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화. 엔지 루벨의 각오 (198/208)

198화. 엔지 루벨의 각오2022.03.24.

이우라가 명령했다.

16562842575307.jpg“그자의 이름을 찾아내라.”

카르도 루벨의 진짜 이름을 알아내라고.

16562842575307.jpg“할 수 있겠지. 왕들의 이름도 찾아냈으니.”

다름 아닌, 그의 아들인 엔지 루벨에게. 갑작스런 요구에 엔지는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16562842575317.jpg“제가 이제 와서 어떻게…….”

엔지가 주저하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곤 자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댔다.

16562842575317.jpg“만약 방법이 있다면 누나가 이미 알아냈을 거예요.”

16562842575307.jpg“레나 루벨은 제국 밖에 있었다.”

16562842575317.jpg“그, 그건 그렇지만 누나가 손을 놓고 있었을 리는…….”

엔지는 저도 모르게 우겼다. 누나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아버지처럼, 아니. 아버지보다 더. 그러니 가능성이 있는 시도라면 진즉에 다 해보지 않았을까? 엔지는 차라리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렇게 미루고 싶었다. 하지만 이우라는 소년의 낙관과 방관을 허락하지 않았다.

16562842575307.jpg“물론 손을 놓고 있진 않았겠지. 다만 이것과 다른 방법을 고려했을 뿐.”

16562842575317.jpg“다른 방법이요?”

16562842575307.jpg“가령 카르도 루벨이 돌아오면 혼자 싸울 작정이라든가.”

이우라는 그렇게 말하며 1년 전, 자신이 레나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16562842575307.jpg―정녕 황제와 싸울 생각이라면 나도 돕겠다.

16562842575307.jpg―죽은 자들에게서 벗어날 길이 있다면 나도 그쪽을 택하겠다.

그때, 아직 니힐이 건재할 때 이우라는 레나에게 협력을 약속했다. 하지만 레나는 말로만 감사를 표할 뿐 이후 이우라를 제대로 써먹지 않았다. 그래서 결전의 순간 이우라는 오히려 나자와 협력했다. 처음엔 왜 레나가 자신을 이용하지 않는지 의아했다. 하지만 그가 카르도를 법정에 세우고 재판을 주도하는 것을 보며 곧 납득했다. 레나 루벨은 혼자 싸우는 것에 익숙했다. 그래서 모든 과정을 미리 계산했고, 그래서 계획 밖의 누군가를 자신의 전장에 끼워줄 여유도 없었다. 게다가 레나는 실제로 모든 걸 혼자 해냈다. 카르도 루벨을 재판에 세우는 것도, 니힐과 담판을 짓는 것도.

16562842575307.jpg“만약 싸우게 되면 그 역시 자기 몫으로 받아들일 거다. 네 누나라면.”

이우라의 장담에 엔지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누나가 또 싸우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이까지 생겼는데 그건 너무 가혹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우라의 제안에 선뜻 응하기도 어려웠다. 까닭 모를 거부감에 입술을 깨물던 엔지는 자신이 뭘 주저하는지 곧 깨달았다.

16562842575317.jpg‘아버지의 진짜 이름을 찾아내면…… 저하는 그걸로 아버지를 무너트리겠지.’

아직 무덤에 버티고 있는 아버지를. 엔지는 그게 버거웠다. 카르도 루벨이 악당인 것도 알고 여전히 야욕을 버리지 못한 것도 알지만, 그를 자기 손으로 끌어낼 각오는 아직 없었다. 설마 이 일이 자기에게 주어질 거라고는 상상도 한 적 없었다.

16562842575317.jpg“저는…….”

갈등하던 엔지는 어렵게 운을 뗐다. 가면을 쓰고 있던 아버지, 갑자기 민낯을 드러낸 아버지. 누나를 팔고 사람들을 죽이고 나를 옥탑에 가뒀던, 잔인하고 냉정한 아버지. 그럼에도 엔지는 아직 그를 사랑했다. 얇은 가면을 쓰고 있던 시절의 그는, 뒤로 저지른 숱한 죄악에도 불구하고 엔지에겐 자상하고 존경스러운 아버지였으니까. 입술을 달싹이던 엔지는 결국 이를 악물며 눈을 감았다.

16562842575317.jpg―잘 모르겠어. 내가 이렇게 지내도 괜찮은지.

16562842575317.jpg―결국 나는 아버지의 악행으로 유복해진 사람이 아닐까, 싶어서.

문득 엔지의 뇌리에 레나와 나눈 대화가 스쳤다. 그래, 이런 얘길 했었다. 아버지가 악인이라는 것에 괴로워하며, 그에게서 물려받은 것을 버리지도 온전히 끌어안지도 못해 전전긍긍하며. 그래서, 레나는 뭐라고 대답했지?

16562842610599.jpg―네 말이 맞아. 우리가 가진 건 아버지가 빼앗은 것들이야. 그걸 누가 부정할 수 있겠어.

그럼,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돼?

16562842610599.jpg―정답을 누가 알겠어. 모른다는 걸 인정하고 고민하는 수밖에.

귓전에 남은 누나의 음성에 엔지는 참았던 숨을 천천히 뱉어냈다. 아프게 깨물었던 입술도 놓아주고, 괴로움에 닫았던 눈으로 다시 이우라를 바라보았다.

16562842575317.jpg“……아버지의 재판 기록을 읽었어요.”

16562842575307.jpg“재판 기록?”

이우라의 반문에 엔지는 차분히 끄덕였다.

16562842575317.jpg“거기에 누나가 나열한 아버지의 과거가 있었어요. 저하께선 혹시 아버지를 협박했던 백작이 누군지 아시나요?”

16562842575307.jpg“그 여백작은 이미 죽었다.”

엔지의 갈등을 지켜보던 이우라는 의아함을 숨기며 대답했다. 카르도 루벨의 정적이던 그 백작은 카르도가 북부의 백작이 되고 얼마 후 사고로 죽었다. 이제 와선 그게 정말 사고였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어쨌든 이 세상에 없는 건 분명하다. 이우라의 대답에 엔지는 침착하게 고개를 저었다.

16562842575317.jpg“상관없어요. 그 사람이 누군지 이름만 알면.”

16562842575307.jpg“이름을 알아서 어쩔 셈이지?”

16562842575317.jpg“우선 공고를 내주세요. 카르도 루벨의 과거를 아는 자를 찾는다고. 포상금도 함께 걸어서요.”

16562842575307.jpg“포상금을 노린 자들이 몰려들 거다.”

16562842575317.jpg“몰려온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거예요. 카르도 루벨에 대한 정보를 이전에도 거래한 적이 있는지. 그때 그 백작의 이름을 대는 사람을 찾는 거예요.”

백작에게 아버지의 과거를 폭로한 자. 진실에 접근하려면 그자를 찾는 게 우선이다. 엔지는 그렇게 판단했고, 이우라는 잠자코 팔짱을 꼈다. 그의 생각이 과연 타당한지 고심하는 투였다. 또 한편으로는 궁금해하고 있었다. 영리하지만 무른 소년, 엔지 루벨은 카르도 루벨이나 레나 루벨을 전혀 닮지 않았다. 그래서 카르도 루벨의 진짜 이름을 찾아내라고 했을 때 엔지가 처음 보인 반응도 이우라의 예상 범위 안이었다. 아마 이 유약한 소년은 아버지를 공격하는 데 선뜻 협력하지 않을 거다. 어쨌든 한때는 멀쩡히 사이좋은 부자지간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이우라가 굳이 엔지를 부른 건 그가 루벨 가의 마지막 인물이라, 만약 못하겠다고 빼더라도 어떻게든 다그칠 작정으로 부른 거였다. 그런데 엔지는 잠시 갈등하더니 혼자 결론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우라는 자신이 미처 간파하지 못한 그 행간이 궁금해졌다.

16562842575307.jpg“무슨 심경의 변화지?”

16562842575317.jpg“네?”

16562842575307.jpg“처음엔 회피하는 것 같더니.”

정곡을 찔렸는지 엔지가 찔끔하며 눈치를 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소년은 곧 머뭇대는 기색을 지우고 입을 열었다.

16562842575317.jpg“맞아요. 처음엔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16562842575307.jpg“그런데?”

16562842575317.jpg“제 역할을 인정하기로 했어요. 누나에게만 책임을 떠넘기고 지켜볼 순 없으니까요.”

엔지는 담담히 고백하며 쓰게 웃었다. 그래, 나는 정답을 모른다. 아버지 죄업도 그에게 받은 유산도, 여전히 남아 있는 부모를 향한 애정도. 심지어 그 모든 걸 가득 끌어안은 스스로의 마음도. 그것은 하나의 단어나 문장으로 떨어지지 않고 매일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기운다. 그러니 모른다는 걸 인정하고 고민하는 수밖에 없다. 자신이 지금 해야 할 일을.

16562842575317.jpg“게다가 죽은 사람들도 이미 움직였어요. 그러니까, 이제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움직일 때라고 생각해요.”

이대로는 무덤에서 일어난 남부공 저하를 볼 낯이 없다. 이게 엔지가 고민 끝에 찾아낸 답이었다. 엔지의 대답에 이우라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카르도 루벨이 싸고돌며 기른 아들. 그리고 레나 루벨의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 이제까지 이우라에게 엔지 루벨의 존재감은 딱 그 정도였다. 조금 더하자면 루비드의 말 시중, 유니의 친구 정도. 하지만 이제는 엔지를 누군가의 무엇이 아닌 엔지 루벨 그 자체로 여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우라는 웃음 비슷한 숨소리를 내며 굳게 잠그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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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이 맞춰진 두 사람은 이름을 찾기 위해 논의를 계속했다. 그리고 한 달 후, 그들은 결국 라울이라는 이름의 남자를 찾아냈다. *** 레나는 거대한 얼음벽 앞에 서 있었다. 세상을 반으로 나눈, 광활하고 두터운 얼음벽이었다. 레나는 한눈에 다 담기지도 않는 얼음벽의 끝과 끝을 바라보다가 무심코 손을 뻗었다. 겹겹이 세워진 얼음에 손을 대는 순간, 벽 저편에서 누군가가 달려들었다. 쾅! 굉음과 함께 벽이 크게 진동했다. 쾅! 땅이 흔들릴 정도의 충격이 일었지만 저편의 그림자는 개의치 않고 사정없이 벽을 내리쳤다. 쾅쾅쾅쾅쾅! 과격한 충돌에 얼음벽이 울리며 눈 조각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러나 레나는 놀라지 않고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쩌엉! 아무리 내리쳐도 얼음벽이 깨지지 않자, 저편의 존재가 온몸으로 벽을 내리찍었다. 그로써 어른대던 그림자에 불과하던 상대의 모습이 흐릿하게나마 드러났다. 레나는 얼음벽 너머로 보이는 아버지를 향해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카르도도 레나를 봤는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16562842667211.jpg―시간은 무한하다.

16562842667211.jpg―그리고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16562842667211.jpg―기다려라. 네 명이 다하기 전에 나는 반드시 돌아갈 것이다.

카르도는 벼르듯 속삭이더니, 다시금 얼음벽을 매섭게 내리쳤다. 콰앙! 연이은 충격에 얼음벽 위로 긴 실금이 퍼졌다. 그리고 레나는 꿈에서 깼다. . . . 뒷마당에 널린 옷가지 사이로 나른한 햇살이 내리고 있었다. 레나는 하얀 천들이 봄바람에 나풀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잠기운을 천천히 떨쳤다. 린이 빨래 너는 걸 지켜보다가 깜빡 졸아버린 모양이다. 레나가 하품을 하려고 입을 가리는데, 어깨에 걸쳐져 있던 겉옷이 스르르 떨어졌다. 레나가 마루에 앉아 조는 걸 보고 린이 덮어준 옷이었다.

16562842667222.jpg“일어났어?”

막 빨래를 마친 린이 레나에게 다가왔다. 레나는 살포시 웃으며 옆자리를 내주었고, 그의 성실한 남편은 기꺼이 앉아 레나의 손을 잡았다. 그러더니 아이가 생기고 이따금 붓는 아내의 손을 차근차근 주물러 주었다. 레나는 손을 내어준 채 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러곤 아직 잠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16562842610599.jpg“꿈꿨어.”

16562842667222.jpg“무슨 꿈?”

16562842610599.jpg“균열 앞에 서는 꿈.”

마침 바람이 불어와 뒷마당을 훑었다. 줄마다 널린 옷가지가 한차례 일렁이고, 곱게 땋은 레나의 귀밑머리도 살랑대며 흔들렸다. 다정한 바람에 레나는 서글피 웃었고, 린은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16562842610599.jpg“여전히 싸우고 있나 봐. 아주 치열하게.”

레나는 느끼고 있었다. 균열 저편에서 이어지는 선대의 전쟁을. 1년 전, 무덤에서 벗어난 레나는 쫓기듯 세상으로 달려갔다. 그러곤 남부공의 조언대로 놀고 먹고 떠들며 최선을 다해 즐거운 일을 만들었다. 그리고 단 한 순간도 자신을 버린 적 없는 연인과 혼인했다. 단둘이 반지 한 쌍을 나누며 한 결혼이지만 레나는 행복했다. 사랑할 시간은 늘 부족하기에 두 사람은 지난 1년 동안 있는 힘껏 추억을 쌓았다. 이 세상에 여한이 없을 만큼. 언제든 다시 싸우러 돌아가도 괜찮을 만큼. 그런데 함께한 시간이 길어지고, 서로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오히려 마음에 미련이 차올랐다. 그래서 레나는 매일 밤, 이 평화가 내일 하루만 더 이어지길 간절히 기도해왔다.

16562842610599.jpg“아이가 태어날 때까진 별일 없어야 할 텐데.”

레나는 저도 모르게 중얼댔다. 직전의 꿈은 단순한 백일몽이 아니었다. 그건 균열 근처에 레나가 남겨둔 백합들이 전한 현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무덤의 상황이었다. 레나는 좀처럼 떨쳐지지 않는 아버지의 그림자에 숨죽여 탄식했고, 린은 그런 레나를 소중히 보듬었다.

16562842667222.jpg“괜찮을 거야.”

조심스러운 위로와 함께 린이 레나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의 입맞춤은 떨어지는 배꽃잎처럼 사려 깊게 내려와 이마에서 눈가로, 눈가에서 뺨으로 가닿았다. 이윽고 두 사람의 입술이 겹쳐지려 할 때였다.

16562842695918.jpg“저기요, 선생님들.”

불쑥 난입한 목소리에 레나는 화들짝 놀라 린을 밀었고, 안 그래도 물러나려던 린은 추진력을 얻어 마루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부부의 가상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막 나타난 유니의 시선은 차가웠다.

16562842695918.jpg“아무 데서나 그러시면 제가 엄청 곤란한데요.”

레나처럼 머리를 땋아 내린 유니가 싸늘히 식은 눈으로 질책했다.

16562842610599.jpg“와, 왔어요?”

16562842695918.jpg“네, 왔어요.”

찔끔한 레나가 민망한 기색을 숨기며 말하자, 유니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씩 웃으며 등 뒤에 감추고 있던 것을 꺼냈다.

16562842695918.jpg“황궁에서 편지가요. 이우라 아저씨가 보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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