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화
5. 현실엔 복선이 없다
잠시 시간을 되돌려, 전날 밤.
“후.”
나는 침대에 대자로 누워서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대체 내가 오늘 하루 겪었던 일들은 다 뭐였나 싶을 정도로, 정신없는 하루였다.
“머리가 다 멍하네.”
가만히 눈 감고 있으면 그대로 잠들 것 같았다. 그래서 왼쪽으로 굴렀다.
우중충한 검은색으로 된 벽지가 눈에 보인다. 나는 손을 뻗어 손가락 끝으로 벽지를 매만졌다. 묘하게 꺼슬꺼슬한 감촉이다. 벽지라기보다는 사포라고 해야 어울릴 것 같은 느낌.
그렇게 한참을 만지다가, 다시 반대편으로 굴렀다. 그러자 방 내부의 인테리어가 한눈에 들어온다.
침대도 검은색, 책장과 책상도 검은색. 뭐 이렇게 검은색을 좋아하는지, 세상이 온통 검은색투성이다. 역할이 악역이라고 검은색으로 깔맞춤이라도 한 것일까.
“분위기는 좋네.”
근데 방이 이렇게 어두우면 불 껐을 때 아무것도 안 보일 거 같은데.
그런 시답잖은 잡생각을 하던 그때였다.
문득, 내가 이렇게 한가히 있어도 되나 싶었다.
“…진짜로 그럴 때가 아니지 않나?”
천천히 곱씹어보니 정말 그랬다.
뭔가 이상하잖아. 내가 알고 있는 시나리오대로 흘러간 게 손에 꼽는다.
주인공은 어째선지 담임의 호감도를 올리지 않았으며, 나. 그러니까 ‘한시우’에게는 기존에 없었던 약혼자까지 등장했다.
그래서, 화나비는 도대체 누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원작 등장인물이 아니었다. 외전, 후일담. 내가 아는 한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여학생이다.
그런 화나비와 한시우가 나눈 오늘의 대화가, 과연 원작에 있었을까?
자문해봐야 답이 돌아올 문제가 아니었다. 거기까진 내가 장담할 수 없는 영역이었으니까.
원작인 ‘내여친’의 서술 시점은 어디까지나 주인공 1인칭인지라, 주인공이 주도했거나 휘말린 사건이 아닌 ‘작중 밖에서’ 일어난 일들은 나도 자세히 알지 못한다.
지금의 내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그건 바로 원작의 전개가 뒤틀렸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그리 결론을 내리고 나니, 순간 팔뚝에 닭살이 돋았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한시우의 운명인 ‘악역’을 수행하지 않았을 때부터 예견된 일이 아니었을까.
원작의 등장인물인 한시우는 어디까지나 주인공을 방해하는 악역. 그것도 보통 악역이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더욱 악랄해지는 악역이다. 나중에 가면 납치, 협박까지 했었지 아마.
고등학생 빌런치고 벌인 짓의 스케일이 너무 크고, 또 현실성이 매우 떨어지는 일들이었다. 하지만 원래 현실은 픽션보다 더한 법이라고 하지 않는가. 한시우가 저지른 범죄들은 모두 실제 있었던 일을 모티브로 작가가 각색한 것들이었다.
말이 길었는데 요는 한시우가 가까운 미래에 갱생 불가능한 양아치가 된단 소리였다. 악담이 아니라, 내가 아는 원작의 흐름이 그렇다.
한시우는 아마도, 아니 필연코 악역이 된다.
하지만 그런 한시우의 운명을, 내가 비틀었다. 원작에 있었던 히로인과의 다툼, 한시우와 주인공의 충돌은 없었던 사건이 되었다.
그렇게 원작이 바뀌었으니, 자연스럽게 이후의 전개도 뒤틀린 거겠지. 어찌 보면 당연한 흐름이다. 이에 대한 각오도 어느 정도까지는 하고 있었다.
그런데 설마하니 일이 이렇게까지 꼬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만 말이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예정된 수순을 밟아야 했나 싶기도 하다.
“….”
아니 그건 또 아닌가. 예정된 미래로 흘러갔으면 나는 채 1학년을 마치기도 전에 범죄자가 될 게 분명했다. 그런 앞날은 죽어도 사양이다.
“후우….”
나는 뒤통수에 대고 깍지를 꼈다. 결국,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가 악역을 하지 않을 것이란 건 기정사실이었다.
그 말인즉슨,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미래가 바뀔 거란 소리였고, 이제 시나리오의 흐름은 나조차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미래가 미지로 변했다고 해서 마냥 손 놓고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도 그럴 게, 나는 아직 완전히 악역의 굴레를 벗어난 게 아니다. 내가 피한 이벤트는 어디까지나 작중 초반에 있던 가벼운 사건 하나. 게임으로 비유하면 이제 막 튜토리얼을 끝마친 셈이었다.
아직 작중에는 한시우를 악역으로 만들 수많은 사건 사고들이 즐비해 있다. 그 모든 악역 무브먼트를 회피하기 전까지 나는 언제든지 악역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상태,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다.
“으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 자신을 폭탄이라고 비유하니까 좀 찜찜하긴 하다. 뭐 아무튼, 내가 스스로 명명한 ‘시한폭탄 상태’의 시간제한은 아마도 지금으로부터 약 1년 후다.
왜 1년이냐, 그것은 주인공의 시점이 2년 후의 미래로 넘어가는 ‘1학년 종업식’이 1년 뒤의 일이기 때문이다.
거의 한 달에 한 명씩 플래그를 꽂은 주인공의 ‘여사친’이 열 두 명이 되는 순간, ‘내여친’의 본편은 끝난다. 주변 인물에 관한 서술이 끝나는 것도 아마 그쯤.
즉, 내가 1학년 종업식 날까지만 아무 사고도 치지 않고 보낼 수 있다면, 나는 비로소 악역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그 안전한 미래를 그리기 위해서 지금의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
가장 먼저 떠오른 가능성은 전학, 혹은 자퇴였다. 악역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아예 주인공과 엮이지 않는 게 최선의 수니까 말이다.
허나 한시우의 부모님이, 이를 허락할 리 없다. 청하고는 설정상 대한민국 최고의 고등학교, 성적이 됐든 재력이 됐든 상위 1%들만 입학할 수 있는 사립고를 자퇴한다니. 내가 한시우의 부모님이어도 뜯어말린다.
자동적으로 이 방법은 기각. 내 머리는 자연스럽게 다음 방침을 떠올렸다.
“일단 학교는 계속 다녀야 할 것 같은데.”
사실 전학, 자퇴가 안 되면 이 방법밖에 없다. 내 말마따나 학교는 계속 다니되, 최대한 주인공과 엮이는 일이 없도록 지내는 게 차선의 수가 되겠지.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히로인을 제외하면 주인공과 가장 많이 엮이는 조연은 당연히 악역인 한시우, 그만큼 서로 부딪히는 일도 잦다.
본편에 있었던 수많은 충돌 중 하나만 현실이 되어도, 나는 그 순간 악역 행이다.
그런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서는 그 사건들을 모두 없었던 일로 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사건들을 존재하지 않는 일로 만드는 방법은 무척 간단하다.
“내가 다 피하면 돼.”
아주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니었다. 작중에 있었던 주인공과 한시우의 충돌은 유한하고, 그 발단과 사전의 전개만 알고 있다면 피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작중의 이벤트나 사건들을 자세하게 파악하고 있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그때마다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건 한계가 있다. 원작의 거의 모든 사건을 파악하고 있는 나지만. 사람 기억력이라는 게 또 완벽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행여나 잊어버리기 전에 어딘가에 모조리 적어놓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그래서 나는 휴대폰을 집어들어 메모장을 켰다. 그리고 글자를 입력하려고 손가락을 움직였는데.
문득,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 한 가지가 있었다.
“…좀 그렇지 않나?”
이런 메모에 휴대폰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뭔가 불안했다.
단순한 비약이 아니라, 지금 내가 소지 중인 휴대폰은 기존에 존재했던 연락처, 갤러리의 사진, 동영상. 그 밖의 모든 것이 누가 부렸는지 모를 조화로 인해 사라진 상태다.
메모장이라고 해서 안전하리란 보장이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백 퍼센트 안전하지는 않을 것이다. 언제 어떻게 없어질지 모른다.
그렇다면 어디에 적어 두는 것이 좋을까.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던 내 시야에 순간적으로 들어온 것은, 책장에 꽂혀있는 공책 한 권이었다.
“아.”
그래, 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디지털 방식이 안 된다면 아날로그로 수기 작성하면 그만이다.
나는 책장으로 곧장 다가가 공책 하나를 뽑아들었다. 일단 겉으로는 사용감이 전혀 없는 새 공책이다. 그래도 행여나 무언가가 적혀있는 게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촤라락 펼쳐서 훑었다.
탁.
채 10초도 지나지 않아서 공책을 닫았다. 학생이 쓰는 공책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내부는 깔끔하다.
“얜 공부를 안 하나?”
예비용으로 비치해둔 걸 수도 있는데, 너무 섣부른 판단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참고서, 공책 등 여타 다른 책들도 여러 권 훑어보았다.
그 결과.
“진짜 공부 안 하나 보네.”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하긴, 평소에 열심히 공부하는 놈 같았으면 시험 점수 좀 올랐다고 해서 대놓고 컨닝 했다는 의심을 받지는 않았겠지.
내가 오늘 겪었던 건 아예 공부에 손 놨어야 가능한 수준의 추궁이다.
“쯧.”
뭐, 한시우가 공부를 잘하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긴 하다. 아니 오히려 좋다. 적어도 누가 갑자기 찾아와서 내 필기 노트를 보고 싶다며 엿볼 일은 없을 테니까.
나는 공책을 펼쳤다. 목적은 당연히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적기 위해서다.
줄이 없는 공책의 첫 페이지. 그 중앙에 ‘원작’이라는 단어를 적었다. 다음으로는 원작에서 뻗어 나오는 줄기로, 작중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적었다.
당장 생각나는 것들을 우선으로, 그렇게 다 적고 나니까 10분 정도가 지났다.
“뭐가 이렇게 많아.”
막연히 머릿속으로 떠올릴 땐 몰랐는데, 막상 이렇게 순서대로 나열하고 나니까 이벤트들이 정말 많다.
1학기에 예정된 큼직큼직한 것들만 몇 개 꼽아도 수학여행, 축제, 다른 학교 학생들과의 교류회, 선배와의 만남….
라노벨 속 학교 아니랄까 봐 공부는 뒷전이고, 사람 만나는 이벤트들로만 한가득이었다. 부모님들이 학교 일정표 보면 화낼 것 같은데. 그런 시덥잖은 감상을 흘리며, 나는 세부적인 사항들도 채워나갔다.
너무 먼 미래의 일은 뒤편에, 가까운 일은 앞쪽에. 이런 식으로 나름의 규칙을 세워 적었다. 그러자 달력과 비슷한 형태로, 향후 일정표가 완성되었다.
“흠.”
툭툭, 나는 볼펜으로 공책을 가볍게 두드렸다. 우선 당장 코앞에 닥친 이벤트가 눈에 들어온다.
일자는 3월 3일. 바로 내일이고, 이벤트의 내용은 ‘반장 선출’.
청하고등학교는 남녀 각각의 반장, 부반장을 따로 뽑는다. 이유는 생활기록부의 세특 때문이다. 적을 게 많으면 많을수록 좋거든. 묘한 곳에서 현실 고증이 되어있는 것이다.
“어떻게 됐더라?”
그건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건 결과다. 그리 잠시 생각해보니 곧장 기억났다.
남자 반장은 주인공이, 여자 반장은 진희가 된다. 부반장이 누가 됐는지는 모르겠다. 그건 별로 중요치 않았는지, 따로 언급이 없었으니까.
이후엔 별거 없다. 한시우는 주목받고 싶어하는 성격이 아니라 반장 선거에는 나가지 않았고, 그걸로 주인공에게 딱히 시비를 걸지도 않는다.
아마 내일은 무난한 하루가 될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금 조심하면서 다니면 되겠지. 그렇게 판단한 나는 정리를 마치고, 공책을 덮었다.
“어으.”
침대에 눕자마자 수마가 찾아왔다. 나는 거부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었다.
*
다시 시간이 흘러서, 아침 조회시간.
“우리 반에 전학생이 온다고?”
“어, 그렇다는데? 교무실에서 그러더라.”
딱히 잡담을 나눌 사람도 없었기에 멍하니 창밖만 보던 내 귓가에, 이상한 정보가 흘러들어왔다.
무릇 라노벨은 주인공과 히로인의 관계 진전이 어느 정도 이뤄진 후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는 것이 정해진 법칙이다. 그런데 개학한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전학생이 온다니, 뭔가 이상했다.
물론 청하고에도 전학을 오는 학생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건 A반이 아니라 다른 반, 그것도 4월 이후에나 예정된 사건이었다.
“아니 근데 무슨 개학 하자마자 전학을 와. 구라 아니냐?”
“이런 걸로 구라쳐서 뭐하는데. 아님 네가 가서 직접 물어보던가.”
“보면 알겠지. 구라면 아가리 찢는다.”
앞자리의 학생들이 살벌한 대화를 주고받던 그때였다.
“다들 좋은 아침!”
교사의 것이라고 하기엔 믿기 힘든 발랄한 외침과 함께, 교실의 미닫이문이 드르륵 열렸다. 열린 앞문을 통해 들어온 것은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
한 명은 A반의 담임이었고, 다른 사람은 어째 익숙한 얼굴의 여학생이었다.
“허.”
나도 모르게 두 눈이 부릅떠졌다. 쟤가 왜 여기 있지?
여자다, 예쁘다, 처음 보는 교복이다, 전학생인가? 등등…. 학생들은 저마다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뉴페이스의 등장에 반 전체가 웅성거린다.
“자자, 다들 조용! 갑작스럽지만, 우리 반에 전학생이 왔어요! 자, 전학생? 자기소개 좀 해줄래?”
“네.”
자연스럽게 뒷머리를 휘날리며 교탁까지 걷는 전학생의 모습이, 내게는 마치 슬로비디오처럼 느껴졌다.
새삼 그 모습에 반했다거나, 뭐 그런 상투적인 게 아니라…. 그냥 지금 내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가 없어서였다.
“안녕하세요, 소개받았다시피 저는 오늘 전학온 학생이구요, 이름은 화나비. 예월고등학교에서 왔어요.”
그렇게 자기소개를 마친 화나비는, 한쪽 눈을 깜빡였다. 그 시선은 어째 나를 향해 있었던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응, 아침이라 시간이 없으니까 소개는 여기까지. 궁금한 거 있으면 질의응답은 선생님 나가고 나서 너희끼리하고. 자, 어디 보자. 자리는…. 아, 시우 옆에 앉으면 되겠다. 비는 곳이 거기밖에 없네.”
그 말대로, 교실의 빈자리는 내 옆자리가 유일했다. 다른 자리 많은데 굳이 소문 무성한 양아치의 옆자리에 앉으려는 용자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네, 감사합니다.”
화나비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다가와, 내 옆 책상에 자리를 잡았다.
마치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책가방을 걸고, 필기구를 꺼내서 수업을 준비하는 일련의 그 모습이, 나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한마디 했다.
“내일 보자는 말의 뜻이, 설마 이거였어?”
돌아온 대답은 더 기가 막혔다.
화나비는 나를 향해 빙긋 웃어 보이며, 이런 말을 했다.
“제가 계획한 서프라이즈였는데, 재미있으셨나요?”