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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화. 에필로그. 용서받지 못한 그대에게 (1) (202/208)


202화. 에필로그. 용서받지 못한 그대에게 (1)
2022.04.07.


엔지, 이우라와 루비드, 그리고 그를 따르는 북부 기사들은 붉은 창공에서 보았다.

검은 성이 무너지고, 이름을 버린 왕이 몰락하는 과정을.

혹여 또 다른 반전이 일어날까 경계하며 성의 붕괴를 끝까지 지켜보았다.

잠시 후, 성은 녹듯이 사라졌고 그 안에서 거대한 용이 몸을 일으켰다.

용이 포효하자 하늘을 배회하던 작은 용들도 함께 울부짖었다.

싸움이 끝났다. 제국의 마지막 무덤 원정이었다.

.
.
.

레나는 린의 어깨에 기대앉아 가을의 정취를 느끼고 있었다.

물고기 모양 풍경이 바람결에 흔들리자 붉게 물든 단풍도 허공을 수놓았다.

깊은 곳에서 태동하는 생명은 오직 사랑으로 찾아온 선물이었고, 곁에 있는 사람은 심연도 무덤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나를 찾아낸 불멸의 연인이었다.

이 모든 것이 벅차도록 행복해 레나는 눈을 감고 콧노래를 흥얼댔다.

레나의 머리에 뺨을 기대고 있던 린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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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유니한테 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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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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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게 불릴 때 비로소 존재한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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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왜?”

레나가 나른한 목소리로 되묻자, 린도 비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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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그랬잖아. 존재하고 싶다고. 그래서 아버지를 만나러 왔다고.”

레나는 린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아주 예전에 그런 얘길 한 적이 있었다. 린을 막 알게 되었을 때, 황궁에서 재회한 첫날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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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존재하고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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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만나려는 이유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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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 씨도 아까 그러셨잖아요. 병으로 죽은 후작의 딸이냐고. 저는 지금 그런 존재예요. 세상에서 깨끗이 지워진, 살아 있는 게 이상한, 죽은 게 더 당연한.

간신히 기억을 떠올린 레나는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과의 대화를 소중히 기억해주는 린이 고마워서, 그러고보니 한때 그런 이야기를 했구나 싶기도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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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그래?”

즐겁게 웃는 레나를 보며 린이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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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존재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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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린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레나의 미소가 짙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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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미 존재하고 있어. 네가 날 불렀을 때부터, 그리고 내가 대답한 순간부터.”

그래. 이 세상에서 깨끗이 지워진, 살아 있는 게 이상한, 죽은 게 더 당연한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리고 우리는 그저 외치고 싶어 돌아왔다.

너희가 가벼이 여기며 지우고 내버린 존재가 여기 있다고 말하고 싶어서, 너희는 잊었지만 우리는 모두 기억한다고 전하고 싶어서, 단지 그러고 싶어서.

그 공허한 외침이 누군가에게 닿은 후에는 다시 무덤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내 삶의 목표였는데, 너를 만나며 모든 게 변했다.

돌아가기 전까지 사랑하고 싶어졌고, 정해진 미래에도 불구하고 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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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모든 걸 바꿨어. 나도, 내 미래도.”

내가 너로 인해 살기로 결심하고, 살아가기로 도전하며 모든 것이 변했다.

언제나 혼자였던 전장에 함께 서는 이들이 나타나고, 이제 그들은 오히려 나를 뒤로한 채 전선에 나섰다.

린을 만나기 전까지는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레나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이의 도움을 받고 있는지 헤아려보았다.

세상으로 돌아가라며 무덤에서 등을 떠밀어준 부모 같은 이들이 있고, 지낼 곳을 마련해준 믿을 만한 이들이 있고, 조심스레 알린 기별에 곧장 달려와 준 친구가 있고, 이 긴 싸움을 매듭지으러 떠난 동생과 전우들이 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던 순간이 다 거짓말인 것처럼, 많은 이들이 곁에 있다.

그래서 레나는 이제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여기에 존재한다고, 살아 있다고.

드디어 용서받았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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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계절이 바뀌었다.

풍요로운 가을은 안식의 겨울로 접어들고, 혹한 끝에 또다시 봄이 찾아왔다.

그 봄, 여전히 변화를 거듭 중인 그라샤의 중심에서 이우라는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나른한 봄볕 아래서 모처럼 느긋하게 활자를 더듬는데, 똑똑 소리와 함께 한 청년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동부에서 막 돌아온 루비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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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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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루비드는 이우라의 무뚝뚝한 말에 똑같이 대답하더니, 뚜벅뚜벅 걸어와 집무실 창가에 놓인 소파에 앉았다.

그래서 이우라도 읽던 책을 내려놓고 루비드의 맞은 편에 가 앉았다.

그들은 잠시 말이 없었다. 서로를 본체만체하던 과거에 비하면 크나큰 발전이지만, 그들의 사이엔 여전히 어색한 구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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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지 루벨은 잘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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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뭐…….”

결국 이우라가 먼저 운을 떼자 루비드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무언가 생각난 듯 돌연 짜증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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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도 안 돌아보고 가더만.”

루비드는 동부 성에서 활짝 웃던 엔지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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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히 가세요, 저하! 나중에 유니랑 놀러 갈게요!

루비드는 그렇게 소리치며 손을 붕붕 흔들던 자식이 왠지 짜증 났다.

그 옆에서 평소처럼 고양이 눈을 치켜뜨던 유니도, 웃으며 배웅 나온 레나도, 마지못해 따라 나온 동부공도 마찬가지였다.

지난가을, 마지막 무덤 원정을 끝내고 엔지는 황궁으로 돌아왔다. 클라비스의 전언이 담긴 보고서를 완성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겨우내 끄적이던 녀석은 봄이 되기 전에 보고서를 마무리 짓더니, 그 후엔 냉큼 동부 성으로 향했다. 레나 루벨과 함께 살기 위해서였다.

그런 녀석을 동부 성까지 데려다준 게 루비드였다.

아직 어린 놈을 혼자 보내기는 뭐해서, 게다가 리그난 아이테르너가 동부공으로 복권했다고 하여 동부 상황을 둘러볼 목적으로 겸사겸사 동행했다.

그렇게 동부에 간 루비드는 간만에 레나 루벨을 다시 만나 며칠을 머물렀다.

그리고 황궁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날, 그를 배웅하던 녀석들이 저들끼리 너무 즐거워 보여서 루비드는 왠지 기분이 나빴다.

루비드의 불만을 읽은 이우라가 무심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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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에서 더 머물다 오지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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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그야, 넌 친구가 걔네 밖에 없으니까.

이우라는 인상을 쓰는 루비드에게 이렇게 답하려다가 잠자코 말을 삼켰다.

나름 친하다고 생각한 녀석들이 죄다 동부로 가서 소외감 비슷한 걸 느낀 모양이다.

이우라는 동생의 눈치를 살피다가 넌지시 말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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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의 분위기는 어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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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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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공이 복권하고 문제는 없던가?”

이우라의 말마따나 린은 지난 겨울에 다시 동부 성으로 돌아갔다.

죽은 줄 알았던 성의 주인이 돌아오자 사람들은 유령이라도 본 양 기겁했다.

하지만 혼란이 일어날 틈도 없이 데카가 그의 생환을 공표하며 동부공의 자리는 순조롭게 주인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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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멀쩡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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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 모닐은 바보군. 잠자코 동부를 차지하면 될 일을.”

충성스럽다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데카는 모처럼 손에 쥐고 있던 전권을 옛 상관에게 다시 넘겼다.

이우라가 그 충신을 향해 혀를 차자 루비드가 가당치도 않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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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퍽이나. 동부공 옆에 누가 있는데.”

동부공 옆엔 레나 루벨이 있지.

하기야 옆에 그런 부인이 있다면 2년이 아니라 20년 만에 돌아왔어도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을 거다.

게다가 무덤의 경계에서 도사리는 나자 아이테르너를 생각하면, 지금 동부공을 건드리는 건 가장 빠른 자살방법이 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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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나 루벨에 대한 뒷말도 안 나오는 모양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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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꽤 지났으니까. 게다가 애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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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아이라고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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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지난겨울 레나는 무사히 아이를 낳았다. 길에서 봐도 애 아빠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까만 눈동자의 남자아이였다.

동부공이 은둔 생활을 청산하고 성으로 돌아간 이유가 아이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우라는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리그난 아이테르너는, 아니. 린은 제국인이자 동부인인 자신의 역할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돌아간 거였다. 예전처럼, 묵묵히 자신의 사람들을 돌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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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 그 자식은 뭐, 그대로고.”

루비드는 동부에서 만난 레나와 린, 유니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레나가 귀부인인 척 내숭을 떨고 있다는 얘기나, 린이 매일 애를 끼고 다닌다는 이야기, 유니가 검을 배우고 있다는 이야기 등.

이우라는 동생이 주절대는 소리를 가만히 듣다가 넌지시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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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로 가고 싶다면 가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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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왜 자꾸 가래?”

그야, 넌 놀 사람이 정말 걔네 뿐이니까.

이우라는 루비드가 동부에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넌지시 제안했다가, 그가 도리어 짜증을 내는 걸 보고 약간 안심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루비드는 돌아왔다. 엔지가 레나에게 간 것처럼, 루비드도 어쨌든 가족이 있는 곳이 자신의 집이라고 생각한 거다.

그 사실에 안도하던 이우라의 눈빛이 고요히 깊어졌다.

사실 이들은 아직 화해 같은 걸 하지 않았다. 수년 동안 서로를 무시한 시간을 뒤로한 채 어물쩍 다시 형제처럼 지내고 있을 뿐이다.

계기는 혼자 거리를 두던 형에게 동생이 먼저 마음을 열면서였다.

칼리고의 성에서 이우라의 본심을 희미하게나마 깨달은 루비드는 더 이상 형을 경계하거나 미워하지 않았다.

이우라도 권능이 사라지고 처형 강박에서 벗어난 후 비로소 동생을 마주 보며 현재에 이르렀다.

이대로도 나쁘지는 않았다. 애당초 두 사람 다 살가운 성격은 아니어서, 각자 잘 지내는 것만 확인하면 유난스럽게 굴 일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만족하고 지내왔지만, 루비드가 떠나 있던 사이 이우라는 생각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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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내게만 남긴 유언이 있다.”

이우라가 갑작스럽게 꺼낸 화제에 루비드는 놀라서 눈썹을 찡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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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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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반드시 지키라고 했다.”

뜻밖의 말에 루비드의 보랏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꼭 10년 만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이미 10년이 됐는데, 이우라는 이제야 해묵은 진실을 밝혔다.

아버지가 전사하고 어머니가 쓰러졌을 때, 그로써 루비드가 천애 고아가 되었을 때 이우라도 아직 소년이었다.

냉혹한 황제 앞에 홀로 서야 하는 그에게 동생은 유일하게 남은 가족이자 버팀목이었다. 그리고 그가 버텨야 하는 이유이자 목적이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루비드를 지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권능과 함께 넘어온 처형 강박 때문에 동생에겐 다가갈 수 조차 없었다.

내가 널 해칠까 봐, 다치게 할까 봐.

그래서 널 혼자 뒀어.

이우라는 이 변명 같은 말을 차마 꺼내지 못하고 입안에 머금었다.

그러자 루비드가 성마른 목소리로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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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얘길 이제 와서 하는 이유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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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늦기 전에 해야 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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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형 놈의 답지 않은 발언에 루비드가 거북한 표정을 짓자 이우라는 시선을 피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아까 들여다보고 있던 책을 루비드에게 툭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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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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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지 루벨이 넘기고 간 보고서다. 시간이 남으면 한번 읽어보는 것도 좋을 거다.”

그냥 읽어 보라는 말을 못해서 굳이 돌려 돌려 권하는 이우라의 화법에 루비드는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형의 권유대로 엔지가 고치고 고쳐서 완성했다는 책을 펼쳐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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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렇게 두꺼워?”

하지만 루비드는 첫 장을 펼치기도 전에 책의 묵직한 중량에 당황했다.

설마 엔지가 이걸 혼자서 다 썼나 싶어 책장을 쭉 넘겨봤다.

엔지가 정리한 그 책은 제국 그란디스 그라샤가 지워버린 그라샤의 진짜 역사였다.

한때 화려하게 피었던 왕국이 어떻게 쇠락의 길을 걸었는지, 그 끝에 누가 있었는지 엔지는 끈질기게 조사해 역사의 공백을 채웠다.

그 빈칸에는 레지나 그라샤라고 하는, 훗날 니힐 그라샤가 되어버린 비운의 왕이 있었다.

책장을 넘기던 루비드는 이 책이 방대한 분량의 역사서인 것을 곧 깨달았다.

그래서 한없이 수다스러운 촉새 녀석이 이런 걸 써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고, 이 과격한 분량을 언제 읽나 싶어 낙담했다.

루비드가 책장을 넘기며 한숨을 푹푹 쉬자, 멀찍이서 힐끗대던 이우라가 넌지시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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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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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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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앞에 엔지 루벨이 쓴 머리말이 있다.”

루비드는 어쩌라는 거냐는 얼굴로 형을 쳐다보다가, 책이 너무 두꺼우면 머리말이라도 읽어보라는 뜻인 걸 깨닫고 다시 혀를 찼다.

그러곤 너그러운 마음으로 책의 맨 앞장을 펼쳤다.

거기엔 시로 시작해서 시로 끝나는, 엔지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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