 아, 당신에게 구해달라고 하기 전에 당신의 아픔을 먼저 헤아릴걸. 왕이라 부르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먼저 바라볼걸. 그때 그렇게 했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미안해. 미안해요. 당신을 또 몰아세워서. 백합들은 서글피 사과했고, 레나는 그 뜻을 전하려고 레지나를 더 꼭 끌어안았다. 한참 후, 더 이상 왕이 아닌 레지나가 눈물을 그치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평범하게 상처받은 얼굴로 레나에게 물었다.
“날 원망해?”
“……아니.”
“그럼, 경멸해?”
레지나가 잠긴 목소리로 되물었다.
“실망하지 않았어? 내가 밉지는 않아?”
“아니. 나는 널 좋아해.”
레나의 대답에 레지나의 두 눈에 다시금 눈물이 부풀었다. 레나가 그 눈물을 닦아내자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레지나의 눈빛이 차츰 가라앉았다.
“그럼 부탁을 들어줘.”
레지나는 그렇게 속삭이며 레나의 양 뺨을 손으로 감쌌다.
“나를 멈춰줘.”
“너를……?”
“날 버리고 간 내 반쪽을 네가 멈춰줘.”
니힐 그라샤라는 이름으로 대륙을 점령한 황제를.
“그리고 받아줘. 나를, 나는, 더 이상 왕으로 있고 싶지 않아.”
이어진 부탁에 레나의 눈빛이 흔들렸다. 멈춰달라는 말보다 받아달라는 말이 레나에겐 더 무거웠다. 그 뜻을 명백히 아는 탓이었다. 레나가 망설이자 레지나가 절박하게 붙잡았다. 레나는 그 손길을 차마 뿌리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레나의 승낙에 레지나는 깊이 안심하며 미소 지었다. 레지나가 레나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그러곤 그 작은 손을 자신에게로 이끌었다.
“내 심장은 여기 있어.”
레지나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그 목소리가 레나를 슬프게 했지만, 레나는 친구의 간절한 부탁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축복을 빼앗긴 왕이 이를 악물었다. 용서받지 못한 왕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새하얀 빛이 검붉은 무덤에 번졌고, 새로 태어난 왕의 눈에는 눈물이 흘러넘쳤다. 왕이길 포기한 자는 친구의 귓가에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고마워. 그리고 용서받지 못한 왕의 심장이 부서졌다. 레지나는 기쁨과 슬픔을 가득 끌어안고 사라졌다. 원망도 죄책감도 뒤로한 채, 한 떨기 백합이 되었다. 그때 레지나가 떨어트린 눈물은 니힐을 통해서도 흘렀다. 하지만 니힐은 여전히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 두엄의 궁 위로 붉은 균열이 솟구치자, 클라비스 추기경은 홀가분한 얼굴로 중얼댔다.
“시작됐나 보네.”
태연하기 짝이 없는 클라비스와 달리, 엔지는 사색이 되어 창가로 달려갔다.
“대체 왜…….”
엔지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중얼댔다. 지금쯤 아버지의 재판이 한창일 텐데, 저곳에 균열이라니. 엔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하늘을 찢어발긴 균열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종말이야.”
클라비스의 기쁜 목소리에 엔지는 경악하며 돌아보았다. 소년의 질겁한 시선에 클라비스는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이런 놈인 거 이제는 알 때도 되지 않았느냐는 투였다.
“마침 잘됐잖아. 이야기도 막 끝난 참이니.”
말마따나 클라비스는 엔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거의 다 해주었다. 니힐이 레지나였던 시절 겪은 배신도, 니힐의 곁에서 미쳐가던 자신의 좌절도, 그리고 그가 제 발로 무덤에 내려가 레지나의 반쪽을 만난 경위도. 클라비스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마쳤다. 게다가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종말도 찾아왔다. 때문에 클라비스는 여한이 없었지만, 엔지는 아니었다. 진실을 원하는 소년은 아직 듣고 싶은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하나만 더 물을게요.”
엔지가 균열을 등지며 말했다. 소년이 균열 앞에서 질문을 택하자 클라비스의 얼굴에 이채와 미소가 서렸다. 그는 허락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여유와 웃음은, 이어진 질문에 씻은 듯 사라졌다.
“혹시 시를 쓰셨나요?”
“……그런 게 왜 궁금할까, 엔지군?”
여상히 웃던 클라비스가 처음으로 미소를 지우고 언짢은 듯 중얼댔다. 그러나 엔지는 물러나지 않고 재차 물었다.
“시인 비트라가 전하인가요?”
보다 구체적인 물음에 클라비스는 입을 다물었다.
“비트라의 시를 읽었어요. 집에 시집이 있어서요. 누나가 그 시인을 좋아했거든요.”
레나의 이야기에도 클라비스는 침묵했다. 엔지는 그의 싫증 난 얼굴을 보며 중얼댔다.
“사실 이렇게 말하면서도 잘 안 믿겨요. 전하가 그런 시를 썼다는 게. ……그런 시인이 이렇게 됐다는 게.”
“하.”
클라비스가 기가 막힌 듯 차가운 비소를 터트렸다. 그러더니 다시 가짜 웃음을 지으며 시치미를 뗐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넘어가려고 하지 마세요. 이미 알고 있으니까. 폐하의 진실이 전해지길 바란다면 전하에 대해서도 솔직히 알려주세요.”
“말했잖아, 나는 무슨 취급을 받아도 상관없다고.”
“상관있어요.”
클라비스가 어물쩍 넘어가려 하자 엔지가 단호히 막았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전할 수 없어요. 제가 아직 이해 못 했으니까요.”
엔지의 완고함에 클라비스는 불쾌한 듯 눈을 가늘게 하더니, 이내 혀를 차며 되물었다.
“그래서 무슨 얘길 하고 싶은데?”
“그 시를 기억하세요?”
엔지의 물음에 클라비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투였다.
“그 시를 쓸 때 어떤 마음이었는지, 지금도 기억하고 계세요?”
그래서 엔지가 재차 물었다.
“사실 믿기지 않아요. 그 시는 친절하고,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내용이었는데 그런 시를 쓴 사람이 누나를, 그리고 사람들을 죄책감 없이 무덤으로 밀어 넣었다는 게요. 대체 그 시는…….”
“가식이지.”
엔지의 설명이 장황해지자 클라비스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그러곤 여느 때처럼 어여쁘게 웃으며 덧붙였다.
“무지하기 짝이 없는 위선이야.”
클라비스의 가면 같은 미소에 엔지가 주춤하자, 클라비스가 성큼 다가와 소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러곤 얼굴을 가까이하며 친근하게 지껄였다.
“아마 그 시를 쓴 작자는 레나 루벨이 나타나기 전의 너 같았을 거야. 순진하고, 세상 물정 모르고, 나쁜 일이라곤 겪어본 적이 없어서 불행을 책 속의 이야기로만 알던 너.”
“무슨…….”
“쉿, 들어. 아마 그런 시절에 시를 썼을 거야. 아파본 적도 없는 주제에 대충 좋은 말을 덧붙여서. 그걸로 칭찬도 받았겠지, 착하다는 얘기도 들었을 거야. 그러니 더 신나서 써재꼈겠지? 고통이나 고독, 절박함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저 잘난 척을 하려고.”
귓가에 닿는 클라비스의 숨결이 소름 끼쳤다. 엔지가 몸서리쳤지만 클라비스는 그를 놓아주지 않고 여상히 속삭였다.
“나더러 그런 시를 썼냐고 묻는 거라면, 글쎄. 어떨까? 그거 너무 역겹지 않아? 내가 그런 인간인 척했다니, 그런 인간이 이렇게 됐다니 말이야.”
“그, 그만 하세요!”
견디다 못한 엔지가 클라비스를 힘껏 밀쳤다. 클라비스는 그제야 엔지를 놓아주며 한발 물러났다. 장난이었다는 듯, 항복의 표시로 두 손을 들어 올리면서. 그 뻔뻔한 태도에 엔지는 질린 표정으로 클라비스를 바라보았다. 클라비스는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이 시를 썼다는 걸, 그 시인이라는 걸. 그 뻔한 거짓말에 엔지는 주머니에 넣어둔 누나의 편지를 꼭 쥐었다. 그도 차마 믿고 싶지 않았다. 누나가 사랑하던 시인이 클라비스 추기경이라는 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엔지의 눈초리가 차가워지자 클라비스는 빙긋 웃었다.
“그래,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야.”
클라비스가 천사의 얼굴을 가면처럼 쓴 채 지껄였다.
“어차피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 건 레지나의 이야기야. 그러니 내 얘기는 적당히만 해. 제국 막바지에, 미치광이 추기경이 있었다는 정도로만.”
그 한없이 가벼운 태도에 엔지가 입술을 잘근 깨물 때였다. 아아악! 어디선가 커다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아악, 아아악. 아아아악! 짐승의 것인지 사람의 것인지 구분되지 않는, 그런 기이한 울음소리였다. 아니, 잘 들어보니 두 가지가 섞여 있었다. 까마귀가 우는 소리, 그리고 사람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뒤섞여 들려오고 있었다.
“이 소린…….”
돌연 들려온 소리에 엔지가 움찔 놀라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클라비스가 피식 웃었다.
“넌 정말 나랑 똑같구나. 겁이 많은 것까지.”
클라비스의 영문 모를 태연함에 엔지가 미간을 찌푸렸다. 소년이 무어라 말하려고 입을 여는데, 그보다 한발 먼저 그들이 있던 방문이 벌컥 열렸다.
“추, 추기경 전하…….”
허락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비틀대며 피 흘리는 사제였다. 그는 큰 상처를 입은 듯 손으로 옆구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사제님……!”
엔지가 놀라서 달려가려 했지만 클라비스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가만히 있어.”
클라비스가 엔지를 막아서는 사이, 사제가 두려워하며 손을 뻗었다.
“살려주…….”
다음 순간, 신음하는 사제의 등 뒤로 그림자가 덮쳐들었다. 까마귀의 머리를 가진 인간들이었다. 엔지가 그들의 검고 날카로운 부리에 질겁하자, 클라비스가 웃으며 중얼댔다.
“정말, 100년 전이랑 똑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