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소녀와 소년과 소년의 사정청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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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소녀와 소년과 소년의 사정청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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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소녀와 소년과 소년의 사정청취 (2)
2022.04.18.
“이게 뭔 고생이야, 바빠 죽겠는데…….”
루비드가 하얀 입김을 뿜으며 구시렁댔다.
유니와 엔지, 그리고 진은 북부의 설산 입구에서 루비드를 만났다.
그런데 꼭 1년 만에 만난 루비드는 어쩐지 예전보다 더 예민해 보였다.
오래간만에 봤는데도 반가워하기보다는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해, 아이들은 저놈이 왜 저러나 싶어 서로 속닥였다.
“왜 저래?”
“나야 모르지.”
“원래 인성 터진 양반이라며.”
“음, 그렇긴 하지.”
“야…….”
유니와 진의 야박한 평가에 결국 엔지가 나섰다.
“저하, 잘 지내셨어요?”
엔지가 고삐를 당기며 루비드의 옆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루비드는 힐끗 쳐다만 볼 뿐 대꾸조차 하지 않았고, 그래서 엔지는 다시 넌지시 말을 건넸다.
“더 멋있어지셨어요.”
“……아부냐?”
루비드가 그제야 반응하며 엔지를 쳐다봤다.
그리고 뒤에서 몰래 지켜보던 유니와 진은 루비드의 기분을 확신했다.
‘좋아한다.’
‘좋아하네.’
설산 입구부터 잔뜩 날이 서 있던 루비드는 엔지의 방긋대는 얼굴에 결국 혀를 찼다. 그러자 엔지는 더 살갑게 말을 붙였다.
“요즘 바쁘세요? 듣기로는 이우라 저하께서 북부 일을 전임하셨다던데.”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미칠 지경이다.”
루비드는 기다렸다는 듯 이를 갈았다.
온갖 이해관계가 얽힌 중앙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북부도 큰 변화 앞에서 진통을 겪고 있었다.
막강한 군대를 유지하느라 피폐해진 민심을 달래고 망자를 경계하던 시설을 철거하는 등 해결할 문제가 산적해 있었는데, 이우라는 그 모든 것을 루비드에게 맡겼다. 본인은 중앙에서 할 일이 있다는 이유였다.
덕분에 클라비스와 놀고먹으며 방탕하게 지내온 루비드는, 자신의 나태한 과거를 후회하며 밀려오는 업무와 밀린 공부에 압박당하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설산으로 아이들을 데려가라는 형의 명령에 잔뜩 뿔이 났다. 하지만 엔지의 치근덕댐에 루비드의 기분은 금세 풀리고 말았다.
루비드는 이우라를 잔뜩 욕하고 나서야 후련한 듯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곤 속이 풀린 김에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런데 저 녀석, 진짜 나자 공을 만나러 온 거냐?”
“진이요? 네, 맞아요.”
“그런 느낌 아니었잖아?”
“느낌이요?”
엔지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중얼대자, 루비드가 답답하다는 듯 부연했다.
“너희한테나 나한테 하는 태도가 딱히 원수 대하는 태도는…….”
“당연히 아니었지요!”
“끄악!”
속닥대던 루비드는 등 뒤에서 난입한 목소리에 그만 소리를 질렀다. 놀라서 돌아보니 어느새 바짝 다가온 진이 뻔뻔하게 웃고 있었다.
심장이 떨어질 뻔한 루비드가 울컥 욕을 머금었지만, 그 전에 진이 신속하고 당당하게 덧붙였다.
“모든 제국인이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나쁜 건 폭군과 침략자고, 그라샤 사람들도 많이 피해를 입은 걸 압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차마 화를 못 내겠다.
결국 루비드는 이를 악문 채 폐부에서 쏟아지는 숨을 몰래 내쉬었다.
“그래서 직접 만나서 사과를 받으시겠다?”
“그렇습니다.”
“……이성적인 건지 이상적인 건지. 덮어놓고 원망하지 않으니 이쪽에선 고맙긴 하다만.”
“우린 린 형을 아니까요. 물론 동부로 가면 제국에 죽창을 꽂겠다며 벼르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진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고, 그 잔혹한 진실에 루비드는 한숨만 길게 내쉬며 다시 말을 몰았다.
그렇게 설산을 오르길 한참, 아이들의 눈에 뜻밖의 광경이 펼쳐졌다.
“꽃이다.”
유니가 눈 위에 피어난 백합을 향해 말했다. 루비드도 그걸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 왔네.”
루비드는 백합의 방향과 지형을 읽으며 설산의 계곡으로 아이들을 인도했다.
그러자 갈수록 백합이 늘어나더니, 이윽고 꽃이 흐드러지게 핀 설원과 계곡 사이에 숨겨진 거대한 얼음벽이 나타났다.
“우와…….”
진이 눈앞의 광경을 보며 감탄했다.
새하얀 눈 위에 피어난 백합도 성벽만큼이나 장엄한 얼음벽도 지극히 비현실적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은 묘하게 조화로웠는데, 마치 다른 세계의 평화를 잠깐 이 세계에 옮겨다 둔 것 같은 인상이었다.
“이게 무덤의 입구입니까?”
“어, 여기가 맞는데…….”
진의 물음에 루비드가 끄덕이며 말끝을 흐렸다. 그 석연치 않은 대답에 진이 고개를 갸웃대자, 루비드는 엔지를 돌아보며 말했다.
“꽃이 전보다 줄어들었지?”
“네, 제가 보기에도 확실히…….”
루비드와 엔지가 흐드러진 백합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흠집 하나 없는 새하얀 백합은 너른 설원 위에서 대여섯 개의 군락을 이루며 피어 있었다.
백합이 발 디딜 틈도 없이 피어 있던 작년에 비하면 확연히 줄어든 규모였다.
루비드와 엔지가 그것을 이상히 여기며 둘러보는데, 유니가 물었다.
“여기서 이제 어떻게 들어가요?”
“남부공을 불러.”
“엥?”
막연한 대답에 유니가 눈을 깜빡이자, 루비드가 무심히 덧붙였다.
“미리 말하는데 안에서 안 열어주면 그땐 포기하고 돌아가는 거다.”
루비드가 내건 조건에, 망설이던 유니는 오히려 오기가 생긴 듯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러곤 곧장 얼음벽 앞으로 가 소리쳤다.
“영감님, 제 목소리 들리세요? 영감님, 영감님? 영감님!”
유니가 애타게 불렀지만 얼음벽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던 진이 엔지에게 나직이 물었다.
“저렇게 부르면 열리는 문은 맞아?”
“그렇긴 한데, 남부공 저하께서 어떻게 판단하실지…….”
1년 전, 마지막 무덤 원정을 마치고 지상으로 돌아갈 때, 남부공은 이우라에게 약속했다.
앞으로 더 볼 일은 없겠지만, 만약 피치 못할 상황이 생기면 무덤 입구에서 자신을 부르라고. 정말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판단되면 문을 열고 협력을 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불가피한 상황과 거리가 멀고, 이걸 남부공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미지수였다.
‘역시 안 되나…….’
엔지가 얼음벽을 애타게 두드리는 유니를 보며 속으로 중얼댔다. 루비드도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러길 한참, 얼음벽이 미동도 하지 않자 루비드가 무심히 말했다.
“남부공은 너흴 만나줄 생각이 없나 보다.”
루비드의 야박한 평가에 유니가 울컥해서 그를 쏘아봤다. 그러더니 두 주먹으로 얼음벽을 내리치며 빽 소리쳤다.
“할아버지, 저 유니예요!”
유니의 목소리가 얼음벽을 타고 쩌렁쩌렁 울린 순간, 갑자기 쿠궁 하며 지면이 밀리는 소리가 났다.
그와 함께 얼음벽에 쌓여 있던 오래된 눈들이 우수수 떨어지더니, 거울처럼 맑고 매끄럽던 얼음벽 사이로 작은 틈이 벌어졌다.
문보다 조금 넓은 크기의 통로였다.
“열렸다…….”
유니는 반신반의하며 중얼대다가, 이내 기고만장해져서 엔지와 진을 향해 소리쳤다.
“열었어!”
진도 들떠서 루비드에게 물었다.
“이제 들어가면 됩니까?”
“기다리면 나자 공이 마중 나올 거야.”
아이들은 루비드의 말대로 나자의 마중을 기다렸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마중은커녕 망자의 그림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안 오잖아요.”
유니가 볼멘소리로 항의하자 루비드는 고민에 빠졌다.
그냥 알아서 오라는 건가? 하지만 저 길은 꽤 복잡했던 기억이 나는데, 무작정 가도 되나? 통로가 열린 건 들어오라는 뜻이긴 할 텐데.
루비드는 설원을 돌아보았다. 현저히 줄어든 백합의 수도 그렇고,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비드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아이들이 달달 떨면서 기다리는 것을 발견했다.
“그럼 일단 가보자.”
결국 루비드는 결정을 내렸고, 아이들은 그를 따라 얼음벽에 생긴 통로로 쭐레쭐레 걸어 들어갔다.
하지만 그들의 호기로운 결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갈림길.”
앞서가던 루비드가 우뚝 멈추며 말했다. 말마따나 그들의 앞에는 길이 다섯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대놓고 함정 같은 길을 보며 진이 물었다.
“전에도 이랬습니까?”
“어. 그래서 나자 공이 데리러 왔었어. 나갈 때도 입구까지 안내해줬고.”
루비드가 입구에서 나자를 기다린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혹시나 싶어 들어와본 루비드는 결국 급히 마음을 바꿨다.
“나가자.”
“네?”
“들어갔다가 길이라도 잃으면 어쩔 거야.”
“이거 영감님이 열어준 길이면…….”
당연히 괜찮지 않을까요?
유니는 이렇게 주장하고 싶었지만, 그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쿠웅! 둔중한 울림과 함께 발밑이 크게 흔들린 탓이었다.
“젠장, 빨리 나가!”
이변을 느낀 루비드가 아이들의 등을 떠밀었다. 아이들도 고집부리지 않고 곧장 뒤로 돌았다.
그런데 출구를 향해 달리려는 순간 그들은 덜컥 중력을 상실했다.
“어?”
엔지의 가벼운 탄성과 함께 통로에 서 있던 그들은 미끄럼틀을 탄 듯 쭈욱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수평을 이루던 통로가 갑자기 크게 기울어진 탓이었다.
얼음벽으로 이루어진 미끄러운 통로는 안쪽으로 덜컥 내려앉았고, 그래서 출구로 향해 가던 이들은 안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가는 꼴이 되었다.
“뭐야, 이건 또!”
속수무책 당황하는 아이들과 달리, 루비드는 빠르게 활강하면서도 레이피어를 빼 들었다.
이래 봬도 무덤의 붉은 하늘 아래서 지독하게 굴러온 몸이다. 루비드는 흉악한 추억들을 떠올리며 레이피어를 얼음벽에 박아넣었다.
카가각 소리가 나며 레이피어의 날카로운 끝이 얼음벽에 꽂혔다. 루비드는 팔에 힘을 주며 레이피어에 매달렸고, 그다음엔 팔을 뻗었다.
“이아악!”
“으아아!”
겨우 미끄러짐을 면한 루비드 위로 유니와 엔지의 비명소리가 쏟아졌다.
루비드는 이를 악물며 한 팔로는 유니를, 등으로는 엔지를 받았다. 얼음벽에 박힌 레이피어가 삐걱 흔들렸지만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
추락이 멈추자 루비드는 숨을 깊게 내쉬다가, 불길함을 느끼고 두리번댔다.
“……한 놈 어디 갔어?”
받은 건 유니와 엔지뿐. 진이 보이지 않는다.
미끄러지는 소리조차 더는 들리지 않아, 세 사람은 당혹스러워하며 진을 찾았다.
“저 여기 있습니다!”
그때 한참 위쪽에서 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자, 가파른 비탈 위에 매달린 진이 보였다. 그 소년은 사지를 펼치고 몸을 납작 엎드린 채 얼음벽 위에서 꿋꿋이 버티고 있었다.
“출구까지 기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가면 밧줄을 던지겠습니다!”
진은 그렇게 말하더니 정말로 어기적어기적 얼음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저게 된다고?”
“쟤 원래 못하는 것 빼곤 다 잘해요.”
루비드가 얼빠진 얼굴로 중얼대자 그의 팔에 매달린 유니가 종알댔다.
루비드는 여러모로 난 놈이라고 생각하며 점점 멀어지는 진의 엉덩이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잘 올라간다 싶던 진이 돌연 멈추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
어쩐지 불길하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잘 버티던 진이 맹렬한 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밑에서 지켜보던 루비드는 갑자기 산사태처럼 쏟아지는 진을 향해 비명을 질렀다.
“야, 뭐야!”
“밟고 있던 얼음이 부서졌습니다아아!”
“오지 마! 멈춰! 야! 멈추라고!”
하지만 아무리 소리쳐봤자 날개 없는 가련한 짐승은 속수무책 추락했고, 결국 진의 몸통박치기가 루비드 위로 작렬했다.
“크악!”
경쾌한 소리와 함께 레이피어가 박혀 있던 얼음벽마저 부서지며, 한데 얽힌 네 사람은 그대로 자유낙하를 시작했다.
“이아악!”
“으아아!”
유니와 엔지가 아까와 똑같은 발음으로 소리를 질렀고, 루비드는 꼬마들에게 깔린 채 점점 멀어지는 출구를 덧없이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미끄러졌을까.
쿵! 쿵! 쿵! 꽥.
그들은 길고 긴 활강을 끝내고 단단한 바닥과 무참히 조우했다.
“으윽…….”
그들은 아픔을 참으며 고개를 들었다. 어둡던 얼음 통로를 지나온 그들은 어느새 다시 밝은 곳으로 나와 있었다.
통로와 정 반대 방향으로 떨어졌는데 어찌 된 일인가 싶어 둘러보니, 그라샤 황궁의 화려한 응접실이 눈에 들어왔다.
“여긴…….”
엔지가 상황을 알아챈 듯 중얼대는데, 때마침 중후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밖에선 시간이 또 제법 흐른 모양이군.”
루비드와 아이들은 목소리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은 정확히 반으로 갈렸다. 루비드와 엔지는 안심하는 기색이었고, 유니와 진의 눈은 한없이 커졌다.
“여, 영감님?”
“내 어딜 보고 영감이라는 겐가?”
유니의 외침에 근사한 정장 차림의 중년, 남부공이 조소하며 대꾸했다. 그러더니 아직 바닥에 엎드린 유니에게 정중히 손을 뻗었다.
유니는 퉁명스럽게 친절한 남부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쩐지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일부러 짓궂게 씨익 웃었다.
“……말투부터 완전 영감님이에요.”
유니는 그렇게 말하며 남부공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바닥에서 일어난 유니의 키가 남부공의 어깨 아래에 닿았다. 이전보다 훌쩍 큰 유니를 보며 남부공이 놀란 표정을 짓자, 유니는 괜히 창피해 말을 돌렸다.
“듣기는 했는데 직접 보니 또 의외네요. 영감님은 말년에 슬픈 역변을 겪었던 거군요.”
“칭찬이든 욕이든 하나만 하게.”
남부공이 쯧쯧 혀를 차는 사이 청년과 소년들도 몸을 일으켰다.
“어서들 오게.”
남부공이 그들도 반갑게 맞이했다. 그런데 엔지가 마주 인사할 겨를도 없이, 루비드가 따지듯 물었다.
“공이 통로를 움직인 겁니까?”
“맞네. 기껏 문을 열어줬는데 자네들이 그냥 가려고 해서 내가 친히 안내했지.”
이 괴팍한 노인네가 뭐라는 거지?
인솔자로서 아이들을 책임져야 했던 루비드는 저도 모르게 울컥해서 되물었다.
“그냥 나자 공을 보내줬으면 되지 않습니까?”
“나도 그러고 싶었네만, 그 친구는 지금 자고 있네.”
망자도 잠을 자나?
루비드와 엔지가 의아해하는 사이, 진이 끼어들며 물었다.
“그럼 언제 일어납니까?”
진이 나서자 남부공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무언가 생각하는 얼굴로 진을 바라보더니, 이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자네, 까마귀 무리에 있던 소년이군.”
“기억하십니까?”
“기억할 수밖에. 내가 죽기 직전에 본 자들이 아닌가?”
남부공의 호탕한 목소리에 진도 어렵게 웃었다.
“그때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공께서 지켜주신 덕분에 다들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진이 고마움과 슬픔이 뒤섞인 얼굴로 말하자 남부공도 흐뭇하게 마주 웃었다.
“별말씀을. 나 또한 은혜를 갚은 것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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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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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자 공을 만나러 왔다고?”
소파에 앉은 남부공이 다소 얼떨떨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에 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네, 그 사람이 동부에 한 일에 대해 직접 사과를 받고 싶어서 왔습니다.”
“……이런 부탁이면 북부도 거절할 도리가 없었겠군.”
남부공이 루비드를 향해 중얼대자, 루비드는 모르는 척 시선을 돌리며 콧방귀를 뀌었다.
사실 남부공은 이들이 우르르 찾아와서 밖에 큰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다. 그래서 밖에 별일이 없다는 소식에 의아해했고, 진의 설명에는 이내 납득했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회복을 위해 최대의 노력을 해야 하는 법이니, 이우라도 루비드도 이 소년의 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상황을 십분 이해했지만, 남부공은 진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
“하지만 아까 말했듯 나자 공은 지금 자고 있네. 그리고 깨어나지 않을 걸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직접 보는 게 빠르겠지.”
남부공이 가볍게 손을 튕겼다. 그러자 응접실의 벽과 바닥이 켜켜이 접히며 새로운 공간이 나타났다.
거대한 얼음 조각이 놓인 넓은 홀이었다. 그런데 그 얼음 조각 안에는 사람이 갇혀 있었다. 나자 아이테르너였다.
“이, 이거 저하께서 하신 건가요?”
엔지의 물음에 남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오해를 사기 전에 서둘러 해명했다.
“나자 공의 부탁이었네.”
“왜 이런 부탁을…….”
“여기서 무슨 다른 이유가 있겠나?”
남부공이 탄식하듯 중얼댔다. 그러더니 다소 지친 얼굴로 이렇게 덧붙였다.
“새로운 망자의 왕 때문이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