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체크메이트2022.02.28.
황궁으로 돌아온 이우라는 곧장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귀족들, 성직자들, 기사들, 관료와 궁인들까지 너나 할 것 없이 몰려와 이우라에게 영문을 물었다. 이제 균열이 사라진 게 맞는지, 망자들은 모두 떠났는지, 더는 위험하지 않은지. 그들의 절박한 아우성에 이우라는 대답했다. 싸움은 끝났으며, 균열도 망자도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북부공의 대답에 사람들이 함성을 터트렸다. 죽음과 멸망의 문턱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자들은 환호하고 울었다. 서로 얼싸안는 이들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을 헤치고 한 아이가 이우라를 불러 세웠다. 아저씨! 그 높은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이우라가 느낀 건 두려움이었다. 아가씨는요? 하녀복을 입은 여자아이가 들뜬 얼굴로 물었다. 그 옆에 선 소년 사제도 비슷한 눈빛으로 이우라를 바라보았다. 아저씨? 이우라의 침묵에 어린 하녀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 무구한 얼굴에 불안함이 번진 건, 또 그것이 옆에 선 소년에게 전염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우리 아가씨 어디 있어요? 린 씨는요? 왜 말을 안 해요, 네? 연이은 물음에 이우라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의 대답은 아이들을 나락으로 떨어트렸다. 기뻐하는 사람들 속에서 두 아이는 그럴 리 없다는 듯, 믿을 수 없다는 듯 배신당한 얼굴로 이우라를 바라보았다. 재미없어요, 장난치지 말아요. 어린 하녀는 그렇게 신경질을 내더니 끝내 침묵하는 이우라를 밀치며 무작정 내달렸다. 직접 보기 전까지는 믿지 않겠다는 투였다. 대책 없이 달려가는 아이를 이우라가 붙잡았다. 아이가 놓으라며 소리쳤다. 자신을 들어 올린 팔을 뿌리치려고 몸부림쳤다. 악을 썼다. 화를 냈다.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에 멍하니 서 있던 소년의 눈에도 차츰 눈물이 맺혔다. 비틀대던 소년은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곤 야속하게 밝은, 이제 아무 상처도 없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찬바람이 밀려와 시큰한 코끝을 스쳤다. 그 사소한 감각이 이게 꿈이 아님을 깨닫게 했다. 소년은 마음이 무너지는 것을 느끼며 되뇌었다. 금방 온다며, 이따 보자며. 누나는 또 거짓말을 했다. 또 나만 두고 가버렸다. 그게 너무 서럽고도 슬퍼, 소년은 결국 엎드려 울었다.
하지만 황궁에 모인 사람들은 그저 기뻐하느라 아이들의 슬픔을 깨닫지 못했다. 하늘만 그들을 동정하듯 눈물을 보태주었다. 그 가혹한 해의 첫눈이었다. . . . 그날은 세상이 무너진대도 이상하지 않은 날이었다. 증오에 찬 사람들이 까마귀로 변해 울부짖고, 떼를 지어 나온 망자들은 우는 사자처럼 거리를 어슬렁댔다. 하늘을 두 번이나 찢은 붉은 균열은 그 자체로 완전한 종말이었다. 하지만 무수한 징조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밤을 견뎌 새벽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날을 기점으로 많은 것이 변했다. 가장 어둡던 순간 피어난 백합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그 꽃을 무덤에서 한 아름 들고 온 이가 이제 세상에 없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
“왔냐?”
루비드의 무심한 물음에 사제복을 벗은 엔지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안녕하세요, 저하. 오늘은 좀 어떠세요?”
“누가 누구 안부를 물어.”
“네?”
엔지가 기껏 상냥하게 물었지만 루비드는 오히려 그 소년을 흘겨보았다. 루비드는 아직 부상이 다 낫지 않아 요양 중이었다. 엔지는 그런 루비드를 위해 말동무를 해드릴 겸 찾아왔지만, 정작 얼굴이 수척한 건 루비드보다 엔지 쪽이었다. 당연했다. 불과 며칠 전, 소년은 모든 것을 잃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리고 누나도. 그런 주제에 비실대는 몸을 이끌고 돌아다니며 애써 웃는다. 그러지 않으면 오히려 견디지 못할 것 같아서. 그 필사적인 모습에 루비드는 혀를 차더니, 시종을 불러 체스판을 가져오게 했다.
“오늘은 이긴다.”
루비드가 험악한 얼굴로 체스판을 대령하자 엔지는 웃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곤 체스판 위에 기물을 세우며 말했다.
“팔 움직이는 거, 이제 괜찮으신가봐요.”
“이깟 상처.”
아직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주제에 루비드가 허세를 부렸다. 그래서 엔지는 빙그레 웃었다.
“다행이에요, 잘린 데 없이 멀쩡하셔서.”
“잘려?”
“손가락 몇 개 잘라 먹혀도 이상하지 않은 부리였잖아요.”
실실대며 섬뜩한 말을 하는 엔지를 보며 루비드는 확신했다. 이 녀석 지금 정상이 아니구나. 루비드는 아무 말이나 하는 엔지를 노려보다가 앞에 놓인 하얀 비숍을 움직였다. 그러곤 조금 작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일부러 피하는 것 같았어.”
“네?”
“클라비스가 까마귀로 변했을 때, 일부러 급소를 피하는 것 같았다고.”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루비드는 겸연쩍은지 웅얼대며 덧붙였다. 뜻밖의 말에 엔지는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다시 옅게 웃었다. 그날 클라비스는 바라던 대로 죽음을 맞이했다. 지난 100년이 너무 길었다는 듯, 먼지가 되어 흔적도 남기지 않고 흩어졌다. 클라비스를 떠올린 엔지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지금 엔지에겐 클라비스가 남긴 것을 정리할 여력이 없었다. 지금은 그저 무너지지 않도록 견디는 게 우선이었다. 엔지는 클라비스의 이야기를 뒤로한 채, 검은 룩을 움직여 방어했다.
“이우라 전하께선 요즘 엄청 바빠 보이세요. 혼자 수습하시느라 여기저기 다니고 계세요.”
“알아, 어제 왔었어.”
“네?”
화제를 돌리던 엔지는 루비드의 대답에 오히려 놀랐다. 그러자 루비드는 뭘 그렇게 쳐다보냐는 듯 인상을 썼다.
“사이가…… 좋아지셨나 봐요……?”
“시끄러.”
엔지가 신기하다는 듯 중얼대자 루비드는 겸연쩍어하며 서둘러 퀸을 잡았다. 성급한 판단이었다. 마땅히 갈곳이 없어 한참을 고민하던 루비드는 마지못해 체스판 중간에 퀸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푸념하듯 덧붙였다.
“아직도 니힐이 없는 게 실감이 안 나.”
“다들 그럴 거예요. 단 한 번도 황제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망자도. 폭군과 망자, 이 두 가지는 제국인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다. 엔지가 자신의 검은 퀸으로 루비드의 하얀 퀸을 쓰러트렸다. 그에 루비드는 옆에 있던 나이트로 퀸을 꺾었다. 그로써 둘 다 퀸을 잃고 말았다.
“그 황제가 사과하고 떠났다니 아직도 안 믿겨. 대체 어떤 인간이었던 거야?”
루비드의 의문에 엔지는 재차 부담을 느꼈다. 아마 다들 궁금할 것이다. 니힐 그라샤가, 그리고 레지나 그라샤가 어떤 인물인지. 엔지는 자신이 해야할 일을 알지만 외면한 채 체스판 위의 폰을 전진시켰다.
“아, 오늘도 광장에 사람들이 모였대요.”
“그런것치곤 조용하네.”
“다들 대화를 원하니까요. 다행이죠, 정말.”
광장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 건 황제와 추기경이 사라진 다음 날부터였다. 본래 황궁 앞 광장은 상류층만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그곳은 변화를 바라는 모든 이에게 개방되었다. 누가 나서서 정한 것은 아니다. 다만 숨죽여 지내던 자들이 스스로 광장에 나왔고, 귀족들은 그들을 막지 않았다. 평범한 듯 놀라운 기적이었다. 그들은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고 있었다. 서로 미워해서 죽이는 건 이미 너무 많이 했다는 걸 아는 까닭이었다.
“그 꼬맹이는 아직도 그 상태냐?”
엔지의 폰이 계속 전진하는 걸 보며 루비드가 물었다. 유니의 이야기였다. 그에 엔지는 한숨을 쉬며 고개만 끄덕였다. 레나가 무덤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유니는 방에 틀어박혔다. 그 상태로 벌써 며칠째 나오지 않고 있다. 듣기로는 거의 먹지도 않는다고 하고, 몇 번 찾아간 엔지도 끝내 만나지 못했다. 언제나 기고만장하던 꼬마가 두문불출한다는 소식에 루비드의 미간이 좁아졌다.
“어떻게 다시 데려올 방법은 없나?”
루비드가 자신의 킹을 건드리며 중얼댔다. 내색은 안 했지만 루비드도 레나의 부재가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이런 식으로 영영 못 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리고 미처 상상하지 못한 현실은 그에게도 꽤 가혹했다. 망자의 왕들이 황제의 빈자리를 노리고 지상으로 돌진하던 그 날, 레나 루벨은 자신의 연인과 함께 무덤으로 들어갔다. 무덤에 속한 자가 지상에 있으면 무덤과 지상이 이어진다. 그래서 레나 루벨은 망자들의 침공을 막기 위해 무덤으로 향했다. 그로써 통로는 굳게 닫혔고, 균열을 열어 무덤을 오가던 날은 이제 과거가 되었다.
“혹시나 해서 제단으로 시험해봤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엔지가 폰을 한 칸 더 전진시키며 말했다.
“망자를 부르는 것도, 무덤으로 가는 길을 여는 것도 이제는 안 된다고 해요.”
엔지의 검은 폰은 체스판 끝까지 도달했고, 그 자리에서 퀸으로 승진했다. 그로써 루비드는 궁지에 몰렸다. 킹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루비드가 체스판을 톡톡 두드리며 중얼댔다.
“니힐이 사라져서 제단도 힘을 잃은 건가…….”
어쩌면 이게 정상이다. 망자와 전쟁을 벌이거나 무덤의 문을 여는 것보단, 그리고 죽은 왕의 권능을 사용하는 것보단 이편이 훨씬 정상이다. 그러니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의 현실이 최선이라는 걸. 게다가 레나 루벨의 상황도 그렇게 최악은 아니다. 죽은 게 아니고 연인과 함께 떠난 거다. 어쩌면 거기서 잘 지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받아들이는 수밖에……. 애써 생각하던 루비드는 어금니를 물었다. 역시 싫다. 죽자고 싸워서 이따위 결말이라니. 루비드는 이를 갈며 짜증을 내더니, 돌연 신경질을 멈추고 인상을 썼다. 무언가 발견한 표정이었다.
“……균열을 닫으려고 돌아간 거랬지.”
“네?”
“레나 루벨 말이야. 무덤에 속한 게 지상에 있으면 무덤과 지상이 이어진다고.”
“아, 네.”
루비드는 골똘히 생각하며 구석에 놓인 나이트로 손을 뻗었다. 엔지의 승진한 퀸이 본진을 노리고 있지만 개의치 않기로 했다. 때로는 공격이 가장 좋은 방어였다.
“그럼 살아 있는 게 무덤에 있으면?”
“살아 있는 거라뇨?”
“리그난 아이테르너, 그놈은 멀쩡히 살아 있는 인간이잖아. 망자가 지상에 있어서 무덤과 지상이 연결된다면, 산 사람이 무덤에 있어도 마찬가지 아니야?”
또각 소리와 함께 루비드의 나이트가 움직였다. 하지만 엔지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느라 미처 깨닫지 못했다. 체크메이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