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소녀와 소년과 소년의 사정청취 (4) (207/208)


외전. 소녀와 소년과 소년의 사정청취 (4)
2022.04.25.


나자가 청년을 향해 나직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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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어를 할 줄 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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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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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가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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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지금은 가위에 찔릴까 봐 무서워하는 사람.”

청년의 대답에 나자의 입이 굳게 닫혔다.

말로는 무섭다는데 전혀 겁먹지 않은 투였다.

부상자 따위 마음만 먹으면 제압할 수 있다는 건가? 실제로 옷 너머로 느껴지는 청년의 몸은 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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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어쩌다 그렇게 다친 거야?”

잠시 궁리하던 나자는 청년의 물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을 몰아붙이던 형제들이 떠오른 탓이었다.

자신의 처지를 떠올린 나자는 물음에 답하는 대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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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도운 것은 훗날 사례하겠다. 무기를 빌려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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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

나자는 이 청년에게 무기가 있을 거라 확신했다. 이 단단한 어깨는 분명 병장기를 다루는 자의 것이었다.

그런데 청년은 무기를 내주는 대신 웃으며 나자의 팔을 비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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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몸으로 무슨 무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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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윽!”

청년이 팔을 강하게 잡자 나자는 너무 쉽게 가위를 놓쳤다. 그뿐만 아니라 그대로 덜컥 무너져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여기저기 상처 입고 차가운 강물에 휩쓸렸던 나자는 크게 쇠약해져 있었다.

이대로면 산에서 내려가기도 전에 쓰러지겠다 싶어, 청년은 일부러 가혹하게 다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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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나을 때까지 얌전히 계시죠. 기껏 살려낸 사람을 산길에서 시체로 보긴 싫으니까.”

청년은 그렇게 말하며 쓰러진 나자에게 팔을 뻗었다. 일으켜서 이불로 옮겨줄 요량이었다.

그런데 나자의 어깨에 손이 닿는 순간, 청년의 시야가 뒤집혔다. 나자가 있는 힘껏 청년의 몸을 메쳐버린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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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메…….’

얌전히 상황을 지켜보던 진은 방구석으로 날아가는 청년을 보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앉은 자세에서 사람을 저렇게 넘겨버리다니.

게다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나자는 나동그라진 청년에게 달려들어 연속기를 퍼부었고, 그걸 적당히 말리려던 청년도 호되게 맞고 또 맞던 끝에 결국 전력을 다해 응수했다.

나자와 청년은 살벌하게 몸싸움을 벌였고, 진은 주먹질과 발길질이 난무하는 방구석을 보며 심각하게 중얼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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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래놓고 나중에 애를 만든다고?’

사랑엔 국경도 없다지만 저건 좀 심하지 않나.

진이 질린 눈으로 구경하길 한참, 이내 만신창이가 된 나자와 청년은 그대로 방바닥에 널브러졌다.

청년은 입술이 터져서 피가 났고 나자는 완전히 지쳐 숨을 헐떡거렸다.

겨우 나가떨어진 나자를 보며 청년이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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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무슨 산짐승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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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옷 어디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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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천상으로 돌아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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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개소리야…….”

나자의 면박에 청년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에 나자는 인상을 썼다.

저렇게 얻어맞고 웃다니, 다른 꿍꿍이가 있거나 맞는 걸 즐기거나 둘 중 하나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시선에 경멸이 가득했지만, 청년은 개의치 않고 더 짙게 웃었다. 그는 이 사나운 처녀가 제법 흥미로운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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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이름이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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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서 뭐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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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뭐 해, 기왕 이렇게 됐으니 이름 정도는 알자는 거지.”

나자가 아무리 표독하게 쏘아붙여도 청년은 여상히 능글맞았다.

그 모습에 나자의 얼굴은 더 일그러졌고, 몰래 훔쳐보던 진도 심정이 다소 애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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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 형님네 아버지는 허랑방탕한 분이셨구나…….’

자기 옷을 찾는 나자에게 천상으로 돌아갈 거냐고 되묻는 것부터가 그렇다.

나자가 제국인이라 저 말을 못 알아들어 다행이지, 진의 귀에는 대놓고 추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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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주기 싫으면 됐어. 나는 단이다. 나쁜 짓 할 생각 없으니까 몸 나을 때까지 쉬다 가.”

청년, 단이 상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역시나 린과 꼭 빼닮은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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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후 몇몇 장면이 진의 눈앞을 빠르게 지나갔다.

단의 집은 깊은 산속에 덩그러니 놓인 오두막이었다.

사교성 좋은 젊은 남자가 왜 이런 곳에서 은둔 중인지는 알 수 없지만, 덕분에 나자는 형제들의 추격을 피해 몸을 회복할 수 있었다.

완벽히 고립된 그곳에서 두 사람은 기묘한 동거를 이어갔다.

단은 매사 장난을 치면서도 다친 나자를 성심성의껏 돌봐주었다.

나자는 신세를 지는 주제에 한결같이 매섭게 굴었지만, 그렇다고 고마운 마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증거로 나자는 몸이 좀 나아지자 새벽에 활을 들고 나가서 작은 사냥감을 잡아 왔다. 그러곤 그걸 단의 방문 앞에 말없이 널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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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잡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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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그래놓고 아침에 나온 단이 놀라 묻자 모르는 척 콧방귀를 뀌었다.

진은 그 모습이 고양이가 주인에게 사냥감을 선물하고 시치미를 떼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단도 비슷한 인상을 받았는지 나자의 선물을 기쁘게 받았다.

이후로도 비슷한 일이 몇 번 더 있었다.

하지만 단지 그뿐, 나자는 단과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몸이 낫기만을 조심히 기다렸다.

베인 상처가 아물고, 강물에 휩쓸렸던 몸이 다시 기력을 찾기까지 한 달가량이 걸렸다.

이곳에 온 지 꼭 한 달째 되는 날, 나자는 그만 돌아가기로 했다.

몸도 다 나았으니 저놈이 붙잡을 핑계도 없고 설령 붙잡아도 이제는 단박에 메치고 가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슬슬 떠날 준비를 하려는데, 단이 마을의 장날이라며 산에서 내려갔다.

마침 집도 비었겠다 가볍게 떠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막상 나자는 그 텅 빈 오두막을 선뜻 떠나지 못했다.

아무렴 신세를 졌는데 말은 하고 가야겠지.

나자는 스스로에게 핑계를 대며 빈집을 지켰다. 그리고 평소 비좁던 오두막이 그날따라 넓게 느껴지는 것에 당황했다.

어느새 밤이 깊었고 깜빡 잠이 들었던 나자는 달빛에 깨어났다.

유난히 달이 밝은 날, 창문을 통해 스미는 빛이 나자에게 드리우고 있었다.

그것에 홀린 듯 밖으로 나온 나자는, 처마 밑 마루에서 달을 향해 앉은 단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장에 다녀온다던 그 녀석은 혼자 소담한 술상을 차려놓고 달을 벗 삼아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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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일어났어?”

인기척을 느낀 단이 나자를 돌아보며 물었다.

대답이 궁했던 나자는 무어라 말하는 대신 조금 떨어진 곳에 대충 몸을 말고 앉았다.

나자의 침묵이 익숙한 듯 단은 술병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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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마실래?”

나자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방으로 들어가지도 않았다. 다가오지도 않고 멀어지지도 않고 늘 그렇듯 적당한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단은 개의치 않았다. 저렇게 멋진 달을 혼자만 보는 건 손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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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여기서 뭐 하는 거냐?”

단이 다시 술잔을 기울이는데 문득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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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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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은 아닌 것 같은데.”

나자가 단에 관해 묻는 건 처음이었다. 그 첫 질문에 단이 빙그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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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관심 있어?”

얼토당토않은 반문에 나자의 시선이 차게 식었다. 경멸을 당했지만 단은 그럼에도 즐거운 기색이었다.

그래서 눈을 흘기던 나자도 다시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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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집에서 가문의 문장을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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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문장? 아, 명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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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몰락 귀족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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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양친 모두 멀쩡하셔. 아버님은 요직에 계시고.”

단은 덤덤히 말하다가 일부러 허세를 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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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 봬도 사대부 집안 외아들이야, 나.”

그렇게 말하는 투가 왠지 씁쓸함을 감추려는 것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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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지금은 거지꼴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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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이랑 의절했어.”

단이 술잔을 비우며 고백했다. 그러곤 후련하게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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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진 대로 살기 싫었거든.”

단의 대답에 나자는 알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란디스 그라샤에도 있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주제에 자유를 꿈꾸는 철없는 녀석. 지금까지 봐온 단을 보면, 나자는 이 실토가 그리 놀랍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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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혼자 수긍하는 나자에게 단이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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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어쩌다 여기까지 왔어?”

단에게 처음으로 질문을 꺼낸 나자와 달리, 단은 전부터 나자를 궁금해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자는 일체 무시하며 대답해주지 않았다.

나자는 전에 그랬던 것처럼 못 들은 척할까 하다가, 내리는 달빛에 저도 몰래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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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너랑 반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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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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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계자 자리를 놓고 경쟁하다 형제들에게 배신당했어.”

단이 가문을 박차고 나왔다면 나자는 가문의 경쟁자들에게 쫓겨났다.

서로 묘하게 엇갈리는 처지에 단은 웃음을 터트렸고 나자도 실소 비슷한 걸 잠깐 머금었다.

뜻밖의 접점에 단이 한결 풀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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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후계자 같은 게 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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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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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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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걸 생각한 적 없어. 이게 내 의무라고 배웠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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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진짜 재미없다.”

단이 웃음을 터트리자 나자의 눈빛이 도로 험악해졌다. 나자도 질 수 없다는 듯 뾰족한 목소리로 단을 타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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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넌 집 나와서 하는 게 고작 이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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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이라니…….”

하지만 단은 역시 일말의 타격도 받지 않았다. 그는 나자의 표현을 오히려 재미있어하더니 허심탄회 속내를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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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만간 여행을 갈 거야. 여기가 대륙 동쪽 끝이니까, 서쪽 끝까지.”

그래서 단은 일부러 국경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서 제국어를 배우고 자금을 모아 떠날 작정이었다. 어머님이 언제 사람을 풀지 몰라 마을로 자주 내려가지도 못하는 신세지만, 단은 목표를 위해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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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은 엄청 넓고 신기한 것도 많다며. 모래로 된 산과 눈과 얼음으로 된 섬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 특히 얼음으로 된 섬은 밤하늘이 녹색으로 물들기도 한다는데, 한 번 보면 평생 잊지 못할 정도라고 들었어. 나는 여기서는 소문으로만 알 수 있는 것들을 전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단은 소년처럼 들떠서 자신이 전해 들은 세상의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았다.

그렇게 떠들기를 한참, 나자는 아까부터 말이 없었다.

단은 나자가 혹시 잠들었나 싶어 옆을 돌아보았다.

나자는 양팔로 자신의 무릎을 끌어안고, 긴 머리를 옆으로 늘어트린 채 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용히 경청하는 나자의 황금색 눈동자가 단을 담았고, 단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달처럼 깊었다. 그날은 만월이었다.

***

진이 나자의 과거를 지켜보고 있을 때, 엔지는 낯선 공간에서 주위를 두리번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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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는 어디 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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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다른 데 떨어졌나 봐.”

다소 긴장한 엔지와 달리 옆에서 대답하는 유니는 매우 태연해 보였다.

유니의 한결같은 대범함에 엔지가 신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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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정말 무서운 게 없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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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한 자릿수일 때부터 전쟁터를 돌아다녔는데 새삼 무서울 리가.”

유니는 그렇게 말하며 어두운 복도로 걸음을 옮겼고, 엔지는 놀라서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떨어진 공간은 고요했다. 게다가 앞으로 이어지는 긴 복도는 그라샤 황궁을 본뜬 모양새였다.

그 익숙하고도 낯선 곳을 걷던 엔지가 불현듯 유니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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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알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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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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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온 이유. 누나 말까지 어기면서 그냥 온 건 아니잖아.”

레나와 린은 이들의 무덤행을 반대했다. 그럼에도 이우라를 통해 여기까지 온 건 두 사람에 대한 배신이나 다름없었다.

린의 말을 입맛대로 곡해하는 진은 그렇다 쳐도, 레나의 말을 착실히 따르던 유니가 일탈을 감행한 건 결코 예삿일이 아니었다.

엔지는 핵심을 짚자 쉽게 유니는 난처한지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곤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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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영감님한테 보여주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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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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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영감님이…….”

막 운을 떼던 유니는 말을 멈추고 정면을 주시했다.

복도 저편에 웬 사람이 서 있었다. 제국의 것도 동부의 것도 아닌, 기묘한 복식을 한 중년 남자였다.

나자와 별 접점이 없어 보이는 남자의 등장에 유니와 엔지는 함께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길 잠깐, 엔지가 돌연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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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 나자 공에게 들어간 망자 왕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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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자 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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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옷, 책에서 본 적 있어.”

엔지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저 남자가 입은 하얗고 치렁치렁한 가운과 몸통에 두른 보석 띠. 저건 수천 년 전, 소위 제사장이라 불리던 자들의 예복이었다.

엔지가 남자의 정체를 추측하는데, 그 남자가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냅다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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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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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다!”

망자의 왕이 꽁무니를 빼고 달아나는 모습에 유니가 바락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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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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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잡으라고?”

엔지가 당황해서 되물었지만 유니는 두말하지 않고 튀어 나갔다.

머뭇대던 엔지도 결국 그 뒤를 따랐고, 난데없는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고요하던 복도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특히 과격한 건 유니의 발소리였고, 멀리서 앞서가는 망자의 왕은 복도 위를 유령처럼 스치며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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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도망치는 거야!?”

유니는 무작정 쫓아가면서도 타당하게 의문을 품었다.

엔지의 추측이 맞다면 저건 망자의 왕. 자고로 망자의 왕은 엄청나게 무섭고 강한 놈들이었다.

그에 옆에서 달리던 엔지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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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체라고 했잖아!”

나자의 분탕으로 대가 거듭 바뀐 탓에 지금 망자의 왕은 일반 망자와 다를 바 없이 약했다.

그래서인지 저것은 밖에서 찾아온 불청객을 보자마자 냅다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달리기를 한참,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복도가 돌연 휘어졌다.

유니도 미끄러지듯 몸을 틀었고 직후 쏟아진 빛에 질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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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윽!”

강렬한 눈부심에 유니와 엔지는 급히 앞을 가렸다. 그렇게 견디길 얼마, 두 사람은 천천히 눈을 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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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또 어디야?”

복도 끝에 나타난 곳은 돔 형태의 넓은 공간이었다.

천장은 하늘을 향해 개방되었고, 둥글게 돌아가는 벽면엔 온통 하얀 커튼이 늘어져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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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주위를 둘러보던 엔지가 반신반의하며 중얼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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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힐 황제의 화랑이야.”

엔지는 그렇게 말하며 늘어진 커튼을 걷었다.

그 안에는 금발의 황제가, 왕이던 시절의 레지나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이곳에서 옛 황제의 잔상과 마주한 엔지는 적잖이 당황했다. 동시에 흥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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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이 무너지면서 다 소실된 것들인데…….”

4년 전, 니힐과 클라비스가 죽던 날 황제의 화랑도 무너졌다. 망자들이 일으킨 화재와 붕괴 때문이었다.

중요한 사료를 발견한 엔지는 눈을 빛내며 커튼을 걷었다. 이걸 현실로 옮겨갈 수는 없으니 잘 보고 기록으로 남길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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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좀 도와줘! 커튼을 다 열어줘!”

엔지의 부탁에 유니도 그를 따라 무겁게 내려진 커튼을 휘감아 묶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벽면에 감춰쳐 있던 레지나의 초상화들이 하나둘 드러났다.

왕으로 집권하던 시절, 왕위를 계승 받던 날, 게다가 어릴 때 모습까지 온갖 초상화가 전부 그곳에 있었다.

그 다채로운 모습이 엔지를 더 들뜨게 했다. 그는 매사에 무심하고 잔혹하던 황제가 자신의 과거를 어떤 심정으로 간직했는지 알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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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이 사람…….”

엔지는 유니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유니도 커다란 그림을 앞두고 있었는데 그 그림엔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을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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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비스 전하.”

엔지는 유니의 옆으로 다가가 신음하듯 중얼댔다.

유니가 발견한 초상화에는 금발의 레지나와 클라비스가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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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비스의 웃는 얼굴이 엔지의 마음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엔지가 홀린 듯 옛 스승의 초상화를 바라볼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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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은 누구인가……?”

멀리서 철판을 긁는 듯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니와 엔지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화랑 저편에, 백의를 입은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아까 도망친 망자의 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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