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그들의 의지2022.03.10.
레나와 린을 태운 망자가 균열을 통과했다. 그들이 무덤으로 들어가자 균열은 거짓말처럼 빠르게 아물었다.
“아…….”
레나는 눈물 맺힌 눈으로 사라져버린 균열 너머, 무덤의 붉은 정경을 바라보았다. 이제 나갈 수 없다. 망자의 왕이 지상을 떠나자 균열은 기다렸다는 듯 자취를 지우고 지상과의 연결을 끊었다. 이미 각오한 일이지만 레나는 진정할 수 없었다. 자신을 따라온 린 때문이었다.
“괜찮아.”
레나가 황망한 얼굴로 울자 린이 위로했다.
“안 괜찮아…….”
하지만 그 말은 오히려 레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안 괜찮아. 널 여기까지 끌어들였는데 어떻게, 내가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어. 레나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린이 다정히 안아줘도 마찬가지였다.
“정신 차려라.”
함께 있던 나자가 그들을 다그쳐 깨웠다.
“망자들이 몰려온다. 우선 내 영역으로 물러나겠다.”
나자는 왕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급히 자리를 떴다. 우선 자신의 영토로 돌아가 망자들을 부활시키고 전열을 가다듬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카르도를 비롯한 망자의 왕들은 좀처럼 틈을 주지 않았다. 균열이 닫힌 것에 대한 화풀이인지, 아니면 자신들의 천적인 레나 루벨을 제거하기 위함인지 그들은 균열을 노리던 병력 그대로 나자를 공격했다. 나자의 영토로 맹렬한 침공이 쏟아졌다. 용들이 녹아 부서지길 반복하며 수세에 몰리자 레나도 어쩔 수 없이 정신을 다잡았다. 격렬한 싸움 속에서 레나와 나자는 필사적으로 린을 지켰다. 반대로 카르도는 그들의 약점인 린을 오히려 집요하게 노렸다. 그 난장판 속에서 리그난 아이테르너가 망자의 피를 뒤집어쓴 건 우연보다는 필연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때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이제 벌어질 리 없다고 생각한 균열이, 아주 작은 규모로 열린 것이다. . . .
“린 씨가 새로운 매개가 된 건 그때 알아챘어요.”
“나는 이미 알고 있었지.”
레나의 설명을 끊고 루비드가 의기양양하게 끼어들었다. 그는 칭송을 바라는 눈으로 거만하게 레나를 쳐다봤고, 레나는 빙긋 웃으며 유니에게 말했다.
“저희뿐만이 아니라 아버지나 다른 망자의 왕들도 알게 됐고요.”
“앗, 엄청 위험했겠네요.”
“아무래도 그랬죠.”
“야, 내 말 무시하냐?”
대놓고 무시당한 루비드가 험악하게 쏘아봤지만 레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 . . 레나와 나자는 왕들의 침공을 가까스로 막아냈다. 하지만 그들에겐 숨을 돌릴 겨를조차 없었다.
“곧 다시 올 거다.”
“아마 린 씨를 노리겠죠.”
“온 세상이 너희를 갈라놓으려고 하는군.”
나자의 뼈 있는 한마디에 레나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 모습을 본 나자가 무심히 덧붙였다.
“여기까지 왔으면서 쉽게 져주지 마라.”
나자의 격려 아닌 격려에 레나는 그만 눈물을 닦았다. 린이 여기까지 마음을 쏟아줬는데 이래서는 면목이 없다. 정신을 차린 레나는 나자와 함께 왕들을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레지나와 같은 방법을 쓰는 거예요.”
“왕들의 심장을 강탈하자는 건가?”
“네, 그들을 약화시키고 권능도 빼앗으면 판도를 뒤집을 수 있어요. 아버지 이외의 다른 왕들은 이름이 밝혀져서 숨지도 못해요.”
셋이 뭉쳐서 덤벼든다면 이쪽에선 하나씩 처리해주면 될 일. 레지나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히엠스 그라샤와 프리무스의 심장을 차례로 빼앗으면, 그들의 힘을 절반쯤 빼앗아 올 수 있다. 그리고 딱 그만큼 나자가 강해지고 다른 왕들이 약해진다면 이 열세도 뒤집을 수 있다. 그렇게 판단한 레나와 나자는 린을 성에 남겨두고 속전속결 히엠스 그라샤의 영토로 향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불덩이가 날아다녀야 하는 그의 영토가 고요했다. 군데군데 일그러진 지형은 이미 무언가가 휩쓸어버린 형국이었다.
“내분이라도 일어난 걸까요?”
레나가 의아해하며 두리번대는데, 재를 옮기는 자 하나가 흔들대며 날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나자는 곧장 그것을 사로잡아 장악했다. 그리고 혈액을 교환해 그가 보고 경험한 것을 모조리 파헤쳤다. 그로써 알아낸 사실은 절망적이었다.
“네 아비가 히엠스 그라샤를 배신했다.”
“배신이요?”
“심장을 강탈하고 본체를 납치했다. 이쪽 수를 읽은 모양이다.”
약삭빠른 사냥꾼이 한 발 먼저 움직였다. 카르도가 선수 친 것을 알게 된 레나는 퍼뜩 놀라서 중얼댔다.
“그럼 사자를 가둔 왕은?”
레나와 나자는 곧장 사자 왕의 영토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의 광경도 히엠스 그라샤의 영토와 똑같았다. 파괴의 흔적이 가득한 땅과 텅 빈 성. 카르도는 과감히 동맹을 처분하고 힘을 독점했다. 그로써 두 개의 권능을 손에 넣은 그가 다음으로 할 일은…….
“돌아가야 해요!”
레나는 다급히 소리쳤다. 나자도 이미 망자를 불러 그 위로 뛰어오르고 있었다. 두 왕의 심장까지 손에 넣은 지금, 카르도에게 남은 숙제는 하나뿐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레나와 나자는 곧장 린이 있는 성으로 돌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그 성은 이미 카르도의 망자들에게 포위되어 공격받고 있었다. 카르도의 망자들이 나자의 망자들을 짓밟고 그의 성에 도달하기 직전, 레나가 권능을 일으켜 카르도의 망자들을 침묵시켰다. 그로써 잠시 정적이 흘렀지만, 그 또한 오래가지 않았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구나.
나자의 성을 에워싼 망자 가운데서 형상 하나가 솟구쳤다. 카르도 루벨이었다.
―혹시나 해서 기다렸는데, 너도 내 진짜 이름은 모르는 모양이구나.
“아버지…….”
레나는 예전처럼 자상하게 말하는 카르도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카르도는 기뻐 보였다. 자신을 궁지로 몰던 딸에게 드디어 반격할 수 있어서 만족하는 투였다. 게다가 동부공만 손에 넣으면 지상으로 돌아가 자신을 재판한 자들에게 복수할 수 있다. 그리고 니힐의 빈자리를 차지하고 제국의 주인이 될 수도 있었다. 카르도는 새롭게 펼쳐진 기회에 열광했고, 레나는 그 모습에 현기증을 느꼈다. 레나를 지탱하는 용서 받지 못한 자들은 잊힌 이름과 존재를 찾고자 하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의 아버지는 이름도 정체도 숨긴 채 그저 더 높은 곳만 노리고 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어그러트리며. 이 간극이 레나를 숨 막히게 만들었다.
―그렇게 벌레 보듯 하지 말거라. 네가 거기까지 도달한 것도 결국 나와 같은 인간이기 때문이 아니냐. 나도 너처럼 포기하거나 역경에 지지 않고 끝까지 싸웠을 뿐이다.
카르도가 손을 뻗으며 궤변을 늘어놓았다.
―우리가 그럴 수 있었던 건 다른 인간보다 우월하고 강하기 때문이지. 나는 날 닮은 네가 정말 자랑스럽다.
듣다 못한 레나가 이를 악물며 채찍을 휘둘렀다. 카르도의 형상이 진흙처럼 무너지자, 그는 허물어지는 입술로 빙그레 미소 지으며 중얼댔다.
―나자 아이테르너.
그 이름이 열쇠가 되어 나자의 성문을 열었다. 겹겹이 서 있던 성벽이 내려앉으며 한 인물이 노출되었다. 린이었다. 카르도의 망자들이 린을 향해 달려들었다. 지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 그를 통해 밖으로 나가 다시 한번 영광을 구가할 생각이었다. 레나와 나자는 그것을 막기 위해 내달렸다. 하지만 린은 너무 멀었다. 그에 반해 카르도의 망자들은 이미 그의 지척에 있었고, 카르도 루벨의 악랄한 의지는 레나의 백합으로도 멈춰지지 않았다. 안 돼, 안 돼. 소름 끼치는 위기 앞에서 레나의 의식이 확장되었다. 그럼에도 이 간극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손이 닿지 않는다. 린의 목을 잡아채려는 카르도 루벨은 한참이나 앞서 있는데. 구할 수 없어. 닿지 않아. 레나는 멈춘 것 같은 시간 속에서 모든 가능성을 펼쳐놓고 절망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연이은 실패는 더 근본적인 좌절을 불러왔다. 이번을 넘긴다 해도 카르도의 공격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아마 더 진화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우리의 숨통을 조일 것이다. 숨을 곳도 도망칠 곳도 없다. 상대의 본체에 도달할 방법도 없다. 린을 여기까지 끌어들여서 결국 이런 결말이라니. 너마저 위험하게 만드는 게 내가 사랑한 결실이라니. 레나는 아득히 괴로워하는 순간, 어딘선가 서늘한 냉기가 쏟아졌다. 이어 몰아친 눈보라에 앞으로 달리던 레나의 몸이 뒤로 밀렸다. 레나만이 아니었다. 나자도 망자들도 냉기에 휩쓸려 한참이나 밀려났다.
‘눈……?’
나자는 반신반의하며 흩날리는 눈발을 바라보았다. 눈이라니, 무덤엔 이런 권능도 계절도 없다. 나자는 이게 카르도의 새로운 힘일까 싶어 이를 악물고 린을 찾았다. 그런데 나자의, 그리고 레나의 눈에 뜻밖의 광경이 비쳤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눈보라 가운데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청년과 중년 그사이에 속한, 선이 굵은 미남이었다.
그 남자가 린과 카르도의 사이를 막아선 채 혀를 찼다.
“자식들에게 본이 되기는커녕 죽어서도 걸림돌 노릇을 하다니, 정녕 염치없는 작자로다.”
남자의 훈계에 레나는 얼이 빠졌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 말투가 어째 익숙했다. 게다가 저 남자는 레나처럼 남부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누구지?’
레나가 반신반의할 때였다. 눈보라를 헤치고 다가온 나자가 뜻밖의 말을 중얼댔다.
“남부공이다.”
. . .
“영감님이요?”
유니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엔지와 루비드도 마찬가지였다.
“영감보다는 아저씨에 가까운 모습이었어요.”
레나의 천연덕스러운 설명에 유니는 턱까지 툭 떨어트렸다.
“여, 영감님이, 남부공 저하가 망자가 됐다고요?”
“남부공 저하는 악당도 희생자도 아니잖아…….”
아이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한 얼굴로 중얼댔다. 그에 레나는 아까 그랬던 것처럼 짙게 미소 지었다. . . . 잿빛 머리카락의 미남이 팔을 뿌리치자 눈보라가 일어났다. 그에 린을 거의 사로잡았던 카르도의 분신은 멀찍이 밀려나고 말았다. 다시 팔을 뻗어도 소용없었다. 가만히 서서 버티는 것도 버거운데 몸이 얼어붙으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남부공……!
결정적인 순간에 방해받은 카르도가 성을 냈다. 그에 남부공 빌 알레스가 혀를 차며 대꾸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짐승이라 하고 싶지만 짐승도 제 자식은 예뻐하니 그 비유는 짐승에게도 억울할 터.”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온화했으나 쏟아지는 냉기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차가운 기류가 카르도의 망자들을 하나씩 얼려 깨트렸다.
“짐승은커녕 오물보다 못한 자여, 가서 그대보다 덜 추한 것이 세상에 있기는 한지 아침저녁으로 숙고하게.”
“소용없다, 어차피 나는……!”
“반쪽짜리 심장 두 개를 가진 겁쟁이지. 과욕에 동맹마저 집어삼킨.”
남부공의 덤덤한 대답에 발악하던 카르도의 말문이 막혔다.
“그대야말로 소용없다. 직접 나설 용기도 없고, 이제 와 다른 왕들에게 심장을 돌려주기에도 늦었으니. 그나마 머리는 잘 굴러가니 무슨 뜻인지 알겠지.”
카르도는 나자에게 히엠스와 프리무스의 힘이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해 그들의 심장을 먼저 강탈했다. 그들의 권능을 손에 넣으면 혼자서도 나자의 성을 정복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 시도는 거의 성공했지만, 남부공이 등장하며 판도는 완전히 뒤집혔다. 본체를 숨긴 채, 다른 왕들의 반쪽짜리 권능만으로 남부공과 나자를 한 번에 상대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이미 원한을 산 왕들에게 심장을 돌려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제 무덤을 파고 누워버린 카르도는 할 말을 잃고 이만 부득 갈았다.
“알아들었으면 꺼지게.”
남부공이 그 꼴을 비웃으며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살아생전 업화를 일으키던 그의 손짓이 이제는 냉기를 불러와 카르도의 분신을 얼려버렸다. 새하얗게 내린 서리를 따라 고요함이 퍼졌다. 레나는 상황이 정리되자마자 린에게 달려가 그를 끌어안았다. 그러곤 그의 상태를 살피고 기분을 물어보고 다행이라는 말을 연거푸 반복한 후, 조금 늦은 감을 느끼며 남부공을 돌아보았다.
“저하께선 어떻게…….”
“퍽도 일찍 물어보는군.”
남부공이 불쾌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얼굴은 꽤 젊어졌지만 그의 꼬장꼬장한 성격은 노년 그대로였다. 레나가 그 모습을 어색하게 바라보자, 남부공은 금새 누그러져 대답했다.
“보는 바와 같이 무덤에 머물게 되었네. 나와 같은 자들을 대표하여.”
“하지만 저하께서는 죄를 짓지 않으셨어요.”
“그건 경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게 무슨…….”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레나가 갸웃대자, 남부공이 있지도 않은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세상에 문턱이 생길 정도로 죄인이 충분하니 한 맺힌 자들이 덩달아 가라앉고, 한 맺힌 자들이 가득하니 지켜보던 자들에게도 의지가 생겼다.”
짓밟은 자가 먼저 있었고, 짓밟힌 자가 말하기 시작할 때 듣는 자가 나타났다.
“그대들을 돕고자 하는 의지가, 경이 일깨운 우리의 의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