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4화. 어리광 (184/208)

184화. 어리광2022.02.03.

선왕의 금지 기록 열람. 레지나가 왕이 되어 가장 먼저 한 일이었다.

16562839484211.jpg“누나, 이게 대체…….”

16562839484218.jpg“보는 대로야.”

레지나는 씁쓸한 얼굴로 클라비스 대공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16562839484218.jpg“히엠스 그라샤 선왕 시절 벌어진 마녀사냥. 이게 그 실체야.”

16562839484211.jpg“마녀사냥을 주도한 게 왕실이었다고?”

16562839484218.jpg“그래, 철저하게 계산된 거였어. 대상도, 손익도.”

16562839484211.jpg“왜 그런 짓을…….”

16562839484218.jpg“혼자 사는 여자 대부분이 전사자의 유가족이었으니까.”

16562839484211.jpg“뭐……?”

경악하는 동생에게 누나는 담담히 설명했다.

16562839484218.jpg“무리하게 전쟁을 일으켰고 무리하게 징집했어. 그러다 보니 약속도 무리하게 한 거야. 전사자의 가족을 왕실에서 평생 책임지기로.”

레지나의 말에 클라비스의 시선이 흔들렸다. 아직 소년인 대공은 차마 믿고 싶지 않다는 듯 입술을 떨며 중얼댔다.

16562839484211.jpg“그럼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고, 나라를 지킨 사람들의 가족을 화형시킨 거야?”

16562839484218.jpg“그래야 막대한 비용을 아낄 수 있으니까.”

16562839484211.jpg“말도 안 돼……!”

16562839484218.jpg“그래,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이래놓고 시대의 희생양이라고 그럴싸하게 포장했어.”

비명을 지르는 클라비스를 외면한 채, 레지나는 화가 난 얼굴로 책상에 늘어진 서류를 추렸다. 그러곤 어느 때보다 단호하게, 그리고 결연하게 말했다.

16562839484218.jpg“이런 말도 안 되는 일, 내 나라에선 절대 용납하지 않을 거야.”

16562839512664.jpg

  . . . 그래,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아무 죄 없는 자를 시대의 희생양이라 부르며 짓밟는 건. 그 시체를 밟고 새 시대와 새 희망을 꿈꾸는 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래서 레지나였던 ‘그것’은 생각했다.

16562839484218.jpg―이런 말도 안 되는 일, 내 나라에선 절대 용납하지 않을 거야.

그래서 이미 운명에 굴복한 반신을 뜯어내고 복수를 택했다. 복수는 매듭짓지 못한 일에 대한 항거. 권리의 회복. 존재의 주장. ‘그것’은 스스로 한 말을 지키기 위해 무덤의 왕들을 죽이고 생과 사의 경계를 찢었다.

16562839512671.jpg“저, 저게 뭐야!”

16562839512671.jpg“레지나 그라샤?”

16562839512671.jpg“무용왕이 되살아났다!”

‘그것’이 최초의 균열을 열고 밖으로 나왔을 때, 고맙게도 지상의 시간은 그가 죽던 순간에 멈춰 있었다. 단두대도, 핏자국도, 그리고 왕을 죽이고 흥분한 사람들도. 왕을 처형한 폭도들이 되돌아온 ‘그것’을 보고 소리쳤다. 그중 무용왕이라는 말이 ‘그것’의 귓가에 유독 선명히 박혔다. 무용왕. 레지나 그라샤를 아무 쓸모 없는 왕이라 비웃으며 붙인 멸칭.

16562839484218.jpg“……내가 그리도 미운가?”

머리칼이 하얗게 센 ‘그것’이 자신을 괴물처럼 바라보는 백성들에게 물었다. 사람들은 무겁게 파고드는 음성에, 그 이질적인 분위기에 일순 얼어붙었다. ‘그것’이 겁먹은 자들을 향해 말했다.

16562839484218.jpg“나도 너희가 밉다.”

너희가 맹목으로 나를 미워했듯, 나도 이제 너희를 조건 없이 미워한다.

16562839484218.jpg“그러니 너희는 내 것이다.”

왕의 선언과 함께, ‘그것’을 증오하던 자들의 머리가 검은 깃털로 뒤덮였다. 순식간에 까마귀로 변한 자들은 처절하게 울며 사람들을 공격했고, 증오심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자들은 갑자기 쏟아진 재앙에 속절없이 찢겨나갔다. ‘그것’은 자신이 엎드렸던 단두대에 걸터앉아 절규로 얼룩진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16562839484218.jpg‘이건 내가 시킨 일인가?’

판단이 둔하게 뒤따라왔다. 하지만 상황을 이해하고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충격적이지도, 슬프거나 안타깝지도 않았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느낌이지만 이제 와선 아무래도 좋았다. 반역자들을 정리한 후, ‘그것’은 하나 남은 피붙이를 불러들였다. 그의 연약한 동생, 클라비스 대공이 까마귀들의 호위를 받으며 궁에 도착했다. 그때 그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문득 동생의 지난 말이 뇌리를 스쳤다.

16562839484211.jpg―날 위해서 살아주면 안 돼? 나도 널 위해 살 테니까, 응?

아,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했지. 그때 네 말을 들었으면 뭔가 달라졌을까? 죄 없이 죽어 다시 돌아오는 일도 없었을까? 잠시 생각하던 ‘그것’은 이내 부질없음을 느꼈다. 시간을 되돌린다 한들 나는 같은 결정을 내릴 것이다. 왜냐하면 왕이니까. 그라샤의 고결하고 어리석은 왕, 그게 나니까.

16562839484218.jpg“어서 와라, 내 동생.”

‘그것’은 심장이 싸늘하게 얼어붙는 것을 느끼며 동생을 불렀다. 그러곤 당황해 두리번거리는 가련한 동생에게 말했다.

16562839484218.jpg“레지나 그라샤는 죄인이다. 이 나라와 법정이, 그리고 백성들이 내린 결론이야. 그래서 나도 그들의 방식에 따르기로 했다.”

16562839484211.jpg“레나…….”

16562839484218.jpg“그렇게 부르지 마라. 죄인의 천한 이름이다.”

‘그것’은 자신의 옛 이름을 날카롭게 부정했다. ‘레지나’는 무덤에서 죽음을 수용했다. 제 앞에 놓인 단두대를 시대의 요구로 인정하고 자신의 처형 역시 왕의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내 나라에서 시대의 희생양이 나오는 걸 허락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거부한다. 나는 무고한 자의 죽음으로 소생하는 나라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유를 만들어주겠다. 너희가 무용하다 일컬은 그대로 해주겠다. 오직 그러기 위해 돌아온 ‘그것’은, 자신의 나라를 사랑한 만큼 증오하게 된 왕의 망령은 텅 빈 공허 속에서 선언했다.

16562839484218.jpg“나는 니힐이다.”

  . . . 그래, 안다. 레지나의 말마따나 니힐은 이 이름을 지을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이 굴레의 공허함과 무의미함을.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지독하게 버텨온 이유는…….

16562839512671.jpg“왕이라서.”

니힐에게 아직 짓밟힌 채, 레지나가 흐릿한 목소리로 중얼댔다.

16562839512671.jpg“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견딜 뿐이지. 왕이라서.”

레지나의 여상한 속삭임에 무덤처럼 붉게 타던 배경이 점점 어두워졌다. 이윽고 사방이 검은 장막에 뒤덮였고, 눈을 이글대던 니힐의 분노도 차츰 가라앉았다. 비록 예전에 갈라졌다 해도 상대는 자기 자신. 누구보다 자신을 잘 아는 존재와 실랑이해봤자 남을 게 없었다.

16562839484218.jpg“그래, 네 말이 맞아.”

그래서 니힐은 자신의 발을 붙잡은 레지나의 손을 걷어차며 말했다.

16562839484218.jpg“우린 진즉에 사라져야 할 존재였다.”

16562839484218.jpg“하지만 내게 단두대 앞에 설 죄는 없었지.”

16562839484218.jpg“그래서 친히 만들어주었다. 날 죽인 그들에게, 날 죽일 이유를.”

이건 자비로운 왕이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베푼 친절. 자신의 백성들이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는 목 잘린 왕의 자애, 광기. 그리고 복수였다. 어둠 속에서 니힐의 서슬이 시리게 빛날 때, 새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16562839570347.jpg“무너트릴 이유까지 만들어주는 황제라니…….”

니힐은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며 탄식이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어둠 한 자락을 밀어내며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공간의 주인인 레나 루벨이었다. 레나가 가벼운 걸음으로 두 사람이자 한 사람인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러곤 아직 니힐의 발치에 쓰러진 레지나를 일으키며 덧붙였다.

16562839570347.jpg“그래서 자신에게 니힐이라고 이름 붙였군요. 반역과 몰락이 목표인 황제여서.”

레나가 친근히 말을 걸었지만 니힐의 시선은 여상히 싸늘했다. 실은 내심 놀란 상태였다. 이 수상한 공간에 레지나에 이어 레나 루벨까지 나타났다. 그럼 여긴 대체 어디지?

16562839570347.jpg“여기가 어딘가 하는 표정이네요.”

레나가 니힐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말했다.

16562839570347.jpg“예상하는 게 맞아요. 당신이 지배의 권능을 써서 들어온 내 안이에요.”

안 그래도 니힐은 그렇게 추측하고 있었다. 레나 루벨의 피를 마셔서 그의 심연으로 떨어진 건 아닐까 하고. 하지만 정말 그렇다면 레지나가 여기 있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지금까지 니힐은 레지나가 자신이 만든 허상인 줄 알고 상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가 레나 루벨의 내면이라면, 그리고 레나 루벨과 접촉 중인 저 레지나가 진짜라면…….

16562839484218.jpg‘심장이 부서지면서 소멸한 게 아니었나?’

니힐이 불쾌한 눈으로 레지나를 쏘아보자, 레지나는 서글픈 얼굴로 레나의 곁에 섰다. 그 모습에 니힐의 눈빛이 더 흉흉해졌지만 레나가 모르는 척 끼어들었다.

16562839570347.jpg“지금이라도 물러날 생각은 없나요? 당신의 말마따나 이유라면 이제 충분하잖아요. 순서는 좀 바뀌었지만, 이젠 아무도 당신을 죄 없는 희생양이라고 부르지 않을 거예요.”

니힐 그라샤는 이제 단두대 앞에 서도 손색없는 폭군이 됐다. 자신의 희망대로. 레나가 그것을 꼬집으며 충고했다.

16562839570347.jpg“이미 복수는 지나치게 했어요. 당신의 나라에도, 그리고 당신 스스로에게도.”

16562839484218.jpg“그걸 왜 네가 결정하지?”

하지만 니힐은 레나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고개를 기울이며 중얼댔다.

16562839484218.jpg“지나쳤는지 모자랐는지는 내가 판단해.”

16562839570347.jpg“그래서 당신의 판단은요?”

16562839484218.jpg“불만이라면 끌어내라. 이유는 충분히 만들어줬으니 이제 너희만 성공하면 끝이야.”

16562839570347.jpg“성공하면 끝?”

레나는 놀랍다는 듯 니힐의 표현을 따라 했다. 그러곤 헛웃음을 지으며 되물었다.

16562839570347.jpg“결국 스스로 물러날 생각은 없다는 거군요.”

니힐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여느 때처럼 싸늘하게, 황제답고 망자답게 무정한 눈으로 레나를 주시할 뿐이었다. 레나는 그 모습을 잠자코 마주 보더니 이내 차갑게 중얼댔다.

16562839570347.jpg“어리광 작작 부려, 레지나.”

예상치 못한 막말에 니힐이 눈을 부릅떴다. 황제의 표정이 살벌해졌지만 레나는 모르는 척 혀를 차며 말했다.

16562839570347.jpg“그만 정신 좀 차리라고.”

16562839484218.jpg“감히…….”

16562839570347.jpg“시대의 희생양을 용납할 수 없다, 왕이라서 스스로 물러날 수 없다, 왕이니까 마지막까지 견뎌야 한다, 불만이면 끌어내라?”

레나는 니힐이 으르렁대는 소리마저 무시하고 그의 앞선 발언을 나열했다. 그러곤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16562839570347.jpg“전부 말 같지도 않은 핑계야.”

16562839484218.jpg“네까짓 게 뭘 안다고…….”

16562839570347.jpg“알아. 네가 당한 일, 그때 느낀 감정도 전부 알아. 반으로 갈라질 만큼 괴로웠던 것도. 그때 네가 느낀 것 중 잘못된 건 없어. 다만, 너무 잘못 표현했을 뿐이지.”

레나는 언젠가 린이 했던 말을 따라 하며 니힐을 바라보았다. 니힐은 그 눈빛을 어처구니없다는 듯 마주 보았다. 레나는 마치 자신의 형제나 친구에게 하듯, 니힐을 훈계하고 있었다.

16562839570347.jpg“결국 네게 뭐가 남았는지 봐. 전부 네 죄가 됐잖아.”

레나가 말하는 동안 레지나는 그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었다. 니힐은 자신에게 마구 쏘아붙이는 레나와 그 옆에 선 자신의 반신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레나와 레지나의 관계를 의심하는 니힐을 향해, 레나가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16562839570347.jpg“널 보며 아버지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고 생각했어. 내가 아버지에게 기회를 주면, 네게도 용서받을 기회가 생길까 봐. 물론 그 기회는 네가 보기 좋게 날려 버렸지만.”

레나는 씁쓸한 낯빛으로 니힐이 처분해버린 카르도 루벨을 떠올렸다. 한때 누구보다 사랑했던, 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잘못한 내 아버지. 그는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지 않았다. 레나는 그 사실을 안타까워하며 니힐을 돌아보았다.

16562839570347.jpg“아버지를 설득하는 건 실패했지만 너한텐 기대를 걸고 싶어.”

레나 루벨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죄 많고 어리광 심한 친구에게 생긋 웃었다.

16562839570347.jpg“필요하다면, 조금 혼내서라도.”

1656283962703.jpg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