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그들이 누구라고 생각해?2022.02.07.
“혼내서라도…….”
니힐은 레나의 입에서 흘러나온 생소한 표현을 잠시 곱씹었다. 혼낸다니, 감히 나를? 니힐은 낯선 감정으로 레나를 바라보았다. 이건 그가 100년 전에 버린 일부도 모르는 감정이었다. 니힐은 이 느낌이 뭔지 몰라 불쾌해하다가 레나의 곁에 선 레지나를 턱짓하며 물었다.
“저건 왜 여기 있지?”
“네가 모르는 사이 많은 일이 있었어.”
“내 심장을 부순 건 알고 있다.”
“네가 나한테 준 거야.”
레나가 니힐의 말을 정정했다. 그러자 니힐은 레나가 아닌 레지나를 쏘아보았다. 니힐이 혐오스럽다는 듯 레지나를 쳐다봤지만 레지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어받았다.
“내가 직접 심장을 주고 그다음엔 망자가 되었다. 네가 거부하고 떠났던 자들, 나도 이젠 그들의 일부다.”
“그럼 레나 루벨을 없애면 너도 영영 사라지겠군.”
니힐은 냉랭히 결론을 내렸다. 자신의 못난 반쪽을 당장이라도 없애버리고 싶다는 투였다. 그의 의지에 반응하듯, 이미 형상을 이룬 채 대기하던 망자들이 레나와 레지나를 에워쌌다. 망자들이 서서히 거리를 좁혀오자 레나와 레지나는 서로에게 등을 기댔다. 니힐은 더 이상 탐색도 말씨름도 하고 싶지 않다는 듯 꼼꼼하게 두 사람을 포위했다. 그 일촉즉발의 순간, 레지나가 나직이 중얼댔다.
“온다.”
그 말을 신호로 망자들이 몰아치듯 쏟아졌다.
*** 린은 덜컥이는 소리에 흠칫 고개를 들었다. 레나와 니힐은 아직 정신을 잃은 채였고, 까마귀들은 그 주변을 맴돌며 우아하게 춤추고 있었다. 그곳에서 린은 악몽에 갇힌 기분으로 레나의 곁을 지키다가, 돌연 들려온 소리에 놀라 주위를 경계했다.
‘뭐지?’
린이 소리를 찾아 두리번대는 순간 대리석 바닥에서 비늘 덮인 발등이 불쑥 솟구쳤다. 비늘뿐만이 아니었다. 앙상한 인간의 신체가, 불붙은 독충의 침이, 그리고 네발짐승의 불규칙한 척추가 땅에서 하나둘 기어 나왔다.
‘망자…….’
이미 니힐에게 심장을 빼앗긴 왕들의 망자가 두엄의 궁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왜지? 왕들은 다 죽었는데, 게다가 여긴 무덤도 아닌데…….’
린은 다급히 생각하다가 레나 옆에 쓰러진 니힐을 보고 짧게 탄식했다. 망자의 왕들을 모두 정복한 황제가 여기 있다. 그리고 이곳은 그의 영토. 그러니 이제부턴 이곳도 무덤이다. 생과 사는 이미 지독하게 뒤얽혔다. 어느덧 몸을 일으킨 망자들이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린을 향해서, 아니. 레나를 향해서였다. 린은 잇소리를 내며 달려든 망자 둘을 연이어 베어 넘겼다. 뒤이어 숨돌릴 틈도 없이 날개를 펼친 독충이 불덩이를 토하고 네 발의 망자가 짖으며 덤벼들었다. 홀로 선 린은 검을 세워 망자들의 공격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하지만 연거푸 공격을 쳐내는 사이 틈이 생겼고, 짐승 하나가 곁을 스치는가 싶더니 린의 어깨에서 피가 솟구쳤다.
"크윽……!"
린은 통증을 참으며 제 어깨를 물어뜯은 짐승을 검으로 쳐올렸다. 망자 한 마리를 다시 밀어낸 린은 아득함을 느꼈다. 오롯이 혼자인 린과 달리 망자들은 하나둘 솟구치며 점점 득실대고 있었다. 린은 저것들을 혼자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권능을 잃어버린 동부공은 여느 기사들처럼 조금 단련한 사람에 불과했다. 궁지에 몰린 린은 결국 니힐을 쏘아봤다. 저 망자들의 움직임은 분명 니힐 그라샤의 의지. 그렇다면 더 이상 레나만 기다릴 수 없다. 절박해진 린은 더 참지 않고 니힐을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그런데 린이 니힐의 목을 내리치기 직전, 피잉 하고 바람 소리가 울렸다. 이어 쨍강 깨지는 소리가 나며 높이 들어 올린 검의 무게가 반절로 줄었다.
‘무슨…….’
린은 아연한 눈으로 자신의 검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반으로 동강 난 검 윗부분이 깔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린은 이게 누구의 소행인지 깨닫고 이우라 쪽을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까마귀가 된 이우라가 참격을 날린 자세로 린을 쏘아보고 있었다. 이우라 뿐만이 아니었다. 까마귀가 된 귀족들이 어느새 춤을 멈추고 린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그들은 황제를 해치려 한 린을 적으로 인식한 듯, 그를 향해 맹렬한 적의를 내뿜기 시작했다. 이우라가 다시 검을 치켜들자 린은 자신의 토막난 검을 버리고 레나를 안아들었다. 그러곤 덮쳐드는 망자와 까마귀들을 피해 내달렸다. 부상을 입은 어깨에서 피가 철철 흘렀지만 지금은 아픔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레나, 일어나……!’
린은 레나를 안고 도망치며 간절히 빌었다. 하지만 그의 기원을 비웃기라도 하듯, 얌전히 눈을 감고 있던 레나는 오히려 왈칵 피를 토했다. ***
“윽……!”
레나의 잇새로 마른 신음이 흘렀다.
“혼내주겠다더니.”
“흐윽…….”
“큰소리친 게 무안하겠군.”
레나의 목을 한 손에 쥔 채, 니힐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중얼댔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레나는 니힐에게 사로잡힌 채 저항도 못 하고 있었다. 레지나 역시 망자들에게 짓눌려 꼼짝도 못 하는 처지였다. 레나와 레지나는 나름 잘 싸웠다. 하지만 끝없이 몰려드는 망자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고, 그게 아니라도 니힐이 가진 권능은 지나치게 압도적이었다. 그로써 니힐은 수월히 그들을 제압하고 다소의 통쾌함과 짜증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밖이었으면 진작 죽었을 텐데.”
니힐은 레나를 완벽하게 제압하고도 죽일 수 없는 상황에 혀를 찼다. 이 기이한 공간은 현실의 물리법칙을 어느 정도 따르다가도 결정적인 순간 니힐의 기대를 배신했다. 진즉 죽었어야 할 레나 루벨이 어영부영 아직 살아 있는 게 그 증거였다.
“그래서 여기로 데려온 거야…….”
레나가 피가 흐르는 입술로 말했다. 그 가소로운 허세에 니힐이 혀를 찼다.
“여기라면 좀 다를 거라고 생각했나?”
“아니, 널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안 했어.”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애써 웃었다. 실은 당장이라도 까무룩 정신을 놓칠 것 같았다. 니힐의 가공할 만한 권능과 몇 번이나 맞부딪혔다. 그의 말마따나 밖이었다면 진즉에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전부 견뎌낸 레나는, 니힐을 여기로 끌고 온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의 상태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망자들은 다 나왔나?’
레나는 자신의 심연으로 들어온 니힐의 무게를 대략적으로나마 가늠할 수 있었다. 왕들의 심장을 제 가슴 안에 녹이고 망자들까지 모두 끌어안고 있던 니힐은 거북할 정도로 무거웠다. 그런데 망자들이 나오며 니힐에게서 느껴지는 질량이 차츰 줄었다. 이대로라면 곧…….
“아직도 잔머리를 굴리고 있군.”
니힐이 레나의 목을 억세게 조르며 말했다.
“시간을 끌 생각이라면 단념해라. 여기서 죽일 수 없다면 밖에서 죽여도 되니까.”
“밖에서……?”
“지금쯤 네가 기르던 강아지가 널 애타게 부르고 있겠군.”
강아지, 린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레나가 린을 떠올리고 놀란 표정을 짓자 니힐이 단호히 덧붙였다.
“대답하지 마라. 잠든 채 죽든 깨어나서 죽든, 네 결말은 하나뿐이니까.”
“망자들을…… 밖으로도 내보낸 거야?”
니힐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끝난 싸움이라 확신한 탓이었다. 나자의 아들 따위 망자 너덧 마리면 해치울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이미 도망쳤을지도 모르지. 그럼 지금 자신과 함께 심연으로 내려온 레나 루벨의 육체는 완전히 무방비.
“네가 내 일부와 무슨 작당을 했는지 궁금하지도 않아. 감히 나와 그것을 동일시한 게 역겨울 뿐.”
니힐은 이제 끝이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그만 꺼져라. 네 비천한 이름과 함께.”
니힐은 말을 맺으며 레나의 목을 쥔 손아귀에 힘을 줬다. 그런데 만신창이가 되어 축 늘어져 있던 레나가 돌연 니힐의 손목을 확 낚아챘다.
“남의 이름을 비천하다고 하면 안 되지.”
시름시름 죽어가던 레나가 돌연 눈을 치뜨며 니힐을 도발했다. 그러더니 그대로 니힐의 손목을 비틀어 그의 몸을 넘겨버렸다. 순식간에 메쳐진 니힐은 바닥에 충돌하기 전 몸을 굴려 고양이처럼 착지했다. 그러곤 다시 멀쩡해진 레나를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그에 여태 지친 척 늘어져 있던 레나가 천연덕스럽게 중얼댔다.
“하긴, 이건 네 이름이기도 하지. 그렇다고 비천하단 소릴 막 해도 되는 건 아니지만.”
“……아직 힘이 남았나?”
“아니, 죽을 것 같아.”
레나가 조금 해쓱한 얼굴로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빨리 끝내려고. 이제 시간을 끌 필요도 없으니까.”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공간을 가득 채운 망자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니힐의 무게를 다시 가늠했다. 망자들을 밖으로 내보낸 게 사실인지, 처음 들어왔을 때보다 가볍게 느껴졌다. 슬슬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레나가 가볍게 운을 뗐다.
“레지나, 네가 무덤에서 거절한 자들이 누구라고 생각해?”
“또 무슨 헛소릴…….”
“비천한 패자? 아니면 구걸하는 약자?”
니힐이 잇소리를 냈지만 레나는 태연하게 보기를 제시했다. 그 익숙한 표현에 니힐은 잠시 멈칫했고, 레나는 힘없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주 심한 일을 당한 사람들은 맞아. 그런데 그들이 정말 패자에다 약자일까?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복수에 미치지 않은 사람들이 정말 연약하다고 생각해?”
니힐은 레나가 또 무슨 속셈으로 주절대나 싶어 그를 빤히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제 와 경계해봤자 너무 늦었다.
“그들은 강해. 너희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레나는 담담히 말하며 미소 지었다. 그와 함께 어둠에 덮여있던 레나의 세상이 새하얗게 밝아졌다. . . . 제국은 황제인 니힐 그라샤의 영역. 그래서 망자들은 니힐의 의지대로 제국의 땅을 밟았다. 축복을 빼앗긴 왕과 용서받지 못한 자들에겐 꽤 반가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역은 바로 너희들이니까. 그날, 망자들이 균열이 아닌 땅에서부터 솟구쳐 제국을 어지럽힌 날. 망자들이 본격적으로 활개를 치기 직전 온 제국은 백합으로 뒤덮였다. 오랜 시간을 기다린, 각기 다른 이름을 가진 고결한 백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