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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화. 진짜 이름 (197/208)

197화. 진짜 이름2022.03.21.

별빛이었다. 그리고 달빛이었다.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옥탑에 갇혔을 때, 엔지가 시를 읽기 위해 의지한 건 하늘에서 내리는 그 희미한 빛이다. 무한하지만 깨닫기 어려운 별빛은 가장 어두운 곳에서 진리를 속삭였다. 연약하던 소년을 제련한 것도 바로 그 별빛이었다. 그리고 옥탑에 갇힌 지 1년도 더 지난 지금, 엔지는 그때로 돌아간 듯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래서 쏟아지는 별빛 아래서 귀를 기울였다. 레나가 속삭이고 간 행복하다는 말이 믿기 어려운 문장이 되어 소년을 부추겼다. 버림받고 희생당한 누나. 사랑하던 시인에게도 배신당한 레나 루벨. 그럼에도 행복하다고 고백하는 그를 보며 소년은 드디어 깨달았다. 자신이 무엇을 써야 하는지, 새하얀 추기경이 남긴 이야기에 무엇을 담아야 하는지. 그걸 비로소 알게 된 소년은 마른 풀이 단비를 마시듯, 쏟아지는 별빛을 기쁘게 끌어안았다. *** 엔지는 황궁으로 돌아가자마자 원고를 손보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복귀한 엔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황궁에 서식하는 사막같이 건조한 남자와 독대하는 일이었다.

16562842383309.jpg“동부행은 어땠지?”

16562842383315.jpg“아, 잘 다녀왔습니다, 저하.”

엔지는 앞에 놓인 찻잔엔 손도 대지 못한 채 한껏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한 달 전 동부로 떠났던 엔지는 바로 어제 황궁으로 돌아왔다. 동부에 머물던 일주일 외엔 계속 달리기만 한 고된 여정이었다. 그럼에도 황궁에 오자마자 원고를 들여다볼 만큼 의욕이 가득했는데, 엔지가 책상에 앉기도 전에 이우라로부터 호출이 왔다. 잠깐 자신의 방으로 오라는, 꽤 이례적인 명령이었다.

16562842383309.jpg“동부공과 레나 루벨을 만났다고 들었다.”

16562842383315.jpg“네, 잘 지내는 걸 보고 왔습니다.”

16562842383309.jpg“동부에 계속 머물 생각이라지.”

16562842383315.jpg“네, 그렇습니다…….”

엔지는 최대한 공손하게 대답하며 이우라의 눈치를 살폈다. 최근 플레누스 형제는 사이가 별로 나쁘지 않다. 하하호호 웃으며 손잡고 다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의사소통은 가능해졌다. 그러니 이번 동부행에 대해서도 루비드가 잘 설명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우라는 엔지를 굳이 따로 불렀고, 엔지는 영문을 알 수 없어 내심 불안했다. 그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이우라가 무심히 운을 뗐다.

16562842383309.jpg“레나 루벨이 함구시키지는 않은 모양이군. 여태 숨어지내더니 무슨 바람이지?”

질문인지 소감인지 모를 말에 엔지가 소심하게 대꾸했다.

16562842383315.jpg“그게, 저희가 알면 저하도 곧 눈치채실 거라고 그냥 솔직하게 말하라고 했습니다.”

16562842383309.jpg“내가 어떻게 나올 줄 알고.”

16562842383315.jpg“누나 말로는 굳이 변수를 만들진 않으실 거라고…….”

냉랭히 되묻던 이우라의 눈이 묘하게 가늘어졌다. 언뜻 노려보는 것 같지만, 조금만 관대해지면 웃음 비슷한 것으로도 여겨줄 수 있는 눈 모양이었다. 레나는 정확히 예측했다. 이우라는 이제야 나타난 레나와 동부공을 수도로 불러들일 생각이 없었다. 니힐과 클라비스의 몰락 이후 제국은 많은 변화를 거쳤다. 황궁으로 집중된 부와 권력이 사방으로 쪼개지고, 흡수됐던 나라들이 제 이름을 되찾고, 노예처럼 살던 자들은 차츰 자유를 회복했다. 물론 그러기 위해 이우라는 매 순간 곡예 하듯 파고를 넘어야 했다. 본디 권력은 서로 달라붙는 성미가 있어서 원래대로라면 이우라가 황실의 주인이 되거나, 그가 거부하면 다른 유력 귀족에게 기회가 돌아가는 게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하지만 그라샤의 황실은 두 가지 이유로 유지되지 않았다. 하나는 폭군의 위압에 지치다 못해 질려버린 이우라가 그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광장으로 모여든 민중의 시선 때문이었다. 제국의 마지막 날, 제도 곳곳에 피어난 백합은 사람들을 일깨웠다. 그들을 움직이게 하고, 또 인내하게 했다. 본디 민중이 모이면 폭동으로 이어지는 것이 절차인데, 그날 광장에 모인 이들은 함부로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과거 무고하게 처형된 왕이 무엇이 되어 돌아왔는지 아는 까닭이었다. 그래서 그들 다만 고요하게 존재를 주장했고, 이우라를 비롯한 귀족들에게 시간을 주었다. 우리가 너희를 죽이기 전에, 또 미움이 깊어져 한없이 싸우기 전에 세상을 고치라고. 이우라는 그들의 명령을 준엄히 받아들여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하나씩 해나갔다. 그때 이우라가 레나를 종종 떠올린 건 사실이다. 황제를 끌어내린 당사자가 있으면 산재한 문제를 보다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초창기의 일이고, 지금은 이우라의 노력이 조금씩 결실을 맺고 있다.

16562842383309.jpg“그래, 지금은 나타나봤자 짐이 될 뿐이지.”

제국이 겨우 해체되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레나 루벨이 등장하면 또 어떤 역동이 일어날지 모를 일. 그러니 오겠다고 해도 말려야 할 판이긴 한데, 그걸 레나 쪽에서 냉큼 먼저 말하니 이우라는 기분이 조금 묘했다.

16562842383315.jpg“그래서 누나도 그라샤에는 더 간섭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16562842383309.jpg“데카 모닐과는 내통하면서?”

이우라가 다소 심술궂게 되물었다. 데카가 자기 몰래 린을 도운 일을 꼬집는 거였다.

16562842383315.jpg“아, 아무래도 데카 경은 동부공 저하 쪽 사람이니까요.”

엔지가 놀라서 얼른 변호했지만, 정작 이우라는 별로 상관없다는 투였다. 원래 나자를 섬겼던 데카는 그의 아들에게도 기꺼이 충성했다. 린 역시 그를 신뢰했고, 그래서 레나를 위해 거처를 마련할 때 가장 먼저 그에게 연락했다. 휘를 비롯한 사람들의 위치를 린에게 알려준 것도 데카였다. 그리고 지금은 린의 신혼까지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으니, 데카를 동부의 섭정으로 지지했던 이우라는 뒤통수를 맞은 셈이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이우라는 평소처럼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고, 엔지는 괜히 긴장해서 아까부터 노려보던 찻잔을 들어올렸다. 아직 뜨거운 찻잔을 겨우 입술에 댔을 때, 이우라가 기습처럼 물었다.

16562842383309.jpg“유니도 그쪽에 쭉 머물기로 했고.”

16562842383315.jpg“읍!”

엔지는 그만 혀를 데이고 말았다. 이우라 플레누스의 말대로 유니는 동부에 남았다. 보름 전, 드디어 누나와 재회한 엔지는 그들이 사는 곳에서 일주일간 머물렀다. 꿈같이 짧은 시간이었다. 엔지는 누나와 더 이야기하고 싶고, 린과도 더 친해지고 싶었다. 하지만 엔지나 루비드는 황궁에서 하는 일이 나름 많았다. 왕자인 루비드는 말할 것도 없고, 엔지는 당장 원고를 손보고 싶어서 조바심이 난 상태였다. 그래서 다음을 기약하며 일주일 만에 황궁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는데, 유니가 대뜸 선언했다.

16562842411182.jpg―나 여기 남기로 했어.

유니는 그렇게 말하며 레나의 옆에 당당히 섰다. 그러더니 엔지나 루비드가 반대할 겨를도 없이 냉큼 선수를 쳤다.

16562842411182.jpg―허락은 받았어.

16562842383315.jpg―누, 누구한테?

16562842411182.jpg―당연히 아가씨한테지.

엔지가 레나를 돌아보자 레나는 빙긋 웃으며 끄덕였다. 그 즉흥적인 결정에 엔지가 당황하는데, 휘와 함께 있던 진이 물었다.

16562842438681.jpg―북부공이 보살펴 주는데 아깝지 않냐고 어머니가 묻습니다!

16562842411182.jpg―응, 하나도 안 아까워!

유니는 냉큼 대답하며 활짝 웃었다. 레나가 사라진 후로는 잘 볼 수 없던, 무척이나 밝은 미소였다. 결국 유니는 그렇게 레나 곁에 남았다. 황궁에는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이. 그 일을 회상하던 엔지는 이우라의 표정이 어쩐지 떨떠름해졌다고 느꼈다. 그래서 저도 몰래 무심코 묻고 말았다.

16562842383315.jpg“혹시 섭섭하세요?”

그 순간 이우라의 눈빛이 차가워졌고, 엔지는 찔끔해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곤 속으로 소리쳤다.

16562842383315.jpg‘섭섭한 거 맞나 봐!’

루비드와 은근히 겹치는 이우라의 표정에 엔지는 진심으로 놀랐다. 저런 삐진 표정은 루비드만 가능한 줄 알았는데, 이우라도 상당한 수준으로 소화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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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지는 이우라가 유니를 아끼는 걸 새삼 실감하다가, 조금 더 용기 내 덧붙였다.

16562842383315.jpg“그, 그래도 가끔 놀러 오지 않을까요? 여기 놓고 간 짐도 많고, 음……. 저하도 여기 계시니까요. 아마 조만간 편지할 거예요.”

엔지는 위로 비슷한 말을 하며 스스로에게 어안이 벙벙해졌다. 엔지에게 북부의 왕은 더없이 어려운 상대였다. 루비드의 형인 것과 유니와 친근한 것을 참작해도 엔지는 좀처럼 그를 편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우라는 아버지가 배신한 상대이자 아버지를 내친 사람이니까. 그런 이유로 엔지는 이우라의 비호를 받으면서도 여전히 그를 어려워했고, 이우라 역시 그걸 알고 엔지를 따로 부르거나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다가 천하의 북부공이 섭섭한 기색을 내비쳐 위로하는 지경에 이르렀나. 엔지가 속으로 유니를 탓하는 사이, 이우라는 잠깐 머금었던 우울을 지우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16562842383309.jpg“사담이 길었군.”

사담이 길었다는 말은 본론이 따로 있다는 의미. 그래서 잠깐 편해졌던 엔지도 다시 덩달아 긴장했다.

16562842383309.jpg“네게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다.”

16562842383315.jpg“화, 확인이라니 무슨…….”

16562842383309.jpg“무덤의 상황에 대해선 들었겠지.”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엔지는 얼떨떨하게 끄덕였다.

16562842383309.jpg“카르도 루벨이 밖으로 나오려고 몸부림치고 있다지.”

16562842383315.jpg“네, 그런데 남부공 저하와 전대 동부공 저하께서 출구를 막았다고 했습니다.”

16562842383309.jpg“출구를 막았다는 게 균열이 영원히 닫혔다는 의미인가?”

그건 아니다. 엔지는 무심코 대답하려다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엔지가 대답을 미루자 이우라가 그의 말을 대신 가로챘다.

16562842383309.jpg“그건 아니겠지. 레나 루벨이 다시 밖으로 나왔으니 언제든 균열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터. 그렇다면 나자와 남부공이 출구를 막고 있다 한들 카르도 루벨은 언젠가 기회를 잡겠지.”

이우라의 냉철에 엔지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어쩌면 이건 당연한 예측이다. 또한 그라샤의 안정을 우선시하는 이우라에게 레나의 귀환은 결코 반가운 소식이 아닐 것이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험요소를 자신의 앞마당에 들이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엔지는 철렁 내려앉았던 마음을 서둘러 다잡았다. 그러곤 일전에 클라비스에게 했던 것처럼 눈썹을 곤두세우고 물었다.

16562842383315.jpg“그래서 무슨 말씀을 하려고 부르신 거죠?”

16562842383309.jpg“영구적인 평화를 위해 레나 루벨은 무덤으로 돌아가야 한다.”

엔지는 이우라를 어려워하던 것도 잊고 반박하려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우라의 말이 한발 빨랐다.

16562842383309.jpg“……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16562842383315.jpg“……네?”

16562842383309.jpg“네 누나에게 희생을 재차 요구하는 건 불합리하니까.”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을 하든가. 엔지는 안심하면서도 이우라에게 짙은 띠꺼움을 느꼈다.

16562842383309.jpg“다만 확인은 필요하다. 레나 루벨은 무덤의 교착상태가 그대로 이어질 거라고 믿는 건가?”

이우라를 불손하게 쳐다보던 엔지는 이어진 물음에 주춤하고 시선을 떨어트렸다.

16562842383315.jpg“……그건 모르겠어요.”

16562842383309.jpg“마냥 낙관하진 않겠지. 달리 말하면 언제든 싸움에 대비하고 있다는 뜻일 테고.”

이우라의 추측에 엔지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싸움에 대비하고 있다고? 하지만 누나는 지금 아이를 가졌다.

16562842383315.jpg‘아…….’

엔지는 레나가 짊어진 부담을 비로소 깨닫고 멍하니 탄식했다. 지금 균열의 위치를 아는 건 누나뿐이다. 그걸 혼자만 알고 있다는 건, 만약 문제가 생겼을 때도 혼자 해결할 각오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해결 방법은…….

16562842383315.jpg‘균열을 막고 싸우거나, 최악의 경우 무덤으로 돌아가거나…….’

엔지는 레나의 생각을 이해하고 머리가 아찔해졌다. 레나의 싸움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16562842383315.jpg“……그래서 무슨 말씀을 하려고 부르신 거죠?”

엔지는 저도 모르게 따졌다. 간신히 다시 만난 누나와 또 생이별할까 봐 예민해진 탓이었다. 한 입 거리의 소년이 각을 세웠지만 이우라는 노여워하지 않았다. 대신 엔지를 부른 진짜 이유를 비로소 꺼냈다.

16562842383309.jpg“레나 루벨을 지키고 싶다면 카르도 루벨의 진짜 이름을 알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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