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소녀와 소년과 소년의 사정청취 (5) (208/208)


외전. 소녀와 소년과 소년의 사정청취 (5)
2022.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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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은 누구인가……?”

망자의 왕이 물었다.

낯선 존재의 물음에 유니는 엔지를 돌아보았고, 엔지는 조심히 입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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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우리는 나자 공을 깨우러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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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산 자인가?”

왕이 나직이 되물었다. 어쩐지 의미심장한 물음에 엔지는 저도 모르게 주춤했다.

그러자 왕은 눈을 빛내며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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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는 없는가? 설마 그렇게 둘이 온 건 아니겠지?”

아까 마구 도망쳤던 왕은 판단을 마쳤다. 숨어서 유니와 엔지를 충분히 살펴본 후 저들이 사냥꾼이 아니라 사냥감이라는 확신에 모습을 드러낸 거였다.

망자 왕의 돌변에 엔지가 당황해서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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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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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할 것 없다. 아까 기세등등하게 쫓아온 건 그대들이 아니었나.”

그러나 망자의 왕은 개의치 않고 옷자락을 흔들며 다가왔다.

그가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자 엔지는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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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세요. 이 이상 가까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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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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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가 물어요.”

영문 모를 말에 망자의 왕은 어리둥절해졌고, 유니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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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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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컥!”

퍼억! 준비된 흉기 유니가 망자 왕의 안면을 검집으로 무자비하게 후려쳤다.

눈 깜짝할 사이 날아온 기습에 망자의 왕이 덜컥 몸을 꺾었다.

유니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내려온 왕의 머리를 돌려차고 기울어진 왕의 몸통을 내리찍고 쓰러진 왕의 등짝에서 콩콩 발까지 굴렀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망자의 왕은 대처도 못 한 채 가련히 짓밟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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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도망치나 했더니 진짜 약하네.”

잠시 후, 유니가 이마에 맺힌 땀을 상쾌하게 닦으며 말했다. 그러곤 바닥에 쓰러진 왕을 향해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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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주제에 우리가 약해 보이니까 기어 나온 거야? 그 와중에 자기가 더 센 거 같으니까 겁주고? 와, 내가 더 창피해. 혀 깨물고 죽고 싶을 만큼 창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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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방진……!”

유니의 횡포에 망자의 왕이 버럭 성을 내며 불을 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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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앗!”

갑작스러운 열기에 유니가 엔지를 밀며 물러났다. 그 사이 망자의 왕은 사람의 형상을 벗고 허공으로 파라락 날아올랐다.

망자의 왕이 거대한 악충으로 변했지만 유니와 엔지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이미 어린 시절 두엄의 궁에서 실컷 본 모습이었다.

망자의 왕이 실체를 드러내자 엔지가 유니에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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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 이길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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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노력이 날 배신하지 않으면.”

긴장한 엔지와 달리 유니는 자약하게 웃으며 검을 뽑았다.

유니의 자신만만한 모습에 망자의 왕이 화를 내듯 불덩이를 집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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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피해!”

유니는 엔지를 밀며 망자의 왕에게 달려들었다.

날개를 가진 망자의 왕은 날아오르며 불덩이를 토해냈고, 유니는 대범하게 도약하며 검을 휘둘렀다.

그 바람에 황제의 화랑에 불이 옮겨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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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잠깐만! 여기서 싸우면 안 돼!”

그걸 본 엔지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아직 여기 있는 초상화를 다 살펴보지 못했다. 평생 다시 못 볼 유산을 이렇게 허망하게 잃을 순 없었다.

그래서 다급히 유니를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애당초 불을 퍼트리는 쪽은 모기처럼 빙빙 도는 망자의 왕이었다.

속수무책 지켜보던 엔지의 눈에 문득 클라비스의 초상화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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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레지나 왕과 클라비스 왕자의 초상화 주위로 불붙은 커튼이 일렁였다.

그걸 본 엔지는 저도 모르게 달려갔다.

다른 건 몰라도, 어차피 실체조차 없는 의식의 조각이라도 왠지 저건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무작정 클라비스의 초상화로 달려가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펑 하는 폭발음이 들려왔다.

놀라서 돌아보니 머리카락이 그을린 유니가 검으로 자신을 엄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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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씨. 위험하게…….”

불덩이가 엔지를 향해 날아오자 유니가 막아준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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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미안.”

엔지가 급히 사과했다.

유니는 그런 엔지와 그가 등진 초상화를 빠르게 번갈아 보더니, 이내 누그러진 목소리로 중얼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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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어. 중요한 거면 가서 챙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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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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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서 후회하지 말고 얼른 챙기라고.”

엔지는 얼떨떨해하면서도 돌아서서 초상화를 꺼냈고, 유니는 차분히 심호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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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자랑 싸우는 거 생각보다 까다롭네.’

망자 하나에 사람 셋이면 선방이라고 했나?

아가씨는 이런 놈들이랑 매일 그렇게 싸웠구나.

유니는 레나의 위대함을 새삼 깨닫고 픽 웃었다.

아가씨처럼 되고 싶었다. 그래서 단련했다. 손에서 매일 피가 나도록, 동부의 정규기사들도 질릴 만큼 혹독하게.

그렇게 단련하고 또 단련해서 어느 정도 강해졌다는 확신이 생기면, 그때는 영감님을 만나고 싶었다.

왜냐하면 아직 기억하기 때문이다. 서부의 깊은 숲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남부공의 마지막 모습을.

그때 그가 홀로 숲에 온 이유는 유니를 데려가기 위해서였다. 때문에 그 일은 유니에게 잊을 수 없는 빚으로 남았다.

나 때문에 영감님이 죽었다거나, 내가 영감님을 살릴 수 있었다는 생각 따윌 하는 건 아니다.

다만 기회가 된다면 보여주고 싶었다.

그때 당신의 죽음을 무력하게 바라보던 아이가 이렇게 자랐다고, 그러니까 조금은 자랑스러워해도 된다고.

호흡을 가다듬은 유니가 돌연 검을 늘어트렸다. 대신 한 손으로 검을 잡고, 같은 쪽 발을 뒤로 뺐다.

검을 들고 창던지기 자세를 취하는 소녀를 보며 망자의 왕은 반신반의하며 중얼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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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던질 셈인가?’

저런 어설픈 자세로 뭘 어쩌겠다는 건지.

망자의 왕이 의심하는데, 유니가 정말로 검을 집어 던졌다. 짧은 손잡이를 잡고 던진 검은 날쌘 구석 없이 나뭇가지처럼 붕붕 돌며 큰 호선을 그렸다.

그걸 피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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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청한 것!’

그래서 망자의 왕은 유니를 비웃으며 몸을 낮췄다. 그런데 검을 피했다 싶은 순간, 그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망자 왕의 위치가 낮아진 틈을 노려 벽을 차고 도약한 유니였다.

콰앙! 힘껏 뛰어오른 유니가 망자 왕의 안면을 무릎으로 찍으며 그것을 바닥으로 떨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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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았다.”

유니는 바닥에 널브러진 망자 왕의 날개를 밟아 꺾었고, 그 사이 엔지가 멀리 날아간 유니의 검을 주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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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녀석만 없애면 해결이지?”

유니가 검을 건네받으며 중얼댔다. 그때 유니는 나가서 영감님한테 한껏 으스댈 생각에 이미 들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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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을 치는 건 처음이라 좀 어색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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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하지만 이건 어차피 죽은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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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엔지의 부추김에 유니는 가볍게 검을 치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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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잠깐…….”

그렇게 처형이 거행되기 직전, 망자의 왕이 절박하게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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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 클라비스!”

익숙한 이름에 엔지가 움찔 반응하고 유니도 팔을 멈췄다.

그 모습에 확신을 얻은 듯 망자의 왕이 빠르게 지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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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클라비스 그라샤를 알고 있겠지. 거래하자, 나를 살려주면 그를 만나게 해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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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개수작이야?”

유니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혀를 찼다.

유니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엔지는 아니었다.

엔지는 클라비스를 정확히 호명한 망자의 왕을 바라보며 반신반의 중얼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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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비스 저하는 이미 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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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마찬가지다.”

망자 왕이 비릿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그러곤 그렇게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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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자는 죽어서 우리의 일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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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엔지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앙! 굉음과 함께 화염이 휘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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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악!”

망자 왕을 밟고 있던 유니는 순식간에 덮쳐든 불꽃을 미처 피할 수 없었다.

그것은 역전을 노린, 망자 왕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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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과 함께 달빛을 쐰 후, 나자는 그의 곁에 더 머물렀다.

날이 밝으면 가야지.

몸이 더 회복되면 가야지.

신세 진 것만 갚고서 가야지.

그렇게 하나둘 핑계를 더하는 사이 계절이 바뀌고 아이가 생겼다.

처음엔 기쁨보다 혼란이 더 컸지만, 곧 두 사람은 찾아온 아이에게 감사하며 앞으로도 함께하기로 약속했다.

그러기 위해 나자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부와 명예, 가문, 그리고 복수까지.

그게 아깝지는 않았다. 이듬해 태어난 아이는 이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였다.

부부가 된 나자와 단은 아이에게 두 개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하나는 단의 나라에서 쓸 이름, 다른 하나는 훗날 제국을 여행하며 쓸 이름이었다.

아장아장 걷던 아이는 곧 말을 시작했고, 글을 썼으며 산과 들을 상쾌하게 내달릴 만큼 무럭무럭 자랐다. 그리고 나자와 단은 그 모습을 언제나 행복하게 바라보았다.

그즈음 나자의 눈빛은 더 이상 맹수를 연상시키지 않았다.

그린 듯 행복한 그들의 일상을 지켜보며, 진은 의문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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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때 헤어진 거 아니었나?’

린은 나자를 전혀 기억 못 했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아주 어릴 때 헤어진 건데, 지금 눈앞에서 뛰노는 아이는 제법 커서 모친의 존재를 잊기엔 너무 늦어 보였다.

그 아이, 린은 이제 열 살 가까이 자랐다. 그럼에도 그들의 평화는 계속되었다.

게다가 어린 린에게 예쁜 여자친구가 생겼다. 진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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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나 누님?’

진은 어린 레나의 등장에 깜짝 놀라 중얼댔다.

어디선가 나타난 레나는 린과 사이좋게 뛰놀았고, 나자는 그 모습을 흐뭇이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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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레나의 등장에 진은 비로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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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상상이구나.’

어쩌면 가질 수도 있었던, 하지만 결국 얻지 못한 행복에 대한 상상.

그걸 깨닫는 순간 진의 등으로 돌연 서늘함이 끼쳤다.

놀라서 돌아보니 그의 그림자에 이 세상의 실체가 비치고 있었다.

갓난아이를 빼앗긴 어미의 비명이, 젖은 강보를 끌어안고 쏟아내던 눈물이, 피로 흥건한 칼끝이, 그리고 겁에 질린 아이가 그곳에 흐릿한 그림자로 어른대고 있었다.

그걸 본 진은 당황해 다시 나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정작 나자는 그것을 외면한 채 홀로 행복한 순간을 꿈꾸고 있었다.

앞뒤에서 펼쳐지는 원수의 인생에 진은 만감이 교차했다.

우릴 군대로 짓밟은 자가 저런 꿈을 꾼다는 게 어처구니없었다.

한편으로는 당신도 이런 꿈을 꾸는 사람이었음을, 그걸 누군가 부수고 짓밟아 냉혹해졌음을 외면할 수 없었다.

술렁이는 마음에, 이제껏 멀리서 지켜보던 진은 나자에게 다가갔다.

그는 여전히 진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고, 뛰노는 아이들을 향해 거짓말처럼 곱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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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일을 동정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신이 우리에게 한 일을 잊을 수는 없습니다.”

진은 다른 세계에 있는 나자에게 한풀이하듯 중얼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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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사과를 받고 싶었습니다. 적어도 당신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는 들어야 할 것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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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마디에 무슨 의미가 있지?”

그때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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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말 한마디로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어.”

나자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아이들에게 눈을 고정한 채 입술만 움직여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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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을 해도, 무슨 수를 써도 지난 일은 바뀌지 않아.”

기대하지 않은 대답에 진은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나자는 개의치 않고 마당에서 뛰어노는 어린 린과 레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서 일순 겁먹었던 진도 다시 긴장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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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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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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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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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너는 굳이 내게 사과를 바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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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진이 머뭇대며 운을 떼는데, 돌연 세상이 쿵 진동했다.

발밑이 흔들리는 충격에 진은 놀라서 몸을 낮췄다. 그러고 다시 고개를 드니, 나자의 찬란한 세계가 무너지고 있었다.

진이 놀랄 겨를도 없이 발밑이 움푹 꺼졌다. 바닥이 무너지며 추락이 시작되었고, 그 아래는 어둠이었다.

진은 까마득한 나락으로 미끄러지며 나자를 돌아보았다.

나자는 이렇게 될 걸 알았다는 듯, 붕괴하는 꿈속에서 다만 눈을 감고 있었다.

***

콰아앙! 굉음과 함께 화염이 몰아쳤다.

유니는 순식간에 덮쳐든 화염에 덧없이 휩쓸렸다. 어마어마한 열기가 전신을 핥았고, 찰나의 순간 남부공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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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작은 위험이라도 감지되면 나오게. 내가 직접 꺼내면 다칠 수 있으니 그대들의 의지로 나와야 하네.

유니는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처 의지를 드러내기 전에, 그만 의식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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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야!”

엔지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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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나가! 어서…… 흡, 콜록!”

그 순간 엔지의 목으로 수상한 잿가루가 흘러들어왔다. 그걸 마신 엔지는 입을 가리며 덜컥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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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되지, 어딜 가려고.”

망자의 왕이 음산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대신 화상을 입은 유니가 그의 발밑에 무릎을 꿇었다.

상황이 역전되자 망자의 왕은 사람과 독충의 모습이 반반 섞인 얼굴로 광소를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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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의 식사다. 살아 있는 영혼, 별미…….”

망자의 왕이 군침을 흘리며 유니에게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곤충의 그것처럼 길게 늘어지며 가시가 돋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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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

엔지가 저린 몸을 일으키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의 몸은 굳은 양초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망자의 왕이 낫 같은 팔을 높이 치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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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윽!”

그런데 망자의 왕이 우뚝 행동을 멈췄다. 마치 보이지 않는 사슬에 묶인 듯, 스스로도 당황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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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망자의 왕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두리번대다가, 자신의 발치에 핀 하얀 꽃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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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합……?”

어느새 그의 발밑에 백합이 피어 있었다.

갑자기 생겨난 꽃을 보고 엔지도 눈을 크게 떴다.

백합이라니, 그건 누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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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해서 쫓아오길 잘했지.”

그때, 등 뒤에서 나긋한 숙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엔지는 맥이 탁 풀렸고, 반대로 망자의 왕은 사시나무처럼 떨기 시작했다.

이윽고 한 숙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백합을 이끌고 나타난 그는 입술은 자애롭고 부드러워 보였다. 하지만 그 위에 놓인 두 눈은 잘 벼려진 칼처럼 날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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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가서 보자.”

백합의 주인은 엔지에게 짧게 경고한 후, 꼼짝없이 얼어붙은 망자의 왕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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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

망자의 왕은 그가 누군지 알아보고 겁에 질려 주저앉았다.

숙녀는 그 처량한 모습을 동정하듯 손을 뻗었다.

그리고 세상이 붕괴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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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엔지가 숨을 토하며 깨어났다.

눈을 번쩍 뜬 엔지는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곳은 황궁을 본뜬 응접실, 무덤의 입구였다.

가장 먼저 보인 건 루비드와 젊어진 남부공이었고, 그 옆에 무표정한 진과 어딘지 분해 보이는 유니가 있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엔 나자가, 또 그 옆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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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레나를 발견한 엔지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중얼댔다. 그의 영원한 단짝인 린도 한걸음 뒤에 서 있었다.

엔지가 깨어나자 레나가 웃는 낯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불길함을 느낀 순간, 레나가 엔지의 귀밑머리를 단호히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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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누나, 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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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으로 놀러 간다더니, 다들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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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 누나야말로 여긴 어떻게 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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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이우라 씨한테 연락을 받았지.”

이우라 플레누스는 상식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의 행선지를 당연히 보호자에게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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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없이 무덤에 온 것도 모자라서 망자랑 싸움까지 하고, 내가 늦었으면 어쩌려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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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켜보고 있었네, 경이 안 왔으면 내가 빼냈을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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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러워요.”

레나는 세 망나니를 한데 모아 혼냈고 그 녀석들을 부추긴 남부공도 공평하게 비난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기에, 세 사람과 한 망자는 얌전히 혼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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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래도 나자 공이 깨어나셨잖아. 아마 우리가 안 왔으면 못 일어나셨을 거야.”

엔지가 사돈어른을 핑계 삼아 변명했다. 유효한 발언이었는지 레나의 잔소리가 뚝 멈췄다.

대신 진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나자는 간만에 찾아온 아들을 아는 척도 못 하고 먼 곳만 바라보았다.

그런 나자에게 린이 먼저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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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어 있었다는 이야기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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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로운 일은 아니었다.”

나자는 린을 사랑하는지 미워하는지 모를 태도로 대답했다. 그 차가운 목소리가 야속할 법도 한데, 린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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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 오는 김에 보여드리려고 같이 왔습니다.”

린은 그렇게 말하며 두터운 겉옷을 열었다. 그러자 그 안에 곤히 잠든 아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아이를 본 나자의 눈이 거짓말처럼 일렁였다.

린은 품에 폭 안긴 아이를 떼서 나자에게 내밀었다. 나자는 당황하면서도 어색하게 아이를 안아 들었다.

린을 꼭 닮은 아이가 품에 안기는 순간 나자의 가슴이 미어졌다.

그는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를 기분으로 혼란스러워하다가 진을 돌아보았다.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던 진은 눈이 마주치자 움찔 놀라더니 무언가 결심한 듯 나자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아까 못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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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한다고 지난 일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난 일을 딛고 갈 수는 있습니다.”

진의 대답에 나자의 눈빛이 한층 깊어졌다.

나자의 시선이 린을, 그리고 자신의 품에 안긴 아이를 차례로 담았다.

나자 역시 사과받지 못했다. 아이를 빼앗아간 여자에게,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자들에게 일말의 반성도 얻지 못했다.

그래서 나자 역시 사과도 반성도 하지 않았지만, 품 안의 온기가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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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과에 그만한 의미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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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으로 하는 사과라면, 네.”

진의 담담하고도 단호한 대답에 나자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곤 삶이 끝난 후에야 찾아온 기회에, 잠자코 머리를 숙였다.

그건 정복자의 굴복이 아닌, 가족과 함께 살아가고 싶은 한 여자의 사무친 후회였다.

진이 무덤에 온 목적을 비로소 이루고 있을 때, 유니는 또 다른 이유로 표정이 굳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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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개의치 말아라. 다 걱정돼서 한 소리이니.”

남부공은 유니가 레나에게 혼나서 풀이 죽은 줄 알고 넌지시 속삭였다. 그에 유니는 오히려 미간을 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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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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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아까부터 왜 벌레 씹은 표정인가?”

남부공의 채근에 유니는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노골적인 반항에 남부공의 고개가 더욱 기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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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내게 할 말이 있다고 했지.”

그래서 다시 운을 떼봐도 소용없었다.

어딘지 분해 보이는 유니의 표정에 남부공이 반신반의하며 다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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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보니 제법이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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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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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봤네. 망자의 왕과 싸우던 모습을.”

이번엔 제대로 짚었는지, 유니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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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이겼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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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분해서 표정이 안 좋았군?”

남부공의 간파에 유니가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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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워서 이기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항상 보호받기만 했으니까. 그땐 어리고 약해서 당신을 지켜내지 못했으니까.

그 마음을 읽은 듯 남부공이 옅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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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절반 이상의 승리일세. 그리고 싸우는 것도 이기는 것도 좋지만 승패에 너무 연연하지는 말게. 이전처럼 생사가 갈리는 것도 아니고, 모처럼 싸울 필요 없는 세상이 아닌가?”

이 좋은 시절, 승패에 희비를 두는 것은 너무 아깝다.

남부공은 유니가 이기든 지든 당당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살얼음판같이 엄중한 시절은 이미 지났으니 말이다.

남부공의 조언에 굳어 있던 유니의 입가에도 비로소 미소가 피었다. 겨우 마음이 풀린 듯, 유니가 결연한 목소리로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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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엔 반드시 이길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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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 안 들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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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님의 명예를 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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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명예가 무슨 잘못을 했나?”

결국 유니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고, 무덤으로 찾아온 세 소년 소녀는 다 행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때 루비드가 모두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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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이쪽은 언제 해결할 거야?”

루비드가 주의를 끌며 가리킨 건 다들 잊고 있던, 겸손히 앉은 망자의 왕이었다.

레나가 나자의 안에서 강제로 끌고 나온 망자의 왕은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운명을 두고 잠시 의견이 분분했다.

나자와 유니는 죽여 없애버리길 희망했고, 린과 진은 그래봤자 새로운 왕이 탄생할 테니 그냥 돌려보내자고 주장했다. 레나와 루비드는 아무렴 좋다는 태도였고, 엔지는 무언가 마음에 걸린 사람처럼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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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얼리지.”

결국 남부공이 나서서 의견을 정리했다. 다들 이견은 없었다. 물론 망자의 왕도 자신의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상황 정리가 비로소 끝나고, 즉흥적인 티타임이 열렸다.

그 자리에서 레나는 동생들이 무덤으로 향했다는 소식에 놀랐던 심정을 토로했다.

린은 그들을 데리러 가는 김에 나자에게 아들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그 와중에 두 사람의 아이는 미동도 하지 않고 조모의 품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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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밖에 있던 백합이 줄어들었던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루비드가 문득 생각난 듯 화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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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된 거야? 그 꽃이 네가 다스리는 망자들이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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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원래 가야 하는 곳으로 간 거예요.”

루비드의 물음에 레나가 잔잔히 웃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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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자는 무덤의 문턱을 넘지 못한 자들이에요. 자신의 죄와 업 때문에, 혹은 죽음도 꺾지 못한 의지 때문에. 백합의 수가 줄어든 건 그들이 짊어졌던 것이 사라졌다는 뜻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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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젠 망자가 아니게 됐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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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마 다들 더 좋은 곳으로 떠났을 거예요. 다른 대부분의 사람처럼.”

레나의 설명에 루비드를 비롯한 살아 있는 자들은 감명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한 사람, 엔지만 제외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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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른 망자들은? 저 백합처럼 잘못 없는 망자들 말고, 정말 잘못한 망자들도 떠날 수 있어?”

갑작스러운 물음에도 레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어쩐지 불안해하는 동생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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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날 수 있어. 자신의 죄를 깨닫는다면, 그들도 분명 갈 수 있어.”

 

.
.
.

티타임 후, 레나와 린은 내친김에 여기서 며칠 머물기로 했다. 나자가 두 사람의 아이를 내려놓지 않는 탓이었다.

남부공도 루비드에게 더 머물 것을 권했다. 여기서 며칠을 보내도 밖에선 하룻밤에 불과하니 느긋이 쉬다가 가라는 의미였다. 마침 휴식이 필요했기에 루비드도 함께 있기로 했다.

그들은 모처럼 평안한 시간을 보냈다. 유니와 진이 겁도 없이 무덤 안쪽을 싸돌아다닌 것 말고는 별다른 사고도 없었다.

다만 엔지가 이따금 생각에 잠기는 일이 많았다. 그걸 이상하게 여긴 레나가 동생에게 조용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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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비스가?”

그로써 듣게 된 이야기는 레나에게도 뜻밖이었다. 놀라서 되묻는 레나에게 엔지가 힘없이 끄덕였다.

나자의 의식 속에서 만난 망자의 왕, 태움과 그을림의 왕은 클라비스가 자신의 일부가 됐다고 말했다.

엔지는 차마 믿고 싶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충분히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못내 괴로웠다.

동생의 고뇌를 알게 된 레나는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덜컥 나자를 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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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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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

사돈어른의 등장에 엔지가 당황하자 레나가 사정을 설명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나자는 곧 무심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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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위를 알고 싶다면 확인해주겠다.”

다행히 그는 사돈총각에게 관대했고, 잠시 후 그들은 망자의 왕이 갇힌 얼음 조각 앞에 섰다.

나자는 먼저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다. 그러더니 주먹으로 얼음을 꿰뚫고 망자 왕에게서 검은 피를 뽑아냈다.

그 과격한 행동으로 나자의 권능이 발현되었고, 눈을 감았던 나자는 잠시 후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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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떻게 됐나요? 정말인가요? 클라비스 전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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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설명하는 것보단 직접 보는 게 낫겠지.”

다급히 묻는 엔지에게 나자가 손을 뻗었다. 그에 엔지는 주저하다가 손을 포갰다.

나자의 손을 잡는 순간, 엔지의 눈앞이 뒤집혔다.

새빨간 하늘과 검은 땅이 보였다. 남부공과 나자가 꾸민 입구가 아니라, 날것 그대로의 무덤이었다.

그 살풍경한 광경을 둘러보던 엔지의 눈에 한 사람이 맺혔다.

그 광활한 대지 한가운데 홀로 선 남자. 새하얗고 상처 입은 클라비스가 그곳에 있었다.

클라비스를 발견한 엔지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정말이었다. 클라비스는 무덤에 있었다. 죄와 업을 짊어져 무덤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이곳에 가라앉았다.

슬퍼하는 엔지와 달리 그날의 클라비스 이미 모든 것을 받아들인 표정이었다.

어김없이 망자들이 몰려왔다. 불과 재를 품은 독충들이 클라비스에게 몰려와 바스락대며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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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의 색의 가진 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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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한 위정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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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된 교사여, 신을 저버린 사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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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일부가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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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우리와 같은 존재이니, 함께 불과 재를 옮기는 것이 마땅하다.

망자들이 다그치듯 종용했고 클라비스는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아니, 거부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하나씩 세며 서글피 자신의 운명을 마주했다.

그 처연한 모습에 엔지는 신음하며 흐느꼈다.

이게 저 죄 많은 사람이 감당해야 할 몫이라면 그럴 것이다. 여기엔 틀린 것도 잘못된 것도 없었다.

하지만 엔지는 어쩔 수 없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미 벌어진 일을 바라보며 눈물을 떨어트리는데, 돌연 붉은 하늘이 밝게 빛났다.

하늘에서 떨어진 낯선 빛이 무덤의 검은 땅을 밝혔다.

그 무결한 빛이 클라비스를 갉아먹던 망자들을 불살랐다.

엔지는 눈을 크게 떴고, 클라비스도 놀란 듯 주위를 두리번댔다. 그러다 곧 입술을 깨물며 신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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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클라비스의 시선 끝엔 레지나가 있었다.

니힐이 아니라, 목이 잘렸던 미친 황제가 아니라 그의 사랑하는 누나가 담담히 미소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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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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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나는…….

레지나가 손을 뻗었지만 클라비스는 차마 다가가지 못했다. 망설이고 주저하고 울 것 같은 눈으로 레지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가득한 슬픔에 레지나의 눈도 슬퍼졌다. 하지만 레지나는 미소를 지우지 않고, 발에 못이 박힌 듯 서 있는 동생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말없이 그의 어깨를 안아주었다.

클라비스는 숨을 마시며 눈을 크게 떴다.

이윽고 온기가 스며들어 그의 죽은 몸을 덥히고 그의 새하얀 머리카락을 다시 금빛으로 물들였다.

그 그리운 감각에 클라비스의 두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레지나는 말없이 그의 등을 다독였고, 결국 클라비스는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쏟았다.

망자는 무덤의 문턱을 넘지 못한 자들.

자신의 죄와 업 때문에, 혹은 죽음도 꺾지 못한 의지 때문에 가라앉은 자들.

하지만 그들도 떠날 수 있다. 떠날 수 있어. 자신의 죄를 깨닫는다면, 그들도 분명.

레나의 말대로였다.

레나의 말대로 백 년간 동생을 기다려온 레지나와 자신의 죄를 깨달은 클라비스는 서로를 꼭 안은 채 빛으로 부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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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을 지켜보던 엔지의 뺨에도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슬픔 한 점 없는 기쁨과 감사의 눈물이었다.

엔지는 눈물을 닦으며 그들의 마지막 모습을 눈에 새겼다.

그러곤 비로소 다시 만난 남매를, 이제 먼 곳으로 떠나는 그들을 기쁘게 배웅했다.

레지나레나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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