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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화. 얼음벽 (199/208)

199화. 얼음벽2022.03.28.

갑작스러운 편지에 레나와 린은 의아해하며 봉투의 밀랍을 뜯었다. 그러자 그라샤의 높은 품격을 고스란히 간직한 편지지와, 그 편지지가 너무 과분한 용건이 드러났다.

1656284279215.jpg“레나 루벨. 균열의 위치를 밝혀라. 경이 끝내지 못한 일을 매듭짓겠다.”

이우라의 편지 첫 문장을 낭독한 레나는 어이가 없어서 중얼댔다.

1656284279215.jpg“……형만 한 아우가 없다더니, 예의 없음도 형 쪽이 한 수 위였네요.”

레나의 탄식에 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고, 유니는 반대로 고개를 저으며 덧붙였다.

16562842792163.jpg“이해하세요, 아가씨. 이 아저씨 원래 낯가림이 심해요.”

낯가림의 문제가 아니지 싶지만, 레나는 토 달지 않고 편지를 쭉 읽어내렸다. 이우라가 휘갈긴 편지엔 무덤에서 카르도 루벨과 결판을 내겠다는 포부가 담겨 있었다. 물론 레나에겐 기도 차지 않는 이야기였다.

1656284279215.jpg“권능도 없어진 와중에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요.”

16562842792172.jpg“게다가 병력도 예전 같지 않을 텐데.”

레나와 린은 회의적인 시선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그들은 이우라가 뭐라고 하든, 이 세상과 겨우 분리된 무덤을 산 자들의 사정권으로 다시 끌어들일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균열의 위치를 알려줄 생각도 당연히 없었는데, 편지 말미에 적힌 문장이 그들의 다짐을 덜컥 뒤집었다.

1656284279215.jpg“카르도 루벨의 본명을 알아냈다……?”

편지를 읽던 레나가 반신반의하며 린을 돌아보았다. 린도 꽤 놀란 표정이었다. 카르도 루벨의 본명을 알아냈다니.

1656284279215.jpg“말도 안 돼.”

레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면 레나도 진즉에 알아냈을 거다. 레나는 이미 수년 전에 카르도 루벨의 뒤를 캔 적이 있다. 돈과 시간을 잔뜩 들여 흩어진 정보를 몽땅 긁어모았다. 하지만 그중에 아버지의 본명에 대한 것은 없었다.

1656284279215.jpg“답장을 보내야겠어요.”

레나가 고심 끝에 말했다. 편지를 묶은 전서구가 동부성으로 날아간 건 그로부터 한 시간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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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우라 씨에게. 보내주신 편지는 잘 읽어보았습니다. 안부 인사도 없이 본론만 담긴 편지가 몹시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우라 씨의 취향대로 곧장 본론으로 넘어가 여쭙겠습니다. 제 아버지의 이름은 어떻게 알아내셨죠? 그리고 균열의 위치를 물어보시는 건 무덤으로 들어가 아버지와 싸우겠다는 뜻인가요? 만약 알아내신 이름이 진짜라면 저도 함께 움직이고 싶지만 그 전에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제가 확인한 바로 아버지의 본명을 아는 사람은 없어요. 서부에 있던 루벨 자작가의 성이 전소되며 그 식솔들이 대부분 사망한 것은 이우라 씨도 알고 계실 테죠. 그 성의 유일한 생존자가 라울이라는 신사인데 저 역시 아버지를 조사하다가 그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를 통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중 아버지의 본명에 대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혹여 그 신사를 통해 알아낸 이름이라면 사실 여부를 먼저 확인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문제로, 저는 당분간 움직이기가 어렵습니다. 이것도 엔지나 루비드 씨에게 들어서 아시겠지만 얼마 전 아이가 생겨서 올겨울 출산을 예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정말 무덤에 갈 생각이라면 제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거예요. 이 두 가지가 확인되면 무덤의 위치를 공유하겠습니다. 그럼 답변을 기다릴게요. 추신. 유니가 안부를 전해달라고 하네요. 요즘도 고기만 골라 먹으며 편식하냐고 묻는데, 당신 그런 사람이었나요? . . . 이우라는 레나의 악필로 채워진 편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러길 한참, 이윽고 그는 편지를 내리며 맞은편에 앉은 루비드와 엔지를 향해 물었다.

16562842792193.jpg“레나 루벨에게 아이가 생겼나?”

이우라의 물음에 루비드는 여태 몰랐냐는 표정을 지었고, 엔지는 이우라가 그걸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속으로 뜨악했다. 소식에서 소외당한 이우라가 어쩐지 침울한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더니 잠자코 책상으로 돌아가 펜을 들었다. *** 레나 루벨 경. 경이 제기한 문제들은 굳이 거론할 필요가 없는 사안이다. 우선 카르도 루벨의 본명은 라울이라는 자에게서 알아낸 것이 아니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확보한 이름은 카르도 루벨의 본명과 일치할 확률이 매우 높으며,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선 무덤에서 확인해야 한다. 그러니 앞서 전달한 요구에 협조하길 바란다. 또한 경의 현재 상황 역시 우리의 고려대상에서 제외된다. 앞선 편지에서도 나는 경에게 동행이나 협력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카르도 루벨이라는 잠재적 위협을 제거하려는 건 어디까지나 그라샤를 위한 선제조치이지 그대의 형편을 위한 것이 아니다. 더욱이 임부를 전력으로 유용할 계획은 없으니, 더 제시할 문제가 없다면 균열의 위치를 조속히 밝히길 촉구한다. . . . 레나와 린은 다소 복잡한 기분으로 이우라의 답장을, 그리고 그것과 함께 온 소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우라는 이렇게 재수 없는 편지를 썼으면서 거기에 아기용품 따위를 같이 보냈다. 아기자기한 옷과 신발, 손 싸개 등등 뜻밖의 출산선물을 받은 레나는 한참을 고민하다 중얼댔다.

1656284279215.jpg“이우라 씨는 미친 사람인 걸까요?”

16562842792172.jpg“이건 비서나 참모들이 보낸 걸 수도…….”

16562842792163.jpg“아가씨, 이 옷 너무 귀여워요!”

유니가 샛노란 아기 옷을 펼쳐보며 비명을 질렀다. 그래서 레나는 함께 즐기고 싶은 마음 절반과 이우라의 싸가지 없음을 성토하고 싶은 마음 절반 사이에서 애매하게 미소만 지었다. 그 사이 린이 편지를 다시 읽어보다가 말했다.

16562842792172.jpg“이름을 확보한 건 정말일까?”

1656284279215.jpg“모르겠어,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덮어놓고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레나와 린은 머리를 맞댄 채 한참을 고민했다. 내리쬐는 햇살 아래서 매미가 울었다. 그라샤의 수도와 동부 끝자락까지 몇 차례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 계절은 어느새 한여름으로 치닫고 있었다. 레나는 린이 떠온 찬물에 발을 담근 채 골똘히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1656284279215.jpg“역시 안 되겠어. 내가 같이 간다면 모를까 균열의 위치를 알려주고 이 사람들만 보내는 건…….”

16562842792163.jpg“어? 아가씨, 여기 뭐가 또 있는데요?”

그때 유니가 레나의 말을 끊고 도톰한 소포를 흔들었다. 아기 옷과 뒤섞였던 걸 유니가 찾아 건네주자, 부부는 다시 머리를 맞대고 소포를 뜯어 보았다. 그 안에 든 내용물은 엔지 루벨이 쓴 엽서 한 장과, 그가 카르도 루벨의 이름을 추적하며 수집한 자료의 사본이었다. 그 엽서엔 엔지의 바른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누나에게. 혹시 이우라 저하의 제안을 고민하고 있을까 봐 나도 짧게 편지를 썼어. 우리가 못 미더워서 망설이고 있다면 이걸 보고 다시 생각해줘. 나는 누나만큼 강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못 할 만큼 약하지도 않아. 조금만 의지해줘. 지금까진 누나 혼자 했으니까 나머진 내가 할게. 엔지의 짧은 엽서를 훑어본 레나는 이어 동봉된 보고서를 펼쳤다. 그 세세한 기록을 살펴보던 레나는 곧 놀라서 린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함께 보던 린이 웃으며 끄덕였다.

16562842792172.jpg“이 정도면 협조할 수밖에 없겠네.”

남편의 동조에 레나는 눈을 깜빡이며 다시 보고서를 확인했다. 린의 말마따나, 거기엔 레나를 설득할 만한 내용이 가득했다. 설마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동생의 참신하고도 과격한 시도에 레나는 결국 헛웃음을 터트렸다. 린의 말마따나, 이렇게 나온다면 레나도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 . . . 아기 옷을 선물 받은 레나가 이우라에게 다시 답장을 보낸 지 석 달이 지났다. 또다시 계절이 바뀌어 가을이 찾아왔지만, 엔지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숨 막히는 고지대에서 보다 이른 겨울을 맞이하고 있었다.

16562842792193.jpg“정지.”

이우라의 명령에 루비드와 엔지, 그리고 북부의 정예 기사들이 고삐를 당기며 말을 멈췄다. 그들의 숨결이 공기 중으로 하얗게 얼어붙었다. 지금 그들은 그라샤 북단의 척박한 동토에 서 있었다. 그곳은 북부공 이우라의 영토이자 레나 루벨이 알려준 균열의 위치였다. 지난 여름, 레나에게 균열의 위치를 전해 들었을 때 이우라는 다소 황당했다. 설마 무덤으로 통하는 마지막 균열이 자신의 영역에 숨겨져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한 탓이었다. 어쩐지 우롱당한 기분을 뒤로하고, 이우라는 정찰대였던 기사에게 물었다.

16562842792193.jpg“꽃은 어디 있지?”

16562842848521.jpg“이쪽입니다.”

이우라가 설산에서 꽃을 찾자, 기사는 앞장서며 그들을 이끌었다. 그렇게 혹한을 견디며 걷기를 얼마, 그들은 곧 기이한 광경에 걸음을 멈췄다.

16562842848528.jpg“백합…….”

엔지가 눈밭에 피어난 꽃을 보며 중얼댔다. 이 추운 곳에 한 떨기 백합이 고아하게 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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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2842792193.jpg“레나 루벨의 망자다.”

이우라의 말에 엔지가 끄덕이는데, 고요히 숨 쉬던 백합이 돌연 고개를 기울였다. 바람 한 점 없는 곳에서 서서히 움직인 꽃은 이윽고 한 방향을 가리켰다.

16562842848544.jpg“저쪽으로 가라는 건가?”

루비드가 미심쩍어하며 앞장섰다. 그러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또 다른 백합이 발견됐다. 그것 역시 천천히 한 방향을 가리켰고, 그렇게 꽃들의 지시를 따르던 자들은 얼마 후 계곡 아래 숨겨진 거대한 얼음벽을 발견했다.

16562842792193.jpg“여기군.”

16562842848528.jpg“여기도 백합이…….”

얼음벽을 올려다보는 이우라 옆에서 엔지가 주변을 두리번댔다. 차가운 눈밭 위에 백합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그 몽환적인 광경에 엔지는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16562842848528.jpg“누나는 이 사람들을 일부러 남겨둔 걸까요?”

16562842792193.jpg“균열을 감시 중이었을 거다.”

이우라의 긍정에 엔지는 조용히 탄식했다. 역시 레나는 균열이 열리면 언제든 나서서 싸울 생각이었다.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누나의 안배에 엔지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곤 가방에 든 책을 확인하듯 꽉 끌어안았다.

16562842848544.jpg“이 얼음벽은 어떻게 열지?”

루비드가 두께를 헤아릴 수 없는 벽을 레이피어로 두드리며 말했다.

16562842792193.jpg“기다려라. 우리가 도착하면 레나 루벨의 망자들이 입구를 열기로 했다.”

이우라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백합들이 얼음벽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틈 하나 없이 견고하던 얼음벽 하단에 작은 균열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실금에서 시작된 틈은 이윽고 사람이 오갈 수 있을 만큼 큰 통로가 되었다. 그리고 통로 저편에서 한때 제국을 지배했던 붉은 빛이 쏟아졌다.

16562842848544.jpg“열렸다.”

루비드가 길을 확인하고 앞서 나가려 할 때였다. 돌연 이우라가 그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행동을 제지당한 루비드가 짜증을 내며 이우라를 돌아보는데, 무덤으로 이어지는 통로에서 저벅대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무덤에서 무언가가 다가오자 기사들은 일시에 검을 뽑았다.

16562842792193.jpg“검을 집어넣어라.”

그런데 상대의 모습이 미처 확인되기도 전에 이우라가 명령했다. 기사들이 주저하며 검을 갈무리하자, 통로 저편에서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62842848521.jpg“축복을 빼앗긴 왕이 찾아온 줄 알았는데.”

싸늘한 음성과 함께, 검은 제복을 입은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16562842848521.jpg“너흰 뭐지?”

무덤을 지키는 파수꾼 중 하나인 나자 아이테르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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