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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화. 헌화 (186/208)

186화. 헌화2022.02.10.

어둠을 밀어내며 피어난 백합이 니힐의 몸을 속박했다. 그것은 손길처럼 부드럽게 니힐의 팔과 다리에 감겼고, 니힐은 짜증을 내며 팔을 휘두르려다가 이질감에 멈췄다.

16562839833591.jpg“뿌리칠 수 없지?”

레나가 굳어 선 니힐에게 물었다. 말마따나 니힐은 이 여린 백합 떨기를 뿌리칠 수 없었다. 사자를 가둔 왕의 권능까지 사용했지만 그것을 뜯어낼 수도, 풀어낼 수도 없었다. 니힐은 혀를 차며 참격을 일으켰다. 날쌘 바람 소리가 마구잡이로 울려 퍼지며 대기를 찢었다. 하지만 단지 그뿐 결과는 같았다. 업화를 일으켜 봐도 마찬가지였다.

16562839833598.jpg“허튼짓을…….”

권능이 통하지 않자 니힐은 사자처럼 으르렁대며 망자들을 불러들였다. 그런데 그의 의지에 따라야 하는 망자들이 움직이지 않았다. 니힐은 불길한 예감에 뒤를 돌아보고 으득 이를 갈았다. 망자들도 백합에 구속되어 갇혀 있었다. 망자들이 몸부림치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고통을 모르는 평소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것들은 마치 겁에 질린 것처럼 백합에 에워싸여 덜덜 떨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망자들에게서 풀려난 레지나가 몸을 일으켰다. . . . 레나를 안고 달리던 린은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16562839833604.jpg“백합……?”

믿을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광경이 넘실대고 있었다. 망자와 까마귀들이 덮쳐들던 순간 어디선가 새하얀 빛이 넘쳤다. 린은 빛을 따라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고, 균열 너머의 이변을 홀로 목격했다. 언제나 징그럽게 붉던 무덤의 하늘이 새벽처럼 희게 빛나고 있었다. 백합이 피어나 향기를 퍼트린 건 그 직후였다. 린은 얼떨떨한 눈으로 망자들을 붙잡은 백합을 바라보았다. 이우라도 백합 줄기에 팔다리가 엉켜 검을 놓고 주저앉아 있었다.

16562839833604.jpg‘기적이라도 일어난 건가?’

린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자신의 품에 안긴 레나를 내려다보았다. 레나는 평온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 . .

16562839833613.jpg‘뭐였지? 방금 누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엔지는 당혹스러워하며 붉은 옷의 까마귀를 바라보았다. 그 까마귀, 클라비스는 갑자기 피어난 백합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16562839833617.jpg“멈췄다…….”

16562839833617.jpg“저기서 못 나오는 건가?”

엔지와 유니를 지키던 기사들이 긴장 섞인 목소리로 중얼댔다. 그들은 신중을 기하며 클라비스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갑자기 피어난 꽃들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 모습이 답답했는지, 유니가 기사들의 옆구리를 밀치며 앞으로 나왔다.

16562839833625.jpg“좀 비켜봐요.”

16562839833617.jpg“이봐……!”

기사가 제지하려 했지만 유니는 듣지 않고 클라비스가 갇힌 백합 줄기 앞까지 다가갔다. 그러곤 새하얗게 핀 꽃잎으로 조심조심 손을 뻗었다. 기사들은 유니를 차마 말리지 못하고 그 무모한 행동을 지켜보았다.

16562839833625.jpg“아!”

꽃잎을 건드린 유니가 화들짝 물러났다. 아이는 마치 벌에 쏘인 것처럼 놀라더니, 이내 다시 손을 뻗어 순백색 꽃을 어루만졌다.

16562839833613.jpg“괘, 괜찮아?”

엔지가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기사들도 잔뜩 굳은 표정으로 유니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그런데 손끝으로 꽃을 조심히 건드리던 유니가 돌연 두 손을 뻗어 꽃송이를 감쌌다.

16562839833625.jpg“이거……. 아니, 이 사람들…….”

16562839833613.jpg“사람들?”

엔지가 되묻자 유니가 멍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여전히 꽃을 감싼 채 중얼댔다.

16562839833625.jpg“이 사람들이 나를 알아. 이 사람들, 레나 아가씨하고 함께 있었어.”

  . . . 망자들이 제도의 거리를 점령한 것처럼, 빛나는 백합도 그들이 있는 곳에 빠짐없이 피어났다. 사람들은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고 비명을 지르다가 흐드러지게 핀 꽃을 보고 멍하니 굳어버렸다.

16562839833617.jpg“망자들이…… 무서워하고 있어.”

빈민가의 한 소녀가 중얼댔다. 혼비백산 도망치던 사람들에게 치이고 밟혀 주저앉은 소녀는, 흉포한 망자들이 가녀린 백합 속에서 몸부림치는 모습을 아주 가까이서 보고 있었다. 망자들이 갇혔지만 늦게라도 그 소녀를 일으키러 온 사람은 없었다. 망자들이 다시 난동을 부릴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런데 잠시 후, 그들의 방관이 무안하게 망자들이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억센 비늘과 단단한 갑각, 그리고 거친 털과 발톱이 낙엽처럼 덧없이 흩어졌다. 그렇게 괴물의 형상이 점점 벗겨지더니, 이내 평범하고 초라한 인간의 모습이 드러났다.

16562839833617.jpg“사람……?”

16562839833617.jpg“저게 망자야? 저런 게…….”

저런 게 지금까지 사람들을 도륙하고 다녔다고? 지켜보던 이들이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댔다. 그리고 본 모습을 들킨 망자들은, 죄와 업에 취해 날뛰다 이제야 제정신을 차린 그들은 수치심을 참지 못하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16562839833617.jpg―보지 마.

16562839833617.jpg―제발 보지 마.

16562839833617.jpg―날 드러내지 마…….

잊히길 바라는 자들은 점점 작아졌다. 그들은 빛을 무서워하는 벌레처럼 몸을 웅크리더니 점점 땅으로 녹아들었다. 이윽고 그들은 사라졌고 그 자리엔 기억되길 바라는 자들만, 눈부시게 흰 백합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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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니힐은 망자들이 사라지는 광경을 보고 다시 레나를 향해 으르렁댔다.

16562839833598.jpg“무슨 짓을 한 거지?”

16562839833591.jpg“말했잖아, 너희보다 강하다고.”

니힐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레나를 쏘아보자, 레나가 느긋하게 웃으며 말했다.

16562839833591.jpg“무덤은 인간의 죄와 업이 쌓여서 생긴 문턱이야.”

망자들이 자신의 업에 깔려 가라앉은 곳, 닮은 이들과 무리를 이루고 함께 배회하는 곳. 그곳이 바로 무덤이다.

16562839833591.jpg“그런데 우리는 죄를 짓지 않았어. 우릴 무덤에 붙잡은 건 우리 잘못이 아니라 너희 잘못이지. 그러니 당연한 거야. 죗값을 치러야 하는 게 너희라면, 우리는 너희에게 보상받아야 하는 쪽이니까.”

무덤은 죄와 업이 쌓이는 장소답게 공정하고, 그 규율에 따라 레나 루벨은 걸맞은 권능을 부여받았다. 비록 다른 망자들처럼 파괴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권능을 모조리 무력화시키고 압도하는 힘. 그게 축복을 빼앗긴 왕과 용서받지 못한 자들의 권능이자 권리였다.

16562839833598.jpg“그런가.”

니힐은 불쾌해하면서도 수긍했다. 그건 니힐이 무덤에 떨어진 직후 망자의 왕들을 모조리 도륙한 것과 같은 맥락의 이야기였다. 니힐 역시 복수를 바라던, 돌려받을 빚이 있던 자들의 왕이었다. 그 권한으로 왕들을 지배했던 니힐은 자신과 똑같은 권한을 가진 레나를 마지못해 인정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망자들을 굴복시킬 권한이지 같은 반열에 선 자신을 속박할 권리는 아니었다. 니힐은 눈을 가늘게 뜨고 도무지 끊기지 않는 백합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곧 스스로 해답을 찾았다.

16562839833598.jpg“……내게도 받을 게 있는 자들이군.”

니힐은 자신에 의해 희생된 자들도 여기 있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 니힐도 그들 앞에선 무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니힐은 순백의 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이제라도 지배의 권능을 풀고 밖으로 나가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몸을 묶은 백합이 일말의 움직임도 허락하지 않았다. 완전히 갇힌 걸 깨달은 니힐은 돌연 눈을 치뜨며 속삭였다.

16562839833598.jpg“하지만 네게 빚진 건 없다.”

니힐이 레나를 노려보는 순간 업화와 참격이 함께 일어났다. 참격에 감긴 화염이 불비가 되어 사정없이 쏟아졌다. 용서받지 못한 자들에겐 손댈 수 없으니 그들을 이끄는 레나 루벨을 죽여버릴 심산이었다. 그런데 레나에게 공격이 닿기 전, 니힐의 지긋지긋한 반쪽이 끼어들어 앞을 막았다. 니힐은 레지나를 보고 으득 이를 물었다. 그러곤 모든 걸 태우고 잘라낼 기세로 권능을 퍼부었다. 그런데 휘몰아치는 화염 속에서 니힐은 레지나와 눈이 마주쳤다.

16562839833598.jpg‘웃어?’

뜻밖에도 레지나는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니힐은 울컥해서 남은 힘을 모조리 짜냈다. 쾅! 쾅! 콰앙! 세상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경악스러운 권능에 레나는 숨을 쉴 수 없었고 레지나도 점차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니힐은 레지나가 이대로 사라지길 기대했다. 그런데 레지나가 오히려 공격을 견디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니힐은 접근을 거부하며 더 거칠게 힘을 쏟아냈지만 레지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다가왔다.

16562839833598.jpg‘왜 부서지지 않지?’

니힐은 이를 악물었다. 레나 루벨처럼 레지나 역시 니힐에게 받을 것이 없다. 그렇다면 권능이 통할 텐데, 이 공간의 가호를 받는다 해도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텐데, 왜 계속 움직이는 거지? 초조해하던 니힐은 불현듯 심장의 격통을 느꼈다. 권능을 과도하게 사용한 대가였다. 니힐이 신음을 토하는 사이 불길이 약해졌고, 그 틈에 지척까지 다가온 레지나가 니힐의 어깨를 붙잡았다.

16562839833617.jpg“이제 그만하자.”

16562839833598.jpg“치워라.”

16562839833617.jpg“기억해?”

으르렁대는 니힐에게 레지나가 속삭였다.

16562839833617.jpg“차라리 꽃을 바치겠습니다.”

익숙한 시구에 뒤편에서 엎드리고 있던 레나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내리 싸늘하던 니힐의 눈빛도 일순간 흔들렸다. 그리고 니힐은 뒤늦게 깨달았다. 레지나가 웃는 게 아니라 울고 있다는 걸, 열기로 눈물이 증발해 그 일그러짐을 웃음으로 착각했다는 걸. 레지나가 소리 없이 울며 다시 말했다.

16562839833617.jpg“기억한다면 이제 그만해. 더 이상 날 부정하지 마.”

16562839833598.jpg“집어치워!”

니힐이 일갈하며 참격을 날렸다. 날카로운 공기가 결국 레지나를 무너트렸다. 심장이 혹사당한 니힐도 결국 왈칵 피를 토했다. 겨우 레지나를 쓰러트렸지만 레지나는 바닥에 거꾸러진 후에도 니힐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에 니힐이 이를 악물며 레나에게 말했다.

16562839833598.jpg“심장을 가져가라.”

그것은 패배 선언이었다.

16562839833598.jpg“더 시간 끌 필요 없다. 네 승리다.”

끝을 예감한 니힐이 지난 한 세기 동안 악착같이 버틴 것이 무색하게 말했다. 니힐은 마지막까지 왕 다운 최후를 선택한 것처럼 보였다. 한편으로는 심장을 내주더라도 레지나를 받아들이진 않겠다고 주장하는 듯했다. 그 건조한 태도에 레나도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마른 입술로 속삭였다.

16562839833591.jpg“……차라리 꽃을 바치겠습니다, 너희도 그 시를 알아?”

레나의 물음에 니힐과 레지나의 표정이 각기 다른 이유로 굳었다. 그들의 침묵은 명백한 긍정이었다. 레나는 짧게 탄식하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열기를 견디느라 잔뜩 쉰 목소리로 그 시의 첫 구절을 읊조렸다.

16562839833591.jpg“사는 동안 무수히도 많은 금이 생겼습니다…….”

간만에 듣는, 하지만 단 한 번도 잊어본 적 없는 시 앞에서 니힐과 레지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사는 동안 무수히도 많은 금이 생겼습니다. 마음의 잔금이 햇살에 찔린 물결만큼 많지만 상처 입었다는 이유로 망가지진 않으려 합니다. 나를 강하게 하는 것도 약하게 하는 것도 당신이 아닌 내 자신임을 알기에 그럼에도 나를 미워하는 당신에겐 차라리 꽃을 바치겠습니다. 그 시는 니힐이 레지나를 잘라낸 이유였다. 레지나는 동생이 쓴 시를 좋아했지만, 동시에 상처 입었다는 이유로 망가지고 싶었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을 갈가리 찢고 싶었다. 그래서 레지나는 그 시를 간직한 마음을 잘라내고 니힐이 되었다.

16562839833591.jpg“그래서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레나가 레지나를 매몰차게 거부하던 니힐에게 물었다. 레나는 그들의 침묵으로 많은 것을 이해했다. 레지나의 마음도, 니힐에게 해야 하는 말도,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던 시와 시인에 대해서도. 머릿속이 어지럽고 온몸이 아팠지만, 레나는 애써 견디며 몸을 바르게 세웠다.

16562839833591.jpg“어차피 망가졌으니까, 그 후 저지른 일을 레지나의 마음으로는 감당할 수 없으니까.”

16562839833598.jpg“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

레나의 탄식 같은 속삭임에 니힐이 날카롭게 반응했다. 힘겹게 걸어간 레나는 니힐의 지척에서 몸을 숙였다.

16562839833591.jpg“버림받았다고 반드시 망가져야 하는 건 아니야.”

레나의 손길이 닿자 레지나는 눈을 감았다. 힘겹게 견디던 레지나는 빛으로 흩어졌고, 그가 있던 자리엔 새하얀 꽃 한 줌이 남았다.

16562839833591.jpg“망가졌다고 영원히 그 상태로 머물러야 하는 건 더더욱 아니고.”

16562839833598.jpg“멈춰라.”

니힐이 레나의 의도를 깨달은 듯 이를 악물고 위협했다. 하지만 레나는 물러나지 않고 흩어진 들꽃을 조심히 받쳐 들었다.

16562839833591.jpg“아무도 네게 꽃을 준 적 없다면 내가 바칠게.”

16562839833598.jpg“치워!”

니힐의 격분에도 레나는 물러나지 않았다. 니힐은 레나가 들고 오는 것을 혐오스럽게 바라보다가 자신의 가슴을 거칠게 긁었다. 차라리 심장을 뜯어 자살하려는 작정이었다. 하지만 백합들이 그의 행동을 가로막았다.

16562839833598.jpg“이익……!”

16562839833591.jpg“거부하지 마. 마음을 돌려받는 것뿐이야.”

니힐이 몸부림쳤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황제의 품격을 지키던 니힐이 궁지에 몰린 짐승처럼 발버둥 쳤다. 레나는 손을 뻗어 피 투성이인 니힐의 입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그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낸 후, 손에 든 수수한 들꽃을 니힐의 귓가에 꽂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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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로써 니힐과 레지나는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과 그를 위한 헌화로 다시 만났다. 오래전 갈라졌던 그들의 재회가 순백색 빛을 일으켰다. 그 눈부신 빛 속에서, 니힐의 비명이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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