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에필로그. 용서받지 못한 그대에게 (2)
(203/208)
203화. 에필로그. 용서받지 못한 그대에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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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화. 에필로그. 용서받지 못한 그대에게 (2)
2022.04.11.
사는 동안 무수히도 많은 금이 생겼습니다.
마음의 잔금이 햇살에 찔린 물결만큼 많지만
상처 입었다는 이유로 망가지진 않으려 합니다.
나를 강하게 하는 것도 약하게 하는 것도
당신이 아닌 내 자신임을 알기에
그럼에도 나를 미워하는 당신에겐
차라리 꽃을 바치겠습니다.
이것은 그란디스 그라샤를 살아간 어느 시인의 시입니다.
잔혹한 시대를 살며 숨 쉬듯이 상처 입었던,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시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제 세상에 없는 한 사람의 권유로 황제 니힐의 이야기를 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일대기를 정리하면서 이걸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 계속 고민했습니다.
단순히 있는 사실만을 전하기엔 니힐 그라샤가 이 시대와 사람들에게 입힌 상처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니힐 그라샤의 과거는 명백히 불행하고 비극적입니다.
따라서 객관적인 사실만 전달하더라도 그를 동정하거나 변호하는 관점으로 비칠 수 있고, 그건 오랜 기간 제국에 착취당한 자들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할까 고민하다가, 두 편의 시를 인용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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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걸음으로 걸어온 엔지는 문 앞에 선 기사들에게 눈인사했다.
그러자 동부 기사들은 기꺼이 문을 열어주었고, 엔지는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방에 들어갔다.
“누…….”
조카를 보러온 엔지는 자연스럽게 누나를 찾다가, 뜻밖의 인물과 마주쳐 우뚝 멈춰 섰다.
아기방에는 누나가 아니라 동부공 저하가 있었다. 그는 유모들을 잠시 물려놓고, 혼자 새근새근 잠든 아이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앗, 죄송해요. 계신지 모르고…….”
엔지는 동부공 앞에서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동부 성에 온 지 이제 겨우 일주일, 엔지는 아직 린을 어려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서둘러 돌아서는데 등 뒤에서 린이 말했다.
“아기 보러 온 거지?”
“네…….”
린의 온화한 물음에 엔지는 걸음을 멈추고 대답했다.
그러자 린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린의 표정은 기사들 앞에서와 달리 부드럽게 풀어져 있었고, 엔지는 용기를 얻어 조심히 다가갔다.
“지금 자고 있어.”
엔지가 아기 침대 옆으로 다가오자 린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말마따나 레나와 린의 작은 아이는 새근대며 꿈나라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 모습에 엔지는 새삼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누나의 아이라니. 엔지는 그 아이의 평화로운 얼굴을 보며 편안함과 벅참을 함께 느꼈다.
엔지가 고요히 감격하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린이 넌지시 물었다.
“지내는 데 불편한 건 없어?”
“아, 네. 전혀요. 누나도 있고 유니도 있고, 다들 친절히 대해주셔서 좋아요. 정말요.”
여전히 긴장 상태인 엔지가 빠르게 대답했다. 그 모습에 린도 어색하게 미소 지었고, 엔지는 조금 죽고 싶어졌다.
계속 데면데면하게 굴고 있지만 그렇다고 엔지가 린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한때 대립진영에 있던 무시무시한 동부공에게 악감정이 남은 것도 아니었다.
사실 엔지는 누구보다도 린과 친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보려고 할 말을 고를 때였다.
린이 평소처럼 낮고 느린 목소리로 운을 뗐다.
“고마워.”
“네?”
“레나를 위해 싸워줘서. 계속 인사하고 싶었어.”
예상치 못한 감사 인사에 엔지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엔지와 시선이 마주친 린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고, 엔지는 어쩐지 창피해 고개를 푹 숙였다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저도 계속 인사하고 싶었어요. 감사해요, 누나를 지켜주셔서. 저하가 안 계셨다면…… 누나를 다시 만나지 못했을 거예요.”
엔지가 조심히 밝힌 진심에 마찬가지로 조심하던 린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그는 아내와 얼굴만 닮은 처남을 다정히 바라보다가, 다소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계속 저하라고 부를 거야?”
“그, 그럼 뭐라고…….”
“이름을 불러도 되고, 아니면 유니처럼 린 씨도 괜찮고.”
“그러면 저하의 체면이…….”
“괜찮아, 유니 때문에 이미 바닥이야.”
린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엔지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엔지가 여전히 머뭇대자 린이 웃으며 덧붙였다.
“너무 어려워하지 마. 이제 가족이니까.”
가족이라는 말에 엔지는 놀란 듯 숨을 마셨다가 침대에 누운 조카를 보고 미간을 찡그리며 웃었다.
아프고도 기뻤다. 갈기갈기 찢어진 루벨 가문과 이젠 곁에 없는 부모님이 생각나서, 그럼에도 새로운 가족을 만난 게 감사해서.
“그럼 저도 린 씨라고 부를게요.”
엔지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린의 호의에 화답했다. 그러곤 혹시 모를 오해를 풀고자 해명했다.
“어, 그리고 제가 원래 낯을 가리는 성격은 아닌데 린 씨……한테는 좀, 그랬지만 그게 나쁜 뜻이 있었던 건 결코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인데 실은 누나의 남편이 이 세상에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봐서, 아, 그게 린 씨여서 정말 다행이라고도 생각했어요. 만약 다른 사람이었으면 어떻게 감당할까 싶기도, 음, 말이 조금 이상한데 그러니까 저는…….”
주절대던 엔지는 점점 말이 꼬이는 걸 느꼈다. 그래서 어떻게든 수습하려고 머리를 굴리다가, 그래도 모처럼 터놓고 말할 기회라고 생각해 있는 힘껏 진심을 전했다.
“저, 저는 사실 린 씨를 좋아해요!”
아, 죽을까?
여러모로 망했다는 생각이 엔지의 뇌리를 스쳤다.
그런데 민망해할 틈도 없이 뎅그렁 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등 뒤에서 난 소리에 린과 엔지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고, 거기서 연습용 검을 떨어트린 유니를 발견했다.
유니는 밀회를 목격한 사람처럼 린과 엔지를 천천히 번갈아 보더니 이내 냉큼 돌아서며 소리쳤다.
“아가씨!”
“잠깐……!”
유니가 레나를 찾아 달려가자 린이 놀라서 손을 뻗었다.
그 소리에 아기가 깨어나 울었고 애 아빠는 아내와 아이 양쪽에 들이닥친 위기에 난감해하다가 허둥지둥 아기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엔지는 그만 푸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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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는 동안 무수히도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저 시의 표현처럼 상처 입었다는 이유로 망가지기도 합니다.
니힐 그라샤도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한때 공명정대한 왕이었지만 온 세상이 그를 외면했고 그는 결국 자신을 버린 세상에 복수하고자 죽음을 이끌고 돌아온 것입니다.
그의 삶을 긍정하거나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해는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견뎌온 시간에 마침표를 찍고, 그간의 괴로움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겐 저마다 망가질 이유가 있지만, 그래서 복수를 결심하거나 타인에게 무정해지거나 세상의 부조리를 방관하기도 하지만, 이유가 있다고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 시인의 고백처럼 나를 미워하는 당신에게 차라리 꽃을 바치기로 결심할 수 있습니다.
혹자는 왜 굳이 그래야 하냐고 묻기도 합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저 함께 살아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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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때문에 린 씨가 당황했잖아.”
복도로 나온 엔지가 유니를 가볍게 타박했다.
그러자 유니는 오히려 고개를 저으며 으스댔다.
“너 아직 모르는구나. 린 씨는 매도당하는 거 좋아해.”
우리 매형은 그런 사람 아니야.
엔지가 떨떠름하게 쳐다봤지만 유니는 모르는 척 높이 묶은 머리를 찰랑대며 걸었다.
훈련복을 입고 긴 머리를 묶은 유니는 왠지 과거의 레나를 떠올리게 했다.
남부 제복을 입고 당당히 싸우던 누나의 모습이 문득 뇌리를 스쳐, 엔지는 유니가 들고 있는 검에 슬쩍 관심을 보였다.
“오늘도 새벽부터 검술 훈련한 거야?”
엔지의 물음에 유니는 씩 웃더니 검을 한 손으로 돌리며 곡예 비슷한 검술을 뽐냈다.
비교적 가벼운 연습용 검이지만 그럼에도 그걸 다루는 유니의 자세는 제법 날렵했고, 엔지는 순수하게 감탄하며 되물었다.
“안 힘들어?”
“재밌어.”
유니는 힘든 기색 없이 당차게 웃었다. 그러곤 씩씩하게 검을 흔들며 포부를 밝혔다.
“나는 아가씨처럼 강해지고 싶어. 그래서 여기저기 여행하고 싶어.”
그 ‘여기저기’에 무덤이 포함된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유니는 언젠가 무덤에 갈 계획인 걸 다 티 나게 감추고 있었다.
유니가 무덤 행을 꿈꾸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남부공 영감님을 다시 만나고 싶어서고, 다른 하나는 늘 숨어서 보기만 했던 망자와 직접 싸워보고 싶어서였다.
망자들이 온 세상에 두려움을 주던 시대가 있었다. 유니는 그 시절, 어리고 연약해서 도망치고 숨기에 급급했던 나날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청산할 생각이었다.
유니의 무모하고도 큰 꿈에 엔지는 멍하니 생각하다 중얼댔다.
“여행은 너 혼자 갈 거야?”
“왜, 같이 가고 싶어?”
“아니, 꼭 그런 건…….”
“가고 싶다고 하면 데려가 줄게.”
엔지가 서운한 투로 묻자 유니가 인심 쓰는 척 대답했다. 그러더니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어차피 나 아니면 너 데려갈 사람도 없으니까.”
엔지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유니는 아무 설명 없이 뻔뻔하게 웃으며 돌아섰다.
그래서 엔지는 이 말이 프러포즈인지 아닌지를 그날 밤새도록 고민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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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책임과 상처를 떠넘긴 끝에 희생양이 생겨나고, 그 희생양이 칼을 쥐며 폭군이 탄생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길고 긴 역사 속에서 상처를 주고 복수하는 일을 반복해왔습니다.
이것을 멈추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많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망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연약하고 각자 다르며 이미 너무 오랫동안 서로를 미워했습니다.
세상엔 악의가 가득하며 사람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 악의를 타인에게 전가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선한 의지 또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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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근한 햇살이 정원에 봄기운을 더했다.
레나 루벨은 정원 가장 안쪽에 마련된 둥지에서 홀로 독서를 즐기고 있었다.
소중한 글자를 하나하나 살피며 책장을 넘기는데, 가벼운 인기척과 함께 친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요즘도 숨어서 책 읽어?”
레나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엔지도 꼭 같은 표정으로 누나를 향해 마주 웃었다.
“내가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내 특기잖아. 숨어 있는 누나 찾는 거.”
레나는 피식 웃으며 동생에게 옆자리를 내주었다. 엔지는 기꺼이 옆에 앉았고, 남매는 잠시 도란도란 대화를 나눴다.
동부 생활에 적응은 했는지, 아이를 낳고 몸은 아프지 않은지, 두 사람은 가볍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러다 문득 레나가 말했다.
“꽤 인상적이었어.”
“뭐가?”
영문을 묻는 엔지에게, 레나는 무릎에 내려둔 책의 표지를 보여주었다.
그건 엔지가 쓴 니힐의 책이었고, 그걸 본 엔지의 얼굴이 삽시에 붉어졌다.
“아, 보여주지 마.”
엔지는 민망해하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읽으라고 쓴 책이긴 한데, 자신이 쥐어짠 문장을 누나가 눈앞에서 읽는다고 생각하니 대단히 창피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레나는 잔인하게 낭독을 시작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선한 의지 또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으악, 하지 마!”
엔지는 기겁하며 팔을 뻗었고, 레나는 책을 뺏기지 않으려고 가볍게 몸을 틀었다.
남매는 또 그렇게 한참 동안 실랑이를 했다. 하지만 역시 동생은 누나를 당해낼 수 없었고, 금방 지쳐버린 엔지는 주저앉아 좌절했다.
“다행이다.”
레나는 허약하고 실없는 동생을 향해 웃다가 불현듯 중얼댔다.
“망가지지 않아서. 나도, 너도.”
눈으로 영문을 묻던 엔지는 곧 누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그래서 누나를 따라 포근히 미소 지었다.
“도움을 많이 받았어.”
“응.”
“행운이야.”
“정말.”
남매는 그렇게 말하며 찬란하게 떨어지는 햇살을 바라보았다.
새삼 꿈 같았다.
하루아침에 팔리고 무덤에 떨어져 망자의 왕이 되었을 때.
그리고 옥탑에 갇혀 독을 삼키고 사경을 헤맬 때.
다시 이런 순간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다시 만났다.
그래서 남매는 그들을 감싼 햇살과 바람, 들꽃, 그리고 소중한 사람의 존재에 감사하며, 돌려받은 삶을 기쁘게 만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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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우리를 상처 입히는 것이 가득하지만, 그만큼 우리를 다시 살아가게 하는 것도 가득합니다.
철저히 혼자라고 느껴져도 세상엔 분명 우리가 잘되길 바라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누군가가 남긴 시일 수도 있으며, 어딘가에서 이어지는 기도일 수도 있습니다.
나 역시 같은 마음으로 이 책을 씁니다.
이기적인 자들의 만행과 그로 인한 상처로 가득한 이야기는 마치 세상의 단면처럼 우릴 아프게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오히려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끼치는 존재임을,
그래서 버림받고 용서받지 못한 존재를 영원히 외면할 수 없음을,
서로에게 저지른 모든 잘못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언젠가 반드시 만나리라는 것도.
이 이야기가 누군가에겐 위로가, 또 누군가에겐 경고가 되길 바라며 같은 시인의 다른 시로 글을 맺습니다.
우리는 만나리라.
서로 치고 찢던 손의 핏자국을 지우고
그곳에서 다시 만나리라.
사는 동안엔 진리를 몰라
선물 같던 그대를 아프게 했지만
그곳에서 부끄러움을 깨달으리라.
그래서 다시 만난 그대와
영원한 시간 가득 입을 맞추며
그곳에서 아픔을 씻으리라.
모든 버림받은 자들과
용서받지 못한 그대도
그곳에서는 함께 웃으리라.
모든 버림받은 자들과, 용서받지 못한 그대에게.
레지나레나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