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1화. 그 시인 (181/208)

181화. 그 시인2022.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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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마귀 머리를 단 자들의 어깨와 등이 마치 날갯짓하듯 들썩였다. 도망치던 사제를 붙잡고 부리로 찍어대느라 생긴 움직임이었다. 그 까마귀들은 다채로운 옷을 입고 있었다. 귀족의 고아한 연미복, 기사의 절도 있는 제복, 궁정인의 정갈한 정복까지 황궁에서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복식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다 다른 옷이 무색하게 부리를 벌리고 우짖는 그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기괴했다.

16562838836525.jpg“으……!”

엔지는 사색이 되어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그러자 사제를 덮치던 까마귀들이 흑요석 같은 눈을 번들대며 하나둘 고개를 돌렸다. 피를 뚝뚝 흘리는 까마귀들의 주목에 엔지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까마귀들은 처참히 널브러진 사제에게 흥미를 잃고, 엔지를 다음 먹잇감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빤히 쳐다보던 까마귀들이 바닥을 차며 달려들었다.

16562838836525.jpg“으아……!”

엔지가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창가에 서 있던 소년에겐 물러날 곳이 없었고, 그 사이 까마귀들은 도약해 엔지를 덮쳤다. 눈을 질끈 감은 엔지의 뺨에 미지근한 액체가 떨어졌다. 단지 그뿐, 아무런 통증도 충격도 느끼지 못한 엔지는 주저하며 눈을 떴다. 그리고 눈앞의 광경에 다시 경악했다.

16562838836525.jpg“전하…….”

클라비스가 엔지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날카로운 까마귀 부리에 상처를 입었는지, 그의 흰 성의는 이미 붉게 물들고 있었다. 엔지가 클라비스의 혈흔에 질겁하자, 앞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16562838836539.jpg“너 진짜 겁쟁이구나?”

클라비스의 가벼운 핀잔과 함께, 그를 덮쳤던 까마귀들이 시든 꽃처럼 말라비틀어졌다. 엔지가 그 광경에 다시 놀라는 사이 클라비스가 몸을 돌려 엔지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16562838836539.jpg“어쩌지? 나는 싸우거나 지키는 거 전혀 못 하는데.”

클라비스는 그렇게 말하며 엔지의 뺨에 묻은 피를 손수 닦아주었다. 얼떨떨하게 서 있던 엔지는 클라비스의 반대편 팔이 처참하게 베인 걸 발견했다.

16562838836525.jpg“저, 전하는 괜찮으세요?”

16562838836539.jpg“누굴 걱정하는 거야.”

클라비스는 오히려 낄낄대며 소년을 비웃었다. 그러곤 상처를 외면한 채 말했다.

16562838836539.jpg“이제 계속 몰려올 텐데, 도망칠래? 하긴 여기선 어디로 도망치나 마찬가지일 것 같지만.”

때마침 밖에서 비명이 울렸다. 그리고 방향을 특정할 수도 없이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속엔 엔지를 찾는 뚜렷한 음성도 섞여 있었다.

16562838836613.jpg“엔지 루벨!”

그 다급한 목소리에 엔지는 반색했다. 루비드였다.

16562838836525.jpg“루비드 저하!”

엔지는 그대로 문 쪽으로 달려가다가 클라비스에게 뒷덜미가 잡혔다. 그 사이 문밖에서 인간의 머리를 가진 네발짐승이 나타났고, 그 망자는 클라비스의 쇠약으로 덧없이 쓰러졌다.

16562838836539.jpg“조심해야지.”

클라비스의 핀잔에 엔지는 하얗게 질려 널브러진 망자를 바라보았다. 인간의 얼굴에 네발짐승. 사자 왕의 망자였다.

16562838836525.jpg‘이게 왜 여기에…….’

사자 왕은 황제 폐하가 직접 처리했다고 들었는데. 엔지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클라비스가 앞장섰다. 엔지는 주저하면서도 그 뒤를 따랐고, 이윽고 복도 밖으로 나와서는 더 경악했다. 황궁의 널따란 복도에 뼈만 남은 망자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망자들이지만 엔지는 그들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첫울음을 삼킨 자들이었다.

16562838836525.jpg“체…….”

저도 모르게 첼레스테의 이름을 중얼대던 엔지의 입을 클라비스가 막았다. 다행히 이번엔 들키지 않은 듯, 첫울음을 삼킨 자들은 엔지를 발견하지 못하고 계속 서성였다. 사자 왕에 이어 우는 왕의 망자들까지 나타나다니. 그 으스스한 모습을 아연히 바라보던 엔지의 시야에 무언가 빠르게 스쳤다. 엔지는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금 경악했다. 창밖에, 불꼬리를 단 독충과 검은 용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16562838836525.jpg‘대체 무슨 일이…….’

무덤에 있어야 할 온갖 망자들이 황궁으로 나와 활개 치다니. 게다가 까마귀 머리를 가진 자들은 또 뭐고. 클라비스와 엔지가 이 망자 밭을 어떻게 지나갈까 고민할 때였다. 콰앙! 쾅! 복도 저편에서 돌연 굉음이 울렸고, 첫울음을 삼킨 자들이 그쪽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리고 루비드의 목소리도 재차 들려왔다.

16562838836613.jpg“엔지 루벨! 들리면 대답해!”

엔지는 차마 소리를 낼 수 없어 입만 크게 벌렸고, 저편의 루비드도 상황을 파악한 듯 다시 소리쳤다.

16562838836613.jpg“아니, 젠장! 말하지 마! 그냥 가만히 있어!”

루비드의 당부와 함께 다시 쾅쾅대는 소리가 울렸다. 루비드가 참격으로 망자들을 쳐부수며 밀고 들어오는 소리였다. 첫울음을 삼킨 자들이 몰려가자 클라비스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16562838836539.jpg“잘됐네, 엔지군. 마침 데리러 온 친구가 있어서.”

클라비스는 그렇게 말하며 복도 저편을 턱짓했다. 가서 루비드와 합류하라는 뜻이었다. 루비드의 보호는 분명 반가운 일이지만, 엔지는 선뜻 걸음을 떼지 못했다. 이대로 돌아서면 클라비스를 다시 만나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건 왠지 싫었다.

16562838836525.jpg“전하는 같이 안 가세요?”

16562838836539.jpg“내가 왜?”

엔지의 충동적인 물음에 클라비스가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16562838836539.jpg“나랑 더 있고 싶어?”

16562838836525.jpg“그런 게 아니라…….”

16562838836539.jpg“내 용건은 끝났어. 더 할 얘기도 없으니 그만 가.”

16562838836525.jpg“싫어요.”

엔지의 단호한 대답에 클라비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에 엔지는 고심하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16562838836525.jpg“저는 아직 할 얘기가 남았어요. 저, 전하가 한 일은 절대 용납할 수 없지만, 게다가 아직 인정도 안 하셨지만……. 누나는 비트라가 쓴 시를 좋아했어요. 그냥 좋아한 게 아니라 엄청나게, 처음부터 끝까지 다 외우고 다닐 정도로요.”

16562838836539.jpg“그래서?”

16562838836525.jpg“네?”

16562838836539.jpg“그래서 뭘 어떻게 하고 싶은 거야? 레나 루벨에게 그 시를 쓴 사람이 나라고 알려주면 돼? 네가 좋아하는 시가 사실은 다 기만에 거짓말이란다. 이런 걸 원해?”

16562838836525.jpg“그런 건 아니지만…….”

엔지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실은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뭘 원하는지 스스로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클라비스가 정말 비트라라고 한들, 이걸 누나에게 알리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레나 루벨의 기분만 생각하면 차라리 이대로 덮는 게 낫다. 마침 본인도 극구 부인하니, 엔지만 입을 다물면 앞으로도 비트라의 시는 레나의 버팀목으로 남을 수 있다. 그러니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침묵이 더 이익이다. 분명 그럴 텐데, 어쩐지 엔지는 그쪽을 선택할 수 없었다.

16562838836525.jpg“……그런 건 아니지만, 이대로 넘기고 싶지 않아요.”

엔지는 자신의 마음을 더듬으며 천천히 운을 뗐다.

16562838836525.jpg“이건 누나 때문이 아니라 전하 때문이에요.”

아. 엔지는 말을 이어가며 자신의 마음을 비로소 이해했다. 그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클라비스를 좋아하고 있었다.

16562838836525.jpg“전하가 근본부터 글러 먹은 인간은 아니라고 믿고 싶어요.”

16562838836539.jpg“은근히 말이 심하네. 아니, 이 정도면 대놓고 심한 건가?”

클라비스가 기가 막힌 듯 중얼댔다. 하지만 엔지는 굴하지 않았다.

16562838836525.jpg“태어날 때부터 쓰레기였다면 그런 시도 못 썼을 거예요.”

16562838836539.jpg“이쯤 되면 막 나가자는 거지?”

16562838836525.jpg“그리고 그런 시를 쓴 사람이라면, 아무리 100년이 지났어도 그때의 마음이 조금은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엔지는 자신이 클라비스를 변호하고 싶어 한다는 걸 인정했다. 아버지에겐 전혀 통하지 않았지만, 클라비스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 기대를 품은 사실도. 그리고 그걸 느낀 클라비스도 점점 심정이 곤란했다. 자길 닮은 이 도련님이 썩 싫지 않아서, 이러다간 엔지나 스스로에게 관대해질 것 같아서 곤혹스러웠다. 그래서 이 녀석을 어떻게 쫓아낼까 고민하는데, 때마침 복도 반대편에서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16562838836539.jpg“잡담은 이쯤 해야겠네.”

클라비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엔지의 등을 떠밀었다. 까마귀 소리에 겁을 먹은 엔지도 더는 고집을 피우지 못하고 주춤댔다.

16562838836613.jpg“야!”

게다가 루비드도 반대편 복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북부의 기사 서너 명을 달고 온 그는 망자를 치우느라 고생했는지 숨을 씩씩 몰아쉬고 있었다. 엔지는 루비드의 빨간 옷을 보고 반색했고, 그 옆을 보고는 안도했다. 루비드의 곁에는 유니도 함께 있었다.

16562838921794.jpg“저쪽에서 까마귀들이 옵니다!”

북부 기사가 엔지와 클라비스의 등 뒤를 향해 소리쳤다. 말마따나 화려한 정복을 입은 까마귀들이 클라비스와 엔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16562838836613.jpg“엎드려!”

루비드가 레이피어를 빼 들며 소리쳤고, 클라비스는 엔지의 머리를 누르며 허리를 숙였다. 두 사람 위로 날카로운 참격이 싹둑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클라비스의 머리카락 몇 올을 자르고 날아간 참격이 까마귀들을 후려쳤다. 선두 몇 놈이 쓰러졌지만 그 뒤에는 아직 망자들이 가득 남아 있었다. 그들을 향해 루비드가 다시 레이피어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면서 이미 잔뜩 날뛰었는지, 숨을 몰아쉬느라 이전처럼 민첩하게 참격을 날리지는 못했다.

16562838836539.jpg“됐으니까 애나 데리고 가.”

클라비스가 루비드의 팔을 잡으며 그에게 엔지를 떠넘겼다. 마치 혼자 남을 것처럼 구는 클라비스를 보며 루비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16562838836613.jpg“어쩌려고?”

16562838836539.jpg“어떻게든 되겠지.”

클라비스는 그렇게 말하며 루비드의 금발을 마구 헝클어트렸다. 마치 강아지를 쓰다듬는 듯한 행동에 루비드는 으르렁대며 그 손을 쳐냈다. 하지만 단지 그뿐, 등을 떠미는 클라비스에겐 더 반발하지 않았다. 애당초 꼬마를 둘이나 달고 있는 루비드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16562838836539.jpg“두엄의 궁으로 가. 의외로 거기가 가장 안전할 거야.”

클라비스의 조언에 루비드는 혀를 차며 돌아섰다. 그러곤 엔지와 유니를 데리고 여태 돌파한 복도로 다시 내달렸다.

16562838949544.jpg“저기요!”

그런데 기사에게 팔을 잡힌 채 달리던 어린 하녀가 돌연 팔을 뿌리치며 돌아섰다. 그 하녀는 클라비스에게 달려가더니 인상을 잔뜩 쓴 채 말했다.

16562838949544.jpg“다쳤잖아요, 혼자 남아서 어쩌려고요?”

16562838836539.jpg“이건 또 뭐야?”

클라비스가 황당하다는 듯 중얼대자, 하녀는 더 엄한 표정으로 대들었다.

16562838949544.jpg“잘난 척 작작 하고 같이 가요.”

하녀는 허락도 없이 감히 추기경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클라비스의 표정이 차갑게 굳자, 북부 기사가 달려와 유니를 훌쩍 낚아챘다.

16562838949544.jpg“아, 왜요!”

16562838921794.jpg“저분이 누군 줄 아느냐?”

16562838949544.jpg“누구든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죽으면 다 시첸데!”

16562838921794.jpg“이 무엄한 녀석……!”

16562838836539.jpg“됐으니까 그만 꺼져요. 귀찮게 하지 말고.”

16562838949544.jpg“인성하고늡……!”

클라비스에게 대들던 하녀는 결국 기사에게 입이 틀어막혔다. 그리고 조금 진심으로 울컥했던 클라비스는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망자가 창문을 뚫고 날아든 건 바로 그때였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불덩이를 품은 독충이 클라비스에게 돌진했다. 안중에도 없던 꼬마 때문에 잠시 한눈을 팔던 클라비스는 유리 파편이 피부를 사정없이 할퀼 때에서야 그것을 눈치챘다. 독충이 클라비스를 덮치기 직전, 두 가지 일이 거의 동시에 벌어졌다. 먼저 일어난 일은 기사를 뿌리친 하녀가 클라비스의 허리를 온몸으로 들이받은 것이고, 그 직후 일어난 일은 루비드의 참격이 독충을 폭파한 것이었다. 클라비스가 뒤로 넘어가고 허공에서 불꽃이 터져 사방으로 튀었다. 그리고 그 불똥은 자연히 클라비스와 그 위에 쓰러진 하녀를 덮쳤다.

16562838949544.jpg“엄마야악!”

16562838836525.jpg“유니야!”

유니가 힘껏 비명을 지르자 엔지도 놀라서 유니의 이름을 외쳤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제품으로 떨어진 하녀 위로 팔을 드리웠던 클라비스는, 그 하녀의 이름을 듣고 얼어붙었다.

16562838836539.jpg“너, 이름이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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