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소녀와 소년과 소년의 사정청취 (3)
(206/208)
외전. 소녀와 소년과 소년의 사정청취 (3)
(206/208)
외전. 소녀와 소년과 소년의 사정청취 (3)
2022.04.21.
카르도 루벨의 완전한 죽음 후 무덤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뒤이어 새 왕이 탄생하긴 했으나 그는 빈자리를 채우는 약체에 불과했고, 그건 히엠스 그라샤의 뒤를 이은 왕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남은 강자인 사자를 가둔 왕은 그라샤 놈들에게 연이어 당한 수모에 치를 떨며 잠적해 버려서, 이후 남부공과 나자는 꽤 느긋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길을 열어주십시오. 당신들의 제국은 절대 밟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 여유는 피라미 같은 두 왕이 야심을 품으며 삐거덕 흔들리기 시작했다.
―참신한 개소리군.
남부공은 그들의 부탁을 정중히 거절했다.
하지만 나자는 신규 왕들에게도 한결같은 포악함을 보여주었다.
―죽어.
피라미 왕들이 남부공에게 다시 읍소하려는 찰나, 나자가 그들을 덮쳤다.
기습을 당한 두 왕은 순식간에 심장을 빼앗겼고 곧 강탈당한 심장과 함께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한 번은 봐줘도 되잖나?
―틈을 보일 이유는 없다.
남부공이 다소 황당해했지만 나자는 단호했다.
그는 아들에게 위협이 될 가능성은 아주 작은 불씨도 용납하지 않을 참이었다.
하지만 망자들에게도 나자 못지않은 열망이 있었다.
―길을 열어주십시오. 다른 대륙이라도 차지하게 해주십시오.
얼마 후, 새로운 왕이 다시 남부공과 나자를 찾아왔다.
이번에도 나자는 왕들을 부숴버렸다. 그러곤 뭔가 이상한 듯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왜 그러나?
―왕들이 약해졌다. 카르도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남부공의 물음에 나자가 중얼댔다.
말마따나 새로운 왕은 지나치게 약했다. 떨거지 중에서 그나마 강한 자가 왕으로 선발된 탓이었다.
―어지간한 악인이 나타나기 전까진 무난히 지낼 수 있겠군.
상황을 이해한 남부공이 고개를 주억댔다. 왕들이 잔뜩 약해졌으니, 문지기 역할도 한결 수월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대단한 착각이었다.
약한 왕은 자신에게 속한 망자를 통제할 힘도 부족했다. 그래서 생명을 탐하는 망자의 열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오히려 끊임없이 남부공과 나자를 찾아왔다.
―길을 열어주십시오.
―산 자를 먹게 해주십시오.
―밖으로 나가 생명을 느끼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애걸하는 망자의 왕은 점차 왕이라 부를 수 없는, 망자 무리의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나자는 개의치 않으며 그들을 파괴했고 어느 순간 깨달았다.
망자는 무한히 부활하지만, 망자의 왕은 심장이 부서지면 소멸한다.
그렇다면 망자의 왕을 죽여 다른 망자를 왕으로 승급시키면, 그렇게 죽이고 또 죽이고 계속 죽이면, 세상에 평화가 찾아오지 않을까?
결함을 찾을 수 없는 완벽한 논리였고, 나자는 이 발상이 꽤 마음에 들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나자는 더욱 즐겁게, 그리고 경쾌하게 망자의 왕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
.
.
“강제 성불…….”
이야기를 듣던 진이 작게 중얼댔다.
제국어와 동부어가 뒤섞인 말에 옆에 있던 사람들이 갸웃대며 쳐다봤다.
“성불이 뭔가?”
“어, 좋은 곳으로 보내준다는 뜻입니다.”
남부공의 물음에 진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옆에선 엔지가 나자의 발상에 감탄했다.
“확실히 틀린 얘기는 아니네요. 그렇게 망자의 수를 줄인다니…….”
엔지는 혼자 중얼대다가 문득 남부공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밖에 있던 백합이 많이 줄었던데, 혹시 무슨 일인지 아세요?”
“백합이 줄었다고?”
“아, 네. 예전의 절반도 안 되는 것 같았어요.”
엔지의 말에 남부공은 오히려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묘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 바람에 이야기가 끊기자 유니가 남부공을 채근했다.
“그런데 린 씨네 엄마는 어쩌다가 저 지경이 된 거예요?”
“저 친구는 욕심이 과했지. 떼를 몰 땐 도망칠 구석을 남겨둬야 하는 법인데, 망자를 박멸하려다가 도리어 역공을 당했네.”
“역공이요?”
남부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자가 갇힌 거대한 얼음덩어리를 바라보았다.
나자는 아들 내외의 행복을 위해 왕 사냥에 나섰다.
태생부터 정복자인 나자에게 오합지졸은 차근차근 격파당했다. 하지만 생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었다.
도망 다니던 망자들은 멸망 수준의 위협 앞에서 점차 두려움을 상실했다. 결국 그들은 태세를 바꿔 나자에게 반격을 가했고, 태움과 그을림의 왕은 유효타를 넣는 것에 성공했다.
스스로 재가 되어 나자의 안으로 파고든 것이었다.
“레나 루벨이 당한 수법이잖아.”
가만히 듣던 루비드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댔다.
무패를 자랑하는 레나지만, 그도 망자의 왕 때문에 딱 한 번 위험했던 적이 있다. 히엠스 그라샤의 재를 삼키고 스러졌을 때였다.
“맞네. 나자도 그 잿가루엔 수가 없더군. 집행자처럼 정신을 잃지는 않았지만, 착란이 생겨 현재와 과거를 혼동했네. 아무래도 망자들이 나자를 조종해서 밖으로 나가려는 것처럼 보였네. 그래서 나자는 자기가 허튼짓하기 전에 가둬달라 했고, 지금 저 모양이 된 걸세.”
남부공의 설명에 루비드와 아이들은 복잡한 눈으로 얼음 속 나자를 바라보았다.
더없이 흉포하지만 아들에겐 맹목적으로 헌신하는 저 모습을 이기적이라고 해야 할지 숭고하다고 해야 할지 그들은 알 수 없었다.
특히 나자를 만나려고 여기까지 온 진은 생각이 많아 보였다.
“어떻게 깨울 방법은 없습니까?”
“사과받지 못한 건 유감이지만 이쯤 물러나 주게나. 이미 죽은 사람이고 편히 쉬지도 못하는 자일세.”
진의 물음에 남부공이 완곡히 거절했다. 그러자 진은 고개를 저으며 정정했다.
“아뇨, 사과를 받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어머니가 이런 상태라면 린 형님이 너무 가엽지 않습니까?”
순간 남부공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는 허를 찔린 사람처럼 소년을 바라보더니, 이내 풀어진 얼굴로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내가 자네를 얕봤군. 사과하겠네.”
일평생 사과할 일 없던 자가 자세를 낮췄지만, 정작 진은 그 무게를 모르는 듯 선선히 사과를 받아주었다.
남부공은 그마저 마음에 드는지 너그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나자를 깨울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닐세.”
“치사하게 간 보신 거예요?”
유니가 어김없이 꼬투리를 잡자 남부공의 표정도 도로 띠꺼워졌다.
“매도하지 말아라. 부담이 따르는 일이라 상정하지 않은 것뿐이니.”
“부담이요?”
“왜, 집행자도 같은 상황에서 동부공의 도움을 받지 않았느냐. 나자도 그렇게 깨울 수 있다.”
“그럼 문제없잖아요?”
“문제는 깨우러 간 자가 상당히 고생해야 한다는 점이지. 그래서 함부로 권하지 않았다. 사과를 받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굳이 모험까지 할 필요는 없으니.”
하지만 진에게 나자를 구해낼 의지가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렇게 생각한 남부공의 시선이 진에게 닿자, 옆에서 듣던 루비드가 끼어들었다.
“애한테 모험을 시키겠다는 말입니까?”
인솔자로서 이들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루비드는 남부공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가 하라 말라 할 수는 없는 일이지. 다만 하겠다면 안전은 책임지겠네.”
“하겠습니다!”
“저도요!”
“야!”
남부공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과 유니가 손을 번쩍 들며 자진했다.
두 녀석의 무모함에 루비드가 버럭 소리쳤지만 놈들은 이미 들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염려 말게. 다치는 일은 없게 할 테니.”
“애당초 공이 직접 하면 되지 않습니까?”
“내가 의식을 잃으면 누가 여길 지키나?”
남부공이 정신을 잃으면 균열을 막은 얼음벽이 사라지고, 대신 착란이 온 나자가 깨어나 망자들과 함께 날뛰게 될 터였다.
반박할 말이 없어진 루비드는 결국 팔짱을 끼고 입술을 깨물었다.
루비드가 차라리 내가 가겠다고 나섰지만 소용없었다.
진과 유니는 이미 마음이 앞서 있었고 엔지는 저 야생마들을 뒤따를 생각에 한숨만 폭 내쉬었다.
잠시 후 유니와 엔지, 그리고 진은 나자가 갇힌 얼음 앞에 앉았다.
“아주 작은 위험이라도 감지되면 나오게. 내가 직접 꺼내면 다칠 수 있으니 그대들의 의지로 나와야 하네.”
이런저런 설명을 마친 남부공이 마지막으로 강조했다. 아이들은 기꺼이 끄덕였고, 남부공은 가장 먼저 진의 머리로 손을 뻗었다.
남부공이 반대편 손을 나자가 갇힌 얼음에 얹자 멀쩡하던 진이 스르르 눈을 감고 쓰러졌다.
“안으로 들어간 거예요?”
“그렇다.”
유니의 물음에 남부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엔지에게 손을 뻗었다.
이윽고 엔지도 얌전히 쓰러졌고, 루비드는 늘어진 두 소년을 바로 눕혔다.
남부공이 끝으로 유니에게 손을 뻗으려는데 유니가 돌연 물었다.
“그런데 린 씨네 엄마는 언제 이렇게 된 거예요?”
“글쎄, 시간이 멈춘 곳이라 언제라고 말하기 어렵군. 며칠 전 같기도 하고 이미 백 년쯤 지난 것 같기도 해서.”
“혼자 심심하지 않으셨어요?”
유니의 물음에 남부공은 그저 빙긋 웃었다. 분명 젊은 얼굴인데 노인일 때보다 더 깊은 세월이 느껴졌다.
유니는 남부공의 낯선 얼굴과 그럼에도 친숙한 눈동자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작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저 영감님한테 할 말 있어요.”
“말하라.”
“다녀와서 할게요.”
유니의 한결같은 얄미움에 남부공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곤 손을 뻗어, 유니의 의식도 한 사람의 깊은 내면으로 옮겨주었다.
.
.
.
“오?”
다시 눈을 떴을 때, 진은 파란 하늘을 보고 있었다.
‘들어온 건가?’
진은 뒤바뀐 풍경을 두리번대며 돌아보았다. 이곳은 높고 험준한 산이었다. 절벽과 계곡이 굽이굽이 이어지는 산세가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기도 했다.
‘유니랑 엔지는 어디 있지?’
챙강!
친구들을 찾는 진의 귓가에 돌연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렸다. 무기를 맞대는 소리였다.
진은 반사적으로 몸을 낮추고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절벽 끝에서 동부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서로? 아니, 서로 싸우는 게 아니다. 대여섯 명이 한 명을 공격하는 거였다.
그리고 진은 혼자 다수를 상대하는 사람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나자 아이테르너!’
설마 바로 만날 줄이야. 진은 깜짝 놀라 숨을 곳을 찾았다. 하지만 이 높은 절벽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었다.
그래서 진의 모습이 고스란히 노출됐지만, 저들은 진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양 서로 싸우기에 바빴다.
‘내가 안 보이나?’
진은 주춤대며 몸을 일으켰다. 역시 저들에게 진은 없는 사람이었다.
숨을 필요가 없는 걸 깨달은 진은 조심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정신없이 싸우는 나자의 얼굴에 다시금 헛숨을 삼켰다.
‘어려.’
얼음 속에 갇힌 나자와 달리, 눈앞에 있는 나자는 젊다 못해 어려 보였다. 기껏해야 스무 살 남짓한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검을 휘두르는 나자의 기세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나자를 에워싼 다른 이들도 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제복을 입은 자들의 맹공에 나자는 점점 상처를 입었고, 결국 벼랑 끝까지 몰렸다.
수세에 몰린 나자가 자신에게 검을 겨눈 자들에게 으르렁댔다.
“너희가 감히…….”
‘기사들이 반란을 일으킨 건가?’
진은 애써 상황을 추측했다. 하지만 이어진 대화를 들어보니 뭔가 이상했다.
나자에게 검을 겨눈, 진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소년이 입을 열었다.
“너무 서운해하지는 마. 원래 가장 앞서가는 사람이 공격받는 법이잖아.”
“멍청한 것들, 내가 없으면 너희끼리 죽이게 될 거다.”
“그래도 네가 없으면 우리 중 한 명에게 기회가 오겠지.”
소년은 그렇게 말하며 검을 뒤로 당겼다. 그러곤 애석한 미소와 함께 쐐기를 박았다.
“유감이야, 누나. 다음 생엔 만나지 말자.”
소년, 나자의 동생은 그렇게 말하며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그대로 나자를 베어 넘길 작정이었다.
그런데 동생이 사정거리 안으로 당도한 순간, 이미 지쳤다고 생각한 나자가 몸을 비틀었다.
그는 공격을 피하며 도리어 동생을 검으로 긁어 버렸다.
“아직도 저항을……!”
피가 솟구치자 나자의 다른 형제들이 부득 이를 갈며 달려들었다.
진은 다시 시작된 싸움을 지켜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등 뒤에, 저 절벽까지 이어지는 길에 북부 제복을 입은 자들이 이미 너덧 명이나 쓰러져 있었다. 나자를 공격하다가 역공을 당한 그의 형제들이었다.
‘형제끼리 저렇게 싸움을…….’
진은 미처 몰랐지만, 이건 린을 제외한 역대 동부공의 숙명이었다.
동부공들은 수많은 형제와 경쟁한 끝에 작위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권능을 얻기 전에 적게는 대여섯 명부터 많게는 스무 명 가까이 후계자를 낳았다. 권능을 얻으면 더는 후사를 볼 수 없는 특유의 저주 때문이었다.
나자에게도 열세 명이나 되는 배다른 형제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가장 유력한 차기 동부공을 합심해서 해치우려 하는 중이었다.
챙 하고 깨지는 소리와 함께 싸움이 멎었다. 그 소리는 형제들의 맹공에 나자의 검이 튕겨 나가는 소리였다.
“끈질기긴.”
나자의 언니가 혀를 차며 중얼댔다.
드디어 싸움이 끝난 것처럼 보였다. 나자는 지칠 만큼 지쳤고 부상도 심했다. 게다가 이제는 무기도 없었다.
그럼에도 남은 형제들은 방심하지 않고 거리를 둔 채 나자를 경계했다.
그들의 신중함에 나자는 조용히 이를 갈다가 낮게 중얼댔다.
“……매일 기도해라.”
“기도?”
나자의 언니가 비웃자, 나자도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으르렁댔다.
“내가 살아 돌아오지 않기를.”
나자는 그 말을 끝으로, 스스로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아!’
진은 놀라서 추락하는 나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었다.
.
.
.
‘집?’
어느새 진은 어둑한 방에 들어와 있었다.
게다가 이 방의 형태는 진의 눈에 몹시 익숙했다. 제국이 아니라 동부의 양식으로 지어지고 꾸며진 방이었다.
‘어……, 아!’
어리둥절해하던 진은 곧 주먹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내리쳤다. 아까 그 절벽, 왠지 산세가 익숙하다 싶었다.
나자가 공격당한 곳은 제국 동부의 국경이었다.
‘절벽에서 떨어져서 우리나라로 넘어왔구나!’
진이 상황을 비로소 이해한 순간, 아주 작게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몸에 붕대를 감은 나자가 방 안에서 날붙이를 챙기는 소리였다.
보아하니 이제 막 정신을 차린 모양인데, 나자는 눈을 뜨자마자 숨을 죽이고 무기부터 찾았다.
마침 바닥엔 붕대를 자르느라 나와 있는 가위가 놓여 있었다. 나자는 그것을 들고 조용히 문 옆으로 몸을 붙였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키가 큰 사람이 방으로 들어왔다.
“어?”
그 사람은 이부자리가 비어 있는 걸 보고 멈칫 놀랐다.
그 순간 문 옆에 숨어 있던 나자가 그의 목 아래로 가위를 들이밀었다.
“뭐, 뭐야?”
방으로 들어온 사람이 당황해서 소리쳤다. 당연히 동부어였다. 하지만 동부어를 모르는 나자는 제국어로 낮게 추궁했다.
“넌 누구냐?”
“자, 잠깐만 이거 좀 위험한데, 야, 나 그래도 도와준 사람인데…….”
하지만 상대방은 계속해서 동부어로 주절댔고, 그걸 알아듣지 못한 나자는 초조함에 가위를 더 꽉 움켜쥐었다.
애써 숨기고 있지만 나자의 호흡은 불규칙했다. 베이고 찔린 데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격류에 휩쓸린 몸은 그야말로 만신창이였다.
당장에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나자는 오히려 상처 입은 맹수처럼 발톱을 세우고 으르렁댔다.
진이 긴장해서 지켜보는데, 정작 목에 날붙이가 들어온 사람은 태연했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어색한 제국어를 구사했다.
“괜찮습니다. 해치지 않겠습니다.”
익숙한 언어에 나자의 일그러진 미간이 조금 펴졌다. 그리고 진은 비로소 깨달았다.
‘엇.’
방으로 들어온 그 사람은 린과 꼭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